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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사게는 방문수 5회이하는 글을쓸수가 없네요. 자게에라도 반성문
게시물ID : freeboard_733349짧은주소 복사하기
작성자 : No.15구대성
추천 : 3
조회수 : 150회
댓글수 : 0개
등록시간 : 2013/12/14 18:08:31
자게에라도 반성문을 올려보려고 합니다.
시사게에 올리고싶으면서도 무서워서 새로 아이디를 팠더니 올릴수가 없군요.
 
이 이야기는 어찌보면 저희 가족사이기도 합니다.
안녕들하십니까라는 물음에 주저리주저리 이야기 해보려고 합니다.
아무도 읽지 않으셔도 그냥... 스스로 마음을 잡기위해 써보고 싶었습니다.
 
저희 부모님은 좋은 분들입니다.
콘크리트층 부모님을 가지신 분들이라면 정말 부러워할만한 부모님입니다.
 
아버지는 가난하게 사시다가 치료비가 없어 부러진 다리를 치료하지 못하고 그대로 지내셔서 아직까지 다리를 저십니다.
그러면서도 그 시골에서 아득바득 공부하셔서 대학을 들어가셨습니다.
시골 7남매 가난한 조부모님께 더이상 폐가 되지 않기위하여 명문대라 불리우는 대학들을 포기하시고 장학금을 받고 지거국을 다니셨습니다.
 
저희 아버지는 운동권 출신이십니다.
다리를 저시고, 지금 기준으로는 정말 작은 체구로 어두운 시대에 똑바로 맞서 싸우셨습니다.
 
저희 어머니역시 대학을 나오셨습니다.
그시절 여자가 대학가기 힘들기 때문에 저희 어머니는 가출을 해서 스스로 돈을 벌어 공부를 하시고, 역시 여자에게는 (2남 1녀중 둘째셔서 더욱더) 등록금을 대줄수 없다는 외할머니의 주장에 역시 장학금을 위해 지거국으로 오셨습니다.
 
저희 어머니는 직접 운동을 나가신 분은 아니지만 여러면에서 동조하고 도우신거로 알고있습니다.
그로 인한 많은 불이익으로 어머니의 미래는 어두워 지고 말았습니다.
여자의 몸으로 홀로 자수성가하셨던 어머니는 대학을 힘들게 졸업하신뒤 바로 전업주부가 될수밖에 없었습니다.
 
저희 아버지에게는 빨간줄이 있었습니다.
아마 운동권 출신이시라면 대부분 있는 그 줄입니다.
잘 기억은 안나지만 김대중 대통령 시절에 민주화 운동으로 인한 빨간줄을 지워주겠다 하였고 저희 아버지는 그걸 거부하려고 했습니다.
당당하시기에 거리낄게 없다 하셨습니다.
 
그러나 저와 제동생얼굴을 보고 몇날며칠을 고민하시던 끝에
자식들을 위해 빨간줄을 지우셨습니다.
 
호된 과거가 보상을 받는건지, 가루가 되어 그냥 잊혀져 버리는건지 모르겠다며 씁쓸히 웃으시는 아버지의 미소가 조금 슬퍼보였었습니다.
저는 아버지에게 빨간줄이 있었다는 것도 그걸 지우셨다는 것도 대학을 다니면서 전혀 알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언제인지를 정확히 기억하지 못합니다. 쓰다보니 역시 많이 부끄럽네요
모든건 아버지가 술에 취해서 드문드문 주정을 부리시는걸 몇년에 걸쳐 조합한 끝에 알게 되었습니다.
 
어머니는 아직도 전화 소리에 깜짝깜작 놀라십니다.
예기치 못한 방문도 두려워 하십니다.(택배의 활성화로 이점은 많이 나아지셨지만요 ㅋㅋ)
그 이유는 아버지때문이었습니다.
 
저를 임신하고있던중에도 꾸준히 싸우셨던 아버지는 항상 경찰에 쫓기셨고
신혼집에 귀가를 할때 제대로 현관을 통해 들어오신적이 손에 꼽는다고 합니다.
 
저희 아버지는 참 인덕이 많으셨습니다.
그래서 많은 후배들이 저희 집을 피난처로 썼다고 하십니다.
형사들에게 폭언을 듣고, 사람들을 피신시켜주고, 책들을 숨기고,
어머니는 임신한 상태로 그 모든것을 마주하면서 많이 지치셨습니다.
 
그런 부모님 밑에서 저는 어릴때부터 정치에 관한 이야기를 많이 들었고,
 어린나이에 아버지어머니를 따라 그냥 막연히 어떤 당을 싫어했습니다.
조금 크면서 주위의 다른 몇몇 어른들 이야기를 들으면, 저희 부모님은 나쁜사람이었습니다. 어리석은 바보였습니다.
 
특히 저희 아버지는 경상북도 출신이시기에 그런 어른들이 더 많았습니다.
제가 아버지께 그 어떤당에 대하여 왜 아버지는 그 당을 무조건 미워하냐 라는 어리석은 물음을 던졌던 기억이 있습니다.
아버지는 화를 내지 않고 웃으며
 
네가 직접 찾고 네가 직접 생각한뒤 결정하여라. 나를 따를 필요는 없다. 네가 그 당을 지지한다고 하면 나와 진지하게 이야기를 나누고 토론을 하면 되는 거다.
라고 하셨습니다.
 
지금 생각하면... 저희 아버지가 보살같이 느껴지는 말이네요.
 
아직 정치에 관심만 가지며 이도저도 모를때 아버지께 많이 끌려다녔습니다.
노무현 캠프에 계시던 아버지를 따라 여러 의원들도 뵙고 실제로 노무현 대통령님과 악수도 해보고...
제 남동생을 직접 안아들고 이야기를 나눈 사진이 아직도 저희집에 있어요.
노무현 대통령님을 무조건적으로 지지하지는 않습니다만, 인간적으로는 많이 존경합니다.
역대 대통령들 중에서는 가장 존경하는 분이기도 합니다.
 
저도 제대로 정치에 관심을 가지고 조금씩 공부하며 이제 겨우 제 정치관을 갖게될 무렵 김진태 의원에 관한 기사를 읽고 조금 놀랐습니다.
솔직히 저한테는 그냥 멀리살면서도 아버지를 찾는 아버지의 친한친구,인 아저씨였던 분이 저런 대단한 분이었다는거에 상당히 많이 놀랐었습니다.
안타깝게도 그 기사는 김진태 의원께서 세상을 떠나셨다는 기사였고, 후회로 가슴을 쳤었습니다.
 
아버지가 항상 그분을 뵈러 간다며 저에게 같이 가겠느냐고 물었을때 저는 귀찮음에 그냥 거절하고는 했었거든요.
과거로 돌아가면 저 자신에게 꿀밤한대 때려주고 싶네요.
 
각설하고, 이명박 정부가 들어서고 많은 촛불 시위가 일어났습니다.
 
뉴스로 소식을 접하신 어머니께서 귀가한 저의 손을 붙잡자마자 한 첫마디를 아직도 잊지 못합니다.
넌 저런데 나서지마라.
 
의외죠?
 
어머니는 몇번이고 몇번이고 저를 잡고 대답을 요구하셨습니다.
 
절대 저런데 나서지마라.
너는 나서지마라.
 
아버지는 일이 바쁜와중에도 시위에 나가셨습니다. 아직 어린 제 동생들의 손을 붙잡고요.
하지만 어머니는 제 손을 붙잡고 우셨습니다.
 
많이 걱정되셨겠지요.
그러겠노라 답할수밖에 없었습니다.
아버지도 몇번 나가시고는 그냥 묵묵히 어머니의 손을 붙잡고는 그 뒤로 나가지 않으셨습니다.
 
제가 타향살이를 하는동안에도 전화해서 절대 나가지 말라며 말리셨습니다.
 
저희 가족은 마치 정치를 잊은냥 그렇게 이명박정부를 지냈습니다.
아버지도 어머니도 아무말 하지 않으셨습니다.
 
이번 대선기간에 고향집에 내려갈일이 생겼습니다. 마침 딱 대선날이었죠. 투표를 하고 아버지와밥을 먹었습니다.
 
그리고 아버지의 친구들을 만났습니다.
모두 민주화 운동을 하셨던 분들입니다.
 
집에서는 항상 허허웃으며 사람좋고, 사회에서는 친구들에게 돈뜯기고 사기당하는 사람좋은 아버지가
그분들께는 영웅이었고 존경할만한 친우였습니다.
 
기분이 너무 좋았습니다.
 
그분들중 한분이 말했습니다.
 
절대 누가 대통령이 되면 안돼. 그럼 우리의 그 세월은 뭐야.
말이 안돼. 그렇게 되면 우리는 뭘까?
될리가 없어. 우리의 많은걸 바쳤잖아.
 
그날 결과를 보고 아버지는 말이 없으셨습니다.
저를 먼저 집에 보내고 술에 취해 늦게 들어오셨습니다.
어머니도 집에서 술을 드시고 계셨습니다.
 
솔직히 저는 아무말도 할 수가 없었습니다.
그날 두분이서 거실에서 같이 술을 드시던날 저의 손을 잡고 아버지가 사과하셨습니다.
자신이 모자라 너에게 힘든짐을 지워줄것같다고
몇번을 사과하셨습니다.
 
저는
바뀔거라고 생각했습니다.
 
이명박 정부때
모두가 나가 요구하는 그때
무언가가 바뀔거라 생각했습니다.
 
제가 나가지 않아도,
어머니의 눈물어린 부탁을 들어드려도
바뀔거라고 생각했습니다.
 
저는
개념있는 사람이라고 생각했습니다.
 
행동하지 않아도,
시위에 직접 나서지 않아도
 
그들을 지지하는 글 몇자를 적고,
관심을 가지고
투표를 하고
진보적인 성향의 신문을 읽으면,
그러면 저는 된거라고
충분히 개념있는 사람인거라고 생각했습니다.
 
대자보를 읽었습니다.
많이 부끄럽습니다.
지금도 제가 이 짧은 글을 적는동안에도
행동하는 분들이 고생하고 계시겠지요.
 
아마, 저희 아버지도 고생하고 계실지도 모릅니다.
그러면서도 저는 나서지 않길 바라시겠지요.
자신이 힘이 모자랐다고 생각하시며,
제가 나서지 않길 바라시며 당신이 나가고 계시겠지요.
 
이젠 안될것 같습니다.
너무 많은게 뒤틀려버린것 같습니다.
 
저도 나서야겠습니다.
이제껏 너무나도 안이했습니다.
편하게 안주하고 아무것도 행동하지 않았습니다. 그래도 될거라고 생각했습니다.
 
저는 이 나이 먹도록 부모님을 밟고, 힘을 빌어 살고 있다는 생각이 듭니다.
이번에 어머니께 전화가 오면 어쩔수 없노라 대답하려고 합니다. 아니 제가 먼저 전화하려고 합니다.
저도 어머니처럼, 아버지처럼 당당해지고 싶습니다. 바뀌지 않아도 행동하고 싶습니다.
후에 제 자식들에게 사과라도 하고싶습니다.
아버지처럼 어머니처럼 그런 사과를 하고싶습니다.
 
노무현 대통령이 당선되던날 어머니가 우셨습니다.
이것이 진짜 기적이라고 우셨습니다.
그때는 몰랐지만 커서 당선되는 과정을 정리된 글을 보니 알겠더군요.
 
시위에 절대 나가지말라며 저를 말리는 어머니를 한때는 이해할수 없었으나
그것 역시 시대가 남긴 치유할수 없는 상처겠지요.
 
저도 이제는 행동하려 합니다.
조금 무섭습니다.
 
아버지의 상처와 어머니의 상처를 보며 솔직히 용기가 크게 나지 않습니다만,
부모님의 용기를 닮고 싶습니다.
 
아무생각없이 그냥 생각을끄집어 막 적다보니 두서없는 글이 되어버렸네요.
그냥 저 자신에게 하는 다짐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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