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부는 제주 강정 해군기지 건설에 쓰일 철근이 세월호에 실려 있었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지만 숨기고 있다가 마지못해 공개했다. 청해진해운이 기록해놓은 286톤보다 훨씬 많이 실렸다는 사실도 검·경 수사단계에서 이미 드러났지만, '철근의 진실'은 영영 묻힐 뻔 했다.
'철근의 진실'은 세월호 참사에 대한 검·경의 합동 수사가 얼마나 부실했는지, 또 세월호 참사의 진실을 밝혀야할 정부가 도리어 관련 사실을 은폐하기에 얼마나 급급했는지 보여주는 단적인 예다.
▲ 2014년 4월 16일 오전 제주도 수학여행길에 오른 안산 단원고 학생을 비롯한 459명을 태운 여객선 '세월호'가 전남 진도군 조도면 병풍도 북쪽 20km 해상에서 침몰하는 사고가 발생했다.
ⓒ 해양경찰청 제공
28일 국회 농림축산식품해양수산위원회 업무보고에선 '철근의 진실'에 대한 질의가 이어졌다. 황주홍 국민의당 의원은 "정부 발표에선 철근이 286톤 실렸다고 했는데, 물류회사들이 해수부에 피해 배.보상신청을 해서 보니, 철근이 140톤이 더 실려 있었다고 나왔다"고 지적했다.
김영석 해양수산부장관은 "배.보상과정에서 (수사결과 발표된 철근 적재량과 실제 철근 적재량에) 좀 오차가 있는 것은 사실"이라면서도 "과적에 의한 복원력 상실이 이미 (참사 원인으로) 확실시 됐고, (철근) 무게가 더 늘어난다고 해서 그것(과적이 원인이란 점)을 부인하거나 사고의 원인이 변화하는 게 아니다"라고 답했다.
해수부, '제주 해군기지 공급용 철근' 알면서 특조위 자료 요청 무시
▲ 세월호 특조위 활동 기간 질문에 답변하는 김영석 장관 김영석 해양수산부 장관이 28일 오전 서울 여의도 국회에서 열린 농림축산식품해양수산위원회 전체회의에 참석해 세월호 특조위 활동 기간에 대한 의원들의 질의에 답변하고 있다.
ⓒ 유성호
황 의원은 전날 보도자료를 통해 세월호에 철근이 286톤이 실려 있었다는 검·경합수부 수사결과와는 달리, 철근이 총 426톤(화물 410톤 + 차량적재 16톤) 실려 있었고, 이 중 278톤이 제주 해군기지 건설공사에 공급될 예정이었다고 밝혔다.
근거는 해양수산부가 제출한 자료로, 세월호 참사로 화물을 손해 본 물류회사들이 해수부에 배.보상신청을 한 내용을 집계해 작성됐다. 세월호에 제주 해군기지 건설용 철근이 실렸고, 이 중엔 제주해군기지 건설용 자재가 포함돼 있다는 의혹이 해수부에 의해 사실로 확인된 것이다.
김 장관은 이 같은 사실을 인정하면서도 참사의 원인이 과적이란 점에 변화가 생기는 게 아니라고 답변했지만, 이는 강변일 뿐이다. 이번에 드러난 '철근의 진실'은 세월호 참사 진상규명과 관련해 정부엔 더 이상 기대할 게 없다는 걸 보여준다.
첫째, 정부는 세월호특별법에 근거한 4·16 세월호 참사 특별조사위원회의 활동에 협조하지 않고 무시로 일관해왔다는 것이다.
특조위는 해수부에 화물 배.보상 신청인들이 제출한 각 신청서류와 배.보상 피해명세서, 화물운송장, 선적의뢰서 등의 제출을 요구했다. 하지만 해수부가 제출하지 않아 특조위는 세월호에 화물을 맡긴 화주들을 찾아다니며 조사했고, 세월호에 철근이 410톤 실려 있었다는 사실을 알아냈다. 해수부의 자료제공으로 해결될 일이었다는 점을 생각하면 해수부의 처사는 단순히 자료 미제공에 그치는 게 아니라 특조위 활동 방해라 할 만하다.
세월호 관계자들, 검·경 수사에서 철근 양 확인 방법까지 알려줘
▲ 정부통합로고에 붙은 노란리본 세월호유가족들이 '세월호특조위 강제종료 저지, 세월호 온전한 인양, 진상규명 특별법 개정 촉구' 등을 요구하며 25일 오후부터 정부서울청사앞에서 노숙철야농성을 벌이는 가운데, 27일 오전 정부서울청사 출입문에 붙은 정부통합로고에 노란리본 스티커가 붙어 있다.
ⓒ 권우성
둘째, 참사 직후 이뤄진 검·경합동수사에서도 '철근의 진실'이 드러날 여지는 충분했다. 세월호 관계자들은 선사측이 보유한 적하운임목록 등에 기록된 철근의 양이 실제 선적된 양과 다르다는 점을 조사 과정에서 밝혔다.
[ 2014년 4월 22일 해양경찰 조사에서 이준석 세월호 선장 ] 문: 실제 선적량이 신고한 선적량과 다른 이유는 무엇인가요 답: 화물운송료를 철근 같은 것은 무게로 재고, 가벼운 것은 부피로 측정하여 받기 때문에 돈 받은 양으로 신고하기 때문에 실제량과 다를 수 있습니다.
[ 2014년 4월 16일 해양경찰 조사에서 청해진해운 물류팀 차장 김○○ ] 문: 2014년 4월 15일 21시에 출항한 세월호의 화물 선적 내역과 화물 선적 방법에 대하여 말하세요. 답: 화물선적 내역을 작성하여 왔는데 이것을 보시면 잡화에는 명성물류 선박대리점에서 철근 약 375톤 이상과 사료 약 65톤을 선적하였고…(이하 생략).
[ 2014년 4월 23일 해양경찰 조사에서 청해진해운 물류팀 차장 김○○ ] 문: 청해진해운의 담당자 중 중량 등을 확인할 수 있는 사람은 누구인가요 답: 아마 세월호에 적재된 실 중량 톤수는 정확하게 알지 못하고, 각 화주에게 전화를 하여 맡긴 물건의 중량을 확인하여야 할 것입니다. 예를 들어 세월호에 적재된 철근의 경우에도 계약된 대리점의 경우에는 할인율이 적용되기 때문에 송장에 100톤이 기재되어 오면 우리는 여기서 20% 상당으로 할인을 해주기 때문에 적화운임목록에 작성된 중량은 할인이 적용된 중량이기 때문에 정확하지가 않습니다.
문: 적하물운임목록을 살펴보면 순번번호 20106을 확인하면 H빔 외, 20128 철근 등이 적재된 것으로 나타나는데 그렇다면 위 부피중량(H빔 37.4톤, 철근 286톤)에 나타나는 무게중량인가요 답: 예, 그렇습니다. 문: 그렇다면 위 중량이 실제 적재된 중량인가요. 답: 아닙니다. 실제 중량에서 20% 할인된 중량입니다.
세월호 관계자들은 실제 화물 선적량을 확인할 수 있는 방법까지 알려줬다. 운송을 맡긴 이에게 협조를 요청하면 되는 아주 간단한 조사였지만 검·경의 수사에서 철근 선적량 조사는 얼렁뚱땅 넘어가버리고 말았다.
특검 임명이 진실 알 유일한 대안
▲ "세월호 특조위 활동 강제 종료 중단하라" 세월호 참사 유가족과 시민들이 25일 오후 서울 마포구 아현역 인근에서 정부, 여당에 의해 특조위 활동이 강제 종료되는 것을 반대하며 거리행진을 벌이고 있다. 이날 이들은 박근혜 정부의 세월호 특조위 조사 활동 시한이 오는 6월 30일까지로 못 박은 것에 대해 "특위 활동 시작 시점을 기준으로 볼때 세월호 특위 활동 종료 시점은 현행법으로 내년 2월이다"며 "세월호 참사 진상규명을 위해 특조위 활동 조사간 보장해 줄 것"을 요구했다.
ⓒ 유성호
참사 2년 2개월 만에 드러난 '철근의 진실'을 통해 확인할 수 있는 것은 검·경 수사결과와 정부의 정보공개를 더 이상 믿을 수 없다는 것이다. 특조위의 실질적 활동기간이 아닌 세월호특별법 시행일을 활동기간 시작일이라고 상식에 어긋나는 주장을 펼치며 특조위 활동종료를 강요하고 있는 정부를 보면, 이 같은 의심은 더욱 짙어진다.
세월호 특조위는 지난 2월에 제출했지만 19대 국회 임기종료로 자동폐기된 '특별검사 임명을 위한 국회 의결 요청안'을 다시 제출하기로 했다. 세월호 참사의 진실을 밝힐 의지는커녕 은폐 의혹까지 사고 있는 정부의 태도를 보면 특검이 유일한 대안으로 여겨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