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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자왕의 진실
게시물ID : humordata_743339짧은주소 복사하기
작성자 : ★메시
추천 : 3
조회수 : 1508회
댓글수 : 1개
등록시간 : 2011/03/01 15:35:46
참고로 아래 내용은 kbs 스페셜에서 확인된 내용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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즉위 후 민심을 안정시키고 권력 기반을 다지다

641년 왕위에 오른 의자왕은 즉위한 이듬해 어머니가 죽자 동생인 교기와 여동생 4명 등 40여 명을 섬으로 추방하는, 전격적인 숙청을 단행했다. 자세한 내막은 전하지 않지만 태자 책봉이 늦었던 원인과 관련이 있었을 것이다. 자신의 즉위를 반대했거나 그 원인이 되었던 인물들을 제거한 것으로 보인다. 한편, 그해 국내를 순무하며 죄수의 정상을 기록하여 죽을죄를 제외하고는 모두 용서해주는 등 민심을 수습하기도 했다.
 
그렇게 내부의 권력 기반을 다진 뒤, 외부적으로는 연이은 승전고를 울리며 자신의 역량을 과시했다. 그해 직접 군사를 이끌고 신라를 공격해 미후성 등 40여 성을 함락시켰고, 바로 다음달 윤충을 보내 신라의 전략적 요충지인 대야성을 공격해 성을 함락시키는 등 신라를 큰 곤경에 빠뜨렸다.
 
그런데 문제는 대야성의 성주 품석이 김춘추의 사위이고, 이 싸움의 와중에서 김춘추의 딸인 고타소가 죽었다는 데 있었다. 딸의 사망 소식을 들은 김춘추는 기둥에 기대서서 종일토록 눈을 깜빡이지 않고, 사람이나 물건이 그 앞을 지나가도 알지 못할 정도로 슬퍼했다. 그러고는 “슬프다. 대장부가 되어 어찌 백제를 멸하지 못하랴.”며 벽제 멸망에 온 힘을 쏟기로 결심했다고 전한다. 그 뒤 김춘추는 고구려, 왜, 그리고 당나라를 직접 방문하며 목숨을 건 외교전을 벌인 끝에 결국 당나라와 군사연합을 맺는 데 성공한다. 비록 당이 김춘추의 설득에 신라와 군사 연합을 맺었지만, 이전까지 백제와의 관계도 나쁘지 않았다. 의자왕은 집권 초기 외교에도 탁월한 수완을 보였다. 즉위한 해부터 5년 동안 계속해서 당나라에 조공을 하며 관계를 다졌고, 왜와도 우호관계를 유지했다. 또한 고구려와도 힘을 합쳐 신라를 군사적으로 압박했다.
 
재위 3년인 643년에는 고구려와 화친하여 신라의 당항성을 공격했다. 당항성은 신라와 당나라의 해로를 연결해주는 요충지였다. 당항성이 공격 당하자 신라는 당나라에 사신을 보내 구원을 청했고, 그것을 안 의자왕은 곧 군대를 철수시켰다. 그리고 이듬해 정월 당나라에 사신을 보내 관계가 벌어지지 않도록 하는 등 국제관계에 민첩하게 대응했다. 645년에는 당 태종이 고구려를 정벌하려고 신라의 군사를 징벌한다는 말을 듣고 그 틈을 타 신라의 일곱 성을 공격해 빼앗았으며, 655년에는 고구려∙말갈과 함께 신라의 30여 개 성을 쳐부수는 등 군사적인 능력도 탁월했다. 의자왕 집권 전반기 백제와 신라는 곳곳에서 치열한 접전을 벌였으나 전쟁의 주도권은 분명 백제에게 있었다



의자왕의 마지막 모습에 대한 새로운 단서

2008년 의자왕의 마지막에 대한 단서를 주는 유물 하나가 발견되어 역사학계의 이목을 집중시켰다. 중국 북망산에서 예식진이라는 사람의 무덤과 묘비가 출토된 것이다. 그는 당나라 좌위위 대장군에 오른 사람으로 백제 웅진 출신이라고 묘비에 기록되어 있었다. 그러데 할아버지 대부터 좌평을 지냈던 백제의 귀족 출신으로 당나라의 대장군까지 오른 사람인데 우리 역사 어디에서도 그의 이름은 찾아볼 수 없었다. 역사학자들은 [구당서] ‘소정방’ 편에서 다시 그 이름을 찾아냈다.
 
“其大將禰植 又將義慈來降”-그 대장 예식이 의자왕을 데려와서 항복했다.
 
여기서 예식은 예식진과 동일 인물로 추정된다. 그러니까 당나라에 항복한 주체가 의자왕이 아니라 예식이라는 말이다. 이 충격적인 사실은 신채호의 [조선상고사]에 전하는 백제 멸망 과정과도 이어진다.
 
“웅진의 수성 대장이 의자왕을 잡아 항복하라 하니 왕이 동맥을 끊었으나 끊기지 않아, 당의 포로가 되어 묶이어 가니...”
 
이 두 기록은 의자왕이 스스로 당나라에게 항복했던 것이 아니라, 믿었던 신하에게 배신당했음을 증언한다. 의자왕이 예식진이 지키고 있는 웅진성으로 들어왔는데, 예식진이 의자왕을 배신하고 당에 항복했다는 말이다. 포로가 된 의자왕은 당의 소정방과 신라 무열왕에게 술잔을 올리는 굴욕을 겪은 뒤, 태자 효, 왕자 융∙연 및 대신과 장병, 그리고 백성 1만 2000여 명과 함께 당나라로 압송되어 그곳에서 파란만장한 삶을 마감했다. 700년 역사의 백제는 이렇게 무너지고, 의자왕은 망국의 주범이 되었다.  


 
‘삼천궁녀’를 거느린 호색한으로 낙인 찍힌 의자왕

한 나라를 멸망에 이르게 한 왕에 대한 평가가 호의적이기는 어렵지만, 의자왕은 유독 사치와 향락에 빠져 백제를 멸망으로 이끌었다는 비난을 한 몸에 받아왔다. 백제인의 시각에서 서술한 역사서가 전하지 않고, 백제와 적대관계였던 신라에 흡수 통합된 뒤 신라인의 시각에서 전하는 적장의 모습이기에 부정적인 것은 어쩔 수 없다 하더라도 그 왜곡의 정도가 유난히 심했다.
 
의자왕 하면 많은 사람들이 삼천궁녀를 가장 먼저 떠올린다. 의자왕의 궁녀였던 3,000명의 여성들이 사비성이 함락되자 낙화암에 몰려가 뛰어내리는 장면이 마치 꽃잎이 흩날리는 것 같았다는 전설은 매우 인상적이다. 그러나 당시 사비성의 인구가 5만 명 정도로 추산되고, 또 조선시대에도 궁녀의 수가 최대 600명 정도였다는 것으로 미루어볼 때 사비성에 3,000명의 궁녀가 있었다는 건 믿기 어렵다. 또한 당시 기록 가운데 삼천궁녀에 대해 언급한 부분은 어디에서도 찾아볼 수 없다.
 
조선 중기 시인이었던 민제인의 [백마강부]라는 시에서 ‘궁녀 수 삼천’이라는 말을 처음 찾을 수 있는데, 이는 문인들이 문학적 상징어로 이해해야 한다. 이후 지금까지 대중가요에 삼천궁녀를 소재로 한 노래들이 수십 곡 불리면서 의자왕은 3,000명이나 되는 궁녀를 거느린 방탕한 왕으로 왜곡되었다. 그러니까 삼천궁녀는 방탕했던 호색 군자라는 의자왕의 이미지를 완성시킨 후대인들의 상상력일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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