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시 사랑한다 말할까
김희성 2 “다시 사랑해도 될까?” 심장이 멎는 것 같았다. 그에게서 빗겨 있던 시선을, 떨리는 눈빛으로 그를 향해 옮겼다. 그는 잔뜩 긴장한 얼굴로 나를 보고 있다. 무수한 생각이 빠르게 머릿속을 스치고 지나갔다. 그러다 문득 떠오른 영상에, 마음 한구석이 저려왔다. 그러자 원망과 측은함이 뒤섞인 아이러니한 감정이 솟구치며, 하나의 물음표가 떠올랐다. “넌 왜 아픈 사랑만 골라하니…….” 그 물음에 그가 아픈 표정을 한다. 나의 물음은 그의 심장에 난 염증을 건드리고, 건드리다 못해 염증에 난 고름을 찔러 터뜨린 것과 다를바가 없다. 그것을 알면서도 나는 기어코 물었다. 물어야만 했다. 그것은 나를 위함이 아닌, 그를 위함이다. 그가 같은 실수로, 같은 덫에 걸려, 같은 아픔을 짊어지는 것을 막아야 할 의무가 나에게는 있다. 혹 그러함이 역으로 나에게 생채기를 내더라도, 그것은 내가 그에게 마지막으로 쥐어 줄 수 있는 배려이기에. ‘우리, 더 아프기 전에 그만 두자…….’ 금방이라도 마음 한 켠이 바스라질듯한 얼굴을 한 그를 두고, 나는 다시 시선을 비키며 묵은 기억을 떠올렸다. 그때의 그는 울었던가. 나의 무딘 기억으로는 울었었다. 보는 사람으로 하여금 아주 괴로운 형상으로, 그는 울었었다. 우는 것도, 웃는 것도 아닌 표정으로. 그때의 기억 속 이 장소는 별반 다를 것이 없다. 다만, 붐비지 않는 다는 것 외에는. 저녁을 거르고 만난 우리는, 나란히 볶음밥을 시켜두고서 먹지는 않고 번갈아 가며 울기만 했다. 나는 다른 누구를 이유로, 그는 그런 나를 이유로. 그는 웃는 얼굴로 한참을 울었다. 그것은 소리를 내어 우는 것도 아니어서, 보는 나로 하여금 더욱 마음이 메이도록 하는 울음이었다. ‘너무 행복한데, 짧은 시간이지만 그 시간동안의 우리의 기억은 너무도 즐거운데… 하하, 왜 자꾸 눈물이 나지…….’ 나는 대답할 말을 찾지 못했고, 차분히 그의 뺨을 타고 흐르는 눈물방울을 훔쳐 주는 것 외에는 어떤 행동도 하지 못했다. 울음이 목울대를 비집고 올라오려는 것을 간신히 삼키며, 그를 가만히 안아주었다. 보기보다 가녀린 어깨가, 내 품 한가득 차도록 안겨와 그렇잖아도 괴로운 마음이 쓰렸지만, 내색할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나 마저 마음이 약해지면, 어쩔 도리가 없다는 생각에서 였다. 그렇지만 숨길수는 없었다. 이미 그를 사랑하는 마음은, 스스로가 손을 쓸 수 없을 만큼 몸집이 부풀어 있었고, 그것을 거역하고 싶은 의지가 나에게는 없었다. “사랑하고 싶으니까…….” 그만큼의 생각을 마쳤을 무렵, 그때까지도 입을 꾹 다물고 있던 그가 기어이 말했다. 그리고 그는 아픈 표정으로 울음을 터뜨렸다. 그때와 같이 조용히 다만 얼굴이 웃고 있지는 않았지만, 그것과는 관계없이 그의 모습에 마음이 저리고 아파 괴로운 것은, 그때와 전혀 다를것이 없었다. 주문과도 같이 와닿는 그의 말에, 나의 굳은 다짐이 허물을 벗듯 흘러내렸다. 다짐이 무너진 그 자리에, 나 역시 그를 사랑하고 싶다는 마음이 새 살 돋듯 올라오는 것을 이기지 못한 나는, 끝끝내 우는 그를 두고 도망치듯 커피숍을 나와야 했다. 무슨 정신으로 버스를 잡아 타고, 집까지 도착했는지는 모르겠지만, 집에 도착한 나는 우선 샤워부터 했다. 아무리 찌들듯한 더위라지만, 찬물에 맨 몸을 노출시키고 한참을 있었더니, 나중에는 몸이 으슬으슬 떨려 얼른 물기를 닦고 옷을 주워 입고 나왔다. 그러고 나니 확실히, 머릿속은 깨끗해지는 기분이 들었다. 막 집에 도착한 무렵에는, 온 몸이 바닥으로 푹푹 내려앉는 것 같았다. 그리고 오만가지 생각이 들었다. 젖은 머리카락위에 아무렇게나 타올을 올려 놓은채로 거실에 나와, 휑한 거실 식탁에 앉았다. 습도가 조금 높다, 싶었는데 어느새 비가 오는지 창문에 부딪치는 빗방울 소리가 난다. 조금 전 까지만 해도 비가 올 것 같은 날씨는 아니었는데, 역시 장마철이다. 투둑, 투둑 창문을 시끄럽게 두드리는 빗방울 소리를, 멍한 얼굴로 듣고 있다가 방으로 들어왔다. 문득, 가방에 아무렇게나 쑤셔 넣어 두었던 휴대전화 생각이나 가방을 뒤적거렸다. 도트백 깊숙이 묻혀 있던 휴대전화를 꺼내어 플립을 열었더니, 부재중 전화가 다섯통이나 찍혀있다. 버튼을 눌러 수신인을 확인한 나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섰다. 다섯통 모두 그의 번호다. 이미 진작에 전화번호부의 그의 이름은 삭제했었지만, 그의 전화번호는 여전히 기억하고 있다. 그러고 보니 메시지도 한 통 들어와 있다. 확인해 보니 역시나 수신인은 그. 집앞에 있어. 라는 간단 명료한 메시지 내용에, 머리에 얹고 있던 수건을 내팽개치고 후다닥, 현관 밖으로 나왔다. “…….” 복도에서 아래를 내려다 보니, 우산도 없이 서 있는 그의 모습이 보였다. 내가 살고 있는 오피스텔은 5층짜리의 얕은 건물이어서 엘리베이터가 없다. 나는 급하게 계단을 딛었다. 건물 밖으로 나가자 빗물에 잔뜩 젖은 그의 모습이, 애틋하게 각막에 닿는다. 나는 우산을 펴고 그에게로 다가갔다. “뭐하는거야 지금…….” 그의 모습은 애처롭다 못해 화가 났다. 그는 미세하게 몸을 떨고 있었다. 아무리 공기가 더운 날이라지만, 굵은 빗방울을 우산도 없이 맨 몸으로 그대로 받아내고 있으니 추울법도 했다. 나는 이것저것 재고 생각할 틈도 없이, 조금 신경질 적으로 그의 옷깃을 쥐고 오피스텔 건물 안으로 잡아 끌었다. 잔뜩 젖은 몸을 한 그의 몸은 조금씩 더 심하게 떨리고 있었다. 그러고 보니 그는 유독, 감기에 자주 걸리는 편이었다. 거기까지 생각이 미치자, 머릿속이 화끈, 달아오르는 것 같다. “여기서 뭐하고 있는거야 도대체.” 나의 물음에 그는 별 대답없이 몸만 떤다. 역시 안되겠다 싶어 한사코 만류하는 그를, 어거지로 집 앞까지 끌었다. 주머니에서 열쇠를 찾아 현관문을 여는데, “나 그냥 갈래…….” 하고 그가 추위로 떨리는 목소리를 해 말한다. “그 꼴을 해가지고 가긴 어딜가? 들어와. 감기들겠어.” “…….” “그럴거면서 뭣하러 왔어? 들어와.” 격양된 목소리로 핀잔을 주며, 현관문을 열어 그의 등을 떠밀다 싶이 해 집 안으로 들어왔다. 혼자사는 집이라 마땅히 갈아입힐 옷이 없어 고민하다가, 일단 욕실에 있는 타올 두개를 가져와 그에게 건넸다. “일단 물기라도 좀 닦고 있어. 갈아입을만한 옷 찾아 볼게.” 머리부터 발끝까지 완전히 물에 빠진 생쥐꼴을 한 그는, 어정쩡한 모습으로 내가 건넨 타올을 받았다. 나는 곧장 방으로가 옷장을 뒤졌다. 마침, 집에서 편하게 있던 헐렁한 트레이닝 바지와 티셔츠가 있어, 꺼내어 다시 거실로 나왔다. “욕실에 욕조 있으니까, 따뜻한 물에 몸이라도 담궈. 물 받아 줄게.” 만류할 것 같아 대답도 듣지 않고 욕실로 들어가, 욕조에 달린 수도를 열어 뜨거운 물을 받았다. 시간이 조금 걸릴 것 같아 욕실 밖으로 빼꼼히, 고개를 빼보니 그는 여전히 어정쩡한 행색으로 손에 쥔 타올을 만지작 거리고 있다. 나는 욕실에서 나와 그의 손에 들린 타올을 뺏어, 아직도 축축한 그의 머리카락을 꼼꼼히 닦아주었다. “니가 이러면, 내가 좋아할 줄 알았어?” “…….” “…….” “보고싶었어…….” 그 말에, 그의 머리카락을 닦아주던 손을 움찔, 멈췄다. 마음이 괴로웠다. 몇 번이고 꿈결에 그에게서 보고 싶다는 말을 들었었지만, 정말로 이런 날이 올거라고는 예상하지 못했었다. 그는 잔인하고 냉정할 만큼 나에게서 가분되었던 사람이었기에, 지금의 이 상황이 나에게는 더욱 괴롭고 아프다. 나를 두고 돌아 선 것이 그에게 있어 최선의 방법이었다면, 다시 나에게 와 사랑의 허락을 구하는 것 역시 그에게 있어서는 최선의 방법이리라. 거기까지 생각이 미치자, 왈칵 눈물이 쏟아질 것 같다. 그는 늘 나의 마음을 괴롭힌다. 그와의 이별을 겪은 직후에는, 그를 향한 원망이 나를 괴롭혔고, 시간이 지남에 따라 그를 괴롭혔던 나의 치부에 죄악감을 느껴 괴로웠다. 그것에서 겨우 해방이 되고 나니, 이제는 사랑을 허락할 수 없는 나에게 사랑의 허락을 구하며 나를 괴롭힌다. 그것이 나와 그의 굴레이다. 우리는 서로를 끊임없이 할퀴고, 상처입히며 다시 사랑한다. 그 굴레를 끊을 수 있는 힘이 우리에게는 없다. 그렇더라도 나 혼자에게는 있을 수 있다는 생각으로 지금껏 버텨왔다. 그렇지만 역시 역부족이다. 사랑을 말하는 그를 외면할 방법은 애초애 나에게 주어지지 않았다. 언제고, 그를 사랑할 준비가 되어있는 사람처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