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대 총선 15:1, 15대 21:0, 16대 18:0, 17대 17:1, 18대 17:1, 19대 16:2. 1990년 3당 합당 후, 부산은 야당의 무덤이었다. 여섯 번의 총선에서 새누리당은 그야말로 싹쓸이했다.
노무현 전 대통령도 견고한 지역주의의 벽을 넘지 못했다. 1992년 14대 총선, 1995년 부산시장 선거, 1996년 15대 총선, 2000년 16대 총선. 부산에서 연거푸 낙선했다. ‘호남당’ ‘빨갱이당’ ‘김대중 사람’이라는 낙인찍기에 선거를 치를 것도 없었다고 한다.
2000년 총선에서 낙선을 목도하며 노 전 대통령은 홈페이지에 이렇게 썼다.
“이 아픔 잊는 데는 시간이 약이겠지요. 또 털고 일어나야지요. 농부가 밭을 탓할 수는 없겠지요.”
다음 날 그는 “노무현은 부산을 그래도 사랑합니다”라는 플래카드를 들고 낙선 인사를 했다.
당시 노 전 대통령은 “부산에서 서너 석만 얻을 수 있다면 지역 구도를 무너뜨리고 정책 경쟁을 하는 진짜 야당을 만들 수 있는데…”라고 말했다.
4·13 총선에서 전재수·최인호·박재호·김영춘·김해영이 더불어민주당 깃발로 부산에서 당선됐다. 부산에서 더민주는 호남 전체에서 얻은 의석수보다 많은 의석을 차지했다. 더민주는 ‘호남당’이라는 굴레를 벗어던지게 됐다.
박재호·최인호 당선자의 후원회장을 맡고 있는 조국 교수(서울대 법학전문대학원)는 페이스북에 “그동안 ‘빨갱이’ ‘전라도·김대중 앞잡이’라는 말을 들으면서도 끈질기게 버티고 싸운 결과다”라고 적었다.
부산 친노 그룹의 맏형 격인 이호철 전 청와대 민정수석은 “부산 정치권의 ‘망령’인 지역주의를 부숨으로써 노 대통령이 그렇게 바라던 전국 정당의 기틀을 만들었다. 노무현 대통령의 정치적 꿈을 ‘노무현 키즈’가 이뤘다. 대통령이 감격하실 것이다”라고 말했다.
새누리당은 15개 선거구에 모두 현역 의원을 등판시켰다. 이번에도 새누리당은 ‘우리가 남이가’를 들고 나섰다. 더민주 후보들은 10년 넘게 지역을 지켰다. 깨지고 쓰러져도 다시 일어나 국민에게 손을 내밀었다.
2000년 부산 북·강서을 노무현 후보의 캠프에서 일했던 전재수 당선자(북·강서갑)는 노무현 청와대에서 국정상황실 행정관, 경제정책비서관실 행정관, 제2부속실장을 지냈다. 참여정부 때의 명성은 부산에서는 오히려 독이 됐다. 2006년 부산 북구청장 선거, 2008년 18대 총선, 2012년 19대 총선에서 잇따라 낙선했다. 세 번 낙선하는 사이, 집은 자가에서 전세로, 전세에서 다시 월세로 떨어졌다. 전 당선자는 “만삭의 몸으로 선거운동을 하고 돌아온 아내를 부둥켜안고 많이 울었다”라고 말했다.
전 당선자는 10년 동안 북구를 떠나지 않고 텃밭을 갈고 또 갈았다. 낙선한 다음 날에도 유권자를 찾아가 고충을 들으며 진짜 이웃이 됐다. 당선 비결을 묻자 그는 이렇게 말했다. “노무현 대통령처럼, 떨어졌지만 다시 일어났다. 10년 넘게 1000명의 형님, 1000명의 누님, 1000명의 동생, 1000명의 아버지, 1000명의 어머니를 만들었다. 이제야 부산이 친노의 진심을 이해해주시는 것 같다.”
참여정부 청와대 언론비서관 출신인 최인호 당선자(사하갑)는 정윤재 전 청와대 의전비서관과 함께 부산의 젊은 친노를 대표하는 인물이었다. 참여정부 시절 청와대 비서관, 국가균형발전위원, 열린우리당 전국청년위원장, 통합민주당 부산광역시당 위원장, 새정치민주연합 혁신위원 등 활약이 두드러졌다. 하지만 전국적 명성은 부산에서 도움이 되지 않았다. 최 당선자는 2002년부터 15년째 국회의원에 도전했다. 결국 총선 4수 만에 결실을 보았다. 최 당선자는 4년 내내 홀로 지역을 누비고 다녔다. 재킷에 LED 이름표를 달고 밤낮을 가리지 않았다. 뒷산 산책로와 약수터에 매일 나타나서 별명이 ‘승학산 산신령’이었다. 최 당선자는 “낙후한 이 지역을 위해 능력을 발휘하겠다. 새누리당 의원보다 더민주 의원이 일도 잘한다는 소리를 들을 테니 지켜봐달라”고 말했다.
2000년 총선에서 부산 북·강서을에 출마한 노무현 새천년민주당 후보는 35.69%로 낙선했다.
참여정부 청와대 정무비서관 출신인 박재호 당선자(부산 남구을)도 4수 끝에 배지를 달았다. 어딜 가나 ‘핵심 친노’를 자처하는 바람에 박 당선자는 지역에서 표를 얻기가 쉽지 않았다. 하지만 그는 끝까지 친노임을 강조했다. 박 당선자가 네 번째 선거를 치르는 사이에 부인 이미선씨가 지난해 11월 직장암으로 세상을 떠났다. 박 당선자는 “한 달에 생활비 20만원을 줘도 한마디 불평 없이 아내는 아이 셋을 키웠다. 아내가 끝까지 믿어준 진심에 대한 동정표가 나를 살렸다”라고 말했다.
김영춘 당선자(부산진갑)는 서울 재선 의원(16·17대)이라는 타이틀을 버리고 험지 부산으로 왔다. 19대 총선, 2014년 부산시장 선거에서 실패했지만 이번 총선에서 3선 의원이 됐다. 그 도전은 단번에 그를 부산을 대표하는 유력 주자로 만들었다.
“공통점은 꾸준한 지역밀착형 선거운동”
친노 후보의 부산 약진에 대해 <부산일보>는 이렇게 분석했다. “이들은 하나같이 오랜 기간 지역을 누비며 지역밀착형 선거운동을 해온 공통점이 있다. 새누리당의 텃밭에서 매번 유권자들의 선택을 받지 못했지만, 그래도 이에 좌절하지 않고 10년 넘게 지역을 묵묵히 지키며 주민들과의 신뢰와 교감을 두텁게 쌓아왔다.”
부산 <국제신문>의 한 국장급 기자는 “부산의 대표 정치인 김무성이 대구의 퇴물 정치인 이한구에게 모욕당하는 모습을 보고 부산 시민들의 마음이 상했다. 게다가 문재인이 호남에서 홀대당하는 것을 보고 마음이 더민주로 옮아왔다”라고 말했다.
부산에서 국회의원을 지낸 한 친박 핵심 정치인은 “부산에서 PK(부산·경남)와 TK(대구·경북)가 이혼해야 한다는 소리가 꾸준히 나왔다. TK 정권의 부산 소외론과 새누리당의 오만함에 대한 부산 시민의 심판이라고 본다”라고 말했다.
경남에서도 더민주 민홍철·김경수·서형수 후보가 국회에 입성했다. 노 전 대통령의 마지막 비서관 김경수 당선자(경남 김해을)는 새누리당 이만기 후보와 겨뤘다. 이만기 후보는 총선 출마를 선언한 이후에도 SBS 예능 프로그램 <힐링캠프> <백년손님> 등에 출연하는 특혜를 누리기도 했다. 하지만 김경수 후보는 당내 전국 최다 득표율(62.4%)로 ‘천하장사’ 이만기를 메쳤다.
4월14일 경남 지역 더불어민주당 후보자들이 김해 봉하마을에 있는 노무현 전 대통령 묘역을 찾았다. 이번에는 당선자 신분이었다. 김해갑 민홍철 당선자, 김해을 김경수 당선자, 양산을 서형수 당선자, 허성곤 김해시장 당선자, 김종근 기초의원 당선자가 함께했다.
노 전 대통령의 ‘마지막 비서관’을 지낸 김경수 당선자는 “대통령님이 그토록 원하시던 지역주의 극복, 김해에서부터 그 바람이 시작되는 것 같습니다”라며 눈물을 훔쳤다. 19대 총선 때 부산 북·강서을에 나섰던 문성근씨는 “PK 지역에서 더민주=호남당이라는 등식이 깨지기 시작하면서 부산 경남은 이제 인물 경쟁, 정책 경쟁이 가능해졌다. 친노 후보의 PK 약진은 선거 때마다 계속될 것이다”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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