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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랑스 비시(Vichy)체재와 친일문제의 비교--펌-
게시물ID : sisa_486301짧은주소 복사하기
작성자 : andwer
추천 : 3
조회수 : 823회
댓글수 : 0개
등록시간 : 2014/02/07 06:58:53
일제시대가 종결되고 해방을 맞은 지 60년을 앞두고 친일문제가 또 다시 우리 사회를 억누르고 있다. 노무현 대통령을 비롯한 권력의 핵심세력들은 친일자에 대한 규명과 역사 바로 세우기를 달성하겠다는 의지를 보이며 시퍼렇게 칼을 갈고 있다. ‘정의의 使徒’가 휘두를 칼끝을 보며 준엄한 역사 청산의 모습을 기대하라는 것이다.

역사청산 없이는 우리가 3만 달러시대를 열 수도 없고 그렇게 되어도 지켜낼 수 없다며 경제를 핑계로 역사청산을 회피하려는 기도가 용납되어서는 안된다는 의지를 표명하기도 했다. 그러면서 ‘전가의 寶刀’처럼 휘두르는 말이 바로 프랑스의 역사청산이다. 진보좌파 세력은 언제 어디서나 프랑스의 역사청산을 절대적 가치로 들며 수없이 그것이 모델이라고 한다. 

노대통령은 광복절 기념식에서 프랑스는 4년 남짓 동안의 점령기간에도 불구하고 독일에 대항한  30만 레지스탕스를 인정하고 포상했는데 왜 우리는 50년이 넘는 식민시대에도 불과 1만 명밖에 포상하지 못하고 있는지 부끄럽다고 했다. 또한 제2차 대전 종결 후 프랑스가 실시한 비시(Vichy)정부에 대한 숙청만큼의 철저한 청산이 이루어지지 못했으니 이제나마 바로잡겠다는 것이다. 결론부터 말해 지금 정부와 여당이 주도하는 역사청산작업이 하나의 권력투쟁적인 것이고 정치적 목적을 향한 것이라면 이해할 수도 있다. 그것은 세상에 존재하는 권력이 성숙하지 못한 국민을 향해 써먹는 상투적인 수법이니 깨이지 못한 우리 국민이 자성해야 할 사안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렇지 않고 만약 진정 프랑스 역사를 모델로 삼는다면 그것은 역사의식의 빈곤을 말하는 것이고, 실패한 역사를 본 받자는 것에 다름 아니다. 프랑스 역사는 우리가 본 받아야 할 역사가 아니라 실패의 교훈으로 삼아야할 역사이기 때문이다.  

진보좌파는 프랑스에서 일어난 숙청결과가 멋있게 보였는지도 모른다. 제2차 대전이 끝나자 프랑스에서는 독일 협력자에 대한 숙청이 벌어져 6,763명이 사형선고를 받고 786명이 사형에 처해졌으며 이미 그전에 재판도 없이 1만여 명에 대해 즉결 처형이 이루어졌기 때문이다. 반면 제2차 세계대전의 주도자는 독일이었지만 전후 독일의 뉘른베르크 戰犯 재판결과는 희생국가였던 프랑스와는 엄청난 차이가 있었다. 불과 12명이 교수형에 처해지고 7명만이 종신형과 징역형을 받았다. 프랑스는 독일의 희생국이었는데도 786명이 죽고 독일은 침략전쟁을 일으킨 전범국이었음에도 불과 12명에 대한 희생으로 종결된 사실의 차이를 분명히 알아야 한다.

이런 엄청난 결과의 차이에도 불구하고 프랑스의 전후청산은 모범적이었고 독일의 전후청산은 잘못된 것이라는 평가도 없다. 또 그렇다고 해서 프랑스에 민족정기가 앙양되었고 잘못된 역사청산으로 독일에 나치즘이 창궐한다는 말도 우리는 들어보지 못했다. 오히려 뉘른베르크는 성공적인 나치잔재 청산의 상징으로 2001년 유네스코의 인권상을 수상하기도 했다. 다시 말하면 역사는 처단한다고 해서 바로 잡혀지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일제를 청산하고 친일자를 규명하겠다면 먼저 우리 조상과 선배세대들의 일제시대 때의 삶의 실상을 보아야 한다. 과거청산을 부르짖던 열린우리당 의장 신기남의 아버지 신상묵과 대통령 노무현의 장인 권오석, 그리고 방어적 입장이던 한나라당 대표인 박근혜의 아버지 박정희 등 3人 인생사는 그 모든 것의 결정판이다. 신기남의 아버지 신상묵은 일제 때에는 일본군 헌병이 되어 해방 전까지 징용을 독려했고, 해방 후에는 경찰에 입문해 좌익 빨치산세력을 진압하는 공을 세워 국가로부터 태극무공훈장을 받은 건국의 공신이다. 한편 노대통령의 장인 권오석은 일본 제국주의시대의 엘리트로 공무원시험에 합격, 面書記로 일본총독부 직원으로 출발했다. 그러나 그는 해방이 되자 남로당에 가입하여 좌익 활동을 시작했고 급기야 ‘반동조사위원회’의 부위원장이 되어 일제 때부터 함께 공무원 생활을 하던 면장 등 11명을 학살하는 만행을 저질렀다.

일제시대에 태어난 박정희 대통령의 삶도 파란만장했다. 대통령은 일본군 육사를 나와 해방 전까지 만주 관동군으로 종사하다, 해방 후 광복군에 몸담기도 했고 귀국 후에는 다시 교사생활을 하기도 했으며 남한공산주의 본당인 남로당을 기웃거리기도 했지만 육사를 통해 대한민국 군에 들어가 한국전쟁을 겪고 대통령이 되어 대한민국의 근대화를 이끌었다. 대한민국의 대통령과 여당대표, 그리고 야당대표의 장인과 아버지의 과거 경력에서 보듯 그 시대를 살았던 사람들은 가혹한 봉건시대와 잔혹한 식민시대, 그리고 세계사적 극렬한 좌우전쟁의 시대를 짧은 시대에 다 겪으며 살아야했던 보기 드문 나라의 백성이었다.
어쩌면 거의 유일한 나라다. 그 시대 다른 사람들도 마찬가지다. 

역사청산을 부르짖던 유시민의원의 伯父도 일제 때 면장을 했고 일본군 정신대대책위원장을 맡던 이미경의원의 아버지도 일제 때 헌병을 했다. 대통령과 열린우리당의 지도부의 친인척 모두가 줄줄이 친일 핵심세력이 아닌 사람이 없을 정도다. 그것은 바로 우리 민족은 20세기 전후에 펼쳐진 그 모든 격랑의 소용돌이의 중심 속에서 살아야했기 때문에 생긴 현상이다. 대한민국은 봉건제의 잔재도, 일제시대의 잔재도 그리고 공산 전체주의의 잔재도 역사 속에 함께 가지고 있는 나라인 것이다. 그렇기에 특정 시기, 특정 시점만을 현미경을 가지고 확대해서 본다면 처단하지 않을 사람이 없을 정도다. 특정 시각으로만 본다면 손가락질 받고 능지처참 당하지 않을 사람이 없을 정도다.

심지어 박정희와 대립했던 장준하도 사상계’ 잡지를 통해 5·16 혁명은 불가피한 것이다라고 상황론을 말했는데 그렇다면 이제 와서 장준하를 쿠데타 동조세력으로 진상규명하고 처단해야 하겠는가? 역사에 기준을 설정하고 잘못된 역사를 청산한다는 것은 그만큼 어렵고 복잡한 것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런데 한 술 더 떠서 늘 권력을 잡은 세력은 역사청산이란 수단을 통해 또 다른 권력투쟁을 하기 때문에 문제를 더욱 복잡하게 만들고 있다. 역사를 보면 알 수 있듯이 역사바로세우기란 항상 ‘현재 권력’을 가진 자가 ‘미래 권력’을 목표로 해서 ‘과거 권력’을 裁斷하는 것이었기 때문이다.

프랑스는 1789년 프랑스혁명 이래 청산과 처단의 길을 걸은 역사다. 정변이 발생하고 새로운 정권이 들어설 때마다 수천 명을 처단과 학살하는 것을 다반사로 하던 나라다. 그러나 그랬다고 해서 프랑스에서 ‘民族精氣’가 확립되었다는 얘기를 들어본 적도 없고, 그랬다고 해서 프랑스가 세계사에 기여한 것이 있다는 사실도 들어본 적이 없다. 프랑스에서 있었던 수많은 역사청산은 단지 구권력에 대한 신권력의 처단이었을 뿐이다. 그런데도 우리는 그런 나라를 본받자는 것이다. 프랑스 혁명(1789)후 국왕 루이 16세를 단두대에서 처형할 때 로베스피에르는 역사적 임무를 수행하고 있는 것으로 판단했을 것이다. 그랬기에 그는 광란의 대공포정치라는 시대를 낳으며 50만 명에 달하는 숫자를 체포하고 17만 명 이상의 희생자를 만들었다. 

재판도 없이 무죄냐 사형이냐 만이 결정되었다. 혁명 주도자들은 혁명의 후퇴를 막고 혁명을 공고히 하기 위해서는 오욕된 역사를 청소하는 것이 불가피하며, 역사발전을 앞당긴다는 소명을 느꼈을 것이다. 더구나 평등주의를 입론한 루  소의 사상을 떠받들던 로베스  피에르의 당시 별명은 청렴지사(Incorruptible)이었을 만큼 청렴결백하고 그만큼 처단에 단호했다. 그러나 그런 1년간의 광란적 처형이 계속되면서 로베스피에르는 이젠 자기 자신이 처형의 대상이 되어 단두대 위에 서야 한다는 것을 깨달았다.

로베스피에르는 대공포정치의 책임을 지고 1794년 7월 28일 혁명 동지들에 의해 단두대에서 처형되었다. 민중의 열렬한 호응 속에 수없는 사람의 처형을 주도했던 그가 바로 그 자리에 똑같은 열기의 민중적 호응을 받으며 단두대의 이슬로 사라졌다. 대혁명 후 10년간의 혁명의 광란과 소용돌이 끝에 질서와 안정이 요구되던 프랑스는 나폴레옹 보나파르트의 쿠데타(1799)를 선택하였다. 이탈리아와 이집트전투의 영웅이던 나폴레옹은 유럽의 다른 국가의 간섭과 침략으로부터 프랑스를 구할 구세주로 여겨졌고 강한 프랑스의 상징이었다.

혁명정신을 이어받는다는 나폴레옹이 간 길은 다시 군주적 독재와 침략적 대외팽창이었다. 그가 오스트리아전투와 이탈리아 및 독일에서의 전투를 승리로 이끌자 프랑스 민중은 열광했다. 나폴레옹이 곧 프랑스였다. 그러나 거기까지가 영광이었고 영웅이었다. 약 92만 프랑스인이 나폴레옹 영광시대를 만들기 위해 목숨을 던져야 했다. 러시아 원정에서 5만 명의 프랑스군이 목숨을 잃었고 에스파냐전투과정에서는 약 10만 명을 도륙시키는 대학살을 저지르기도 했다. 그러나 전투에서 패배가 이어지자, 이제 프랑스는 더 이상 나폴레옹을 지켜주지 않았다.

결국 엘바섬에 유배되었고, 다시 탈출하여 재기를 꿈꾸다 또 다른 패배로 세인트-헬레나섬에서 유폐되었다. 나폴레옹은 잊혀졌고 아무도 찾지 않는 가운데 손가락질을 해대는 멸시 속에 몇 년 뒤인 1821년 쓸쓸히 사망하였다. 제2차 세계대전이 발발하자 제  1차대전 때와 마찬가지로 프랑스는 독일군에 궤멸당했다. 독일 점령상태에서 독일에 대한 적극적 협조체제를 만들며 세워진 정부가 바로 페탱(Philippe Petain)이 이끄는 비시(Vichy)정부(1940-44)다. 제1차 세계대전의 영웅 페탱과 그가 이끄는 비시정부는 좌우파를 비롯한 모든 민중의 ‘열광적 지지’를 안고 출범했다. 페탱은 말 그대로 ‘민족 혁명’의 상징이었고 페탱에 대한 민중의 자발적 지지는 압도적이었고 광적인 것이었고 심지어 독일에 대항했던 레지스탕스에서도 페탱주의자들이 있었다.

도처에 페탱의 초상화가 난무했고 페탱의 캐릭터는 성냥, 달력 등 모든 일상용품에 각인되었으며 “프랑스는 페탱을 위한 것이며 프랑스는 페탱이다”는 노래가 유행하였다. 그러나 불과 4년 뒤 페탱과 비시정부는 모든 악과 실패의 근원인 것처럼 여겨졌다. 영국과 미국 연합국이 주도한 반나치즘 투쟁으로 제2차 세계대전이 종결되자 프랑스에는 대숙청의 공포와 광기가 다시 몰아쳤다. 페탱을 비롯한 비시정부를 주도했던 인물들에 대한 피의 숙청과 처단이 시작되었다.
조사대상이 2백만이나 되었고 99만 명을 연행 조사하였다. 그 결과 6,763명에게 사형선고가 내려지고, 2,702명에게 종신강제노동형이 내려지는 등 약 9만 명이 선고를 받았다.

이제 대한민국에서 프랑스 역사청산을 본 받자며 역사청산의 유령이 떠돌고 있다. 일제청산, 군사정부청산, 5·6공화국청산 등 때만 되면 시작했던 권력에 의한 역사청산이 아직도 미진하다고 여긴 모양이다. ‘역사바로세우기’라며 김영삼 정부 때 시작한 전두환·노태우 전대통령에게 내란죄로 무기징역과   17년형을 선고했지만 그것으론 민족정기가 확립되지 못했고 나라발전에도 보탬이 되지 못했으며 건국 후 최대 경제위기로 김영삼 대통령 스스로가 최악의 대통령이라는 나락으로 떨어지고 말았다.

그런데도 우리는 역사청산의 문제만 나오면 항상 프랑스 역사청산에 대한 찬양을 끌어와 일반화시키려고 한다. 마치 우리가 본받아야 할 모델인 것처럼 여기며 수많은 사람들이 잘못되고 실패한 프랑스의 역사청산을 미화하는 것이다. 프랑스인 자신들도 혐오하는 그 살육과 처단의 역사청산을 우리가 따라가자는 것이다. 프랑스 역사는 끊임없이 과거를 부정하는 혁명과 처단의 연속이었다. 왕정이 부정되었고 로베스피에르가 부정되었으며 테르미도르가 부정되었다. 나폴레옹 보나파르트가 부정되었고 과격 왕당파(ultras)에 의한 과거청산으로 백색공포가 자발적 민중에 의해 자행되었으며, 청산을 명목으로 7만 명이 체포되어 처형되고 단죄되었다. 또 다시 들어섰던 왕정복고(1815-30) 역시 들어섰다 부정되었다. 1830년의 7월, 1000여명의 희생자를 발생시키는 7월 혁명으로 나라가 흔들리고, 민중들이 가혹한 시기를 맞더니 다시 7월 왕정기(1830-48)에 들어섰다. 그것도 잠시 공산주의이론의 풍미 속에 1848년의 2월 혁명으로 다시 프랑스는 풍비박산이 나고 바리케이드와 시위, 총격전이 계속되고 왕정에서 다시 공화정(1848-51)의 시기로 넘어 갔다.

그러나 그것도 잠시 쿠데타(1851)에 의해 나폴레옹의 조카 나폴레옹 3세로 호칭했던 루이 보나파르트의 제정 시대로 돌입하고, 보나파르트는 점차 황제로 등극했다. “나폴레옹 3세 황제 만세”를 외치는 소리가 전 프랑스를 뒤덮었다. 이때 역시 새로운 체제가 들어서는 와중에 2만 7천명이 체포되고 1만 명이 알제리로 유배되고 600명 이상이 도륙되었다.

그러고도 否定에 否定을 거듭하는 역사는 중단되지 않았다. 나폴레옹 3세가 대독 전에서 참패하자 군중은 즉시 제정을 폐지 하고 다시 공화정을 선포했으며,  그 후 공산주의적 ‘파리 코뮨’(Commune)이 성립하면서 격렬한 내전상태로 들어가 결국 2만여 명이 목숨을 잃고 코뮨이 청산되었다. 이 과정에서 다시 4만이 체포되고 7천여 명이 유형에 처해졌다. 제2차 대전 전인 1936년에는 사회주의 ‘인민전선’정부가 들어섰다가 몇 년도 버티지 못하고 불과 몇 십 년 만에 독일의 세 번째 침략을 맞아 다시 나라를 내주었다.

이런 부정과 처단의 역사를 겪으며 프랑스는 독일의 ‘밥’이 되었다. 1871년 비스마르크의 독일에 패하여 영토와 배상금을 지불하더니 제1차 대전(1914)과 제2차 대전(1940)에서 모두 별다른 저항도 해 보지 못하고 독일에게 나라를 내줬으며, 영국과 미국 연합군에 의존하여 나라를 다시 찾을 수 있었다.

제1차 대전의 실패로 프랑스는 132만 명이 목숨을 잃는 희생을 당했고 제2차 대전에서는 62만 명 이상이 희생당했다.

제2차 대전에서 프랑스는 불과 한 달 만에 독일에 항복을 선언하고 말았다. 이렇게 해서 탄생된 것이 바로 비시정부였다.

프랑스 국민은 비시정부의 페텡에 대해 열광했다. 독일과의 협력 속에 강한 민족주의 국가를 요구했다. 그러나 그것도 잠시 미국의 참전으로 세계대전은 독일에게 불리하게 돌아갔고 결국 1944년 프랑스가 해방되자 이젠 대대적인 비시(Vichy)정부에 대한 숙청이 시작되었던 것이다. 그것이 바로 한국의 정부여당 및 진보좌파가 침이 마르게 칭찬하고 모델로 삼는 프랑스 비시정부에 대한 숙청이다. 약 1만 명이 즉결 처형을 받았 으며 6,763명이 사형선고를 받아 786명이 사형에 처해진 그 숙청은 역사청산이 아니라 바로 프랑스 역사에 수없이 반복된 과거에 대한 또 하나의 처단이자 도륙이었을 뿐이다.

누가 보아도 프랑스의 혁명역사는 실패의 전형이다. 청산과 처단의 역사였을 뿐이다.

청산의 역사란 보이지 않고 국왕제도 세습 상원제까지 이어받는 계승의 역사, 긍정의 역사를 걸어온 영국과 비교해 보면 더욱 뚜렷하다.

계속된 혁명적 역사청산은 명백히 잘못이었다는 것이 프랑스 혁명 200주년이었던 1989년 프랑스인 대부분의 심정이기도 했다. 당시 여론조사에서 프랑스의 대다수는 과거의 혁명이야말로 지속적인 재난이었을 뿐이라고 평가했다. 만약 프랑스의 역사청산이 모범적인 것이었다면 프랑스는 세계적 모범의 길을 가고 민족정기의 확립에서도 세계의 모범이 되었어야 마땅하다. 그러나 애석하게도 프랑스는 그렇지 못했다.

프랑스 근현대사는 오직 반복된 역사청산의 역사였다. 그렇기 때문에 인류사에 기여한 것도 찾기 힘들다.

영국이 역사를 바꾼 산업혁명을 추진하고 의회민주주의를 확립하여 전 세계에 민주주의체제를 확산시키고 시장경제체제를 만들어 인류 보편시스템으로 하는 동안 프랑스는 역사청산만 하고 있었던 것이다. 만약 프랑스가 기여한 것이 있다면 잘못된 역사청산의 전형을 제3세계에도 전수시켰다는 것이다. 그 한 예가 캄보디아다. 프랑스 식민지였던 캄보디아의 역사청산은 프랑스식 처단과 도륙의 결정판이었다.

크메르 루즈(Khmer Rouge)의 폴 포트(Pol Pot)는 권력을 잡자 100만 명의 처형에 들어갔다. 그 기간에 기아와 질병으로 죽은 숫자까지 합친다면 300만 명이 크메르 루즈정권에 의해 희생되었다. 더구나 프랑스의 비시(Vichy)정부 4년과 대한민국 36년의 식민지는 엄연히 다르다. 지금 우리가 역사청산의 대상에 올려놓은 사람은 일제시대를 자초한 사람들이 아니라 일제시대에 태어난 사람들을 대상으로 하고 있다.

일제시대에 태어나 교육받고 삶을 영위한 사람들이 일제와 연관 없기를 바란다는 것은 애초부터 무리다. 죄가 있다면 일제시대에 태어난 사람이 아니라 일제시대를 자초한 조선 중·후기 조상을 욕해야 맞을 것이다. 

돌을 던지고 진상규명을 한다면 그 죄가 열 배나 더 큰 대한제국을 지키지 못하고 일본의 식민지배의 길을 열어준 나라의 핵심세력을 심판대에 올려야 한다. 비시정부시대의 친독, 친나치즘이라고 하는 것은 선택의 문제였고 그것도 불과 4년이란 기간의 문제였다. 그러나 대한민국에 일제의 그늘이 드리우기 시작한 것은 이미 1894년 청일전쟁에서 일본이 승리한 시점부터라고 보아야 마땅하다.

통치자 대원군을 잡아가고 조선을 좌지우지하던 청나라가 일본에 패배하면서 맺어진 시모노세키 조약 제1조에 ‘조선이 자주독립국’임을 못 박았지만 그것은 누가 보아도 淸나라가 일본의 영향력을 인정하기 시작한 것이었다. 나아가 1904년 러일전쟁에서의 일본의 승리는 그 지배권을 아시아가 아닌 세계로부터 인정받는 계기였던 것이다.

달리 말하면 일제시대는 적어도 50년간 계속된 체제다. 그 기간에 우리 조선을 좌우하던 중국조차 식민지상태에 들어가고 동남아시아 전체와 태평양 일대가 식민지로 확대되는 역사적 변전이 일어났다.

게다가 당시 조선은 사회의 모든 영역에서 근대적 문물이 도입되는 새로운 변전이 전개되는 상황이었고 독립된 ‘민주공화국’에 대한 구상은 희미한 상태였고 조선왕조에 대한충성심은 더 이상 남아있지 않던 때였다.

더구나 일찍이 조선역사에 없었던 연평균 4%대의 경제성장이 계속되었고 공업성장률은 연평균 10%를 웃돌았다.

그 상황에서 그 시대를 살아온 사람도 아닌 후배세대가 그 시대에 태어나 생존하고 희생해야 했던 사람에게 왜 항일하지 않고 순응했느냐고 욕하는 것은 너무 가혹한 것이다. 심지어는 조선의 민족 운동가들조차 1931년의 만주사변과 1937년 中日전쟁에서 중국이 패하고 중국마저 일본 식민지가 되자 독립국가란 불가능하다고 느끼기 시작했다는 것이 당시의 역사 기록이다.

그런데 해방된 오늘의 시각에서 결과론으로 해방될 것에 대한 희망을 갖고 끝까지 저항하지 않았느냐고 말하는 것은 너무 가혹한 것이다. 세계 최대 대국인 미국이 對日戰에 참전하고 미군 20만 명을 희생시키며, 신기술인 원자탄까지 동원해 결국 일본을 굴복시켜 일본 식민지국가들을 해방시킬 것이라는 확신을 못 가졌느냐고 말하는 것은 가혹한 것이다.

그것은 소련이 해체되고 중국이 개혁개방으로 들어선 오늘의 시각에서 공산주의는 잘못된 것이고 공산주의체제로 가면 민족이 망하는 길인데 왜 공산주의세력과 맞서 싸우지 않았느냐고 식민시대나 해방직후 시대를 살아간 사람들을 추궁하는 것과 마찬가지다.

적어도 그 말을 할 수 있는 사람은 당시 민족독립운동을 했던 당사자들만이 할 수 있는 것이지 60년이 지난 후세대가 할 수 있는 평가나 심판은 아닌 것이다. 그렇기에 지금 이 나라에 펼쳐지는 것은 역사청산이 아니라 역사를 들먹이며 펼치는 권력투쟁이자 역사왜곡일 뿐이다.

권력으로부터 시작된 역사청산이나 역사바로세우기가 성공한 예는 없다. 역사는 권력의 몫이 될 수 없기에 권력이 주도하는 역사청산은 권력투쟁일 뿐이다. 그리고 그 피해자는 항상 권력이 없는 자와 일반 국민이었다.

오늘 대한민국에서 역사청산을 말하는 사람들은 입으로는 역사를 말하고 있지만 그것은 역사청산의 이름으로 친일파의 자식을 찾겠다는 것이다.

그것을 통해 권력의 정당성을 확보하고 권력의 재창출을 하겠다는 것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다.

다른 한편으론 역사청산의 이름으로 현존하는 위협이자 우리 민족 최대의 반민족자인 김일성, 김정일에 대한 역사적 평가와 심판을 막겠다는 것이고 보호하자는 것에 다름 아니다.

현실적으로 존재하는 악의 체제로부터 눈을 돌리게 만듦으로 해서 성공한 대한민국체제를 훼손시키고 실패한 김일성, 김정일 체제에 대해 눈감고 묵인하자는 것일 뿐이다.

분명한 것은 과거는 청산되는 것이 아니라 극복되는 것이다.

후세대가 더 훌륭하고 아름다운 역사를 만들어 잘못된 과거가 초라해 보이도록 만들 때 비로소 그 과거는 극복되는 것이다. 淸算은 또 다른 청산만을 부른다. 그만큼 역사를 청산하고 심판하는 것은 어려운 일이다.

과거를 부정하는 것이 아니라 뛰어넘어야 하기 때문이다.

우리가 진정 과거청산의 의지가 있다면 그것은 바로 우리나라를 세계사에 기여하는 나라로 만들고 다른 한편으론 북에 사는 2천 2백만의 우리 민족에게도 자유와 민주주의, 그리고 번영의 길로 가도록 만드는 것이다.

그렇지 않고 현존하는 권력의 유지, 강화하기 위한 방편으로 진행되는 剖棺斬屍이거나, 역사바로세우기를 명목으로 북에 존재하는 명백한 惡의 체제에 대해 눈감자는 것이어서는 안된다.

http://www.hanbal.com/review/review135/t-2.ht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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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냥 읽고 느끼는게 우리나라는 역사의 피해국이며, 언제나 빨갱이 색출이나 친일파 색출 이라는 명목으로 평생 정권이 나뉘어 유지되어 가는 것 같고, 바뀔 것 같지도 않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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