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명한 그림이죠.
두번째 있는 사람이 밟고 있는 책의 개수가 20개쯤 되어보이는데
제가 살면서 읽은 책의 수랑 비슷하군요.
약 한달 전, 슬라보예 지젝이라는 작가가 학교에서 강연을 한다길래 뭣도 모르고 갔습니다.
동시통역이 제공되었지만 저의 짧은 이해도로 무슨 내용인지도 모르고
마지막 날에는 잠이 들고 말았습니다.
그래도 이 사람이 어떤 얘기를 하고 있는지 궁금해서 책 한권을 사기로 결심했습니다.
그래서 산 책이 <폭력이란 무엇인가> 입니다.
오늘 집에 오는 길에 드디어 다 읽었네요.
한 60% 정도 밖에 이해하지 못했지만 강하게 공감하는 부분도 있었고, 제가 부족해서인지 동의하지 못하는 이야기도 있었습니다.
사실 학기 중 통학길에 할 일이 너무 없어서 책을 빌려보기로 결심했는데요,
그 때 부터 읽었던 소위 '철학'책이라는 것은 4권이었죠.
니체 평전, 쇼펜하우어 평전, 철학자처럼 느긋하게 나이 드는 법, 그리고 폭력이란 무엇인가 입니다.
위에 니체 평전, 쇼펜하우어 평전은 (그들의 삶과 철학에 관한 책이라 평전이라 칭했습니다.) 정말 끝까지 읽었습니다.
그냥 끝까지만이죠. 무슨 내용인지 전혀 모르겠습니다.
결국 제가 읽은 책은 심심풀이로 읽기 좋은 '철학자처럼 느긋하게 나이 드는 법' 과
나름대로 진지하게 읽은 폭력이란 무엇인가 입니다.
제가 아는 철학이라고는 고등학교 때 배운 윤리교과서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닙니다.
선대의 자명한 철학가들의 저서도 이해하지 못하는 제가 철학을 논한다는 것 자체가
건방지고 무식한 행동일지 몰라도
철학게시판을 보시는 분들의 의견을 듣고 싶어서 결국 이런 글을 올리게 되었습니다.
멍청한 대학생 헌내기의 생각이라도 잠시 시간 내어서 읽어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본문은 엄청 짧을 텐데 서두만 딥따 기네요.
'철학이란 무엇인가' 라는 질문에 저의 대답은 '자신의 방향성' 입니다.
인간 관계에서의 정치, 경제라는 거시적인 개념에서부터 욕망, 양심과 같은 미시적인 개념까지
모든 인간은 자신의 철학을 기준으로 행동합니다.
물론 이 철학이라는 것은 개인에 따라 돌처럼 단단히 고정되어 있을 수도 있고
유동적이고 시시각각 변할 수 있습니다.
이처럼 유동적인 철학을 지닌 사람들은 자신의 이익만을 쫓아 ( 그 자신이 인식을 하든 아니든 ) 행동하는 사람이 대부분입니다.
물론 고정적인 방향성을 정립하기 위해 일종의 시행착오를 겪는 사람들도 포함될 수 있습니다.
제가 이 시행착오를 겪는 인간 중 한명이라고 생각합니다.
이 과정에서 드는 생각은 '과연 나는 내 방향성에 부합해서 주장을 하는가?' 입니다.
이 질문에 대한 저의 해결책은 Sympathy 혹은 역지사지 입니다.
정의를 논하거나, 어떤 주장을 얘기할 때 위의 두개 혹은 하나(저는 공감과 역지사지는 같은 맥락이라고 봅니다.)를 기준으로 삼는거죠.
인간이기에 자신의 생각이 타인의 생각보다 옳다고 느껴지는 것은 당연합니다.
하지만 나의 생각을 뛰어 넘어 '신적 시야(Birds Eye View)'로 바라보았을 때 그들은 어떤 주장을 하는가도 중요한 것이죠.
많이 자극적인 예를 들어보겠습니다. (이 예의 내용적인 면에 대한 콜로세움은 ..ㅠㅠㅠ)
얼마 전에 김용판에 대해 사법부가 무죄판결을 내렸죠.
김용판을 변호하는 내용이나, 그 죄의 진실적 죄의 유무는 잠시 제쳐두겠습니다.
확고한 존재적 사실은 '김용판 전 서울경찰청장이 무죄를 선고 받았다' 입니다.
A라는 사건이 있다고 가정합시다. 이 A라는 사건은 두개의 대립된 입장에 서 있어서 최후의 수단인 사법권의 맡기게 되었습니다.
근데 A라는 사건이 무죄를 선고 받았습니다.
그러면 한 쪽 측면에서는 사법부도 썩었다라는 주장이 있을테고
오히려 한 쪽에서는 "사법부에서도 이런 판결을 내렸는데 더 이상 어떤 할 말이 필요하겠는가?"
"자신의 주장에 반대한 판결을 내렸다고 사법부의 결정을 부정하는 것인가?" 라고 말할 수도 있습니다.
물론 A라는 사건을 두고 두 입장 각각 다르겠지요.
소위 '중립'이라는 입장 하에 어떤 의견도 말하지 않거나 방관자적 입장으로서 관여하지 않는, 혹은 권력의 뒤로 숨는 자가 해답이다
라는 말은 아닙니다.
한 입장이 너무 분명하게도 진실인 증거가 있다 치더라도
위의 두 입장을 기준으로 한번 더 생각하면
반대 쪽의 의견은 어떤 의미로 옳다고 주장하는가로 생각의 범위를 넓힐 수 있으며
자신의 주장만이 (증거나 타당한 뒷받침 없는) 진실이라고 말하는 오류를 없앨 수 있습니다.
조금 다른 영역으로 넘어가겠습니다.
몇 년 전에 '정의란 무엇인가?' 라는 책의 열풍이 불었죠.
흔히 국가적 분쟁, 혹은 강자와 약자 사이에 관계에서는 '정의'에 부합되지 않는 행동들이 많다고들 합니다.
그렇다면 여기서 말하는 정의라는 것은 무엇인가?
제 대답은 정의(define)할 수 없다 입니다.
다만 확실하게 말할 수 있는 것은
정의라는 잣대는 초국가적, 초문화적이 되어야 합니다.
인간이라는 종족을 나눈다고 가정할 때 국가를 기준으로 삼기에도, 문화적 배경을 기준으로 삼기에도 그 범위는 모호해지기 때문이죠.
그렇기 때문에 일본의 위안부 분들에 대한 태도, 독도문제, 식민지 건설과 같은 과거에 대한 반성을 (국가적 문제)
부정의라고 바라보아서는 안됩니다.
그럼 위의 사례는 옳은것인가 ?
아닙니다. 옳지 않습니다. 하지만 이건 '초월적인 정의에 부합하지 않는다'는 아니라는 것이죠.
어떻게 보면 옳다, 옳지 않다라는 잣대는 주관적입니다.
한국인으로서 분노하고 옳지 않다고 주장하는 것은 당연합니다. 하지만 이 사건을 정의의 기준으로 바라볼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 정의의 잣대로 사건을 바라보는 순간 그 책임은 모호해지기 때문입니다.
옳은 예를 드는 것인지는 모르겠습니다만 '폭력이란 무엇인가'에서 인용한
영국 저널리스트 로버트 피스크(Robert Fisk)의 중동 위기에 대한 다큐멘터리 내용을 적어보겠습니다.
팔레스타인 난민인 아랍인 이웃들이 그에게 열쇠를 보여주었다. 그들 소유였지만, 지금은 이스라엘인들에게 빼앗긴 하이파에 있는 집 열쇠였다.
그래서 그는 그 집에 살고 있는 유대인 가정을 방문해 그들은 어디서 왔느냐고 물었다.
그들은 폴란드 크라코프 주 근교의 소도시 흐샤누프라고 대답했다. 그러면서 전쟁 때 잃은 폴란드의 옛집 사진을 보여 주었다.
그래서 그는 폴란드로 가서 흐샤누프의 그 집에 사는 여인을 찾았다. 그여인은 지금 서우크라이나가 된 렘베르크 출신의 '송환민'이었다.
이 연결고리가 다음은 어디로 이어질지 추측하기란 그리 어렵지 않았다.
그녀가 고향 렘베르크에서 흐샤누프로 송환된 건 렘베르크 시가 소련에 점령당했을 때였다.
그녀의 집은 분명 전후 소련정권이 렘베르크 시를 소비에트화하기 위해 이주시킨 러시아인들의 손에 넘어갔을 것이다.
마지막 얘기를 하겠습니다.
이 얘기를 어떻게 정의해야 할지 잘 모르겠습니다만 저는 무엇이 좋은 것인가라고 간단하게 말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한 단어로 무엇이 좋은 것인가를 표현한다면 그것은 '진보'입니다.
제가 여기서 말하는 진보는 정치적 표현의 진보만은 아닙니다.
진보라는 것 중에서도 새로운 행동, 즉 변화죠.
그렇다면 기존에 있는 것을 깨트리고, 발전시키려는 행동이 좋은것인가 ?
그럴 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습니다.
여기서 가장 중요한 것은 능동적이고 변화를 가져오는 새로운 움직임이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 논리가 제가 생각하기에 가장 취약한 부분이기 때문에 이것이 내 주장이다 ! 라고 말하기에는 많이 부족하다고 느낍니다 ㅠㅠ
생각이 짧아서 옳은 예를 드는 것인지는 모르겠습니다.
히틀러의 행동은 새롭다. 이것은 좋은것인가 ?
아니다 ! 왜냐하면 이것은 진정한 새로움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공산주의의 위협을 차단하기 위한' 반응(react)이지 새로움을 향한 능동적(act) 행동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에 대한 새로운 대안과, 변화만이 옳은 것입니다.
물론 react와 act를 구분할 수 있는 명확한 기준이 무엇이냐라고 물으면
저는 또 대답할 수 없습니다. 생각이 없기 때문이죠 흑흑 ㅠㅠ
'공산주의의 위협을 차단하기 위한' 은 폭력이란 무엇인가에서 인용한 것입니다.
너무 좁은 시야로 말도 안되는 소리를 적어 놓은게 아닐까 조금은 두렵네요.
제 생각을 말하고 싶고 남들과 생각을 공유해볼 수 있는 장이 점점 없어지는 것이 안타깝습니다.
아 ! 한가지 더 부탁드릴 점이 있는데, 제가 읽어서 좋을만한 철학책들을 조금은 추천해주셨으면 합니다.
글을 쓰고 나니 어느새 한시간이나 지나있네요.
저는 뒤늦게 응사에 빠져서 응사보러 가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