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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 성질 더러운 직장 여자상사
게시물ID : humorstory_411252짧은주소 복사하기
작성자 : 뀨..
추천 : 12
조회수 : 4945회
댓글수 : 135개
등록시간 : 2014/02/12 18:09:49
 <1>


 내가 일하는 회사의 우리 팀에는 성질 더러운 여자상사가 있다. 이건 지나치게 점잖은 표현이고, 솔직한 표현을 하자면 정말 개 같은 여자 팀장이 있다. 아니, 이것도 조금 약한 것 같다. 아주 그냥 찢어 죽이고 싶은 것이 있다. 그 여자를 생각하면 치가 떨려서 잠도 안 온다. 차라리 남자라면 계급장 떼고 한번 뜨고 싶은 생각이 들 정도다. 

 부서 특성상 여직원들이 조금 많은 편이긴 한데, 다른 여사원들과는 아무런 문제도 없었다. 단지 우리 팀장하고만 항상 문제가 있다. 나이는 나보다 겨우 4살 많지만, 그녀는 남들보다 무척 빨리 팀장이 되었다. 일은 정말 잘하는 것 같기는 한데, 성질이 더러워서 높으신 분들하고만 친하다.  



 “정말 이렇게 밖에 못하세요? 일부러 그러시는 거예요? 아님 애초에 못하실 일을 하시는 건가요? 일이 적성에 안 맞으세요?”


 “수정해 오겠습니다.”


 “아니요. 수정이 필요한 게 아니에요. 전부 다시 하셔야해요. 이 걸 어떻게 수정해요?”



 내 보고서가 한 번에 통과된 일도 없었지만, 이렇게 다른 직원들이 듣는 곳에서 면박을 당하는 일은 정말 창피했다. 처음에는 정말 내 능력에 대한 의심도 해서, 창피를 무릅쓰고 다른 직원들의 보고서와 비교를 해봐도 특별히 문제될만한 건 별로 없었다. 팀장이 날 남자라서 더 갈군 다는 느낌을 지울 수가 없었다.  

 다른 여직원들에게는 수정할 부분을 지적해주고, 어떻게 바꿔야 하는지 가르쳐주는 모습도 많이 봤었다. 하지만 내게는 언제나 알아서 해오길 바라는 것 같았다. 난 팀장에게서는 아무것도 배울 수 없었고, 다른 직원들이 팀장에게 배운 걸 다시 배울 수밖에 없었다. 다른 여직원들도 날 안쓰럽게 여겨서 많이 도와주는 편이었지만, 그래도 난 또 팀장을 만나면 깨지고 박살나고 분해돼야 했다. 

 이 부서에 남자직원들이 별로 없는 이유가 저 팀장 때문이라는 이야기도 있었다. 견디지 못하고 이직을 하거나, 다른 부서로 이동을 했다는 말들이 있었다. 곧 결혼을 한다는 이야기도 있는데, 저런 성격으로 어떻게 남자는 만났는지 상상하기 힘들었다.  



 “제가 전부 다시 준비하시라고 했잖아요. 이게 뭐에요? 그냥 수정만 하셨네요?”


 “전부 다 수정해서 완전히 다르게 준비한 겁니다.”


 “이보셔요. 제가 말한 건 콘셉트자체가 잘못되었다는 거예요. 이게 무슨 목적의 보고서라고 생각해요? 제가 하는 말이 이해가 안 되세요? 제가 아무 이유 없이 그냥 골탕 먹이려고 이러는 것 같아요? 상사가 잘못된 걸 바꾸라고 얘기하면 바꿔야죠. 왜 마음대로 판단해서 결정하세요? 결정하시는 분이 아니시잖아요?”


 “처음부터 콘셉트가 잘못되었다고 말씀해 주셨다면 제가 알아듣고 바꿨을 텐데요”


 “저기요. 제가 교사에요? 여기가 학교에요? 일일이 다 가르쳐드려야 해요? 여긴 직장이잖아요. 제가 말하면 그대로 하시면 되요. 왜 그러세요? 전부 다시 하라고 전 분명히 말 했잖아요? 그리고 제가 남자 상사라도 그렇게 이유를 말 하셨을까요? 상사가 여자라서 편하세요?”



 그럴 리가 있냐? 라고 말하고 싶은 게 목구멍까지 올라왔지만, 참아야 했다. 이 회사에 취직했을 때 기뻐하던 부모님의 얼굴이 떠올랐다. 이 회사를 나가면 이 바닥에서 어디 갈만한 곳도 없다는 사실이 괴로웠다. 견딜 수 있을 때까지는 최대한 견뎌내겠다고 다짐했었다. 다른 회사를 다니는 다른 친구들의 이야기를 들어봐도 편하게 돈 벌수 있는 직장이란 존재하지 않았다. 

 그래도 오늘은 금요일이란 사실이 날 더 괴롭게 했다. 어차피 거의 매일 야근을 하고 있으니 평일에 약속을 잡지도 않는 편이지만, 그래도 또 월요일 아침까지 보고해야 할 일을 위해서 혼자 야근을 해야 한다는 건 슬픈 일이었다.   

 팀장은 거래처와 미팅이 있다며 먼저 사무실을 나갔고, 다른 직원들은 내게 친절한 조언들을 해주고 모두 퇴근했다. 언제나 금요일에는 야근을 하고 있는 내게 위로들도 잊지 않았다. 그래도 내일은 토요일이라는 사실에 힘을 내면서 보고서를 마무리하기 위해 애썼다. 

 
 밥을 사먹고 일을 하려다가, 혼자 밥 먹기도 귀찮아서 그냥 대충 빵 하나 사먹고 일을 했다. 수정이 아니라 전부 새로 써야하는 보고서는 끝이 보이질 않았고, 아무래도 토요일에도 출근해서 마무리를 해야 할 것 같았다. 막히는 건 가끔 다른 직원들에게 전화로 물어보면서 한참을 일하고 있는데, 사무실에 팀장이 돌아왔다. 



 “아니, 무슨 일을 여태 하고 계세요?”


 “예? 아. 거의 다 끝났어요. 왜 사무실로 돌아오셨어요?” 



 네가 시킨 일을 하고 있다고 대답하지는 못했다. 그녀는 내가 묻는 말에는 대답도 하지 않고 자기 자리의 컴퓨터를 켰다. 뭔가 짜증이 난다는 듯 이런저런 서류들을 살피던 그녀가 책상을 손바닥으로 ‘탕’하고 때렸다. 놀라서 그 쪽을 잠깐 돌아봤지만, 그녀는 내게 볼일 보라는 듯 손을 안에서 바깥으로 휘휘 저었다. 

 그래도 텅 빈 사무실에 둘만 있는데, 신경을 안 쓸 수가 없었다. 약간의 술을 마신 것 같은 그녀는 자기 머리카락을 몇 번 쓸어 넘기다가 일어나서 정수기로 다가가 냉수를 따라 연거푸 마셨다. 그리고 그런 그녀와 눈이 마주쳐서 급하게 다시 내 모니터로 눈을 옮겼다. 

 하지만, 늦었던 것 같다. 그녀는 내게 다가와서 내가 하고 있는 일을 지켜봤다. 팀장이 보고 있으니까 일이 잘 될 리가 없었다. 내가 그녀의 눈치를 살피니, 그녀는 내 옆에 서서 날 내려다보며 한숨을 내쉬었다. 



 “이래서 오늘 집에 가겠어요? 이 건 이렇게 해야죠. 이 게 아니라, 자 봐요”



 처음으로 팀장이 내게 설명을 해주는 순간이었다. 항상 나무라기만 하던 그녀가 내게 설명을 하고 있었다. 감동스러워서 눈물이 다 나올 것 같았다. 그녀의 설명은 정말 명쾌했다. 군대에서 친절한 선임이 설명해줬던 것 이상으로 귀에 쏙쏙 들어왔다. 약간의 술 냄새가 나긴 했지만, 그녀에게서 나는 화장품냄새가 좋게 느껴졌다. 처음으로 그녀도 화장품냄새를 맡을 수 있는 여자라는 걸 느낄 수 있었다. 

 그녀의 간단한 도움으로도 난 토요일 출근은 하지 않아도 될 것 같았다. 일이 쉽게 풀려서 보고서는 금방 완성이 되어가고 있었다. 나 혼자서 할 수 있는 부분을 남겨두고 그녀는 커피를 타서 마시고 있었다.   

 난 그런 그녀에게 감사의 눈빛을 보냈지만, 그녀는 내 눈빛을 오해한 것 같았다. 그녀는 어이가 없다는 표정으로 피식 웃더니, 커피를 한 잔 더 타서 내게 가져다줬다. 



 “나 같은 상사가 어디 있어요? 예?”


 “감사합니다.”



 그녀의 말에 콧방귀를 끼고 싶었지만, 그러기에는 내가 깡이 좀 부족한 편이었다. 진작 좀 가르쳐줄 것이지 사람을 이렇게까지 괴롭혀야 하는 건지 도리어 짜증이 났다. 그래도 내 표정을 잘 갈무리하며 고맙다는 연기를 하면서 스스로를 칭찬하고 싶었다. 나도 이제 많이 사회인이 된 것 같았다. 

 진심으로 감사하는 것 같이 연기하는 내 표정이 그녀는 마음에 들었던 것 같다. 만족스러운 미소를 지으며 내게 술이나 한 잔 하자고 했다. 잘못 들은 줄 알았다. 



 “예?”


 “술이나 한잔하자고요. 혹시 약속 있으세요?”



 이 시간에 약속이 있을 리가 있냐. 술 좋지. 네가 상사니까 술은 네가 사겠지? 그럼 더 좋지. 이제 내 직장생활이 좀 풀릴 수 있으려는 신호 같았다. 불편하던 직장 여상사와 단 둘이 술 한 잔을 거부할 직원이 어디 있겠냐. 

 
 난 저녁도 못 먹었는데, 사무실에서 가까운 오뎅탕 집으로 가야했다. 그리고 그녀는 술을 따라주면서 이런저런 쓸데없는 이야기들을 했다. 전혀 위로하는 것 같지 않는 위로를 들으며, 다 너를 위한 것이니까 잘 따라오라는 짜증나는 말들을 들으며 함께 술을 마셨다. 

 열심히 난 당신의 말을 경청하고 있다는 연기를 했다. 그녀는 내 연기가 마음에 들었는지 자기 얘기들을 꺼내기 시작했다. 그리고 조금씩 취하고 있었다. 



 “자. 한 잔 더 마셔요”


 “많이 드신 것 같은데요”


 “응? 제가 남자 상사라도 그렇게 말씀 하실 수 있어요? 어딜? 계속 마셔야죠?”


 “예. 이 건 뭐 남자 상사라도 말 할 수 있을 거 같은데요.”


 “어머. 그런가? 그래도 한 잔 더 해요. 힘들어요?”


 “아뇨. 전 괜찮은데요.”



 가까운 꼬치 집에 들러서 한 잔 더 마시기로 했다. 그녀는 취해서 점점 자기 이야기를 많이 하기 시작했다. 오늘 미팅이 망했다는 이야기와 또 그녀가 파혼했다는 이야기를 들어야 했다. 

 한창 진행 중이던 그녀의 결혼준비가 끝났다고 했다. 그녀와 결혼하기로 했었던 남자는 무슨 글을 쓰는 사람이라고 했는데, 결혼을 하면 그녀가 먹여 살려야 할 상황이었다고 한다. 그래도 뭐 상관은 없었는데, 그 남자가 바람을 피우고 있었단다. 그래서 얼마 전에 완전히 파혼을 결정했다고 한다.  



 “이 반백수 같은 쉐키가 25살짜리 핏덩어리랑 만나고 있더라고요”


 “25살이면 다 컸죠 뭐”


 “어린 여자 좋아해요?”


 “아뇨. 뭐 전 제가 아직 어리니까. 하하” 


 “좋겠어요? 어리셔서?”  


 “예? 아~ 뭐. 예? 제가 무슨 말을 했죠?”


 “마셔요”



 많이 마셔야했다. 그녀는 여러 가지 일들로 힘들어하고 있었고, 힘든 상황을 술로 잊으려는 부질없는 짓을 남들처럼 하고 있었다. 힘겨워하는 그녀의 모습에서 여자가 보였다. 아니 뭐 그 전에도 여자로 보이기는 했다. 내게 아무 말만 안하면 참 매력적인 여자였다. 단지 내게 아무 말이라도 꺼내기 시작하면 악마로 보였을 뿐이었다. 

 술 덕분인지 그녀가 점점 여자로 느껴졌다. 남자란 어쩔 수 없는 동물이다. 단지 이성적으로 행동하려고 노력을 할 뿐이지, 언제라도 이성의 끈을 놓으면 동물로 변하게 마련이다. 그리고 술은 그 이성의 끈을 붙잡고 있기 힘들게 한다. 


 우리는 둘 다 술에 취해서 서로를 데려다 주겠다고 우겼다. 그리고 결국 택시에서 내린 곳은 그녀의 집 앞이었다. 술 덕분에 놓아버린 이성의 끈을 찾기 힘들었다. 난 그녀에게 엉겨 붙었고, 그녀는 내 꿀밤을 때렸다. 



 “이제 집에 가라? 응?”


 “아 몰라요~ 나 집에 안 갈래”


 “이게 돌았나? 너 어딜 따라 들어와 응?”



 비틀거리면서 결국 그녀와 함께 그녀의 방으로 들어갔다. 그녀는 내게 끊임없이 화를 내면서도 집안에서는 나가라고 하지는 않았다. 그녀의 짜증과 불평이 별로 듣기 싫지 않았다. 술기운에 힘들어 그녀의 방 한가운데에 털 푸덕 주저앉아 있으니, 바닥을 청소한지 오래되어 지저분하다고 식탁 의자에 가서 앉으라고 잔소리를 했다. 

 끊임없이 쫑알거리는 그녀의 잔소리를 들으며 그대로 바닥에 드러누우니, 목이 말랐다. 



 “혹시 시원한 맥주 있어요?”


 “야. 안 일어나? 너 여기가 어딘 줄 알고 드러누워?”


 “아~ 왜 자꾸 반말해요. 아래 직원에게 반말하게 되어있나?”


 “내가요? 이봐요. 좀 예의를 지키시죠?”



 그녀는 확실히 많이 취해 있었다. 난 일어나서 그녀의 냉장고를 뒤져 캔 맥주를 찾아 마셨다. 술을 이쯤 마셨을 때, 시원한 캔 맥주를 마시면 갈증 해소뿐만 아니라 뇌의 찌꺼기들도 해소시켜준다. 뇌에 남아있던 마지막 이성의 찌꺼기들이 씻겨 내려가는 것 같았고, 나도 굉장히 취한 상태에 진입할 수 있었다. 

 그리고 그녀에게 키스했던 것 같다. 기억이 안 난다고 우기고 싶지만, 거짓말을 하고 싶지는 않다. 듬성듬성 끊긴 기억의 조각들로도 내가 그녀와 뭘 했는지는 충분히 알 수 있었고, 그녀의 가슴이 참 예뻤다는 것도 기억할 수 있다. 


 <2>


 커튼 사이로 스며드는 아침햇살에 눈을 뜨고, 익숙하지 않는 천장의 무늬를 조금 감상했다. 굳이 확인하지 않아도 내 옆에 돌아누워 있는 사람이 누구인지는 알 수 있었다. 

 처음 들었던 생각은 걱정보다는 정체를 알기 어려운 즐거움이 있었다. 그리고 두려움은 서서히 느껴지기 시작했었다. 제일 늦게 찾아온 기분은 숙취로 인한 복통과 두통 그리고 갈증이 밀려왔다. 

 조심스럽게 이불을 들치고 침대를 빠져나와 여기저기 뿌려진 내 옷가지들을 챙겨 입었다. 내 옷들을 챙겨 입으면서 의아했던 건, 그녀의 속옷들이 보이지 않았다는 것이다. 어제 입고 있었던 그녀의 겉옷은 분명히 의자에 걸쳐 있었는데, 내가 벗겼을 게 분명한 그녀의 속옷들은 전혀 보이지 않았다. 그녀가 다시 속옷을 챙겨 입고 잠들었는지 확인하고 싶은 마음이 잠깐 들었지만, 쓸데없는 모험을 하고 싶지는 않았다. 

 그저 최대한 조용히 그녀의 집을 빠져나왔다. 


 주말동안에 혹시라도 전화가 올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했지만, 그녀에게서 연락은 전혀 없었다. 술 많이 드셨는데 괜찮으시냐는 문자를 한번 보냈는데 답장은 없었다. 

 쿨하게 생각하기로 했다. 영화나 소설에서는 가끔 이런 일들이 생기면 쿨하게 넘어가기도 하는 것 같았으니, 나도 그래보기로 했다. 그녀도 나와의 관계에 대해서 특별하게 생각하지 않는 것으로 믿기로 했다. 그리고 실제로 그런 것 같았다. 

 월요일 아침에 만나서 인사를 했지만, 전혀 어색한 기색도 없었고 불편한 느낌도 없었다. 오히려 내가 조금 어색해하지는 않았는지 모르겠다. 그저 다른 평범한 바쁜 아침과 같이 정신없이 하루를 시작하는 기분이었고, 지난 주말에 그녀의 도움을 받아 준비했던 보고서도 평소와 같이 보고를 받았다. 



 “음. 뭐 수고하셨고요. 그런데, 이건 이렇게 하면 안 되죠. 본인의 판단이 필요한 부분에  자료만 포함시켰네요. 여기 이 부분만 조금 수정해서 다시 주세요.”


 “예?”


 “수정해 오시라고요”


 “넵”



 평소와 달랐다. 보고서에 문제가 있으면 화를 내야하는데, 그녀가 내게 특정부분을 수정하라고 친절하게 설명을 해줬다. 그리고 정말 그 부분만 수정해서 가져다주니까, 고개를 끄덕이며 됐다고 했다. 내 보고서를 받으면 페이지를 넘기며 언제나 인상을 잔뜩 찌푸리던 그녀가 고개를 끄덕여줬다. 

 믿기 어려운 그녀의 반응에 기분이 좋아졌다. 그때 그날 밤의 그 사건 때문이라고 생각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이게 말로만 듣던 직장 내의 그런 일이라고 생각하니, 어쩐지 웃기기도 했다. 하지만, 그녀는 마녀와 같은 외모의 직장 상사도 아니고, 매우 매력적인 외모의 여자라는 사실이 듣던 것과는 많이 달랐다. 

 한편으로는 어쩐지 몸을 팔아 편하게 되었다는 느낌에 자괴감도 들긴 했지만, 아무리 생각해봐도 내가 몸을 팔았다는 것보다는 덮쳤다는 사실에 가까운 것 같았다. 그날 밤의 그녀가 날 유혹한 것이라고 생각하기는 어려웠다. 


 계속 일을 하는 중에 담배 생각이 나서 옥상으로 가기 위해 엘리베이터에 올랐다. 그런데 그녀가 타려하기에 살짝 고개를 숙여 인사를 했다. 그녀는 날 보고 잠깐 멈칫했지만, 조금 어색하게 내 인사를 받고 함께 엘리베이터에 올랐다. 

 전에 만약 이런 상황이라면 짜증났을 것 같은데, 지금은 단 둘이 엘리베이터에 있으니 어쩐지 어색하다는 느낌이 들었다. 전에는 그녀가 아무 잔소리라도 꺼내면 들을 준비를 해야 했는데, 이번에는 어쩐지 아무 말도 하지 않을 것 같았고 실제로 그녀는 아무 말 없이 벽만 보고 있었다. 

 가만히 있을까 하다가 호기심에 한마디 꺼내보기로 했다. 



 “팀장님 오늘 구두 예쁘시네요.”


 “... 까불지 마”


 “예?”


 “엉기지 말라고 죽여 버릴 테니까” 



 그리고 그녀는 엘리베이터에서 내렸다. 낮은 목소리로 험한 말을 하는 그녀에게 쫄아서 아무 대꾸도 하지 못했다. 그녀가 또각거리며 멀어지는 소리를 들으면서 엘리베이터의 닫음 버튼을 누르지도 못하고 멍청히 서 있었다. 

 더 무서워지기는 했는데, 왠지 친해진 것 같은 느낌이 들어서 기분은 더 좋았다. 

 계속 일을 하면서 그녀가 시킨 일들 때문에 그녀와 마주칠 일은 많았다. 그녀는 더 이상 내 실수에 화를 내지 않았다. 한숨을 내쉬며 가르쳐줬고, 설명하는 그 목소리가 왠지 나긋하고 듣기 좋았던 것 같다. 혹시 그녀가 알아챌 수 있을지 궁금해서 일부러 실수도 해봤다. 



 “아니 이런 걸 실수하면 어떻게?”



 진심으로 걱정하는 것 같은 목소리였다. 그런 그녀가 내 표정을 살피다가 안색이 변했다. 갑자기 정색하기 시작하는 그녀의 얼굴은 정말 무서웠다. 



 “...캐새키야”



 워낙 낮은 목소리로 조용하게 말한 터라 다른 직원들은 아무도 듣지 못했겠지만, 그녀는 분명히 내게 욕을 했다. 내가 일부러 실수를 했다는 걸 알아챈 것 같았다. 그녀는 서류뭉치를 들어서 내 머리를 내려쳤다. 

 사무실의 다른 직원들이 놀라서 전부 우리를 쳐다봤다. 그녀는 아무 일 없다는 표정으로 다시 모니터를 응시했고, 난 흩어진 서류뭉치들을 챙겨서 자리로 돌아왔다. 


 부장님이 날 호출했다. 부장님은 내게 힘내라며 위로했다. 팀장에게는 자기가 잘 말할 테니까, 너무 마음에 담아두지 말라고 했다. 우리 팀장이 최근에 파혼을 겪고 많이 힘들어 그러는 거라고, 내가 이미 알고 있는 이야기를 비밀처럼 얘기해줬다. 난 나도 모르게 억울한 표정을 짓고 있을 수밖에 없었다. 내가 계속 불쌍한 연기를 하고 있으니, 부장님이 술 한 잔 사시겠다는 매력 없는 제안을 해 오셔서 급하게 괜찮다고 대답해야 했다.  

 자리로 돌아왔더니 사무실에 그녀는 없었고, 다른 여직원이 내 자리에 탄산음료를 뽑아다 줬다. 항상 내 담배를 빌려 피우던 박 대리가 담배를 내밀면서 한 대 피우러 다녀오자고 했다. 박 대리와 담배를 피우러 나가는데, 다른 팀 남자 팀장이 내게 다가와 내 어깨를 두드렸다. 

 어쩐지 내 처지가 굉장히 불쌍해진 것 같아서, 난 계속 그렇게 연기하기로 했다. 내가 계속 기운 없는 모습을 보이니, 박 대리는 내 양 어깨를 붙잡고 흔들면서 힘내라고 했다. 



 “힘내. 인마. 어디 초상났냐?”


 “여자상사 아래서 일하기 힘들지? 야. 난 싸대기도 맞은 적 있어.” 


 “어지간하면 조용히 넘어가자. 이런 일 또 있으면, 내가 나서서 해결해줄게”



 난 전혀 그럴 생각이 없었는데, 이들은 내 입을 막으려고 애쓰고 있었다. 어쨌든 위로받는 건 나쁘지 않아서 계속 그 상황을 좀 즐겼다. 

 사무실로 돌아왔더니, 그녀도 자리로 돌아와 있었다. 나와 같이 담배를 피우고 돌아온 다른 팀 남자팀장이 그녀에게 다가가 귓속말로 뭔가 이야기 했고, 그녀는 한숨을 내쉬며 어이없다는 표정을 짓고 있었다. 뭔가 괜찮다는 그녀에게 남자팀장이 계속 뭐라고 이야기 하니까, 그녀가 자리에서 일어나 내게 다가왔다. 



 “회의실로 와. 와요. 아니, 오세요. 아이~ 씨”



 그녀의 말투에 남자팀장은 그녀의 뒤에서 뒷목을 잡았다. 그리고 내게 뭔가 간절한 표정을 지어보이는 것 같은데, 의미는 알겠다. 박 대리는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면서 안타깝다는 표정으로 내게 힘내라는 표정을 지어보였다.

 모두의 걱정스러운 눈인사를 받으며 그녀를 따라 회의실로 향했다. 

 텅 빈 회의실에 들어선 그녀는, 팔짱을 끼고 날 노려보다가 문을 열어서 복도에 누가 있는지 확인하고 다시 문을 닫았다. 그리고 계속 날 노려보기에 난 그녀의 시선을 피할 수밖에 없었다. 그녀는 헛기침을 조금해서 날 환기시키고, 또 날 빤히 노려봐서 난 천장을 감상하기로 했다. 



 “나가면... 야. 들어”


 “예”


 “나가면 웃어. 최대한 행복한 표정을 만들어. 다 괜찮으니 걱정하지 말라는 연기를 해”


 “네?”


 “멍청한 척 하지 마. 죽여 버릴 테니까.”


 “예”



 그녀는 내게 다가와서 그녀의 오른손으로 내 왼손을 잡았다. 내가 놀라서 그녀를 바라보니, 그녀는 입술을 뒤틀고 눈을 크게 떠서 인상을 썼다. 분명히 겁먹으라고 지은 표정일 텐데 왠지 귀엽다. 내가 미친 것 같다.   



 “팔을 흔들어. 유치원생들처럼. 알지?”


 “...예”



 우리는 손을 맞잡고 팔을 흔들며 회의실을 나섰다. 그녀는 다른 사람들이 보라는 듯 일부러 더 힘차게 팔을 흔들었고, 나도 따라서 팔을 흔들 수밖에 없었다. 부장님은 만족한 표정을 지었고, 다른 직원들도 다시 평화가 왔다고 생각하는 것 같았다. 


 나 덕분에 우리 팀은 오늘 저녁에 회식을 하기로 했다. 난 일부러 그녀의 옆에 앉아서 친한 척 가깝게 굴었고, 다른 팀원들은 내 행동에 만족해했다. 그녀가 어금니를 꽉 물고 있다는 건 나만 알고 있는 것 같았다. 

 내가 그녀를 모셔다드리겠다는 말에 다들 그러라고 동조했다. 다들 나를 아주 괜찮은 녀석으로 보는 눈치였다. 그녀는 억지로 미소를 만들며 내게 고맙지만 괜찮다고 혼자 가려했다. 하지만 다른 팀원들이 계속 부추기는 바람에 난 결국 그녀와 함께 그녀의 집까지 왔다. 



 “야. 이제 그냥 가라”


 “여기까지 왔는데, 커피 한잔 안주세요?”


 “까불지 말고, 그. 냥. 가. 라”


 “대사 그렇게 치시면 표절인데요. 그런데, 왜 저한테 반말하세요?”


 “아~ 예 죄송합니다. 부하직원님. 그냥 가세요.”




 그냥 갈까요?





 계속.
<3>


 술도 별로 마시지 않았고, 완강하게 그냥 가라는 그녀의 말에 정말 그냥 갈 수밖에 없었다. 그녀의 눈빛이 너무 단호했다. 그리고 그날의 일에 대해선 아무 말도 꺼내지 말아달라는 감정도 담겨있어서 더 버티기 어려웠다. 

 다음날부터는 원래자리로 돌아간 기분이 들었다. 어제는 잠시 친절했던 그녀가 다시 내게 화를 내기 시작했다. 실수를 하면 어제는 설명을 하더니, 다시 평소의 모습처럼 화를 냈다. 전과 달라진 점이라면, 이제는 그녀가 내게 화를 내도 별로 기분이 나쁘질 않았다. 더 열심히 하려고 노력하게 되었고, 확실히 내 의지가 더해지니 실수도 덜하게 되었다. 

 단 둘이 있는 자리에서도 그녀는 더 이상 내게 반말을 하지 않았다. 전처럼 다시 존대를 해주는 게 이상하게 아쉬웠지만, 그렇다고 다시 반말을 해달라고 할 수는 없잖아. 


 평범한 직장생활이 계속 진행되었다. 그리고 단 한 번도 그녀에게서는 칭찬을 들어본 적 없었던 내가 칭찬도 들었다. 그럭저럭 일이 손에 맞는 느낌이 들기 시작했다. 일을 잘 해결하기 시작하면서 조금은 다른 직원들에게 인정도 받기 시작했다. 

 그러던 중에 그녀가 거래처와의 미팅에 날 데려가겠다고 했다. 너무 떨렸지만 열심히 준비해서 그녀를 따라 미팅을 나갔다. 그녀는 그냥 잘 보고 배울 수만 있어도 성공이라고 했지만, 난 내가 준비한 것들로 그녀를 도울 수 있었다. 미팅을 마치고 그녀는 날 진심으로 칭찬해줬고, 술을 한잔 사주겠다고 했다. 



 “다른 팀원들에게 전화 할까요?”


 “네? 시간도 늦었는데 그냥 우리끼리 한잔 하죠?”


 “우리끼리요~ 와?”


 “아. 그냥 팀원들에게 전화해요. 그게 낫겠네요.”


 “아뇨. 그냥 우리 둘이 마셔요. 팀장님.”



 오랜만에 그녀와 둘이서 술을 마시게 되었다. 사실 내심 기대했었다. 하지만 그녀는 극도로 조심해가며 술을 마셨고, 굉장한 자제력을 보이며 술에 취하지 않으려고 애쓰는 것 같았다. 이러려면 술은 왜 마시자고 한 건지 이해할 수 없었다. 

 어쩐지 피곤한 것 같은 모습을 보이는 그녀에게 한잔 더 마시자는 이야기는 할 수 없었다. 그녀도 술은 대충 반주삼아 마신 정도로 그치고 집으로 돌아갔다. 그날 밤의 그 일은 그저 한순간의 실수였다는 걸 확신할 수 있었다. 물론 진작 그렇게 생각하는 것이 맞는 일이긴 하지만, 흔히들 꿈꾸는 그 실수 이상의 파트너 관계를 상상하긴 했었다. 그래서 괜히 씁쓸해지는 입맛이 들어, 취직하고 자주 만나지 못했던 친구를 만나 한잔 더하고 들어갔다. 


 그녀와의 특별한 관계를 잠시나마 꿈꿨던 부질없는 생각은 머릿속에서 지워냈다. 다시 잔소리 많은 직장 상사와 하는 일은 죄다 어설픈 평사원으로 돌아갔다. 그녀도 다시 말투가 점점 독해졌고, 나도 그녀의 꾸지람에 다시 불평이 늘기 시작했다. 

 일이 즐거워서 하는 사람들이 몇이나 되겠고 자기 상사를 진심으로 존경하고 따르는 직원들이 얼마나 되겠냐만, 그녀는 정말 사람을 좀 불편하게 하는 재주가 있었다. 별로 대단찮은 일로도 사람 마음을 상하게 하는 말을 할 줄 알았다. 어쩐지 조금 더 기분 나쁘게 말하려고 애쓰는 사람 같기도 했다. 



 “머리가 별로 좋으신 편은 아니신 거 같아요?”


 “아니, 무슨 말씀을 그렇게”


 “같은 실수를 한두 번도 아니고, 이게 몇 번째에요?”



 점점 일에 치이며 짜증도 늘었고, 내가 적응하는 속도보다 내게 맡겨지는 일의 양이 늘어나는 속도가 더 빨랐다. 매일매일 지치고 힘들어 주말만 기다리고 살고 있는데, 월요일의 중요한 회의를 위한 보고서가 완전히 엎어졌다. 

 다시 준비해야 했고, 내 소중한 토요일은 회사를 위해 사용해야 했다. 다행히 이번에는 나 혼자 처리해야 할 일은 아니니까, 혼자서 토요일에 출근하는 불상사는 없다는 게 다행이라면 다행이었다. 

 
 토요일 아침에 일을 해야 한다는 사실 덕분에 다들 짜증이 나 있는 상태라서, 서로의 신경을 건들지 않으려고 애쓰느라 다들 말조심들을 하는 편이었다. 평소에는 잘 짜증을 내던 사람도 이럴 때는 주의하는 편이다. 누군가 화를 내면 나빠진 분위기를 쉽게 회복하기 힘든 상황이라는 걸 다들 잘 알고 있었다. 

 하지만, 그녀는 달랐다. 아랑곳하지 않고 짜증을 냈다. 나에게만 그런 것도 아니고, 모두에게 화를 냈다. 하지만 아무도 그녀에게 대들지는 못했다. 그녀의 말이 틀린 것은 없었고, 우리는 마치 뇌가 없는 존재들 같았다. 박 대리가 간혹 총대를 메고 중재를 해보려고 했지만, 박 대리에게 돌아온 평가는 머리는 장식품이 아니냐는 의혹이었다. 

 그래도 모든 일을 해결한 건 그녀였다. 문제를 해결하고 적절한 방향을 찾아준 건 그녀뿐이었다. 회사 내에서 짬밥과 직책은 거저 얻어지는 게 아니었다. 그녀가 아니었다면 토요일 밤의 별을 감상하며 퇴근해야 할지도 몰랐던 우리는 점심 무렵에 일을 정리할 수 있었다.



 “이제 다 된 거죠? 각자 확인들 다시 하시고, 마무리는 누가?”



 마무리는 혼자서 문서들을 출력해서 정리하고, ppt를 나눠서 저장하기만 하면 된다. 머리를 쓸 일은 없는 일이고, 그래서 오래 걸린다. 다들 토요일 점심은 집에 가서 먹고 싶은 것 같았다. 

 그래서, 특별히 만날 사람도 약속도 없는 내가 하기로 했다. 막내 여직원은 내게 무척 감사해하며 행복한 표정을 지었다. 아마도 만날 남자친구가 있는 것 같아서 부러웠다. 다른 팀원들도 내게 고마워하며 잘 부탁한다는 인사들을 했다. 하지만, 그녀는 내가 마무리를 한다는 사실이 못미덥다는 표정이었다. 



 “다 끝내면, 저한테 팩스로 보내요”


 “집에 팩스도 있어요?”



 그녀는 아무 말 없이 무표정한 얼굴로 손가락을 들어 연락망을 가리켰다. 연락망의 그녀 이름 옆에는 전화번호와 팩스번호도 적혀 있었다. 전에 들렀던 그녀의 방에서 팩스로 보이는 물건은 본 기억이 없었다는 표정을 그녀에게 보여주고 싶었지만, 이미 그녀는 사무실을 빠져나가고 있었다. 

 다른 팀원들은 다시 한 번 내게 잘 부탁한다는 인사들을 건네며 사무실을 나가고, 토요일 오후의 고즈넉한 사무실에 홀로 남았다. 

 텅 빈 사무실에 홀로 남겨지면, 사무실이 굉장히 크다는 느낌을 받는다. 어서 일을 하고 남은 주말을 잘 보낼 궁리를 해야 할 테지만, 잠시 멍하니 오만가지 생각들에 잠겨 있게 된다. 그렇게 자꾸 떠오르는 이런저런 생각들을 하나씩 지워내고 일을 마무리하기로 했다. 그냥 출력만 하는 일도 꽤나 오래 걸릴 것 같다. 


 단순한 일이라는 건, 시간만이 모든 걸 지배한다는 걸 의미한다. 특별한 노력이나 능력과 상관없이 그저 시간이 지나야 일이 끝난다. 한참의 시간이 흘러 일을 마무리하고, 그녀에게 팩스를 보내며 전화를 했다.     

 팩스가 들어오고 있지 않다고 했다. 난 분명히 보냈는데 그녀는 받지 못하고 있단다. 


 계속 그렇게 팩스를 갖고 실랑이를 하다가, 결국 내가 한 부 더 출력해서 갖고 가기로 했다. 그녀는 내게 근처에 오면 받으러 나갈 테니까, 전화하라고 했다. 그리고 난 전화하지 않고 그냥 그녀의 집으로 향했다. 



 “전화 하라니까”


 “집도 아는데 뭐 하러 그래요?”


 “어딜 들어와?”


 “에이~ 여기까지 왔는데, 차 한 잔 안주세요? 어? 다시 반말하시네?”



 그녀는 내 질문에는 신경을 끄고, 서류만 넘기며 살폈다. 그녀가 서류를 보는 동안 난 알아서 물주전자를 찾아 물을 끓였다. 물이 다 끓고 내가 커피를 찾느라 그녀의 찬장을 뒤지는 동안에도 그녀는 서류만 살폈다. 형광펜을 가져와 몇 곳에 체크를 하며 계속 서류를 살폈다. 



 “커피 드실래요?”


 “아니요~”



 뭐야 왜 다시 또 존대야. 잠시 그렇게 서류를 살피는 그녀의 모습을 감상했다. 회사에서는 항상 정장차림으로 일하는 모습에 익숙했는데, 추리닝바지에 회색 후드티를 걸치고 서류를 살피는 모습은 뭔가 많이 달라보였다. 짧은 단발머리에 나비 핀을 꽂은 모습도 처음 본 것 같다. 작고 귀여운 입술 사이로 형광펜을 물고 까딱거리는 모습도 처음 봤다. 

 귀엽다. 귀엽다? 별로 그녀와 어울리지 않는 단어라서 바꾸고 싶은데, 특별히 떠오르는 단어가 없다. 잠깐 그녀의 방안을 살피다 구석에 팩스가 있는 걸 발견했다. 그리고 그 옆에 서류뭉치가 쌓여 있었다. 저건 어떤 서류일까? 생각하며 다시 그녀를 살피려다, 그녀와 눈이 마주쳤다. 



 “수고했어?”


 “아. 예”


 “안 가?”


 “예? 해도 졌는데, 술이나 한 잔 하죠? 술 없어요?”


 “없어”


 “술 사올게요”



 대답이 없어서 허락이라고 생각하고 술을 사러 나갔다. 그럭저럭 배를 채울만한 안줏거리들도 좀 사고, 술을 많이 샀다. 아주 많이. 

 술이랑 안줏거리들을 사서 돌아왔는데, 그녀가 그녀의 집 앞에서 어떤 남자와 말다툼을 하고 있었다. 무슨 일인가 싶어서 빨리 다가갔더니, 그녀가 날 보고 굉장히 곤란한 표정을 지었다. 난 어리둥절한 얼굴로 그녀와 그 남자를 살피는데, 그 남자가 날 발견하고 어이없다는 표정으로 웃었다. 



 “야. 뭐야? 너도 맞바람 피우는 거냐?”


 “우리 회사 직원이야”


 “어~ 그래? 부하직원 꼬신 거야? 그 사이를 못 참고?”


 “왜 이래. 우리 끝났잖아? 그만가지?”


 “이런 걸레 같은 년이 이러려고 내 뒤를 캤냐? 지도 똑같으면서 누굴 쓰레기로 만들어?”   



 바람같이 공간을 가른 내 팔이 시원하게 회전했다. 덕분에 크게 휘둘러진 내 주먹이 어설프게 녀석의 얼굴에 꽂힐 뻔 했지만, 녀석은 반사 신경이 꽤나 좋은 녀석이었다. 내 주먹은 크게 빗나갔고 녀석의 반격이 시작되었다. 

 이 녀석 글을 쓴다던 녀석 아니었나? 그녀와 결혼하려고 했다가 바람을 피워서 파혼했다는 그 녀석일 텐데, 주먹이 상당히 매섭다. 내가 상상한 글 쓰는 녀석들은 좀 가녀리고 학구적인 이미지였는데, 이 녀석은 전형적인 파이터 체질이었다. 

 내가 많이 맞았다. 나도 몇 대 때리기는 했지만, 정타는 거의 없었고 난 매우 정확하게 아픈 부위들을 골라 맞았다. 지나던 이웃과 그녀의 도움이 없었으면 꽤 위험할 뻔 했다. 녀석과의 몸으로 나눈 대화는 결국 순찰하던 경찰이 와서야 끝났고, 우리는 파출소를 방문해야 했다. 


 난 얼굴이 좀 붓고 온몸이 쑤시긴 하지만, 어디 부러지거나 한 곳은 없었다. 그리고 녀석은 방금 산책을 나온 사람처럼 깨끗했다. 하지만 쌍방폭행이란다. 서로 다친 곳이 없으면 적당히 합의하라고 했다. 그녀의 설명을 들은 경찰은 또 이런 일이 있으면 그냥 신고를 하시라고 했다. 녀석은 경찰 앞에서는 생각보다 고분고분한 편이었고, 난 진단서를 떼 봐야겠다고 했지만 그녀가 말려서 그냥 그 자리에서 합의하기로 약속했다. 

 그래도 그 녀석은 혼자가고, 난 그녀와 함께 그녀의 집으로 향하니까 기분은 좋았다. 내가 많이 맞긴 했지만, 어쩐지 이긴 기분이 들었다. 

 그런 기분은 잠깐이었고, 그녀의 집에 오자마자 얼굴에 얼음찜질을 해야 했다. 



 “싸움도 못하면서 왜 주먹을 휘둘러?”


 “그럼 거기서 그걸 참나?”


 “네가 뭔데. 참고 말고 하냐?”


 “에이~ 몰라. 술이나 마셔”


 “이 얼굴로 술을 마셔? 그리고 너 말이 짧다?”


 “팀장님도 나한테 반말하잖아”


 “뭐?”



 난 계속 반말을 하기로 했고, 그녀도 별로 나무라지 않았다. 싸움도 좀 한 상태에서 술을 마시니까, 취하지는 않는데 어쩐지 쉽게 흥분하는 것 같은 기분이었다. 술을 조금 마시다말고 그녀를 덮쳤다. 



 “하지 마! 미친놈아”


 “우리 처음도 아닌데 뭘 그래?”



 시원하게 내 턱이 돌아갔다. 그녀가 휘두른 팔에 뺨을 아주 세게 맞았다. 오늘 좀 많이 맞는 날인 것 같다. 안 그래도 조금 욱신거리던 얼굴이 굉장히 아팠다. 진짜 너무 아파서 눈물도 조금 났다. 내가 너무 아파서 얼굴을 부여잡고 있으니, 그녀가 다시 얼음을 가져다줬다. 

 얼굴을 조금 식히고, 재도전했다. 


 잠깐 눈을 뜨고 시계를 보니 아직 이른 시간이어서 다시 눈을 붙였다. 그렇게 조금 더 자다가 빗소리에 시끄러워서 다시 깼다. 내 옆에는 그녀가 돌아누워 있었다. 그때 그날의 모습과 같아서 괜히 웃음이 나왔다. 밖에는 비가내리고 내 옆에는 벌거벗은 미녀가 누워 있으니, 좋은 아침이었다. 

 팬티를 찾아서 주워 입고 세수를 하려고 화장실에 들렀다. 어제보다 얼굴이 조금 더 부운 것 같아서 꼴아 아주 가관이었다. 차가운 물로 얼굴을 좀 식히고 돌아와 옷을 찾아 입으려는데, 오늘은 방바닥에 그녀의 속옷들이 보인다. 내 옷을 찾아 입는 건 그만두고 그냥 다시 침대에 걸터앉았다. 그리고 그녀의 하얀 등과 흐트러진 머리카락을 감상했다.  

 그렇게 돌아누워 있는 그녀가 갑자기 말을 해서 깜짝 놀랐다. 



 “안 가냐?”   


 “깨어있었어?”


 “그럼 자고 있겠냐?”


 “그때도 깨어있었어?”



 대답이 없는 그녀의 뒤로 살며시 누워서 그녀의 가슴을 만지려고 했다. 그러자 그녀가 갑자기 휘두른 팔꿈치에 또 얼굴을 맞았다. 죽을 것 같이 아프다. 너무 아파서 숨도 쉬기 힘들었다. 내가 고통스러운 신음을 흘리니까, 돌아누워 있던 그녀가 일어나서 나를 살폈다. 



 “괜찮아?”


 “가슴 보인다.”   



 급하게 이불을 끌어올리는 그녀를 다시 덮쳤다. 이미 서로 다 보여준 사이에 뭘 그리 부끄러워하시는 건지. 그녀는 다시 팔꿈치를 휘두르지는 않았다.  



 “너 어쩌려고 이래”


 “그러는 넌?”


 “니가 덤볐잖아”



 
 한동안 회사에선 우리의 관계를 숨겼다. 다음해에 그녀가 부서이동을 하고나서야 공개연애를 잠깐 즐기고 곧 결혼을 했다. 결혼생활에 별다른 문제는 없었는데, 그녀가 화를 내면 내가 흥분을 한다는 게 약간의 문제라면 문제였다. 

 그녀가 성질을 자주 내서 좋았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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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실제로 L모 기업에서 근무하는 부부의 이야기입니다. 별로 재미는 없는데, 이 놈이 해준 이야기가 좀 야한 게 좋아서 그냥 썼어요. 이 전과 이 후. 그리고 중간 중간 다른 에피소드들이 많지만, 그걸 다 쓰면 장편이 되요. 전 이제 당분간 장편은 접기로 했기 때문에 그걸 쓰고 싶지는 않습니다. 물론 대사나 특정 모습들은 죄다 제 마음대로 편집했습니다.

 성원에 미치지 못하는 시시한 이야기라서 죄송합니다. 항상 글을 잘 쓰려고 애썼는데, 이번에는 그냥 생각나는 대로 달렸습니다. 이렇게 쓰는 것도 저는 재미있네요. 읽는 분들은 어땠을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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