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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明) 왕조 멸망사 : 사르후 전투上 - (11)
게시물ID : history_13869짧은주소 복사하기
작성자 : 별짓을다하네
추천 : 20
조회수 : 5247회
댓글수 : 4개
등록시간 : 2014/02/01 12:58:53
 
 
 
- 사르후 전투 (1) -
 
 
 
02.jpg
 
사르후 전투.
 
그림만 봐도 대강 짐작할 수 있지만 말타고 활 당기는 왼쪽이 후금군이고 총포 겨누고 쏘는 오른쪽이 명군이다.
 
 
 
세계 전쟁사를 보노라면 흔히 소수의 병력으로 대군을 작살낸 사례들이 종종 있다. 뛰어난 지휘관의 신출귀몰한 전략전술 및 임기응변으로 병력의 열세라는 핸디캡도 극복하고 승리를 거두었던 경우도 있지만 반면에 대군 측의 삽질로 인하여 헛점으로 보이는 바람에 그 틈을 파고 든 상대측의 일격으로 작살났던 경우도 허다하다. 굳이 구분하자면 이 사르후 전투는 후자 쪽에 가깝다고 할 수있다.
 
 
엄밀히 말해 사르후 전투는 전장이 이 사르후 외에도 사르후까지 포함하여 총 다섯 곳이다. 명나라와 후금의 전력이 한곳에서 부딪혀 승패가 갈린 것이 아니라 여러 곳에서 교전을 벌이며 시간의 경과에 따라 승패가 나왔다는 점에서 전투로 불리기 보다는 전쟁이란 표현이 옳지 싶은데, 고작 5일만에 승부가 난지라 전쟁으로 부르기에도 뭐하다.
 
 
10만 병력의 명(明)군은 총 네갈래로 나뉘어 각기 진격했다.
 
 
서로군 : 산해관총병관(山海關總兵官) 두송(杜松).
북로군 : 개원총병관(開原總兵官) 마림(馬林).
남로군 : 요동총병관(遼東總兵官) 이여백(李如柏).
동로군 : 관전총병관(寬甸總兵官) 유정(劉挺). 여기에 강홍립의 조선군이 속해 있었다.
 
사령관 요동경략(遼東經略) 양호(楊鎬)는 후방의 심양(沈陽)에서 총지휘.
 
hb1_201_i4.jpg
 
사르후 전투 경과도.
 
지도만 봐서는 눈만 아프니 차차 보도록 하자.
 
 
일단 전체적으로 보았을 때 명군의 상황은 그리 나쁘지는 않았다. 무엇보다 쪽수만도 후금군의 다섯배에 달하는데다 후술하겠지만 이 지휘관들 중 '누구'를 제외하고는 모두가 임진왜란이나 여진족과의 싸움에 참전하여 나름 경험많은 이들이었고 10만이라는 대군을 한꺼번에 몰아서 진군하기엔 보급문제도 그렇고 여러문제가 뒤따르느니라 복잡하고 움직임이 둔할 것이라 판단하여 넷으로 쪼개 각자 진군하되 정해진 날짜에 집결한다는 전략도 흠잡을 데는 없었다.
 
그런데 무엇이 문제였느냐 하니, 첫단추부터를 잘못 끼웠다는데에서 그 원인을 찾을 수 있다.
 
 
사령관 양호는 이 네갈래의 군세가 정확히 3월 1일에 사르후에 집결하여 합류한 후에 교전하는 것을 목표로 했었고 그렇게 지침을 내렸다. 그런데 두송이 이끄는 서로군이 3월 1일에 도착하자마자 독단적으로 진격하여 후금군과 교전해버린 것이다.
 
 
교전하는게 뭐가 문제냐고 물을지 모르겠는데, 양호가 구상한 네갈래 군이 합류하여 함께 싸운다는 기본 전략을 망쳤다 측면에서 두송의 독자행동은 충분히 문제가 될 만했다. 생각해보면 답은 간단하게 나온다.
 
 
명군의 최대 메리트는 바로 10만이라는 숫자의 대군이다. 혹자가 남긴 명언마냥 싸움은 머리숫자로 하는게 아니라지만, 당장의 최대 장점은 병력에서의 우세다. 그래서 비록 군세를 넷으로 나누어 따로 진군할지언정 싸우는 것은 모여서 함께 싸우려고 했던 것도 이러한 이유에서인데, 간단하게 말하자면 네갈래의 군세가 각기 독단적으로 후금과 교전한다면 각개격파 당할 우려가 있기 때문이었다.
 
 
제아무리 10만이라 해도 넷으로 쪼개면 대충 각기 2만 내지 그보다 더 많게 나누어진다. 후금군의 2만여 병력과 비슷한 숫자다. 행여나 후금군이 각 갈래의 군세에 전력을 집중하여 하나씩 격파해 나간다면 이래서는 대군의 메리트가 소용이고 뭐고 다 무의미해진다.
 
 
이것이 명군 사령관 양호가 가장 우려하고 피하고자 했던 최악의 시나리오로, 위에서도 말했듯 진군은 달리 하더라도 싸우는 것은 합류해서 하고자 했던 이유다.
 
 
그런데 두송이 그 전략은 개나 줘라 심보로 나왔던 것이다.
 
 
1.png
 
두송(杜松).
 
 
 
그곳 사르후에 후금군이 먼저 나와 명군을 기다렸다가 선제공격을 가해와서 불가피하게 맞대응 했다면 모를까, 순전 두송의 공명심과 후금군을 얕잡아 본 자만에서 비롯된 전투였다. 위에서 그 '누구' 가 바로 이 두송이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애초에 두송은 일군의 지휘관이 될만한 그릇이 아니었다. 용맹한 장수였다고는 하나 그가 다일 뿐, 일선에서 직접 칼을 휘두르며 싸우는데에는 도가 튼 맹장일지는 몰라도 기본전략도 모르고 하다못해 전장의 흐름을 가늠하고 파악할 수준의 군재도 못되었다.
 
 
그리고 공명심이라고 했는데, 말 그대로다. 다른 지휘관들 보다 더 전공을 세우고 싶었던 두송은 공명에 눈이 먼 나머지 진격명령을 내린다. 더구나 이때 누르하치가 명군을 막을 요량으로 계번(界藩)이란 곳에다가 성을 쌓고 있다는 첩보까지 접한 상황이었다. 그 작업도 방해할 겸해서 다른 군세들 보다 더 일찍 진격해나간다. 여기서 두송은 한번 더 삽질을 하는데, 기존에 거느리고 있던 병력을 또 나누었던 일이다.
 
 
두송에게 주어진 병력은 3만이라 했다. 사르후에는 2만의 병력을 남겨두고 자신은 직접 후금군이 축성하는 계번성을 깨뜨리러 1만을 이끌고 간다. 이제는 후금의 병력보다 못한 규모의 병력이 된 것이다. 이것이 두송의 두번째 실수였다.
 
 
시기는 아직 한창 겨울의 한기가 채 가시지 않은 3월. 두송은 눈바람이 몰아치는 가운데 군사들을 재촉하고 다그치며 혼하(渾河)라는 강을 건넌다. 그 추운 날에 차디찬 강물에 몸을 담그고 건너려니 그 추위가 오죽했을까. 그러나 두송 본인은 갈길이 멀다며 갑옷까지 벗어던지고 건너는 위엄을 보여주기까지 한다. 게다가 설상가상으로 물살도 셌던지라 익사하는 병사들이 속출하자 보다못한 부장들의 적절한 곳에 진영을 내리고 기다리자는 간언에도 불구하고 이를 무시했던 두송의 고집은 가히 황소고집이라 할만했다.
 
 
누르하치는 처음부터 두송의 이러한 짓거리들을 모두 지켜보고 있었다. 가뜩이나 명의 대군과 대결을 벌이는 것이 심히 부담스러울 누르하치에게는 마치 먹기 좋게 제 스스로 병력을 잘게 쪼개서 들이대주는 두송이 고마울 따름이며 말그대로 천운이 뒤따른 것이고 명군에게 있어서 두송은 흡사 먼 훗날 일본군의 무다구치 렌야와 같은 존재가 되어가고 있었다.
 
 
청군.jpg
 
"사실 두송은 우리가 명나라 군부에 비밀리에 심어둔 스파이일세."
 
 
명군이 한판 붙어볼만한 전력으로 급락하자 누르하치는 여덟번째 아들 황태극(皇太極), 일명 홍타이지에게 후금의 주력인 팔기군 중 2기를 내주어 두송이 노리고 진격해오는 계번성으로 향하게 하는한편, 남은 6기는 사르후에서 어물적거리는 남은 명군을 급습할 것을 지시한다.
 
 
황태극.jpg
 
청(淸) 태종(太宗) 천총제(天總帝) 황태극(皇太極).
 
 
우리에게는 병자호란으로도 익히 알려진 청나라 황제다.
누르하치 사후 청(淸)을 일으켜 명나라를 집어삼키고 만주족이 중국의 주인으로 거듭나게 만든 장본인.
 
 
 
누르하치의 명을 받든 팔기군 6기는 날이 어둑어둑해질 무렵에 행동을 개시하여 사르후에 도착했을 때는 이미 한밤 중이었다. 밤이 되었으니 명군은 횃불을 밝혔을 터. 이는 결국 어둠 속에 훤하게 제 위치를 스스로 까발리는 것과 다름없었고 후금군의 좋은 표적이 되었다. 예나 지금이나 집중사격은 무섭다. 후금군은 그냥 명군 진지를 향해 화살만 냅다 쏘아댔고 명군은 때아닌 야습에 놀라 우왕좌왕대며 어둠속에서 어지러이 날아드는 화살에 무참하게 살해당했다. 그래도 나름 대응한답시고 준비해둔 화포들을 쏘아댔지만 적의 위치도 모르는 상황에서 그냥 공포탄 수준이나 다름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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팔기군(八旗軍)의 갑주.
 
누르하치가 처음 설립하였고 만주족의 고유 군사 및 부족 편제제도에 뿌리를 두고있다.
 
 
명군이 이렇게 깨진데에는 후금군의 야습이 탁월하긴 했지만 무엇보다 사르후로는 후금군이 오지 않을 것이라 판단하고 있던 방심이 치명적이었다. 필시 지휘관 두송이 공격하러 간 계번성을 구원하느라 여념없을 것이라 간주하고 비교적 느슨한 상태로 주둔하던 차에 누르하치의 일격에 맥없이 무너지고 만 것. 또한 두송이라는 지휘관의 부재도 전투 시에는 상당한 손실로 작용했다. 무능해도 어쨌거나 상황에 맞게 지시를 내리고 대응했어야 할 지휘관이 없으니 결국엔 허둥대다 죄다 몰살당한 것이다.
 
 
이 날 학살에 가까운 야밤의 기습으로 2만의 명군은 전멸해버린다.
 
 
한편 계번성을 치러나갔던 두송의 1만 병력은 어땠을까. 물론 이쪽도 상황은 그리 좋지 못했다. 우여곡절 끝에 혼하를 건너 계번성 공성전을 벌였지만 예상 밖으로 계번성의 방어는 굳건했고 엎친데 덮친 격으로 계번성을 구하라는 아버지 누르하치의 명령을 받은 홍타이지가 팔기 2군을 휘몰고 원군으로 나타나는 바람에 고전을 면치 못하던 차에 참으로 희망찬 소식 하나가 날아든다.
 
 
후금군의 야습으로 사르후의 주둔군은 문자 그대로 전멸당했으며 그 주둔군을 몰살시킨 팔기 6기도 이리로 오고 있다 전령의 급보였다. 이 소식에 사령관 두송은 물론이고 병사들의 사기는 바닥을 기게 된다.
 
 
청천벽력과 같은 소식에 두송은 망연자실하여 어찌된 일이냐고 전령을 붙잡고 다그쳤겠지만 애꿎은 전령이라고 알 턱이 없었다. 그리고 머지않아 누르하치의 팔기 6군에다 홍타이지의 팔기 2기, 그리고 계번성의 수비병력까지 포함해서 후금군 세 갈래가 두송의 명군을 몰아쳐 도륙내버리니 난전 속에 두송도 전사해버리고 1만 병력도 모두 전멸당하고 만다.
 
 
벌써 개전 1일차에 10만의 병력 중 3만이 증발했고 네갈래의 군세 중 한갈래가 사라진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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