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경질을 멈추면 비로소 보이는 것들>
[멈추면 비로소 보이는 것들]이라는 책을 며느리가 김 노인에게 드렸다. 요즘 유행하는 책이래요 아버님, 마음을 편안히 해준대요. 노인은 받아들고 표지의 제목을 읽었다. 뒷면을 보고, 한 번 펴고, 덮었다. 집어던졌다.
“내가 늙어서 맨날 신경질이나 낸다고 비꼬는 게지? 버러지 같은 년!”
소리를 듣고 달려온 노인의 아들이 노인을 막아서서 달랬다. 왜그러세요, 항상 아버지 위해서 아내가 노력하는 거 아시면서, 책도 제가 주라고 한 거예요, 노여움 푸세요 아버지.
혼나던 며느리는 오늘도 무표정했다. 달래는 아들도 능숙하게 달랬다. 신경질을 내는 노인도 신경질이 나서 신경질을 내는 것이 아니었다. “저년 혼나는데 얼굴 좀 보라구! 버러지 같은 년.” 생활일 뿐이다.
며느리는 부엌에서 아침 준비를 하느라 달그락거리고, 아들은 점심에 있을 노인의 칠순 잔치 준비로 전화를 걸기 바쁘고, 노인은 혼자 방에 앉아있었다. 노인은 멈춰있다. [멈추면 비로소 보이는 것들]이 방바닥에 입을 벌리고 엎어져 있다. 창문에선 햇살이 비춰든다.
나는 왜 이렇게 신경질을 내지?
노인은 신경질이란 것에 신경질이 나버렸다. 더 이상 그따위 것은 입 밖으로 꺼내기가 싫어졌다.
며느리가 진지 드시라고 노인을 부른다. 방에서 가만히 앉았던 노인이 대답한다.
“기다려봐.” 식탁에서 수저를 놓아주던 아들이 젓가락을 국그릇에 빠뜨린다.
“아버지가, 아버지가 짜증을 안 내셨어!” 확장된 동공으로 부엌을 돌아본다. 아내는 햇살을 받으며 울고 있다. 모시고 산 지 17 년만의 일이었다.
한복점까지 가기는 싫다는 김 노인의 대답에 며느리는 당장 달려가 한복 17 벌을 빌려왔다. 노인이 입을 한복만 정하면 칠순잔치 준비는 끝이었다. 신난 며느리가 한복들을 방바닥에 늘어놓고 엄선해왔다며 골라보라고 노인에게 묻는다. 노인은 잠깐 생각하다가 [멈추면 비로소 보이는 것들] 위에 놓인 흰 색 한복을 고른다. 며느리가 고개를 저으며 피부톤이 맞지 않다고 지적한다.
노인이 며느리를 돌아본다. 며느리는 진지하게 고민하고 있다. 참 지랄맞다는 말이 입 안 가득 찼지만 겨우 삼켰다. 며느리가 갑자기 미쳐버린 걸까 싶기도 했지만 상황이 재밌기도 하여 노인은 봐주기로 한다. “네가 골라줘보거라.” 며느리의 눈이 빛난다.
한복을 몇십 번째 갈아입는 것인지 노인은 기억하지 못한다. 다만 지금 입어보는 것은 흰색 한복이다. 신난 며느리는 만족하지 못한다. 아들은 방 문턱에서 어물쩡거리며 들어오지도, 나가지도 않고 있다. 평소의 역할이 사라져버려, 마치 무슨 사건이라도 기다리는 듯이, 동시에 무슨 사건이라도 일어날까 두려운 듯이. 노인은 이제 저고리를 벗을 때마다 스치는 손목에서 피가 날 것만 같다. 계속해서 한복을 가리키는 며느리의 손톱 밑의 때마저도 짜증이 나서 빼버리고 싶다. 내부에서 끓어오르는 것이 목 끝까지 차올랐다. 이제 뱉으면 된다. 며느리가 한복의 조합을 섞기 시작한다.
“여보,” 아들이 한발짝 안으로 들어오며 말했다. “지금 게 제일 예쁜 것 같은데? 이제 친척들 잘 오고 있나 확인해야지.”
며느리가 잠에서 깬 듯이 돌아본다. 노인은 아들 하난 잘 키웠다고 생각했다.
“무슨 짓이야.” 며느리가 멍하니 말했다. “아버님 좋은 옷 입혀드리겠다는데 당신은 왜 끼어들어.”
“넌 지금 그게 무슨 소리야.”
“왜 항상 찌질이 같이 끼어들지 못해 안달이야, 왜!”
아들이 방 안으로 더 들어온다. 뱉는다. “어디 아파?”
아내는 방을 나가버린다. 적막하다.
화가 나서인지 창피해서인지 노인은 알 길이 없다. 아들의 얼굴은 뒷목까지 벌겋다. 너는 왜 아무 말도 못하느냐 노인이 묻는다. 아들은 멍하니 바닥의 책을 보다가 말한다. “미친 망아지 같아요. 고삐도 없는.” 그러곤 곧 노인을 돌아본다. “아버진 왜 신경질을 내지 않으시죠?”
아들도 방을 나갔다. 신경질을 내야 하는데 신경질을 내지 않으니 노인은 도리어 목이 메었다. 왜 참는지 저도 알 길이 없었다. 그러나 참고 싶은 마음은 변하질 않았다. 노인은 흰 색 한복을 입고 있었고, 잔치 준비는 끝났다.
손주들의 편지 낭독 시간이 왔다. 드디어 축사가 끝났다. 손주 둘이 앞으로 나오고 평화로운 노래가 깔리자 다들 웃는데 아들과 며느리는 억지로 웃고 있었다. 잔치상 뒤에 앉은 노인은 신경질이 나서 견딜 수가 없었다. 술잔을 들고 창 밖을 본다. 칠순 잔치만 무사히 끝나기를 빈다. 창문 턱에 친척들이 각각 입장하며 건넨 선물들이 쌓여있다. 도자기와, 도자기와, 화분과, 도자기들, 그리고 [멈추면 비로소 보이는 것들] 여섯 권. 다들 동시에 같은 생각을 하리라곤 생각지 못한 듯 했다.
“사랑하는 우리 할아버지께.” 손주 하나가 편지를 읽는다. “할아버지는 맨날 화를 냅니다. 그래도 저는 할아버지가 착하시다는 걸 압니다. 엄마도 알고 아빠도 알고 삼촌도 압니다.” 노인은 잔치상이 처음으로 푸짐해보이기 시작했다. “할아버지가 계속 오래오래 샤서서, 사서셔, 아니, 사셔서 우리” 다른 손주가 웃는다. “바보.”
“웃지 마.” 손주가 툭 친다. “왜 때리는데!” 다른 손주가 퍽 퍽 때린다. 손주가 다른 손주를 돌아본다.
“엄마!” 손주가 잔치장을 달리고 뒤로 다른 손주가 울면서 쫓고 그 뒤로 부모가 쫓는다. “너네 이게 무슨 짓이야!” “얘가 먼저 때렸단 말야!” “자, 2번 손주, 1번 손주를 바짝 추격합니다. 그 순간 1번 손주 앞에 나타나는 테이블!” 사회자가 마이크로 중계하고 친척들은 웃음을 터뜨린다. 아들과 며느리는 밥을 퍼먹는다. “너 이 새끼들, 우리 가족 망신 다 시키려고!” 손을 뻗으며 부모가 소리지른다. 손주가 노인에게 뛰어든다. “살려주세요 할아버지!” 작은 몸이 노인의 팔을 덮치고, 손에 쥔 모주가 흰 한복에 엎질러진다.
손주는 머리를 팔로 감싸고 잔뜩 졸아든다. “신경질 내지 마세요” 겁먹은 손주가 혼자 울기 시작한다. 친척들 모두가 웃음을 멈추고 노인을 본다.
노인은 젖은 저고리를 벗어 던졌다. 상에 높게 쌓인 다과는 무너져 내렸고, 김 노인은 신경질이 나서 눈물이 날 지경이었다.
“에이, 버러지 새끼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