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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신주는 불편하죠.
게시물ID : phil_8164짧은주소 복사하기
작성자 : 난사람이다
추천 : 10
조회수 : 13332회
댓글수 : 5개
등록시간 : 2014/02/06 13:27:35
강신주에 대해 철학게에 말이 많네요. 사람에 따라 공감하기도 혹은 비판하기도 하는것 같아요. 하지만 공감하든 비판하든 강신주에게서 오는 메시지에 우리가 받는 인상은 비슷한듯 합니다. 바로 '불편'으로 다가오죠.

강신주의 메시지는 일관적입니다. 비록 한사람의 사상을 한마디로 축약시켜버리는 것을 좋아하지 않지만, 강신주의 메시지를 굳이 축약한다면, "인간성의 회복을 위해 현재(자본주의 포함)를 직시하라"입니다. 그의 저서들을 관통하는 핵심은 '인간성의 회복', 즉 인간은 인간답게 입니다. 여기서부터 우리는 불편함을 경험하게 됩니다. 인간성을 회복하라는 것은, 지금 우리가 '인간성'을 잃어버렸다는 뜻이 되거든요.

인간성을 잃었다는 말에 대해, 헛소리라며 말도 안된다며 거부할 수 있다면 우리가 그다지 불편하진 않을테죠. 하지만 그러지 않습니다. 듣고 보니 맞거든요. 우리가 '인간답게' 살고 있지 못한다는 사실이 말이죠. 여기서 자기자신의 존재가 불안해지기 시작합니다. 내가 이 메시지를 받기 전에는, 분명 나는 '열심히' 살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나의 삶을 순식간에 '동물'의 삶으로 격하 당해버립니다. 분명 나는 인간인데 말이죠.

하지만 더 면밀히 한다면, 강신주가 우리에게 인간이 아니라고 하는 것은 우리가 동물의 삶을 산다고 외치는 것이 아닙니다. 되려 동물의 삶을 살라고 하는 것에 가깝죠. 강신주가 우리에게 던지는 인간성의 소외는, 그보다는 인간의 '상품화'라는 의미에 가깝습니다. 우리가 상품이 되버린 것을 우리는 이미 알고 있었지만, 무의식에 숨기거나 모른채 하고 있었죠. 그러나 강신주와 만남으로써 애써 숨기려던 자신의 '상품화'에 직면하게 됩니다. 그 순간이 강신주의 불편함의 본질입니다. 나의 인간으로서 살고자 하는 본성과 상품으로서 살아왔던 혹은 살아야 하는 현실의 괴리를 직면하는 순간이기 때문이죠.

만일 강신주를 만나지 않는다면 되려 더 행복할 수 있습니다. 상품으로서의 가치를 높이며 거기서 획득되는 재화를 상품을 향유함으로써 즐겁게 살아갈 수 있거든요. 하지만 강신주를 만나는 순간 우리는 불행해집니다. 내가 상품이라는 것은 나의 본성과 맞지 않는데, 그것을 직시하게 되거든요. 강신주가 없으면 우리는 상품으로써의 가치를 높히려는 행위에 만족을 느끼며 그저 즐겁게 살면 되지만, 만나는 순간 괴리가 인식되기 시작하며 열려버린 판도라의 상자를 다시 닫을 수는 없습니다. 내가 그동안 살아오던 삶의 양식이 부정되버리며, 새로운 가치체계를 내가 받아들이기 힘들어지는 이때 우리는 굉장히 아픔을 느끼게 됩니다. 그래서 이 불편때문에 강신주를 제거해버리고 싶은 생각가지 들죠. 강신주는 감기에 걸렸을때 낫기 위한 아픔일수도, 혹은 그냥 감기자체의 아픔일수도 있지만 어쨋든 아픕니다.

여기서 우리는 선택지를 다르게 받게 됩니다. 강신주를 만날 것이냐, 아니면 만나지 않을 것이냐가 아니라 '상품으로의 삶'으로 돌아갈 것인가, 아니면 '인간성의 회복'으로 나아갈 것인가로 말이죠. 어느 선택지든 아픕니다. 그동안 나의 평온한 삶을 부정해버려야 하거든요. '상품으로의 삶'으로 돌아가려 한다면 인식된 인간성의 본성이 우리를 자꾸 찌르게 됩니다. 한번 인식된 것은 사라지지 않으니 더 괴롭죠. 그렇다고 '인간성의 회복'으로 나아가기가 편한 만능 답안은 아닙니다. '인간성의 회복'으로 가는 것은 자본주의의 논리에 역행하는 것이 분명하거든요. 자본주의의 논리에 역행한다는 것은, 내가 자본주의하에서 생존자체를 위협받을 수 있다는 뜻이 됩니다. "꿈이 사람을 행복하게 살게 한다"도 맞지만, 이에 반면 "꿈 쫓다 굶어 죽을 수도 있다"도 우리 삶에서는 맞는 명제이기 때문입니다. 이때에 강신주는 정말 미움의 대상입니다. 내가 서지 않았을 혹은 안서도 됐을 갈림길에 나를 세워버렸거든요.

강신주가 현재 우리에게 필요한 존재인지 불필요한 존재인지는 차치하고서도, 강신주는 아픕니다. 강신주가 제시하는 세상은 없는 세상이 아니라, 그동안 우리가 눈을 감으려 했던 세상이라서 더 아픕니다. 새로운 세상이면 아플때 거부해버리면 되지만, 이미 존재하는 세상이면 아플때 내가 행위를 선택해야하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인식후에 우리가 해야하는 것은, 강신주의 제거보다는 인식되버린 현상에서의 나의 스탠스를 고민하는 것이겠죠. 어쨋든 우리는 안아프고 싶고, 편하고 싶으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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