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소전쟁
제2차 세계대전 당시 나치 독일과 소비에트 연방 사이에서 일어난 4년간의 전쟁
현재까지 인류가 치른 무수한 수의 전쟁 중 가장 거대한 규모로 치러졌으며, 최악의 피해를 남긴 전쟁이다. 그래서 밀덕의 로망이라고 불리기도 한다.
민간인과 군인을 합한 소련측 사망자는 2700만이 넘고, 전사자는 천만에 육박한다. 독일군도 350만의 전사자를 기록했다(전상이 아니라 전사 및 실종자만 이 정도이다.).
리처드 오버리의《독재자들》에 따르면, 소련은 2900만명을 동원했고, 독일은 1800만 +α(동맹국 + 점령지의 수백만 인구)를 동원했다. 게다가 독일의 동원인력 중 대부분이 동부전선에 투입되었다.
그리고 이런 독소전쟁의 시작을 알린것이...
바르바로사 작전
소련과 독일은 대전 초에는 독소 불가침조약을 맺었고 나중에는 폴란드를 서로 사이좋게 나눠먹었다.
하지만 이렇게 겉으로 보기에는 좋아 보이는 관계는 결국 언젠가 무너질 운명이었다. 히틀러는 소련이 살아 있으면 독일 제국은 무너질 것이라고 여겼고 물론 나중에 그렇게 되긴 했지만 슬라브족을 유럽 러시아에서 몰아내고 그 곳을 독일 민족의 생활 공간으로 만들려고 하였다.
그리고 프랑스 침공이 끝나고 영국 본토 항공전을 마치면서 다음 목표를 소련으로 돌렸다. 프랑스가 무너지고 영국 본토가 불타오르자 히틀러는 자신감이 넘쳐나 참모들이 "아직 영국이 항복하지도 않았는데 지금 소련 때리면 전선을 두개로 만드는 미친 짓"이라며 말렸음에도 불구하고 소련 공격을 감행한다.
독일군 주요지휘관들인 할더, 구데리안, 룬트슈테트 등등은 1차대전 당시 양면전쟁의 참혹한 기억 때문에 이 침공에 회의적이었지만, 히틀러의 의지를 막을 사람은 아무도 없었고 그리하여 불만이 있지만 대부분 히틀러의 명령에 따랐다. 또한 군부 내 회의론자들도 잇따른 히틀러의 도박들이 연이어 운 좋게성공했기 때문에 은근히 자신감이 붙어있던 상황이였다.
작전목표를 둘러싸고 독일군 수뇌부 사이에 의견충돌이 있었는데, 할더 총참모장을 비롯한 독일군 수뇌부는 순식간에 정치적 수도이자 교통의 중심인 모스크바를 점령하기를 바랐다. 그러나 히틀러는 곡창지대인 우크라이나와 석유자원이 풍부한 캅카스 지방이 중요하다고 생각했다.
결국 군부와 히틀러는 타협하여 침공군을 북부, 중앙, 남부 집단군 세갈래로 구성하기로 했다.
여기서 당시 전선의 독일군과 소련군의 전력을 비교하면....
| 독일 | 소련 | 비율 |
사단수 | 166 | 190 | 1:1.1 |
총병력 | 4,306,800 | 3,289,851 | 1.3:1 |
각종포 | 42,601 | 59,787 | 1:1.4 |
전차 및 자주포 | 4,171 | 15,687 | 1:3.8 |
전투기 | 4,389 | 11,537 | 1:2.6 |
병력 수는 독일군이 많고, 근데 소련군의 예비군이 넘사벽 장비는 소련군이 많다.
독일군은 2년간의 실전경험으로 장비 수는 뒤졌지만, 그 운용법은 이미 만렙의 경지에 올라 있었다.
소련군의 장비는 독일군에 비해 그다지 뒤떨어지지는 않았으나, 기습을 당한데다가 실전경험이 없었고, 경험많은 장교들이 숙청되어서 전력을 발휘할 수 없었다.
실제로 소련은 1930년대 성공한 공업화 때문에, 전투기 수, 잠수함 수, 전차 수는 1940년 당시 세계 1위였다. 문제는 이렇게 많은 현대적 장비를 보유하고 있었으나, 이를 운용법은 탁상머리 이론에 그치고 있었는데다가, 그나마 대숙청 같은 정치적 문제가 생겨 이론가들이 자주 숙청되었다. 그러다보니 계속 운용사상이 바뀌는 바람에 부대들은 해체와 재편을 반복하고 있었다.
2개 기갑집단이 배치되어 최강전력을 지닌 중부집단군은 민스크, 스몰렌스크 등에서 소련군을 포위격파하고 모스크바를 목표로 진격을 계속했다.
여기서 독일군의 주요 전법은 'Keil und Kessel'이라고 불리는 양익포위였는데,
보병이 먼저 선제공격을 가해 정면의 적을 고정시킨 후, 기갑부대가 양익을 돌파하여 적의 주력을 포위하는 전법이었다.
이 때문에 모스크바에 대한 공격이 늦춰지게 되고 이것은 독소전쟁의 향방을 가르는 치명적인 오판으로 작용한다.
당시 모스크바는 시베리아 철도가 지나가는 중심 도시라 점령 당하면 물자와 병력을 이동시킬 철도망이 마비되는 상황이었다. 하지만 히틀러는 이걸 간과하고 만다.
독일군은 기갑부대가 레닌그라드에서 시가전에 휘말리는 것을 두려워해 제 4기갑집단을 모스크바 공격을 위해 중부집단군으로 전속시켜 레닌그라드에는 포위와 봉쇄에 의한 보급단절을 결정했다.
그러나 1944년 전반 소련군이 레닌그라드를 독일군의 포위에서 해방시킬 때까지 레닌그라드는 점령되지 않았고 레닌그라드는 영웅도시의 칭호를 받은 최초의 소련 도시가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