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콘 사토시 감독의 유언장.
게시물ID : humordata_726829짧은주소 복사하기
작성자 : ㅁㄴㅇΩ
추천 : 10
조회수 : 939회
댓글수 : 3개
등록시간 : 2011/02/05 18:13:43
2010년 8월 25일 (수요일)



안녕




잊을 수 없는 올해 5월 18일.

무사시노 적십자 병원, 순환기과 의사로부터 다음과 같은 선고를 받았다.

- 췌장암 말기. 뼈 여러부분에 전이. 여명 길어야 반년 -

아내와 둘이서 들었다.

둘만의 힘으론 감당할 수 없을 정도로 청천벽력에 억울한 운명이었다.

평소부터 생각하고는 있었다.

'언제 죽는대도 할 수 없지'

..라고는 해도 너무나도 갑작스러웠다.


분명 징후는 보였었다고 말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그 2, 3개월 전부터 등 여기저기와 서혜부 등에 강한 통증을 느꼈고, 오른쪽 다리에는 힘이 들어가지 않게 되면서 걷기도 힘들게 되어 뜸을 뜨거나 카이로프랙틱 등을 다녀봤지만 차도가 없던 차, MRI나 PET-CT 등의 정밀기기로 진단한 결과 느닷없는 사형선고가 내려진 것이었다.

눈치챘을 땐 죽음이 바로 등 뒤에 서있던 것 같은 상황으로, 나로써는 도저히 어찌해 볼 길이 없었던 것이다.


선고 후, 살아남기 위한 방법을 아내와 함께 모색했다.

그야말로 필사적으로.

믿음직한 친구나 더할나위 없이 강력한 분의 지원도 얻어 왔다.

항암제는 거부하고, 일반적인 세상의 상식과는 다소 다른 세계관을 믿으며 살아보려 했다.

<평범함>을 거부하는 부분이 나다워서 좋은 것 같았다.

어차피 언제나 다수파에는 몸둘 곳이 없었던 듯이 생각된다.

의료에 있어서도 마찬가지다.

현대의료의 주류파 뒤에 어떤 시스템이 있는지도 이것저것 뼈저리게 깨달았다.

'자신이 선택한 세계관으로 살아남아 주겠어!'

그러나.

기력만으로는 맘먹은대로 안 되는 것은 작품 제작과 마찬가지.

증세는 하루하루 확실히 진행되고 있었다.


한편, 나 역시 한 사람의 사회인으로서 보편적인 세상 상식의 절반 정도는 받아들이며 살고 있다.

꼬박꼬박 세금도 내고 있으니.

'훌륭'하곤 거리가 멀지만 나 역시 버젓한 일본사회의 멤버 중 하나다.

그러니 살아남기 위한 <사적 세계관>의 준비와는 별도로, <깔끔하게 죽을 채비>에도 손을 썼다고 생각한다.

전혀 깔끔하게 못했지만.

그중 하나가, 믿을 수 있는 친구 두 명의 협력을 얻어 덧없지만 곤 사토시가 가진 저작권 등의 관리를 맡길 회사를 만드는 것.

또 하나는 많지는 않지만 재산이 원활하게 처에게 양도되도록 유언장을 만드는 것이었다.

물론 유산 다툼 같은 게 터질 리야 없지만, 이 세상에 홀로 남을 아내를 위해 불안요소는 하나라도 없애주고 싶었고, 그것이 쬐금 저편으로 여행을 떠날 나 자신을 안심시키는 것으로 이어지니.

절차에 따라붙는, 나나 아내가 익숙치 못한 사무처리나 예비 조사 등은 멋진 친구에 의해 빠르게 진행되어 갔다.

후일, 폐렴으로 위독한 가운데서 비몽사몽 간에 유언장에 마지막 사인을 했을 때에는 일단 이걸로 죽어도 괜찮다고 생각했을 정도다.

'휴우...겨우 죽을 수 있게 됐어...'

어찌됐든, 그 이틀 전에 구급차로 무사시노 적십자 병원으로 옮겨지고, 하루 걸러 또 구급차로 같은 병원에 실려 갔다.

과연 이쯤 되니 입원해서 상세 검사에 들어가게 됐다.

결과는 폐렴의 병발.

가슴에 물도 상당히 찼다.

의사에게 딱잘라 물었더니, 매우 사무적인 태도여서 어떤 의미로는 고마웠다.

"잘 버티면 하루 이틀...고비를 넘긴다 해도 이 달 안이겠지요."

그 말을 들으며, '일기예보 같구먼...'하고 생각했지만, 사태는 절박했다.

그게 7월 7일에 있었던 일.

꽤나 가혹한 칠석이었다.


...이상으로 마음은 굳었다.

나는 내 집에서 죽고 싶다.

주변 사람에게 있어 마지막 대형 민폐를 끼치게 될 지도 모르지만, 어떻게 해서든 집으로 탈출할 방법을 찾아 줄 것을 부탁했다.

아내의 노력과 병원측의 '포기한 듯 하면서도 실은 매우 도움이 되었던' 협력, 외부 의원의 막대한 지원, 그리고 수많은, 하늘의 도움이라고 밖에 생각할 수 없는 우연들.

그렇게 우연과 필연이 빈틈없이 잘 맞아 떨어지는 게 현실이라고 믿기 힘들 정도였다.

<토쿄 갓 파더>도 아니고 말이지.

아내가 탈출분비로 분주한 한편에서, 나는 의사에게, "한나절이라도, 하루라도 집에 있을 수 있다면 아직 할 수 있는 일이 있어요!"라고 호소한 후, 어두침침한 병실에서 혼자 죽음을 기다리고 있었다.

쓸쓸하진 않았지만 떠오르는 생각은 이런 것.

'죽는 것도 나쁘지 않을지도 모르겠군'

특히 이유가 있는 것도 아니었고, 그렇게라도 생각하지 않으면 견딜 수 없었을 지도 모르지만, 기분은 자신도 놀랄 정도로 평온했다.

단지, 단 하나 도저히 참을 수 없는 점이 있었다.


"여기서 죽는 건 싫은데..."

하며 봤더니, 벽에 걸린 달력에서 뭔가가 움직여 실내에 퍼지기 시작했다.

"이런이런...달력에서 행렬이라니...내 환각은 개성이 쥐뿔도 없구만..."

이런 때조차 직업의식이 발동하는 걸 흐뭇하게 느꼈지만, 사실은 이때가 가장 저승에 접근했었을 지도 모르겠다.

정말로 죽음을 가까이에 느꼈다.

죽음의 세계와 시트에 둘둘말려, 수많은 사람들의 노력에 힘입어, 기적적으로 무사시노 적십자 병원을 탈출해 자택에 도착했다.

죽는 것도 괴롭구만.

혹시나 해서 말해 두지만, 특히 무사시노 적십자에 비판이나 혐오는 없으니 오해마시길.

단지, 나는 자신의 집에 돌아가고 싶었을 뿐이었다.

내가 살고 있는 그 집으로.


조금 놀랐던 것은, 자택의 거실에 옮겨질 때 임사체험 등으로 잘 알려진, - 높은 곳에서 자신이 방 안으로 옮겨지는 것을 본다 - 라는 덤이 붙은 것이었다.

자신과 자신을 포함한 풍경을, 지상 수 미터의 정도의 높이였을까, 와이드스러운 렌즈를 통해 진부감(眞俯瞰)으로 보고 있었다.

방 중앙에 있는 침대의 사각이 묘하게 크고 인상적이고, 시트에 감긴 자신이 그 사각 위에 내려졌다.

그리 정중한 느낌은 아니었지만 불평은 할 수 없지.


자, 남은 것은 자택에서 죽음을 기다릴 뿐이었을 터였다.

그런데.

폐렴의 고비를 어렵지 않게 넘겨버린 듯 하다.

얼레?

어느 의미론 이렇게 생각했다.

'못 죽었네(...훗)'

그 후, 죽음만을 생각할 수 밖에 없었던 자신은 분명히 한 번 죽었다고 생각한다.

몽롱한 의식의 깊은 곳에서 [reborn]이라는 단어가 몇 번인가 흔들거렸다.

신기한 것이, 그 다음 날 기력이 다시 재기동했다.

아내를 비롯, 문병을 와서 기력을 나누어 주신 여러분, 응원해준 친구들, 의사나 간호사, 간병인 등 관계자 모두의 덕분이라 생각한다.

정말로, 솔직하게 마음으로부터.


살아갈 기력이 재기동했으니, 멍하게 있을 여유는 없다.

덤으로 받은 것이나 다름없는 명이라고 마음에 되새기며, 소중하게 쓰지 않으면 안된다.

그래서, 현세에 남긴, 도리에 어긋난 행동을 하나라도 줄이고 싶다고 생각했다.

실은 암에 관해 극히 가까이 있는 사람 외에는 알리지 않았었다.

부모님께조차 알리지 않았을 정도다.

특히 일과 관련해선 여러가지로 얽힌 것이 많아 말할래도 하기 힘든 상황이었다.

인터넷 상에 암 선언을 하고, 남은 인생을 하루하루 보고하고 싶다는 생각도 했었지만, 콘 사토시의 죽음이 예정되어 있다는 것은 작다고는 해도 여러가지 영향이 염려되기도 했고, 그때문에 가까운 지인들에게도 도리를 다하지 못했다.

정말 면목없다.


죽기 전에 하다못해 한번이라도 만나, 한마디라도 인사를 하고 싶은 사람은 잔뜩 있다.

가족이나 친척, 거슬러 올라가면 초, 중학교부터 고교 동창, 대학에서 만난 친구들, 만화의 세계에서 만나 수많은 자극을 서로 교환했던 사람들, 애니메이션의 세계에서 책상을 나란히 하고 함께 술잔을 기울이고, 같은 작품 안에서 실력을 서로 자극하며 고락을 함께 나누었던 수많은 동료들, 감독이라는 입장 덕분에 만날 수 있었던 셀 수 없이 많은 사람들, 일본뿐만 아니라, 세계각지에서 팬이라고 해주는 사람들도 만날 수 있었다.

웹을 통해 만난 친구도 있다.


할 수만 있다면 한번 만나고 싶은 사람은 잔뜩 있었으나 (만나고 싶지 않은 사람도 있지만), 만나면 '이 사람과는 더 이상 만날 수 없게 되는구나...'라는 마음만이 쌓일 듯 해 죽음을 잘 받아들이지 못하게 돼버릴 것 같은 생각이 들었다.

회복했다고는 해도 내게 남은 기력은 한 줌 뿐.

만나는 데는 크나큰 각오가 필요했다.

만나고 싶은 사람일수록 만나는 것이 괴롭다.

아이러니컬한 얘기다.

게다가 뼈에 암이 전이된 영향으로 하반신 불수가 되어, 거의 누워 지내는 상태라서 비쩍 말라버린 모습을 보이고 싶지 않았다.

많은 지인들 속엔 건강했던 무렵의 콘 사토시로 남아 있고 싶었다.

병세를 알릴 수 없었던 친척들, 온갖 친구들, 모든 지인분들께 이 자리를 빌어 도리를 다 못함을 사죄드립니다.

하지만, 콘 사토시의 방자함도 이해해 주시면 합니다.

뭐랄까, <그런 녀석>이었잖아요? 콘 사토시라는 사람은.

얼굴을 생각해 내면, 좋은 추억과 웃는 얼굴이 떠오릅니다.

모두들, 정말로 좋은 추억을 잔뜩 주셔서 고맙습니다. 

자신이 살았던 세계를 사랑하고 있습니다.

그렇게 생각할 수 있는 것 그 자체가 행복입니다.


내 인생에서 만난 적지 않은 사람들은, 긍정적, 부정적 어느 쪽이 됐든 역시 콘 사토시라는 인간의 형성에는 어딘가에서 필요했을 터이고, 모든 만남에 감사하고 있다.

그 결과가 사십 대 중반 도중하차라고 하더라도, 이건 이것대로 다름 아닌 내 운명이라 받아들인다.

짭짤한 맛도 제법 봤고 말이지.

지금, 죽음에 대해 생각하는 것은 이런 것.

"유감이라고 밖에 할 말이 없네."

정말로.


그러나, 수많은 결례는 어쩔 수 없다고 포기하더라도, 내가 도저히 마음에 걸려 견딜 수 없는 일이 있다.

부모님과 매드하우스 마루야마씨다.

콘 사토시의 생부모와, 애니메이션 감독으로서의 아버지.

늦었다고는 해도, 있는대로 몽땅 사실을 고할 수 밖에 없다.

용서를 구하고 싶은 기분이었다.


집으로 문병을 와준 마루야마씨를 본 순간, 흘러 나오는 눈물과 비참한 기분이 멈추지 않았다.

"죄송합니다, 이런 모습이 돼버렸어요..."

마루야마씨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고개를 저으며 양손을 붙잡아 주었다.

감사의 기분으로 가슴이 벅찼다.

노도와 같이, 이 사람과 같이 일할 수 있었던 것에 대한 감사가, 형언할 수 없을 정도의 환희가 밀려 왔다.

호들갑스러운 표현으로 들릴 지도 모르지만, 그렇게 밖에 말할 수 없었다.

내 맘대로일진 몰라도, 단번에 용서받은 생각이 들었다.


가장 큰 미련은 영화, [꿈꾸는 기계]이다.

영화 그 자체는 물론, 참가해 준 스탭에 대해서도 걱정되어 견딜 수가 없다.

그럴 수 밖에 없는 것이, 자칫하면 지금까지 피땀을 흘려 그려온 컷들이 그 누구의 눈도 닿지 않고 묻힐 가능성이 넘치도록 있으니까.

어찌됐든 콘 사토시가 원작, 각본, 캐릭터와 세계관 설정, 콘티, 음악 이미지...온갖 이미지 소스를 끌어 안고 있는 것이다.

몰론 작화감독, 미술감독을 비롯해서 많은 스탭들과 공유하고 있는 부분도 잔뜩 있지만, 기본적으로 <콘 사토시>가 아니면 알 수 없는, 만들 수 없는 것 투성이의 내용이다.

그렇게 만든 것은 네 책임이다, 라고 하신다면 그만이지만, 나 나름대로는 세계관을 공유하기 위해 적지않은 노력을 해왔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이렇게 되어 버리고 나니 내가 덕이 부족했던 부분만이 뼈에 사무친다.

스탭 모두에게 참으로 죄송하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조금은 이해도 해주길 바란다.

콘 사토시가 <그런 녀석>이었으니까 다소라도 다른 것과는 틀린, 묘한 것을 응축한 애니메이션을 만들 수 있었다고도 할 수 있으니.

상당히 오만한 말투로 들릴 지는 모르지만, 암이니까 좀 봐줘.


나도 어영부영 죽음을 기다리고 있었던 것은 아니고, 콘 사토시 사후에도 어떻게든 작품들이 존속할 수 있도록 모자란 머리를 쥐어 짜 왔다.

그렇나 그것도 잔꾀.

마루야마씨한테 꿈꾸는 기계에 대한 염려를 얘기했더니,

"괜찮아. 어떻게든 해볼테니 걱정 말게."

라고 하셨다.

울었다.

완전 오열.

지금까지 영화제작에 있어서도 예산에 있어서도 결례만을 쌓아왔지만, 결국 언제나 마루야마씨가 어떻게 해주셨다.

이번도 마찬가지다.

난 발전이 없어.

마루야마씨와는 충분히 이야기 할 시간을 가질 수 있었다.

덕분에, 콘 사토시의 재능이나 기술이 현재의 업계에 있어 상당히 귀중하다는 걸 약간 실감했다.

재능이 아깝다. 어떻게든 두고 갔으면 좋겠다.

뭐니뭐니 해도 더 매드하우스 마루야마씨가 말씀하시는 것이니 자신감을 다소 기념품으로 가지고 명부로 향할 수 있다는 거다.

분명, 다른 사람의 말을 들을 것도 없이, 이상한 발상이나 자잘한 묘사의 기술이 이대로 세상에서 사라지는 것은 단순히 생각해도 아깝지만, 별 수 없지.

그것들을 세상에 낼 기회를 주신 마루야마씨에게는 마음으로부터 감사하고 있다.

정말로 고마웠습니다.

콘 사토시는 애니메이션 감독으로서도 행복했습니다.


부모님께 고하는 것은 진짜로 괴로웠다.

원래대로라면 아직 몸이 말을 들을 때 삿포로에 계시는 부모님을 찾아 뵙고 암에 대해 고할 셈이었으나, 병의 진행이 원통할 정도로 빨라서 결국 죽음에 가장 가까이 다가섰던 병실에서 전화로 갑작스런 비보를 전하게 되었다.

"저, 췌장암 말기라서 곧 죽게 됐어요. 아버지와 어머니의 자식으로 태어나서 정말 기뻤습니다. 고맙습니다."

느닷없는 소식을 듣는 쪽은 견딜 수 없었겠지만, 그때는 이미 죽음의 예감에 휩싸여 있었다.


그러던 것이 집에 돌아가, 폐렴의 고비를 어찌저찌 넘겼던 무렵.

일대결심을하고 부모님을 만나기로 했다.

부모님 역시 만나고 싶어 하셨다.

하지만 만나면 괴롭고, 만날 기력도 없었지만, 어떻게든 한번 뵙고 싶었다.

이 세상에 낳아주신 은혜에 감사의 말을 직접 전하고 싶었다.

나는 정말로 행복했다.

다른 사람들 보다 조금 서둘러 가는 것은 처에게도 부모님께도, 내가 좋아하는 사람들 모두에게 미안하지만.

제멋대로인 나에게 부모님께서 곧 대응해 주셔서, 다음 날 바로 삿포로에서 집까지 오셨다.

병석에 누운 나를 보시자마자 어머니께서 말씀하신 한마디를 잊을 수가 없다.

"미안해! 튼튼하게 낳아주지 못해서!"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부모님과는 짧은 시간 밖에 함께할 수 없었지만, 그걸로 충분했다.

얼굴을 보면 그걸로 모든 게 통할 듯이 생각했었고, 실제로 그러했다.


고마워요, 아버지, 어머니.

두 분의 자식으로 이 땅 위에 삶을 얻을 수 있었던 것이 가장 큰 행복이었습니다. 

셀 수 없을 정도의 추억과 감사로 가슴이 벅찹니다.

행복 그 자체도 소중하지만, 행복을 느낄 수 있는 능력을 키워주신 것, 아무리 감사를 드려도 다 못 드립니다.

정말로 고마웠습니다.


부모보다 먼저 가는 크나큰 불효자이지만, 이 십수 년 간 애니메이션 감독으로서 솜씨를 부리고, 목표를 달성하며, 평가도 나름대로 얻었다.

별로 안 팔렸던 것은 쬐금 유감이지만, 분수에 맞는다고 생각한다.

특히 이 십수 년, 다른 사람 몇 배의 밀도로
살았던 기분이고, 부모님도 내 마음 속을 알아 주셨겠지.


부모님, 마루야마씨와 직접 이야기할 수 있었던 것으로 한 짐 던 느낌이었다.


마지막으로 누구보다도 마음에 걸리고, 하지만 최후까지 의지가 되었던 아내에게.

그 사형선고 후 둘이서 몇 번이고 눈물에 젖었었다.

서로 육체적으로도, 정신적으로도 가혹한 매일이었다.

이루 말로 다 할 수 없을 정도로.

그러나 그런 괴로우면서도 애달픈 나날을 끝까지 넘을 수 있었던 것은, 그 선고 후 바로 말해줬던 강인한 한마디 덕택이었다.

"나, 끝까지 함께 달릴테니까." 

그 말대로, 나의 걱정따위는 따돌리듯이 여기저기서 밀려오는 요구나 청구를 교통정리하고, 남편의 간병을 어깨너머로 바로 터득하여 척척 해나가는 모습에 나는 감동을 느꼈다.

"내 마누라는 대단하다구."

새삼스럽게 말하지 말라구?

아니아니, 지금까지 생각했던 이상이구나...라고 실감했습니다요.

내가 죽은 후에도, 분명 능숙하게 콘 사토시를 배웅해 주겠지.

떠올리면, 결혼 이후 늘상 일, 일에 치여 사는 매일을 보내다, 집에서 느긋하게 지낼 시간이 생겼나 했더니 암, 이란 것은 너무한 얘기다.

하지만 일에 몰두하는 사람이라는 것, 거기에 재능이 있다는 것을 바로 옆에서 잘 이해해 줬었지. 나는 행복했어, 진짜.

삶에 대해서도, 죽음을 맞이함에 있어서도, 아무리 감사를 해도 다할 수 없어.

고마워.


마음에 걸리는 것은 물론 아직 잔뜩 남았지만, 일일히 세다 보면 끝이 없다.

매사에는 끝이 필요하다.


마지막으로, 요즘은 그리 받아주는 곳이 없는 자택에서의 터미널 케어를 수락해 주신 주치의 H선생님, 그리고 그 부인이시며 간호사이신 K씨에게 깊은 감사의 말씀을 전하고 싶다.

자택이라는, 의료에 있어 불편하기 짝이 없는 상황 속에서, 암으로 인한 진통을 갖은 방법으로 끈기있게 제거하여, 죽음이라는 골에 다다를 때까지의 시간을 조금이라도 쾌적하게 지낼 수 있도록 전력을 다해주셔서 얼마나 큰 도움이 되었는지 모른다.

뿐만 아니라, 그냥도 귀찮게 덩치 크고 거만한 환자를 단순한 일의 범주를 아득히 넘어, 무엇보다도 인간적으로 대하여 주셨던 것에 우리 부부가 얼마나 위안을 얻었는지 모릅니다.

선생님 부처의 인품에 격려받은 일도 여러 차례 있었습니다.

깊이, 깊이 감사드립니다.


그리고, 드디어 마지막이 됩니다만 5월 중순에 암 선고를 받은 직후부터 공사에 걸쳐 엄청난 협력과 노력, 정신적 지주가 되어준 두 명의 친구.

주식회사 KON’STONE의 멤버이자 고교시절부터의 친구 T와 프로듀서 H에게 마음으로부터 감사를 보냅니다.

정말 고마웠어.

내 빈약한 어휘로는 적절한 감사의 말을 찾는 것도 어려울 정도로 부부가 함께 신세를 졌네.

두 사람이 없었으면 죽음은 더욱 괴로운 형태로 나와 내 옆에서 간병하는 아내를 집어 삼켰겠지.

하나에서 열까지 정말로 신세가 많았네.

그래서 말인데, 신세만 져서 미안하네만, 나 죽고 나서 배웅하는 것까지 아내에게 협력해줄 수 없겠는가.

그래 준다면 나도 안심하고 여행길에 오를 수 있어.

마음으로부터 부탁하네. 


자...여기까지 긴 문장을 함께하여 주신 여러분, 감사드립니다.

세상에 있는 모든 좋은 것들에 감사하고 싶은 마음과 함께 펜을 놓겠습니다.

자, 그럼 먼저 갑니다.



- 콘 사토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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