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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석투자의 구체적 실천방법-1
게시물ID : economy_5529짧은주소 복사하기
작성자 : 캔들12
추천 : 0
조회수 : 344회
댓글수 : 0개
등록시간 : 2014/02/03 21:07:40


투자에 관련된 괜찮은글입니다. 오랜시간동안 주식시장을 지켜봐온 어떤 연륜이 느껴지네요. 투자에 참고하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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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석투자의 구체적 실천방법

 

1. 평택촌놈의 주식투자 경험담

현재 주식초보자 개인들은 한마디로 말하면 배가 불렀다. 그리고 너무 바보스럽다. 그 이유는 필자의 초보자 시절과 비교하면 현재는 격세지감이라는 표현도 무색할 정도로 정보의 홍수가 넘치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왜 그렇게 이야기를 하는지, 현재 주식투자자들은 어떻게 해야 하는지 그것을 먼저 설명한다. 아마도 이 글을 다 읽고 나면 본인들이 얼마나 노력을 안 했으며, 한심한 투자자였는지 깨닫게 될 것이다. 적어도 주식투자의 관점에서 본다면 70대 노인이 10대 청소년에게 전달하는 그런 경우일 수도 있다. 그래서 주식 나이(?)가 어린 사람들은 필독해야만 한다. 지금은 분석을 위한 충분한 조건을 갖췄다.

 

필자는 1989년에 주식투자를 시작했다. 정확하게 말하면 계좌를 만든 것이다. 당시에는 군대 시절이어서 별 생각도 없이 계좌를 만든 후 마음 내킬 때마다 아무 주식이나 매매했다. 당시에는 행정병을 했던 덕분에 유선전화를 사용할 수 있었고, 지금 돌이켜보면 행운이었다. 당시에는 객장에서 전표에 직접 종목명, 매매수량, 단가, 매수와 매도 여부를 기록해야만 했다. 그게 아닐 경우는 전화로 주문을 냈다.

 

주식투자를 시작했던 동기는 매우 단순했다. 크게 보면 두 가지 요인이 있었다. 하나는 아버님의 권유였다. 원래 학부에서 법학을 전공하셨던 분이 대학원에서 경영학을 공부하시면서 갑자기 경제 마인드가 투철해 지셨다. 뒤늦게 40세가 넘어서 대학교수가 되신 이후 아들에 대한 경제교육을 강화시킨 셈이었다. 그러다가 필자가 군대에 있던 시절 휴가를 나왔을 때 주식투자를 하라고 권유하셨다. 이유는 부동산의 경우 국가가 발전하면 할수록 각종 규제와 통제가 증가할 것이지만, 주식시장은 오히려 발전한다는 그런 논리였다. 또한, 인문학 전공이었던 필자를 걱정하셔서 남자가 경제를 모르면 세상을 살기가 어렵기 때문에 공부 차원에서 권유하신 것이다. 정말 소박한 이유로 주식투자를 시작했다.

 

필자가 아버님에게 가장 고마운 부분이기도 하다. 금년에 연세 79세가 되신다. 경희대 법대 출신이라서 문재인 의원의 선배이기도 하다. 아버님은 참 운이 없으신 분이었다. 서울대 법대를 낙방 후 그 시절에 재수를 할 수도 없어서 2차로 들어간 곳이 경희대 법대였고, 동시에 지금의 고려대 의대였던 대학도 이중으로 합격하셨다고 한다. 그런데 돈이 없어서 의대는 결국 포기하셨다. 어쩌면 아버님께서 서울대 법대를 합격하셨거나 고려대 의대를 졸업하셨다면 필자는 더 유복하게 자랐을지도 모른다. 한편 대학 졸업을 하셨지만, 연좌제에 해당되는 집안이 되면서 취업도 어려웠다고 한다. 둘째 할아버지, 즉 아버님 기준으로는 작은 아버지가 일본 조총련계의 2인자 자리까지 올라간 분이었다. 필자의 집안내력으로 본다면 어쩌면 극좌파가 정상이다. 그런데 집안 분위기는 극우에 가깝다. 참 역사의 아이러니이기도 하다.

 

아무튼 이러니 취업이 될 리가 없었다. 그 시절은 그게 당연한 일이었기 때문이다. 그 이후 어렵게 손바닥 만한 대학의 교수로 지내시다가 정년퇴임을 하셨다. 아무튼 아버님께는 그런 이유로 뭔가 한을 풀어보고자 필자에게 기대를 많이 하셨다. 그러나 어릴 적 천재(?)는 거의 불량배처럼 성장하면서 나름대로 마지막 기대를 주식투자로 결정하신 것 같았다. 돈이라도 많이 벌라는 그런 의미였다고 생각한다. 다른 이유는 사주 때문이었다. 아직 더 살아봐야 알겠지만, 필자는 돈과 관련이 깊은 사주팔자를 타고 났다. 필자의 태몽도 금두꺼비였다. 그래서 돐 사진을 보면 필자가 봐도 두꺼비처럼 보였다. 지금과는 사뭇 다른 외모였다. 지금도 필자는 입 모양이 다소 이쁘다. 눈은 매의 모습이고, 입은 두꺼비 형상이다.

 

필자는 군대를 제대한 후 본격적으로 주식투자를 시작했다. 그것은 1991년 무렵이었다. 당시에는 정보라고 해봐야 증권사 직원에게 귀동냥하는 수준이었다. 지금으로 말하면 뉴스티커에 나오는 각종 기업뉴스나 공시사항이 그 당시에는 정보였다. 그래서 현재 투자자들은 행복하다는 것이다. 또한, 차트는 아예 없었다. 종목의 재무제표를 보는 것은 1년에 한 번씩 발행하는 증권사의 고객 배포용 책자가 고작이었다. 이러니 무슨 분석을 할 수 있었을까. 그래서 하는 수 없이 처음으로 시도한 것이 가치분석이었다. 그래서 필자의 적정주가 프로그램은 알고 보면 20년 동안 연구한 결과물이기도 하다. PER 개념은 당시에도 존재했다. 그것도 겨우 대학의 도서관에서 각종 서적을 찾아서 공부했다. 증권사에는 그런 자료도 책자도 없었기 때문이다. 그 이후 일반인에게 차트가 제대로 공개된 것은 1998년 5월 이후였다. 그 때부터 HTS라는 것이 생겼기 때문이다. 따라서 차트를 20년 동안 연구했다고 말하는 주식전문가는 새빨간 거짓말이다. 이것만 보더라도 현재의 주식투자자들은 얼마나 행복한 사람들인지 반성해야만 한다. 지금은 하기 싫어서 안 한다는 것이다. 과거 필자가 초보자 시절에는 어떤 정보도, 볼 만한 책도, 차트나 재무제표도 파악하기 힘든 시절이었다는 것이다. 아무튼 요즘 초보자들은 배가 너무 불러서 게으르다.

 

2. 평택촌놈의 주식전문가 경험담

필자에게 1990년대는 주로 분석과 학습의 시기였다. 그 시절에는 돈도 없었지만, 공부하는 차원으로만 생각했다. 어쩌면 그 시절의 노력이 자양분으로 작용해서 현재의 모습으로 성장했다고 스스로 평가한다. 그러다가 1998년 이후 전업투자자로 전환했다. 정확하게 말하면 1998년 5월부터 그랬다. 당시에는 매매환경이 열악했다. IMF 시절이라 거래도 거의 없었고, 외장형 모뎀을 이용한 PPP접속 방식이라서 하루에도 몇 번씩 통신이 두절되기도 했다. 그러다가 증권사는 혁신이 발생했다. 지금의 초보자들은 이해를 못 하겠지만, 1998년 증권사의 혁신 이전에는 3일 결제 방식이었다. 월요일에 주식을 매도하면 반드시 수요일 이후부터 매수가 가능했다. 반드시 하루는 거래를 못 하는 그런 방식이었다. 그러다가 1998년에 HTS가 생긴 이후 현재와 같은 시스템으로 변경된 것이다. 지금은 하루에도 매수와 매도를 얼마든지 할 수가 있다. 한편 현재는 인터넷이 속도가 워낙 빠르고 정확해서 매매하기에 전혀 지장도 없다. 이 글을 보는 필자들은 그 시절이 얼마나 열악했는지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 초단타는 아예 못 했다.

 

경력이 짧은 주식전문가들은 이런 것을 아예 모른다. 필자 앞에서 주식투자 20년 이상 했다는 사람들을 데리고 와 봐라. 필자는 몇 가지 질문만 하면 경력을 금방 파악할 수 있다. 요즘 경제TV를 보면 주식투자 경력이 만 5년도 안 되는 애들이 수두룩하게 보인다. 심지어 만 2년도 안 되는 놈들도 있다고 들었다. 그런 애들에게 유료방송을 듣고 있는 중생들이 불쌍하다. 물론 나이만 늙었지 실제로는 주식투자 경력이 10년 남짓한 영감들 중에서 경력이 30년이라고 뻥을 치는 놈들도 있다. 필자와 토론하면 아마도 개망신을 당할 것이다. 필자는 정말 만 25년이다. 그래서 이 바닥에서 경력만 보더라도 한참 선배이다.

 

아무튼 그러다가 1998년 가을에 광풍이 몰아쳤다. 당시 대중주 3인방이었던 은행, 증권, 건설이 폭등했다. 이건 월봉으로 차트를 보면 된다. 당시에 대중주가 점상한가를 기록하는 걸 보면서 경악했다. IMF 시절에 돈 가뭄을 겪다가 사채업자들이 대거 그 바닥으로 뛰어들면서 주식시장이 요동쳤다. 역시 이것을 알면 주식투자 경력이 만 15년 이상이다. 한편 1999년 5월에는 코스닥 광풍이 몰아닥쳤다. 그리고 필자는 그 당시 쉽게 돈을 벌었고, 2000년 이후 주식전문가를 시작했다. 그 이유는 2000년 당시에 딸이 태어나면서 앞으로 명함이 필요할 것 같았다. 또한, 당시에 팍스넷에서는 사이버애널리스트 선발대회가 있었다. 상반기는 구경만 했는데, 필자가 아무리 생각해도 초보자들이 전문가로 행세하는 경우가 많다고 느꼈다. 그래서 필자가 하면 1등을 할 것 같았다. 그래서 처음 글을 쓴 것이 2000년 7월 28일이었다.

 

보통 주에 1명을 선발해서 100만 원을 줬고, 2회 선발이 되면 베스트분석실이라는 곳에서 글을 쓸 수 있었다. 그리고 그 사람들 중에서 하반기 최우수상 1명과 우수상 2명을 각각 선발했다. 당시에 억울하게 나이 때문에 밀리면서 우수상과 상금 500만 원을 받기도 했다. 더 놀라운 것은 글을 쓴 이후 2개월 만에 베스트분석실에 승급했다. 이후 딱 2개월이 더 지나서 실제 조회 수 1위를 기록했다. 그 당시에는 기본급 100만 원에 실제 조회 수를 환산해서 보너스를 지급했는데, 주식전문가들이 조회 수를 조작하기도 했다. 그러나 팍스넷은 실제 조회 수를 파악하는 프로그램이 있었다. 그런데 필자가 1등이었다. 필자는 조회 수를 조작하지 않았고, 그래서 더 인정을 받는 계기가 됐다. 그 때나 지금이나 양아치들은 똑같다. 아무튼 필자는 이미 14년 전에 하루에 한 번 글을 쓰는 것만으로도 월 250만 원을 실수령액으로 받았다.

 

주식전문가로 활동하던 2000년 11월이었다. 팍스넷에서 직원으로 들어오라는 것이다. 그래서 그것도 나쁘지 않다고 생각하면서 승낙을 했고, 2001년 1월이 되면 입사를 하겠다고 기다리던 참에 2000년 12월에 인생이 바뀌는 사건이 발생했다. 그것은 2001년부터 인터넷방송을 시작한다는 것이었다. 그런데 사람이 부족하니까 일단 주식전문가를 더 하라고 해서 어쩔 수 없이 시작했다. 그리고 세계 최초로 2001년 2월 5일에 인터넷방송을 시작했고, 필자는 그 당시 멤버이다. 그래서 필자보다 인터넷방송을 더 오래한 사람은 없다고 확언하는 것이다. 필자가 인터넷방송을 시작한 이후 많은 아이디어를 만들었고, 지금도 그것을 모든 전문가들이 사용한다. 아마도 필자가 만든 아이디어라는 것도 모를 것이다. 처음에는 녹화도 없이 그냥 방송하는 그럼 시스템이었다. 그러다가 필자에 의해서 생긴 방식이 문자전송, 유료텍스트, 녹화방송, 도우미, 방송창에 숫자로 답변하는 방식(예 1번, 아니오 2번) 등이 핵심이다. 이런 시스템을 최초로 제안했고, 지금도 많은 주식전문가들이 사용하고 있다. 따라서 인터넷방송의 교과서를 만든 장본인이 필자이다. 그래서 꼭 하고싶은 말이 있다. 이제 알았냐? 주식전문가 인터넷방송 초보자들아...

   --이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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