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 바뀌어 서른에 일곱이 된 남징어입니다.
아래 글에는 스포일러를 담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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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간이 어렵게 나서 벼르던 로보캅을 보고 왔습니다.
그런데... 보고나서, 함께 보았던 사람들과 영화에 대한 평을 나누는데
제 평이 다른 사람들과 좀 다르네요.
오유의 여러분들은 어떨까 싶어 제 평을 나눕니다.
우선, 한 마디로 요약하자면 제목은 '로보캅'이지만 내용은 '안티 로보캅'
인 것 같습니다.
영화 전반에 흐르는 음악도 액션성을 강조하기보다는 '고뇌'나 '슬픔', 또는
'어두움'을 느끼게 했고, 중간 중간에 등장하는 인물들의 대화 역시 그러했다고
봅니다.
미국의 우익화를 풍자하는 듯한 아나운서 사무엘 잭슨의 우스꽝스럽고 맹목적인
마지막 보도 장면을 생각해보세요. 방송용일 텐데 욕이 막 나오죠?
로보캅 이념의 근간 역시 부정적인 곳에 두고 있습니다. 단순히 "불의에 대한
복수"에서 그치지 않지요. "살인"이라는 것에 대한 고뇌도 없고, 그 복수의 모습이
비슷한 류의 다른 영화에서와 같은 "통쾌함"도 없었습니다. 복수의 정당성 또는
정의를 시사하는 장면이나 대사 역시 드물었지요. 반복해서 나왔던 장면은 고작
로보캅이 기업인에 의해 이용당하는 것 뿐이었습니다. 물론, 그것을 통해 로보캅의
복수를 정당화하려고 했을 수도 있지만, 그 장면 역시 결코 복수의 카타르시스를
주지 못했고, 이렇다할 만한 여운도 주지 못했지요. 오히려 영화 중 로보캅의 아내로
출연하는 에비 코니쉬의 대사를 상기시켜 주었습니다. "그는 아들 앞에서 총을 쐈어요!"
마지막에 가족이 다시 연구소에서 만나는 장면도 제대로 보여주지 않았지요. 오히려
재회를 상징하는 그 장면은 로보캅이 분해되어 있던 처참한 모습을 보여주는 것으로
시작했고, 그 당시 음악 또한 불안하고 음울하기 그지 없었습니다.
어떤 기사에서 감독이 직접 전한 로보캅의 재미에 대해 보도한 것을 보았는데, 꽤
의외였습니다. "50여 종의 하이테크 무기가 나오고" "볼 재미가 풍성한"
글쎄요... 다시 살려낸 과거의 습작같은 커다란 로봇 외에, 모의 전투에서 로보캅보다
우수한 성적을 거두는 사이보그 말고는 기억나는 게 없네요.
개념상 얼핏 동의하기 어려운 무한 탄창의 전기총 따위야 거론할 여지가 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액션성... 히어로물이라고 보기에는 그 액션성 역시 보잘 것 없었습니다.
오토바이에 탄 채로 유리창을 부수고 뛰어드는 장면과, 거대 로봇 위에 매달려 총을 갈기는
장면 외에 또 뭐가 있나요? 겅중겅중 뛰면서 이리 저리 총 쏘는 것?
예전에 나왔던 로보캅을 찾아보았습니다... CG처리나 이런 것이 영 미흡하긴 해도
영화적인 상상력은 훨씬 더 풍부한 것 같았습니다. 탄환을 반사시켜서 사각에 숨은
적을 공략하는 장면이나 사격시에 총구 앞에서 십자 형태로 퍼지는 화려한 불꽃이
볼만 했지요.
주인공의 고뇌 부분도 좀 이상했습니다. 어중간했달까요? 자신이 하루 아침에 반 기계가
되어버린 현실에 몸부림치는 듯하는가 싶었는데 어느새 철저히 기계가 되었지요.
"기계"라며 놀리는 말에도 미소로 넘깁니다. 반 기계가 된 가장을 맞이하는 가족의 태도도
선뜻 공감이 가지 않았습니다. 차라리 그 고뇌를 부각시키려면 더 제대로 하든가, 아니면
가볍게 때우고 액션을 목표로 하는 히어로물답게 가든가 하지, 어물쩡 어물쩡 간만 보는
애매한 태도에 오히려 영화에 빠져들지 못했습니다.
보통의 히어로물을 생각하고 보면 안 된다는 생각이 듭니다.
그런 류 영화들의 일반적인 플롯을 오히려 부정하는 듯하기 때문입니다.
사실 전 그런 것을 기대하고 보았기에, 영화가 끝난 후에 느낌이 좀 이상했습니다.
가벼운 마음으로 통쾌한 액션을 즐기고, 권선징악의 에피소드를 보기를 기대했는데
제게 돌아온 것은 오히려 좀 무거운 주제감뿐이었습니다.
이 영화는 왠지 <로보캅>이라는 히어로를 해부하고 파헤쳐서 그 앙상한 내부를
눈 앞에 들이밀어 보여주는데 주력한 것 같았습니다.
영화보고 와서 심심한 차에 남긴 제 평은 이러한데, 님들의 평은 어떠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