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직도 노무현의 억울한 죽음을 생각하면 분노가 치솟는다. 동시에 시대가 요구하는 운명의 길을 따라, 삶과 죽음, 미안함과 원망을 초극하여 자결을 향해 뚜벅뚜벅 걸어간 聖者의 모습에서 감동이 밀려온다. 노무현은 역사, 정치, 정의, 진보, 진정성을 말하는 사람들의 영혼을 비춰볼 수 있는 거울이 되었다. 영혼의 항해를 인도하는 북극성 같은 별자리가 되었다.
노 무현이라는 거울에 정의, 진보, 개혁을 떠벌리고 있는 나 같은 부류 인간들을 비춰보면 행여 ‘호랑이 아버지에 개자식’(虎父犬子) 소리나 듣지 않을까 두렵다. 사실 노무현 영전에서 상주 노릇을 한 (나를 포함한) 대부분의 사람들은 이미 한번은 개자식이 되었다. 2004년 탄핵총선이 가져다 준 엄청난 기회를 다양한 ‘정치적 헛발질’로 허송해 버렸기 때문이다. 대부분의 상주들은 지난 몇 년간 엄청난 기회를 가졌음에도 불구하고, 노무현이라는 거대한 발광체의 빛을 반사하지 않고는 스스로 빛을 낼 수 없는 반사체에 머무르고 있다. 그러나 노무현은 1988년 정치입문 이후 채 1년도 지나지 않은 시기부터 작지만 강력한 발광체였다. 김영삼과 김대중의 후광이 필요 없는…… 그런데 상주들 대부분은 아직도 반사체에서 벗어나지 못하였기에 虎父犬子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게 된 것이다.
물론 얼마 전까지 쥐새끼, 사냥개, 하이에나 떼들에게 노무현이 처참하게 물어뜯기는 것을 수수방관하거나, 한 술 더 떠서 집단 폭행을 거들다가 돌연 상주로 변신한 진짜 개새끼들에 비하면 우리는 양반이다. 하지만 이 비극적 사태의 먼 원인을 곱씹어보지 않고, 조문(혹은 상주) 하러온 진짜 개새끼들을 내 쫓고, 조롱하면서 ‘친노’ 혹은 ‘진짜 상주’라는 사실에 으쓱해 한다면 그 좋았던 시절(2004년~2007년)의 전철을 밟을 가능성이 높다고 생각한다.
훌륭한 부모님을 둔 자식들이 개자식 소리를 듣는 것은 대체로 부모님 사후에 진짜 소중한 정신적, 지적 유산은 쓰레기통에 처박고, 돈으로 환산되는 물질적 유산을 놓고 이전투구를 벌릴 때다. 나는 노무현 서거 이후 이런 일이 재연될까 두렵다. 솔직히 이런 조짐이 느껴진다. 이른바 진보 개혁 세력이 노무현의 진짜 중요한 유산을 그리 주목하지 않는 것 같아서다.
노무현이 남긴 3대 유산
노무현이 남긴 거대한 유산은 무엇인가?
그 것은 첫째 정치적 유산이다. 이는 일종의 물질적(금전적) 유산 같은 것으로 삼척동자도 다 아는 소중한 유산이다. 이제는 노무현과 가까웠다는 것, 참여정부에서 한 자리 했다는 것, 노무현이 자칭 진보와 보수의 주류, 그리고 호남으로부터 뭇매를 맞을 때(특히 2007년) 그를 옹호했다는 것 등이 대단한 훈장이 되었다. 이는 정당과 후보 지지율로 나타나고 있다. 민주당은 이른바 친노 간판급 인물들 일부와 조문조차 거부당한 ‘탄핵 세력’, ‘노무현 모르쇠 세력’, ‘노무현 때리기를 통해서 정치적 이득을 꾀하던 세력’ 등이 혼재하지만 어쨌든 유력한 대안세력이기에 정당 지지율이 급등하였다. 당연히 원조-짝퉁, 진짜-가짜, 적자-서자 시비가 일어나지 않을 리가 없다. 이들 간의 유산 다툼이 치졸하게 전개되면 개자식 소리를 듣기 십상이다. 이 추문을 확대 과장하려고 하이에나 때들이 호시탐탐 노리고 있다.
두 번째 유산은 정신적(영적) 유산이다. 역사와 ‘관계’가 요구할 때 자신의 모든 것을 던지는 책임성이다. 말과 행동을 일치시키는 진정성이다. ‘사회적 관계’가 요구할 때 자신을 버리고 비우는 희생정신이다. 산전수전 다 겪은 60대 전직 대통령이 보여준 20대 푸른 초심이다. 물론 새로운 진보의 길을 찾기 위한 치열한 탐구정신도 빼놓을 수 없다. 엄청난 조문인파는 그 위대한 정신들에 대한 공감이자 화답이다.
물 론 이 유산의 존재도 대부분의 사람들이 잘 알고 있다. 하지만 이 유산을 전향적으로 상속하려고 하는 사람은 많지 않아 보인다. 특히 세속적, 정치적 욕망이 가장 강한 사람들이 모여드는 정치권에서는 그렇다. 분명한 것은 이 소중한 유산을 상속하지 않고, 2004년~2007년에 그랬듯이 당권투쟁, 자리투쟁, 공천투쟁, 각종 정치적 쇼를 하다 보면 개자식 소리를 듣지 않을 수가 없을 것이다.
세 번째 유산은 지적 유산이다. 한마디로 죽음으로서 한국 사회가 어디쯤 있는지를 밝혀준 것이다. 이는 민주주의, 정의, 진보, 개혁을 이야기 하는 사람들에게는 너무나 소중한 유산임에도 불구하고 이상하게도 주목하는 사람이 별로 없는 유산이다.
노무현은 자신의 몸을 태워 번갯불 같은 섬광을 만들었다. 번갯불이 온 산야의 형상을 번쩍 비추듯이, 노무현을 태운 섬광은 대한민국의 속살을 속속들이 비추었다. 정치와 검찰과 주류 언론이 얼마나 후진적인 마인드와 리더십과 제도(지배구조 등)를 가지고 있는지를 적나라하게 보여주었다. 비동시성의 동시성이 무엇인지, 한국 민주주의가 미처 갚지 못한 외상값이 얼마나 큰지 똑똑히 가르쳐 주었다. 정말 노무현의 죽음은 진보 개혁 세력과 한국 국민들로 하여금, 한국 현실에 발을 디디게 해 주었다고 할 수 있다. 이것은 1969년 암스트롱이 달에 디딘 발걸음처럼 작지만 거대한 착지이다.
그런 점에서 노무현 이전의 대한민국과 이후의 대한민국은 다르다. 노무현 이후의 대한민국은 비로소 현실에 발을 내디뎠기 때문이다. 따라서 노무현 이전의 민주개혁 진보와 노무현 이후의 그것은 다르고 달라야 한다. 민주, 개혁, 진보를 팔아온 제 분파들은 이 서글프지만 거대한 착지로부터 빨리, 많이, 철저히 배우는 분파가 역사의 주도권을 잡지 않을까 한다.
노무현과 국민의 착각
사실 지난 5~6년 동안 노무현과 자칭 ‘진짜 진보’와 국민들은 공히 대한민국의 현 주소를 오판하였다. 노무현은 그 중에서도 가장 작은 착오를 일으켰지만 어쨌든 대한민국 수준을 너무 높게 보았다. 노무현이 파악한 대한민국의 현 주소는 대통령의 도덕적 신뢰, 탈권위주의, 분권과 자율, 대화와 타협, 소프트웨어(마인드) 위주 개혁 등이 사회의 성장과 통합을 한 차원 끌어올릴 수 있는 수준=발전 단계라고 생각했다. 그 단적인 예가 검찰개혁의 기조를, 민주주의(특히 3권 분립)의 기본인 모든 엘리트에 대한 정당한 불신에 근거한 민주적 통제/민주검찰/국민검찰, 무소불위 권력 쪼개고 견제하기, 검찰 정상화 등이 아니라, 검찰의 양심과 양식에 대한 신뢰에 근거한 정치적 중립화로 잡은 것이다. 이는 한국의 민주주의와 정의의 주적을 민주적 통제 바깥에 있어서 'MAFIA' 집단처럼 된 이익집단; 삼성 등 재벌, 조중동, 검찰, 모피아(재경부), 세피아(국세청), 각종 규제.촉진권을 쥔 관료, 각종 직능협회, 대기업.공기업 노조 등이 아니라 제왕적 대통령 하나로 본 소치다.
국민들은 약간 더 심한 착오를 일으켰다. 국민들은 노무현이 이뤄놓은 민주주의, 인권, 정의, 자율, 도덕성 등을 기본으로 생각했다. 이미 손에 들어온 것으로 생각했다. 그 누구도 빼앗아 갈 수 없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욕심을 내서 이명박을 선택한 것이다. 국민들은 이명박을 통한 강력한 성장 드라이버, 1987년과 2002년의 그늘 해소를 꿈꿨다. 한마디로 진보의 합리적 핵심(성과)에 보수의 합리적 핵심을 결합해 줄 것을 기대했다. 그러나 오래지 않아 그것이 완전히 판단 착오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당연히 노무현과 참여정부를 다시 보게 되었다. 게다가 올해 들어 부쩍 심해진 검찰, 주류 언론, 정권 등의 노무현에 대한 야비하고 가혹한 뭇매질에 너무 한다는 정서를 갖게 되었다. 이윽고 불과 1년 3개월 전까지 대통령이었던 사람에 대한 사실상 고문치사 사건이 터져 나왔다. 미안함과 안타까움과 분노와 환멸의 쓰나미가 일어났다.
자칭 진짜 진보의 지독한 착각
가장 심한 착각은 자칭 진짜 진보가 범했다. 이들은 한국의 역사적 상황을, 자본에 기반을 둔 우파 자유주의 정당과 노동에 기반을 둔 좌파 사민주의 정당이 정권을 놓고 다투어야 할 상황이라고 이해했다. 물론 이들이 생각하는 좌파정당은 집권 경험이 있는-따라서 노동의 이해와 요구를 결코 배타적으로 대변하지 않는- 현대 서유럽의 사민당 같은 것이 아니었다. 그것은 혁명노선을 포기한 직후의 반자본, 반시장, 친국유화(공공화), 친노조 정서가 강하게 흐르는 1950~60년대 사민당이었다.
그런데 세계화, 지식정보화, 중국발 구조조정 압력 등이 밀려오면서 이전에 비해 시장의 힘이 강해졌고, 경쟁이 치열해졌다. 국내외 소비자의 선택권, 심판권이 철저하게 작동하면서 공급자간 경쟁과 양극화 현상이 격심하게 일어났다. 인간의 수명을 제외한 모든 존재들의 수명이 짧아졌다. 이들은 변화, 부침, 탄생, 소멸이 격심하게 일어나는 환경, 즉 상시적 구조조정 환경에 놓여버렸다. 노동유연성, 금융유동성은 그 누구도 피할 수 없는 압력이 되었다. 자칭 진짜 진보는 이를 김대중, 노무현 정부가 주도적으로 연출한 신자유주의 탓이라고 생각했다.
요컨대 진보 언론이 짐승3종 세트의 노무현 집단 폭행을 방관하고, 내심 고소하게 생각 했던 것은 기본적으로 봉건, 식민, 냉전, 발전국가(개발독재)의 유제가 미미한 선진국에서 만든 신자유주의 프레임으로 세상을 보았기 때문이다. 이 프레임으로 보면 시장이나 소비자 선택권이 제대로 작동하지 않아서 생긴 (과소 경쟁) 문제는 잘 보이지 않는다. 민주주의가 제대로 작동하지 않아서 생긴 문제도 잘 보이지 않는다. 단지 과잉시장, 과잉경쟁, 탈규제, 민영화의 문제만 선명하게 보일 뿐이다.
신 자유주의 반대, 다시 말해 과도한 경쟁, 효율 추구, 개방(세계화), 민영화, 자율화 반대 등을 시대정신으로 여기는 정책 패러다임으로 보면, 한마디로 한쪽 눈만 뜨고 보면 노무현과 참여정부는 신자유주의 투항/추종 세력이다. 진보 블록에서 제거되어야 마땅한 존재로서, 정치적으로 매장해야 마땅한 존재가 맞다. 좌파신자유주의’라는 농담, ‘권력이 시장에 넘어갔다’는 언명, 한미FTA는 그 명명백백한 증거이다. (특히 앞의 두 언명을 신자유주의자의 결정적인 자백으로 여기는 진보학자들의 모습을 보면, 과거 막걸리 보안법으로 사람 잡아 넣던 공안검사와 다를 바가 없다)
※ 반신자유주의를 시대정신으로 여기는 정책 패러다임 중에서 가장 온건한 것은 아마 김근태 ‘뉴딜론’ 일 것이다. 좀 급진적인 것은 두 진보정당과 진보(주류)언론 패러다임일 것이다. NL, PD의 전통 때문인지 민노당은 민족 모순(외국 자본, 특히 금융 시장 개방 문제와 외국 금융자본의 과실송금 문제를 크게 본다)을 크게 보고, 진보신당은 계급 모순을 크게 보았다. 이들은 공히 노동과 자본의 대립구도를 사회의 기본 모순으로 보았다. 이런 시각에서 보면 노동의 힘을 키워서 자본이 가져가는 잉여를 더 많이 가져오는 것이 시대정신이다. 과도한 자본운동=과도한 경쟁=과도한 효율추구=비인간화라는 등식을 가지고, 증세를 하고, 공공 부문을 키우고, 비정규직을 함부로 채용하지 못하도록 하는 등의 공적 규제를 많이 만들어서 자본과 시장을 제어하고, 양극화를 완화하는 것이 정책 기조이다. 여기에 ‘덜 먹고, 덜 쓰자’주의가 핵심인 생태주의가 결합했다.(이것을 상징하는 슬로건이 진보신당의 ‘더 적색으로 더 녹색으로’ 일 것이다) 어쨌든 자칭 진짜 진보에게는 기업가 정신을 어떻게 북돋우고, 벤처중소기업가, 지식노동의 창의와 열정을 어떻게 발양시킬지에 관해서는 거의 아무런 솔루션이 없다. 진 보의 정체성인 양, 최저 임금 대폭 인상, 비정규직 관련 엄격한 규제 등을 부르짖지만, 그로 인해 엄청나게 늘어날 실업자들을 어떻게 구제할 수 있는지, 과연 고부가가치 산업이 흡수 할 수 있는 지는 면밀히 따져보지 않는다. (원래 이런 규제의 목적은 최저선을 맞추지 못하는 기업.산업을 폐쇄 내지 구조조정하여, 여기에 매여있던 인력을 고부가가치 산업으로 이전시킨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것이 원활하지 않은 상황에서 최저선을 대폭 높이려는 시도는 철저히 기득권 노동에 복무하는 것이다)
기계, 기술, 상품, 작업장, 기업, 직업, 산업 등 모든 존재들의 수명이 짧아지고, 모든 경제주체들이 빠르게 반응하는 시장 환경에 대한 솔루션이 없다. 기업과 시장에 대한 이해가 너무나 떨어지다 보니, 제대로 작동하지 않는 시장을 합리화 하는 솔루션은 거의 없다. 단지 시장에 재갈을 물리고, 시장 폭력 완충 장치(사회안전망)을 만들고, 비시장적 거래를 활성화시키려는 솔루션 뿐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이들은 대체로 실물에 기반을 두지 않았기에 –그래서 세상을 참 단순하게 해석한다- 바꿀 수 있는 것과 바꿀 수 없는 것, 바꾸기 힘든 것과 바꾸기 쉬운 것을 구분할 능력이 없다. 대통령이 할 수 있는 것과 할 수 없는 것을 구분하지도 못한다. 아니 구분할 필요가 없다. 대통령과 정부가 다 할 수 있는데 자본(삼성 등 재벌대기업)과 관료들과 미국 유학파들에 놀아나서 안한 것이라고 몰아붙여야 정치적으로 이익이기 때문이다. 진보의 탈을 쓴 자유주의 세력을 정치적으로 매장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 이면에는 노무현으로 대표되는 가짜 진보를 찌그러뜨리면, 이들에 현혹된(?) 대중을 전취할 수 있다는 확신이 자리하고 있다.
국민들의 현실감각과 균형감각
그런데 망자에 대한 전통적인 관대함으로 결코 해석할 수 없는 엄청난 추모 열기는 노무현과 참여정부에 대한 진보 진영의 평가(폄하)가 별로 국민적 설득력이 없다는 것을 보여주었다. 보수가 덧씌운 반미 친북 좌파 포퓰리즘 무능 세력이라는 덧칠도 마찬가지였다. 엄청난 추모 열기는 대통령의 치적, 한계, 오류를 직관적으로나마 정확하게 구분하는 국민들의 현실 감각과 균형 감각을 떠나서 설명할 수가 없다. 이 감각은 진보와 보수의 대표 논객을 자처하는 사람들과는 확연히 다르다고 보아야 한다.
사실 누가 보아도 노무현 자결을 초래한 짐승 3종 세트의 난동은 신자유주의와도 자유주의와도 반공주의와도 아무런 상관이 없다. 자칭 보수는 시장경제, 자유주의, 민주주의, 법치주의, 3권 분립과도 별로 상관이 없다는 것도 대중적으로 폭로되었다. 그런 점에서 듣는 귀가 있고, 보는 눈이 있는 사람에게 노무현 자결 사태와 전무후무한 추모 열기는 엄청난 지적 충격이 아닐 수 없다.
노무현의 비극적인 죽음은 우리 시대의 혼미와 착각의 산물이다. 노무현 자신과 범진보개혁세력과 다수 국민들의 착각의 산물인 것이다. 어떻게 보면 노무현은 온몸으로 시대의 혼미와 착각에 대해 책임을 졌다고 볼 수 있다. 더욱이 퇴임 후 노무현은 농촌과 환경 살리기 운동, 민주주의 2.0 운영, 비공개 토론 까페 운영, 끊이지 않았던 전문가들과의 토론, 치열한 개인적 학습 등을 하면서 시대의 혼미를 앞서서 깨치려고 하였다. 그 짧은 유서에 (인간의 수많은 생명활동의 하나에 불과한) '책을 읽을수도 글을 쓸 수도 없다'는 언명이 들어간 것을 보면 학습과 발산(글쓰기)을 생명처럼 소중히 여겼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노무현은 자 결 직전까지 치열하게 새로운 진보의 길을 찾아 헤맸다고 할 수 있다. 논어에 나오는 '아침에 도를 들으면 저녁에 죽어도 좋다'(朝聞道 夕死可矣)는 자세로 산 사람이 바로 노무현이 아닐까 한다. 그래서 아름다운 사람, 위대한 사람인 것이다.
노무현이 남긴 숙제
노무현은 한국 사회나 진보가 가야 할 길을 완벽하게 찾은 사람이 아니다. 길을 치열하게 찾던 사람이었다. 하지만 한국 사회가 가야할 대략적인 방향은 잡은 사람이었다. 노무현은 원칙과 상식이 통하고, 자유와 정의가 흐르는 세상이라는 ‘방향’을 제시했다. 또한 그 도정에 얼마만한 피눈물을 흘려야 하는지는 가르쳐주었다. 하지만 그것을 넘어서서 어떤 길로 가야 하는지는 모색 중이었다.
그러므로 노무현을 부활시키는 길, 혹은 그의 유산 상속자=적장자가 되는 길은 노무현의 치적을 줄기차게 칭송하고, 노무현과의 인연을 내세우는 것이 아니다. 치적은 계승 발전시키고, 한계는 뛰어넘고, 오류는 시정하고, 노무현이 못다한 과제를 해결하는 것이다. 이 과제는 곧 새로운 진보의 길을 찾고, 새로운 진보 세력을 만들고, 溫故而知新(온고이지신)으로 다시금 역사적 주도권을 쥐는 것이다.
우리는 얼마나 위대한 정신을 갖고 있나?
원래 모든 위기는 기회고, 모든 기회는 위기다. 그 동안은 진보의 미증유의 위기를 걱정했다. 그러나 지금은 갑자기 닥친 기회를 걱정해야 할 판이다. 탄핵 총선이 준 엄청난 기회를 허송하자 기회의 등에 업혀 있던 위기라는 야수가 등에서 내려와 날뛰어 진보개혁 세력을 물어뜯었다는 기억을 상기해야 할 상황이다.
그래서인지 요즈음 가장 걱정되는 사람은 노무현이 남긴 위대한 유산이 무엇인지도 모르고, 오로지 정치적 유산에만 관심을 가지며, 가짜 상주를 비난하는데 열을 올리는 사람이다. 이들은 노무현 서거로 인해 폐족이 -물론 나는 단 한 번도 이른바 친노가 폐족이라고 생각해 본 적이 없지만- 科擧(과거) 무시험 통과를 보증하는 상훈을 받았다고 생각하는 사람과 다를 바 없다. 그러나 냉엄한 현실은 노무현 서거로 인해 과거에 응시할 자격을 얻었다고 보아야 하지 않을까? 과거에 급제하는 것은 이젠 자신의 실력이라는 말이다. 물론 그 실력의 핵심은 노무현의 정신적 유산과 지적 유산을 온전히 상속하고, 그가 못 다한 숙제를 하는 것이다. 노무현이 남긴 지적 유산과 숙제를 제대로 상속하지 않고, 정치적 유산을 놓고 이전투구판을 벌인다면 虎父犬子 소리를 들어도 할 말이 없을 것이다.
만고의 진리는 위대한 정신과 생각이 위대한 정치세력을 만들고, 이들이 위대한 국가를 만든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얼마나 위대한 정신과 생각을 갖고 있나 되물어야 한다. 더 나아가 지난 10년간의 성공과 좌절의 경험으로부터 무엇을 배웠나? 노무현으로부터 어떤 유산을 물려받았나? 이것도 치열하고 집요하게 물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