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90년 6월 22일 서울에서 태어남 1907년 18살때 수학원에 선발 1908년 19살때 정3품(오늘날 관리관), 1910년 21살때 종2품(오늘날 차관보)에 봉해졌다고 하니 어렸을 때부터 잘나갔던거 같음
1910년 안중근의사가 뤼순감옥에서 돌아가신 해 민영휘와 함께 작위를 받음(민영휘는 자작 이색히는 후작)
참고로 한일 강제 병합 당시 작위가 수여된 색히들은 모두 76명(후작 6명, 백작 3명, 자작 22명, 남작 45명) 수작 당시 21세로 수작자 중 나이가 가장 어림.. 졸라 대단함
21세때 작위를 받을 정도의 정신머리는 가지고 있었으니 당연히 안중근의사가 누군지는 알았을거임
1910년 작위를 받은 해 쪽바리 왕의 생일에 참여해 "텐노 반자이" 삼창하고 아리가또 하며 돌아옴
1911년 22살때 나라 팔아 먹은 돈16만 8000원(현시세 20억)을 받음
1915년 26살때 조선총독부 주도의 식민지배 정당화 사업에 참여
1920년 31살때 유관순열사가 19세의 나이로 서대문형무소에서 고문 끝에 돌아가심
1932년 43살때 쪽바리의 땅에서 이봉창, 윤봉길의사 순국
1937년 48살때 중쪽전쟁(중일전쟁)이 발발
1938년 49살때 조선도 태평양전쟁 승리를 위해 힘써야 된다는 국민정신총동원조선연맹이 결성되자 여기서 또 활발한 활동을 시작함
1941년 52살때 중쪽전쟁 4주년 기념제에 조선 대표로 참석
1942년 53살때 어떻게 하면 원숭이들 똥꼬를 잘 핥아줄까 연구하는 <조선귀족회>에서 일본 육군과 해군에 1만 원씩 헌금할 것이 정해지자 회장 자격으로 총독 미나미 지로를 방문. 태평양전쟁에 꼭 이겨줄것을 비나이나비나이다 하며 2만원(현시세 4억)을 갖다 바침
* 총독 미나미가 이임하게 되자 이색히가 《매일신보》 1942년 5월 30일자에 어떻게 하면 원숭이들 똥코를 잘 핥아줄까 연구하는 <조선귀족회> 회장 자격으로 아래와 같은 글을 남김
제목 : <내선일체에 큰 공적〉 흠흠. 미나미총독께서 사임했다니 깜짝놀랐습니다. 미나미총독은 취임 후 내선일체의 실현을 위해 아낌없이 노력하였습니다. 특히 지원병제도와 징병제도는 미나미총독이 조선 동포로 하여금 황국신민이 될 수 있는 기회를 준 큰 축복입니다. (이런 개색히가) 다행히 후임으로 오시는 분들이 모두 조선과 인연이 깊은 분들이기 때문에 마음으로 환영하는 바입니다.춉춉춉
1942년 53살때 조선귀족을 대표해 쪽바리가 영국, 미국, 중국을 격멸해 줄것을 기도하며 대동아 성업 완수에 조선의 총력을 받쳐 충성할 것을 신전에 맹세....
하지만 히로시마와 나가사키에 뉴클리어 밤이 팡팡
쪽바리 패망
해승이는 조땜
1949년 60살때 반민특위에 당연히 체포
하지만 승만이와 덕술이의 도움으로 반민특위가 해체되고
이후 이해승의 행방은 묘연해짐 (혹시 아시는 분 제보좀)
2014년 1월 8일, 얼마전이죠
법원이 일제로부터 후작 작위와 나라 팔아먹은 돈 20억(현시세)을 받은 이해승의 토지를 국가에 환수하라는 판결을 내립니다.
서울고법 행정11부, 부장판사 최규홍은 이날 이해승의 손자 이모씨가 법무부 장관을 상대로 제기한 친일재산확인결정처분 취소 청구소송에서 원심을 깨고 원고 패소 판결을 내립니다. (원심은 친일재산을 국가에 환수할 필요 없다였습니다.)
재판부는 "헌법재판소가 개정특별법 조항이 합헌이라고 결정했다"며 친일반민족행위자의 토지 국가 환수는 정당하다고 밝혔습니다
다행입니다. 그 재산이 저한테 돌아오는 건 아니지만, 아무쪼록 다행입니다. 요 재산은 국가보훈처로 가 애국지사지원기금으로 쓰입니다. (그 국가보훈처가 이번에 안보교육을 명분으로 대선에 개입했다는 의혹을 받고 있죠.) (역사 얘기를 하다보면 당연히 정치 얘기가 빠질 수 없는데, 너무 복잡해지니 여기까지만 하겠습니다.)
이해승의 손자 이모씨는 홍은동에서 호텔을 운영하고 있는 이우영씨입니다. 그 호텔의 이름은 그랜드힐튼 서울..... 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