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팀에 귀여운 신입이 한 명 들어왔다. 매우 귀엽다. 약간은 엉뚱하고 서툴기도 하고 어리바리한 게, 뭔가 진짜 신입다운 신입이다. 이 귀여운 여자애가 들어오기 전에 막내자리를 지키던 놈은 전혀 신입답지도 않았고 지나치게 똘똘한데다 눈치도 빨라서 되레 불편했는데, 이 아가씨는 정말 신입다워서 난 좋았다.
다른 여직원들은 너무 어린 티를 내는 그녀를 못미더워하고 애 취급했지만, 난 그녀를 잘 가르쳐서 괜찮은 직장인이 되도록 돕고 싶었다. 물론 아직 내 앞가림도 잘하지 못하는 처지라서 쉬운 일은 아닐 것이다. 최소한 그녀가 울면서 회사를 뛰쳐나가는 일은 없게 돕고 싶다.
“저기. 호치키스 좀 가져다 줘요”
“빡 대리님! 스테이플러요?”
“네 그 거. 호치키스. 빡 대리 아니라니까요. 박 대리. 박.”
출력을 좀 하다가 그녀가 빈손으로 지나고 있기에 부탁을 좀 했다. 사실 그녀에게는 특별히 정해진 일이 거의 없다. 아직 팀에 적응을 하는 단계이니까, 다른 사람들의 일을 도우면서 상황을 파악하고 분위기를 좀 느껴보는 중이었다.
나도 겪은 일이지만, 그 단계가 상당히 까다롭고 어려운 일이다. 전반적인 분위기를 파악하고 팀이 돌아가는 분위기를 익힌다는 게 정말 어렵다. 특별히 주어진 일 없이 다른 팀원들을 돕는다는 게 쉽지 않다. 가만히 지켜보고 있으면 할 일 없이 노는 사람으로 보이고, 나서서 다른 사람들을 도우려 해도 뭘 할 줄 아는 게 없다. 그리고 대부분 신입이 자기 일을 건드는 걸 좋아하지 않는다.
자신들도 다들 겪었던 일이긴 하지만, 2년 남짓 하는 군 생활에서도 병장들이 이등병 시절을 기억하기 힘들어하는 것처럼 직장인들도 다들 자신의 신입시절을 쉽게 떠올리지 못한다. 결국 시간이 해결해주는 일들이 대부분이라서, 뭘 나서서 돕기도 참 애매하다.
“빡 대리님! 호치키스 가져왔습니다.”
“어? 이 건 내 거 아닌데? 본인 거예요?”
“팀장님 책상위에 있기에 가져왔어요...”
“예? 아. 괜찮아요. 그리고 빡 대리 아니라니까요. 박 대리요. 박”
팀장님의 호치키스를 가져왔다고 내가 뭐라 나무란 것도 아닌데, 괜히 겁을 먹고 긴장을 하는 것 같기에 괜찮다고 했다. 물론 별로 괜찮지는 않다. 우리 까칠한 여자팀장은 자기 물건 쓰는 걸 무척 싫어한다. 어서 쓰고 가져다 놔야겠다.
하지만 이 귀여운 아가씨가 내 옆에서 날 기다리고 서 있다. 왜 그러고 서 있냐는 표정으로 그녀를 바라보니, 내가 사용하고 있는 호치키스로 시선을 고정하고 있었다. 뒤늦게 팀장님의 호치키스를 가져온 사실이 잘못이라는 걸 깨닫고, 어서 다시 제자리로 가져다 놓고 싶은 것 같았다.
“가져가요”
“예? 빡 대리님 다 쓰셨나요?”
“네 다 썼어요.”
내가 팀장님의 호치키스를 건네주니 잽싸게 돌아섰다. 아직 다 쓰지는 않았지만, 그냥 출력하고 내 자리에서 정리해도 되는 일이다. 그렇게 그녀를 안심시켰다고 생각했는데, 돌아선 그녀가 자리로 돌아오는 팀장님과 마주쳤다.
저럴 필요까지 없는데, 사시나무 떨 듯 부들부들 떨고 있는 것 같다. 팀장님은 그녀가 왜 자길 보고 떨고 있는지 궁금하다는 표정으로 그녀를 살피다가 자기 호치키스를 발견했다. 팀장님이 괜찮다는 말 한마디면 그녀가 참 행복해 할 것 같은데, 팀장님이 그럴 리가 없다. 팀장님은 그녀의 손 안에서 호치키스를 빼앗듯 가져가버렸다.
여자들은 여자들끼리 서로를 더 무서워한다. 그리고 우리 팀장은 냉혈한 같은 여자라서 더욱 무서운 편이다. 남자인 나도 우리 팀장을 무서워하니까, 여자들이 느끼는 우리 팀장의 이미지가 어떨지 상상하기도 어렵다.
가엽게도 잔뜩 긴장해버린 그녀 곁으로, 그녀가 오기 전까지는 우리 팀 막내였던 녀석이 지나갔다. 녀석은 당돌하게도 그녀의 어깨를 툭툭 치며 그녀를 위로했다. 함부로 여직원에게 저런 스킨십을 시도하다니 정말 재수 없는 녀석이다. 만약 내가 그랬다면 성추행으로 몰리겠지만, 저 녀석은 얼굴이 반반해서 저럴 수 있다.
녀석은 급하게 팀장님에게 볼일이 있는지, 그녀 앞에서 보란 듯이 팀장을 불렀다. 자기가 팀장의 관심을 끌 테니까 이런 사소한 일 정도는 신경 끄라는 거겠지. 참 쉽게도 여자들이 좋아할만한 행동을 하는 녀석이다. 아니나 다를까 팀장에게 다가가는 녀석을 보는 그녀의 눈빛이 반짝이고 있었다.
그 놈의 뒤태를 감상하는 그녀를 환기시키기 위해, 나도 그녀를 위로하기로 했다.
“팀장님 무섭죠? 괜찮아요. 마음은 좋으신 분인데, 일하시는 스타일이 그래요”
“빡 대리님? 아~ 네. 고마워요”
“제가 뭘 시키면, 제자리에 있는 걸 가져오시면 될 거예요. 다른 자리에서 가져와야 할 건 제가 말을 해 줄게요”
“빡!”
그녀가 날 부른 건 아니었다. 사무실에선 듣기 힘든 소리에 놀라서 바라본 곳에는, 서류 몇 장이 휘날리고 그 녀석이 그 가운데 서 있었다. 정황상 우리 팀장이 녀석의 머리를 내려쳤다고 생각할 수밖에 없었다. 다른 팀의 직원들도 놀라서 녀석을 보고 있었고, 아무 일 없다는 얼굴로 모니터를 응시하고 있는 팀장님의 표정을 살폈다.
아무리 화가 나도 누구에게나 존칭을 하는 우리 팀장이 저렇게 폭력을 휘두르는 일은 처음 겪었다. 난 우리 팀장을 잘 안다. 팀장님은 쉽게 저럴 사람이 절대 아니다. 이건 분명히 저 녀석이 팀장을 극도로 분노하게 했으리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다른 사람들의 표정들은 달랐다. 평소 쌀쌀하고 일 외의 모든 교류에 관심이 없는 팀장을 사람들이 오해하고 있었다. 다들 우리 팀장이 결국 일을 저지르고 말았다는 표정들로, 그 녀석을 위로하고 싶어 하는 얼굴들이었다.
녀석의 반반한 얼굴과 열정적인 인간관계의 승리였다. 모든 여직원들은 우리 팀장을 마녀 보듯 했고, 이런 놀라운 일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담담하게 서류를 주워 챙기는 그 놈을 지독한 직장상사에게 핍박받는 불쌍한 부하직원으로 보는 눈치였다.
그리고 그녀는 곧 울 것 같은 얼굴이었다.
“빠...빡 대리님... 어뜩해요.”
“뭔가 큰 잘못을 했겠죠.”
“저... 저 때문은 아니겠죠? 괜히 나 때문에 나서다가?”
“예?”
아. 이 아가씨야. 그게 정말 말이 된다고 생각하는 겁니까? 저 놈이 당신 때문에 나서다가 팀장에게 서류뭉치로 머리를 맞았다고 생각하는 거예요? 이 순진한 아가씨야. 당신 순정만화를 너무 많이 봤어. 제발 그런 슬픈 표정 짓지 말라고요. 저 상황은 절대로 결단코 확실하게 당신이랑 상관이 없단 말이야!
라고 외치지는 못했다. 너무 어이가 없어서 한숨이 나오는 걸 막는 게 더 급했다. 곧 부장님이 녀석을 호출했고, 팀장님은 다른 직원들이 자꾸 자길 힐끗 거리는 게 짜증났는지 사무실을 나가셨다.
그녀가 내게 다가와 조용히 말을 걸어왔다.
“빡 대리님...”
“예?”
“부장님에게도 혼나고 있을까요?”
“예? 아니요? 그럴 리가요. 위로를 받고 있겠죠. 맞은 사람을 누가 또 혼내요?”
“아~ 그럼 빡 대리님도 위로해 주세요. 우리 같은 팀이잖아요”
내 어이가 먼 여행을 떠났다. 물론 형식적이라도 위로할 생각은 하고 있었다. 어쨌든 직장 내 폭력사고는 큰 문제이고, 일이 커지는 걸 막으려면 녀석을 좀 달래긴 해야 했다. 하지만 그걸 막내 여직원이 나서서 걱정할 문제는 아니다.
아무래도 그녀가 녀석을 좋아하는 것 같았다. 빌어먹을! 젠장 할! 누구나 그 녀석을 좋아한다. 반반한 얼굴에 무슨 일을 맡기든 경력이상의 일을 해내는 녀석을 누구나 좋아한다. 내가 매번 담배를 빌려 펴도 단 한 번도 짜증도 안내고! 3년차 주제에 내게는 더 배울 일도 없고! 이미 나랑 경쟁하고 있으면서, 날 존경하는 척하는 녀석을 모두가 좋아한다.
난 그런 그 녀석을 위로해야 한다. 그래야 직장 상사로써 체면도 유지하고, 내가 그 녀석에게 밀리고 있다는 인상을 주지 않을 수 있다. 그리고 그녀가 그걸 바라고 있다. 정말 짜증난다.
그녀는 그 녀석을 위해 시원한 탄산음료를 뽑아서 녀석의 자리에 가져다놨다. 그녀에게 언제나 친절한 내게는 단 한 번도 그런 적 없으면서, 녀석에게는 음료도 뽑아다줬다. 그리고 부장님 방에서 돌아온 녀석은, 그녀가 가져다 논 음료를 건들지도 않았다. 나쁜 자식. 고맙다는 인사라도 해라. 그녀는 녀석에게 안타까운 눈초리를 보냈지만, 본척만척했다. 개새.
하지만, 난 저 놈을 위로해야만 한다.
“힘내. 인마. 어디 초상났냐?”
“괜찮습니다. 박 대리님”
괜찮으면 괜찮은 표정을 지어! 억지로라도 웃으라고! 직속상사가 널 위로하고 있잖아! 이 녀석은 상사의 위로에 쓴 웃음을 짓고 있었다. 도대체 팀장에게 무슨 짓을 했기에 얻어맞았냐고 물어보고 싶었지만, 다른 팀 팀장이 지나치게 녀석을 위로하고 있는 바람에 그러지는 못했다.
함께 사무실로 돌아온 다른 팀 팀장이 우리 팀장에게 화해하라고 설득했고, 우리 팀장은 녀석을 회의실로 오라고 했다. 다른 팀 팀장까지 나서서 저러는 걸 이해하기가 어렵다. 우리 팀 내에서 알아서 해결해야하는 일 아닐까?
이해 못할 모습에 내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는데, 녀석은 그런 내 모습에 만족해하는 것 같은 표정을 지었다. 그래 잘났다. 빌어먹을 녀석아. 세상이 모두 널 위해서 돌아가고 있겠지. 그 냉랭한 우리 팀장이 화해의 손길을 네게 먼저 내미니까 정말 행복하겠지. 그게 모두 네 능력 때문이라고 생각하겠지? 아니다 이 녀석아. 네 면상 때문이라고!
녀석과 팀장님은 회의실에서 손을 맞잡고 흔들며 나왔다. 저 팀장님이 정말 우리 팀장이 맞는지 의심스러운 순간이었다.
“정말 다행이에요. 그렇죠? 빡 대리님?”
“예?”
“두 분 화해하신 거 같잖아요?”
그녀는 지금 저 황당한 모습에 감동했다는 표정이었다. 직장 내에서 폭력이 있었는데, 저렇게 손을 맞잡고 화해하는 그 녀석의 모습이 정말 대단하다고 칭찬했다. 그녀뿐만 아니었다. 모두가 녀석의 대범한 태도에 감탄하고 있는 것 같았다. 젠장.
녀석 덕분에 우리 팀은 저녁에 회식을 해야 했다. 그리고 그녀는 녀석에게 눈을 떼지 못하고 있었다. 녀석이 한번만 바라봐줬으면 하는 표정이라 화가 난다. 하지만, 녀석은 팀장님 옆에 딱 붙어서 재롱을 피우고 있다. 사회생활 아주 잘하는 녀석이다. 그 얼굴로 그렇게까지 해야겠냐고 물어보고 싶었다.
팀장 곁에 딱 붙어서 떨어지지 않는 녀석 때문에 그녀가 많이 실망한 것 같았다. 그녀는 혼자서 연신 술을 들이켰다. 잘 마시지도 못하는 술을 너무 빨리 마시고 있는데, 그녀를 돌봐야 할 다른 여직원도 팀장에게 아양을 떠느라 그녀에게 신경을 못 쓰고 있었다.
“왜 혼자 마셔요. 같이 마십시다.”
“앙? 빡 대리님? 역시 빡 대리님 밖에 없어용. 짠~”
“빡 대리 아니라니까요. 박 대리. 박”
“바박? 빠박? 빠악 대리님?”
“천천히 좀 마셔요. 누가 뺏어 먹어요?”
“찌송해용. 제가 너무 버릇이 없죵?”
내가 그녀를 좀 챙기고 싶은데, 괜한 오해를 살까봐 그러기도 쉽지 않다. 저 녀석처럼 반반하게 생긴 놈이 챙기면 매너겠지만, 내가 그러면 껄떡된다는 평가를 받게 된다. 이미 취한 것 같은데 또 술잔을 드는 그녀를 말려줄 사람이 없다.
아무도 그녀에게 말을 걸지 않고, 다들 그녀가 알아듣기 힘든 이야기들만 하고 있다. 가끔 그녀가 끼어들면 그게 아니라며 놀리지나 않으면 다행이었다. 내가 그녀에게 가끔 말을 걸었지만, 한계가 있었다. 다행히 그녀가 술에 빠져죽기 전에 회식이 끝났다.
녀석이 팀장님을 모셔다드리겠다고 했다. 정말 대단한 녀석이다. 난 아직 단 한 번도 그래본 일이 없다. 우리 팀장님이 그렇게 술에 약한 여자도 아니고, 그런 걸 바라는 사람도 아니다. 하지만 저 놈은 당당히 저런 말을 한다.
다들 헤어지면서 그녀도 힘없는 발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걸음에는 힘이 없고 얼굴은 곧 울 것 같다. 내가 데려다 주겠다고 했지만, 당연히 괜찮다고 했다. 택시를 태워주겠다니까 그냥 버스를 타겠단다. 버스정류장으로 향하는 그녀를 지켜봤다. 그녀가 힘없이 걷다가 뒤를 돌아봤다. 왜 안가냐고 내게 물었다. 나도 금방 갈 거라고 먼저 가라고 했다. 다시 돌아서 걸어간다. 그리고 또 멈춰 선다. 다시 날 돌아봤다.
“빡 대리님? 우리 한 잔 더 하실래요?”
그 놈 때문이 분명하다. 힘겨운 표정으로 아무 말 없이 술잔을 받아서 마신다. 내게도 술을 받으란다. 손이 참 곱다. 그녀도 어느 집의 고운 딸일 테고, 열심히 공부해서 대학을 졸업하고 취직을 했을 텐데 인정받기는 참 힘들다.
“빡 대리님 전 회사에서 필요 없는 존재 인가요?”
“아니야. 다들 그래요. 나도 그랬어.”
회사 이야기를 할 필요는 없는데, 차라리 속 시원하게 그 놈 때문이라고 해라. 잘하고 있어. 기회는 오게 되어있어. 서두르지 마. 이런저런 도움이 될 리 없는 흔한 이야기들을 그녀에게 전하고 있는데, 잔다.
앉아서 잔다. 왜 자냐? 깨웠다. 계속 잔다. 잠투정도 한다. 야. 집이 어디냐. 너. 야. 큰일 났다. 누구한테 전화 하지? 그녀의 휴대폰을 꺼내려고 했다. 앙탈을 부리며 이러지 말란다. 내가 뭘 어쨌다고. 야. 일어나. 팀장에게 전화하려다 그만두고 다른 여직원에게 전화 했지만, 안 받는다. 좀 받아라. 야. 왜 자꾸 자냐. 일어나.
들쳐 업고 술집을 나왔다. 어디로 가냐.
“야. 일어나! 제발 일어나.”
왜 안 일어 나냐?
가까운 모텔에 가려다가 이건 아닌 것 같아서 택시를 태워 가까운 호텔로 갔다. 다행히 빈방이 있단다. 술 취해 쓰러진 부하 여직원을 모텔에 데려가는 건 아니지. 그럼 호텔은 괜찮나?
나도 모르겠다.
<2>
그녀를 침대에 던져두고 호텔을 나왔다. 내가 그녀를 건들면 내 인생은 그대로 끝이라는 걸 난 알고 있다. 물론 여기서 떠오르는 그 녀석이라면 다르겠지만, 내가 그런 녀석들과 같을 수는 없다. 사람에게는 누구나 각기 다른 한계가 있다. 그걸 알고 살아야 세상이 편하다. 드라마나 영화에 나오는 멋쟁이들을 함부로 따라하다가는 인생을 망치기 쉽다.
주제를 알아야 한다는 말은 진리다. 다행히 난 매일 아침 거울을 보며 면도를 하는 사람이고, 내 몰골의 상태에 대해서 잘 알고 있다. 난 잘 참아 냈다.
호텔에서 나와 집으로 향하면서 끊임없이 다시 돌아가고 싶은 마음이 들었던 건 어쩔 수 없다. 그건 본능이니 내버려 두기로 했다. 그런 생각을 떠올리는 나를 자책하지 않기로 했다. 하지만, 담배를 한 갑 다 비우고서야 집으로 돌아갈 수 있었다.
잘 참아냈다.
조금은 걱정을 했었지만, 다음날 아침에 그녀가 지각을 하지는 않았다. 그 뿐만 아니라 옷도 갈아입고 왔다. 그리고 평소와 같이 명랑하지만 서툰 하루를 시작하는 것 같았다. 다행이다.
“박 대리님. 어제는 죄송했어요.”
“예? 아니에요. 속은 좀 괜찮으세요? 그 서류는 제 건가요?”
“어머? 아니요! 어머. 어머.”
그녀는 들고 있던 서류를 발견하고 놀랐다는 얼굴로 재빨리 뛰어갔다. 어제 일이 많이 창피했는지 힘줘서 내게 ‘박’ 대리라고 했다. 술에 취해 기억을 하지 못할 줄 알았는데, 내게 미안해하는 걸 보니까 조금은 기억을 하는 것 같다.
돌아서 뛰어가는 그녀의 뒷모습을 보며 멍청하게 입맛을 다셨다. 항상 정장 치마만 입었던 것 같은데, 오늘은 바지를 입고 있었다. 여전히 사랑스러운 그녀의 모습에 괜히 또 텁텁하고 답답한 기분이 들어 담배 생각이 났다.
내가 어제 누굴 위해 뭘 참아 낸 건지 잘 모르겠다.
그 동안 그녀는 내게 많이 의지하는 편이었다. 팀장님은 지나치게 쌀쌀맞고, 그 놈은 출세를 위해 바빠 그녀에게 관심도 없었고, 다른 여직원은 자기 처신을 하기에도 정신이 없어 보였었다. 그래서 언제라도 그녀를 도울 준비가 되어있는 내게 많이 의지했었다. 어찌 보면 조금 불편한 총각 남자상사일수도 있지만, 내 평범한 외모가 그런 불편함을 해소해줬다. 나와 가까이 지낸다고 해서 그 누구도 그녀와 내가 어떤 특별한 관계로 발전하리라고 생각하지는 않을 것이다.
그녀와 내가 연인이 되는, 그런 모습을 상상하기에 그녀는 너무 귀엽다. 난 지나치게 평범하고, 스스로 평범하다 주장하는 배경에는 보통 평균이하의 진실이 숨어있기 마련이다.
그래도 이룰 수 없는 사랑이라 하더라도 난 그녀와 가까이 지낼 수 있어서 좋았었다. 하지만 그녀도 성장하고 일에 익숙해지고 다른 직원들에게도 점점 인정받기 시작했다. 시간이 그녀의 많은 약점들을 해결해줬고, 어느덧 그녀도 자신의 자리를 찾아가기 시작했다.
점점 내가 도울 일이 없어진다는 건, 그녀에게는 정말 좋은 일이다. 언제나 그녀가 있는 곳을 살피고, 그녀가 어떤 일을 하고 있는지 관찰하는 건 이제 필요 없어졌다. 아무도 쓰지 않던 사무실 개선안에 밀크커피 대신에 원두커피가 있으면 좋겠다고 써 내서 다른 직원들을 당황하게 했던 그녀가, 하루에도 몇 번씩 빡 대리님을 찾던 그녀가, 할 일을 찾지 못해서 멍하니 앉아있다 내 시선을 느끼고 배시시 웃던 그녀가 많이 바빠졌다.
업무적으로 그녀와 나누는 대화는 더 많아졌지만, 어쩐지 더 멀어졌다는 느낌이 들었었다. 그녀는 자신 생각하는 것보다 더 빠르게 늘어나는 일거리에 만족해하는 것 같았고, 그녀의 업무에 대한 어려움은 이제 나보다 그 재수 없는 녀석과 다른 여직원이 돕는 게 어울린다.
이제는 그 재수 없는 녀석과도 자주 대화하는 모습을 목격할 수 있었다. 그리고 녀석과 대화를 나누는 그녀의 모습은 행복해 보였다.
“어제 머리 자르셨나 봐요?”
“넹~ 앞머리를 너무 많이 잘랐죠?”
“괜찮은데요. 귀엽네요. 그리고 참. 여기 이건 포함시켜야 해요. 이건 조금 더 부각시키고요~”
참 뛰어난 녀석이다. 그녀가 녀석의 귀엽다는 말에 행복해하고 있는데, 재빨리 업무에 관한 대화로 전환해버린다. 저런 식으로 잔영을 남겨 여자들이 녀석의 말을 오래 기억하게 한다. 전에 어떤 책에서 읽은 기억이 있다. 나도 알고는 있지만, 내가 저렇게 말하는 건 무리가 있다. 모두가 자기가 알고 있는 걸 할 수 있다면, 프로 스포츠가 인기가 있을 수 없다. 저 녀석은 프로다.
팀장님이 새로운 보고서 준비를 하라고 해서 산책나간 정신을 되돌리고 있는데, 기분이 좋아 보이는 그녀가 내게 말을 걸었다.
“빡 대리님! 저 어제 미용실 다녀왔는데, 어때요?”
“앞머리가 너무 짧아요.”
“아~ 역시 그렇죠? 에유~”
“아까 말씀 드린 건 다 됐어요?”
“어머! 참! 천 과장님이 연락 주신다고 했는데!”
“연락 기다리지 마세요. 가서 가져 오세요”
상사가 이야기 하는데, 버르장머리 없이 입술을 쭉 내민다. 물론 난 그 모습도 귀엽다. 짧아진 앞머리도 귀엽고, 내 말에 급하게 자리에서 일어나는 엉덩이도 귀엽고, 허리춤에 바지사이로 삐져나온 셔츠도 귀엽다. 그래서 화가 난다.
막내들의 능력을 보겠다며, 이번 보고서는 그 재수 없는 녀석과 그녀의 의견을 대폭 반영하겠다고 했다. 재수 없는 녀석이야 이미 충분히 능력을 보였으니, 그녀의 업무파악상태를 확인하려는 보고서가 될 것 같았다.
그녀는 이제야 진정한 팀원이 된 것 같다며 즐거워했다. 의욕적으로 준비를 하면서 그 재수 없는 녀석과의 대화가 많이 늘었다. 내게도 물을 수 있는 걸 그 녀석에게만 물어본다. 어차피 언젠가 이렇게 되리라는 걸 알고는 있었지만, 씁쓸한 기분이 드는 건 어쩔 수 없다.
특별히 대단한 내용의 보고서가 될 일이 없는데, 재수 없는 그 녀석과 그녀의 대화가 지나치게 많았다. 어떤 기안을 준비 중이기에 그러는지 궁금해서 그녀의 책상을 살폈다. 그녀가 준비한 기안을 확인하려고 했지만, 내 눈에 들어온 건 연극표 티켓 두 장이었다.
아마도 이번 보고서가 잘 끝나면, 그 재수 없는 녀석과 연극을 보러 갈 생각인 것 같다. 참 부러운 녀석이다. 그런데, 기안이 좀 특이했다. 지나치게 튀는 느낌이 있었다. 이거이래도 되는 건지 걱정이 됐다.
하지만 그녀가 처음으로 준비한 기안에 내가 브레이크를 걸고 싶지는 않았고, 그 재수 없는 녀석이 브레이크를 걸어주길 바랬지만 역시 그 녀석은 재수 없게도 그녀를 싸고돌았다. 역시 그런 녀석이다. 다행히 팀장님이 문제가 있다고 브레이크를 걸어줬다.
“박 대리도 이 게 정말 괜찮아 보여요?”
“예? 뭐 좀 튀긴 하지만, 신입다운 패기도 보이고 새롭기도 하네요.”
“뭐지? 다들 괜찮은 거예요? 나한테 문제가 있나?”
다들 그녀의 기안을 마음에 들어 하니까 팀장도 통과를 시켰다. 그리고 보고서를 부장님이 엎으셨다. 팀장님은 부장님께 불려갔고, 우리 팀은 초비상이 걸렸다. 팀장님은 괜한 나에게만 화를 내셨고, 내가 화를 내는 걸 받아줘야 할 그 재수 없는 녀석은 같이 화를 내고 있었다. 월요일 중요한 회의에 사용할 보고서라고는 생각도 못했었는데, 부장님만 알고 있었거나 우리 팀장이 잠깐 미쳤던 것 같다. 요새 우리 팀장이 좀 이상한 게 최근에 들은 파혼 소문이 사실인 것 같다.
우리는 그녀 덕분에 토요일에 나와서 일을 해야 했지만, 아무도 그녀에게 화를 내지는 않았다. 모두에게 책임이 있는 일이고, 어찌 보면 팀장에게 가장 큰 책임이 있었다. 그래서 팀장이 더 화를 많이 낸다. 원래 제일 잘못한 사람이 가장 많이 화를 내게 되어있다.
잔뜩 얼어버린 그녀가 슬며시 연극티켓을 집어 구기다가 나와 눈이 마주쳤다. 일이 이렇게 되어버렸으니, 녀석에게 연극을 같이 보러 가자는 말은 못하게 된 것 같다. 그녀가 씁쓸한 표정으로 연극티켓을 주머니 속에 넣었다. 그녀가 슬퍼지니 나도 슬프다.
밤늦게 퇴근을 하는 중에 그녀가 내게 말을 걸었다.
“혹시 내일 연극 보러 가실래요?”
울 것 같은 얼굴로 그녀는 구겨진 티켓을 내게 보였다. 차라리 버려라. 우리는 내일도 야근을 해야 할지도 모른다. 그 재수 없는 녀석과 같이 보러갈 수 없어서 슬픈 건 이해할 수 있다. 하지만 그렇다고 나를 출장여부도 알 수 없는 대타로 쓰는 건 바르지 않다.
그래도 난 그러자고 대답할 수밖에 없었다. 난 그럴 수밖에 없다. 그녀는 다행스럽다는 표정으로 웃었다. 그 연극티켓이 비싼 모양이다. 하지만 아쉽게도 그 연극티켓은 버려질 운명일 것이다.
토요일 아침부터 팀장을 우리를 거칠게 몰았다. 실력이 없는 사람이 그러면 문제가 되지만, 실력 있는 사람이 그러면 일에 속도를 붙여준다. 그래도 너무 지나친 것 같아서 중재를 나섰다가 괜한 된서리만 맞았다. 팀장은 내게 일적인 중재를 원했던 것 같은데, 내가 실수를 했다.
그래도 유능한 팀장 덕분에 우리는 토요일 오전 중에 일을 정리 할 수 있었고, 사회생활 잘하는 그 재수 없는 놈이 마무리를 하겠다고 했다. 그래 열심히 살아서 꼭 성공해라. 넌 성공할거야. 재수 없는 놈. 실컷 점수 따라. 난 그녀와 연극 보러 간다.
그녀도 무척 기뻐해서 난 사실 조금 놀랐다. 그 녀석 대신에 나와 연극을 봐야 한다는 사실에 불편한 기색이 전혀 없었다. 조금은 아쉬워 할 줄 알았는데, 그녀는 순수하게 일이 정리되었다는 사실에 기뻐하는 것 같았다. 그런 그녀의 모습이 참 좋다.
“빡 대리님! 정말 다행이에요. 그렇죠?”
“뭐 그렇죠?”
연극은... 잘 모르겠다. 무슨 젠장 할 연극이 부하직원이 여자상사를 겁탈하는 내용 같다. 누가 썼는지 내용이 참 더럽다. 저게 말이 된다고 생각하는 건가? 그리고 그런 두 사람이 사랑하게 된다는 매우 남성편향적인 시각의 더러운 내용이다. 이 따위 연극에 여자관객이 더 많다는 사실을 이해할 수 없다. 어쭈? 이 따위 내용이 또 해피엔딩이다. 전혀 현실적이지 못하다. 세상에 어떻게 저럴 수 있다는 말인가. 자신감을 갖으라고? 세상 남자들을 죄다 강간범으로 만들 생각이냐? 예술을 한다는 놈들의 생각을 이해하기 어렵다.
저질스러운 연극을 보고 나와서 별로 할 말이 없었다. 저 따위 내용을 가지고 부하 여직원이랑 무슨 대화를 나눌 수 있겠나. 그런데 그녀는 뭔가 굉장히 흡족한 것 같은 표정이다. 여자들의 세계를 이해할 수가 없다.
“빡 대리님! 재미있었어요?”
“네? 뭐 좀. 예.”
술을 한 잔 하자고 한다. 그래 난 좋다. 하지만 제발 혹시라도 그 놈 이야기는 꺼내지 않았으면 좋겠다. 난 사랑상담은 못한다. 게다가 난 널 좋아한다고,
술도 잘 못 마시는 애가 또 급하게 술을 마신다. 걱정된다. 천천히 마시라고 했다.
“대리님은 참 좋은 사람이에요”
남자가 사랑하는 여자에게 가장 듣기 싫은 말. 짜증난다. 여자들은 항상 좋은 사람과는 사귀지 않지. 대학 때도 들어봤던 말이다. 대학 때 내게 그 말을 했던 여자애는 대학을 졸업과 동시에 시집을 갔다. 짜증난다.
너무 많이 마시는 것 같아서 술잔을 잡아서 뺐었다. 괜찮으니 좀 더 마시고 싶다고 했다. 난 믿을 수 있단다. 이번에는 혹시 취하면 호텔에다 재우지 말고 집에 데려다 달라며 집 주소를 가르쳐줬다. 믿을 수 있겠지. 나처럼 짐승만도 못한 남자가 흔하지는 않지.
자냐? 또 자?
“일어나! 야! 또 자냐? 야!”
“으응~ 빡 대리니임~ 저 안 자요옹~ 왜 반말해용?”
“아. 죄송해요. 괜찮아요? 많이 마셨어요. 이제 그만가요.”
“...”
어이. 자냐? 야. 이봐? 잔다. 그녀는 또 취해서 잠들었다. 아니, 원래 이러지는 않았던 것 같은데, 최근에 새로 업데이트 된 술버릇인가? 어쨌든 그녀가 테이블 아래로 쓰러지기 전에 들쳐 업어야 했다.
며칠 전에는 쉽게 업을 수 있었던 것 같은데, 오늘따라 그녀를 업기가 매우 힘들다. 차라리 그냥 쭉 늘어져 있으면 좋으련만, 자꾸 업어주려는 날 붙잡는다. 어이 날 그렇게 붙잡으면 내 팔꿈치에 당신의 가슴이 닿는다고! 그녀의 허리를 조심스럽게 붙잡아 다시 부축하려다가, 손이 미끄러져서 그녀의 가슴을 붙잡았다. 만진 건 아니고, 붙잡았다는 표현이 정확하다. 명백한 실수였다.
“빠박! 빡 대리님?”
“어? 아니, 그러니까. 깼어? 이건 실수야. 응? 걸을 수 있겠어요?”
“...”
다시 잔다. 이번엔 다시 또 깰지 몰라서 조금 기다렸다. 그리고 다시 들쳐 업었다.
그녀가 가르쳐준 그녀의 집으로 향했다. 힘들게 그녀를 택시에 태우고, 다시 또 들쳐 업고 그녀의 집 초인종을 눌렀다. 그녀의 어머니로 보이시는 분이 문을 열어주셨다.
“아니, 얘가 무슨 술을 이렇게 마셨어? 근데, 누구세요?”
“예. 같은 사무실에 박 대리라고 합니다. 안녕하세요. 어머님이신가요?”
“아~ 그 빡 대리님이시구나? 얘기 많이 들었어요. 근데 애한테 무슨 술을 이렇게 먹였어요?”
“아니, 그게 아니고요. 술은 제가 먹인 게 아니라요”
“아유~ 술 냄새. 얘! 일어나! 당장 안 일어나?”
어머니께서는 손바닥으로 사정없이 그녀의 등짝을 내리치셨다. 그녀가 아파서 잠을 깨는 것 같았다. 내가 저렇게 때리면 폭행이 되겠지만, 그녀의 어머니니까 괜찮다.
“아잉~ 아파앙~ 응? 엄마넹? 응? 빡 대리님이시넹?”
“이 기집애. 빨리 안 일어나?”
“히잉~ 엄마~ 빡 대리님이 나 막 만졌엉~”
“...”
어머니. 그러니까. 그게 아니고요.
계속.
<3>
그녀의 아버님이 현관으로 나오셨다. 그리고 그녀의 오빠로 보이는 분이 나오셨다. 그리고 한 분 더 나오셨다. 오빠가 있다는 이야기는 들었지만, 두 분이나 있었구나. 아. 한 분 더 나오신다. 오빠가 세 분이나 있으시구나. 설마 더 있지는 않겠지.
가족 분들의 눈이 꽤 크시다는 인상을 받았다. 그녀도 눈이 큰 편인걸 봐선, 눈이 큰 게 아마도 유전인 것 같다. 하지만, 지금 그녀의 아버지와 오빠들 눈이 계속 커지고 있었다. 눈이 저렇게까지 커질 수 있는지 의심했지만, 사실 그 분들이 내 쪽으로 점점 걸어 나오고 있어서 그렇게 느껴진 것 같다. 밤도 늦었는데, 왜 나오시고 그러세요.
“안녕히 계세요!”
“어이~”
“이봐?”
“거기 서봐”
서라고 할 때, 설 사람이 이렇게 빨리 달리지는 않는다. 오랜만에 달리기를 좀 하기로 했다. 평소에 운동을 거의 하지 않은 덕에 무릎이 아파왔지만, 적당한 거리에서 멈출 생각은 없었다. 옛말에 소나기는 피하라고 했고, 다구리에 장사 없다고 했다.
술도 좀 마셨고 그녀를 들쳐 업고 걷기도 했으니, 목구멍에서는 쓴 물이 올라오는 것 같았다. 그래도 조금 더 달렸다. 저기 보이는 저 골목을 돌아서면, 대로가 나오고 분명히 날 기다리는 택시가 있을 것이다. 영화나 드라마에서는 항상 그랬다. 제발 있어라.
일요일에 그녀가 미안하다며 커피나 한잔 하자는 걸 괜찮다고 했다. 어쩐지 미끼 같다는 느낌이 있었다. 평소에 그녀가 보내는 문자 스타일이 아니었다. 언제나 사랑스러운 느낌이 가득했던 그녀의 문자가 아니다. 분명히 그녀의 오빠 중에 누군가가 나를 노리고 미끼를 던진 느낌이 있었다. 커피를 마시러 나갔다가는 분명히 커피보다 훨씬 진하고 쓴 액체를 뱉어 내고 오겠지. 내가 그렇게 순진한 사람은 아니다.
혹시라도 그녀의 오빠들이 회사로 찾아올까봐 걱정을 했지만, 다행히 그런 일은 없었다. 그래도 어쩐지 사무실 분위기는 이상했다. 내가 조금 긴장을 해서 그렇다고 생각하기에도 너무 어색했다. 재수 없는 그 녀석은 얼굴이 많이 상해있었다.
“얼굴이 왜 그래? 누구한테 맞았냐?”
“예? 아. 예. 뭐 좀 그럴 일이”
“나이가 몇인데, 맞고 다니냐. 도망가 도망”
이 녀석은 상사가 걱정해주는데, 싱끗 웃는다. 어디 클럽에서 여자들이나 기웃거리다가 시비가 붙었겠지, 날라리 같은 녀석. 하지만 다른 여직원들은 잘 생긴 얼굴이 상했다며, 진심으로 걱정들을 하고 있었다. 그녀도 녀석의 얼굴이 상한 게 안타깝다는 표정으로 녀석을 위로하려고 했다.
여직원들이 그 재수 없는 녀석에게 붙어서 떨어질 줄을 모르니까, 팀장님이 월요일 아침이 그렇게 한가하냐고 버럭 화를 내셨다. 역시 우리 팀장님밖에 없다. 하지만 또 녀석이 벌떡 자리에서 일어나서 팀장에게 다가가 뭔가 말을 걸었다. 그렇지. 자기 때문에 혼난 다른 여직원들을 보호해야지. 항상 저런 식이지. 대단한 녀석이다. 그녀도 녀석의 그런 행동에 절로 호감이 생긴다는 표정으로 눈을 반짝였다.
그런 그녀와 눈이 마주쳤다. 그녀는 날 보고 피식 웃으며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그래, 난 저러지 못한다는 걸 말해주고 싶은 거겠지. 그래도 내게 그러면 안 되는 것 아닌가. 난 지난 토요일 당신을 챙기다가 당신의 오빠들에게 살해당할 뻔 했다고.
“빡 대리님! 캐러멜 좋아해요?”
“이 썩을까봐 별로...”
“으휴~ 아저씨. 그럴 줄 알았어요.”
그리고는 다른 팀원들에게 캐러멜을 나눠준다. 재수 없는 녀석은 캐러멜을 좋아한다며 더 달라고 하니까, 가방에 있는 걸 다 꺼내서 녀석에게 줬다. 역시 그랬다. 그녀는 녀석이 캐러멜을 좋아한다는 걸 이미 알고, 캐러멜을 사왔던 것이었다. 그리고 바로 녀석에게 줄 수는 없으니까, 나를 징검다리 삼은 것이다.
캐러멜을 다 나눠주고 자리로 돌아오던 그녀가 한 개가 남았다며, 내게 캐러멜을 내밀었다.
“빡 대리님! 하나 드셔 봐요. 제가 어제 만든 거예요”
“난 됐어요. 저 놈 캐러멜 좋아한다니까, 그냥 저 놈 더 줘요.”
“아! 좀! 한 개 드시면 어디 덧나요?”
“이 썩어요.”
그녀가 나눠준 캐러멜을 오물거리던 팀장님이 맛이 괜찮다며 먹어보라고 했다.
“박 대리. 한 번 먹어봐요. 맛이 괜찮은데?”
“이 썩습니다. 팀장님~”
“이 좀 썩으면 어때요. 박 대리 얼굴이면, 이 좀 썩어도 티도 안 나겠네.”
“에이~ 팀장님. 이 썩는 게 얼굴이랑 무슨 상관입니까?”
다른 팀원들은 우리 팀장의 농담에 배꼽이 빠진다는 듯 웃었다. 누군 잘생긴 얼굴 상했다며 걱정해주고, 누군 이 좀 썩어도 얼굴이 못났으니 괜찮다는 이야기인가? 그리고 저런 얘기가 정말 웃긴 것일까? 언어폭력 아닌가? 하지만, 나도 웃을 수밖에 없었다. 우리 팀장님이 농담을 하는 경우는 극히 드문 일이고, 대리쯤 되면 직장상사의 썰렁한 농담에도 반사적으로 웃을 수 있다.
캐러멜 맛이 나쁘진 않았다.
항상 차갑던 팀장님이 많이 부드러워지셨다. 지나치게 의욕적인 재수 없는 놈과 항상 부딪혔었는데, 이제는 팀장님도 녀석에게 넘어가고 말았다. 세상에 저 놈을 싫어하는 여자가 있을지 궁금하다. 팀장님까지 자기편으로 만든 녀석은 점점 승승장구했고, 모든 일이 시원시원하게 풀리는 녀석을 보는 그녀의 눈빛도 점점 아련해지는 것 같다.
그녀에게는 내가 전담마크로 붙었다. 이제는 그녀를 쓸 만한 직원으로 만들어 줄 시기가 왔고, 보통은 여직원에게는 여직원을 전담마크로 붙이는 편인데 나를 붙여줬다. 그만큼 난 안심이 된다는 이야기겠지. 다들 어지간히 한다. 나 같은 남자는 절대로 저런 귀여운 여자와 정분이 날 걱정이 안 된다고 생각하고 있다. 그래도 난 좋다.
많은 시간을 그녀와 함께 보낼 수 있으니, 좋았다. 늘 그래왔듯이 그녀에게 많은 걸 전하려고 노력했고, 그녀도 날 따라오려고 애쓰는 모습이 좋았다.
“빡 대리님? 3년차 쯤 되면 저도 저럴 수 있을까요?”
“네? 아... 저 놈이요? 물론이죠.”
아쉽지만 내 대답은 사실이 아니었다. 저 놈은 신입 때부터 특별한 녀석이었다. 게다가 잘생긴 얼굴에 우리 사무실에는 여자가 많다. 그녀가 남자팀장을 만났더라면 차라리 괜찮았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우리 팀장은 여자에다 여직원에게 더 신경써주는 그런 스타일도 아니다.
그녀가 내게 어디 사냐고 물었다. 그건 왜 물어 보냐고 하니까, 내가 자기 집을 아니까 자기도 내가 어디 사는지는 알아야겠단다.
“혼자사세요?”
“네.”
“와~ 부럽다. 나도 혼자 살고 싶은데, 한 번 구경 가도 괜찮아요?”
“남자 혼자 사는 집에 막 가고 그러는 거 아니에요”
“그렇죠? 그런데 빡 대리님은 괜찮을 것 같은데?”
아예 눈곱만큼도 날 남자로 볼 생각이 없는 것 같았다. 주말에 놀러오겠다고 우겨서 그러라고 했다. 모처럼 방청소를 해야 할 생각에 벌써 피곤해진다.
대청소를 하고, 모처럼 잘 할 수 있는 요리도 했다. 우리 엄마 말고는 내 방에 처음으로 오는 여자라서 약간은 긴장도 했는데, 그녀에게서 전화가 왔다. 생각해보니까, 아무리 그래도 남자 혼자 사는 집에 가기는 좀 그렇단다. 다음에 다른 팀원들과 같이 놀러오겠다고 해서 그러라고 했다.
약간은 아쉽긴 하지만, 그래도 덕분에 모처럼 대청소도 했고 요리도 했으니 괜찮다고 애써 자위했다.
tv를 시청하며 맥주도 조금 마시고, 오랜만에 컴퓨터게임도 좀 했다. 그러다 또 맥주가 생각나서 냉장고를 열었는데, 맥주가 없어서 술을 좀 더 사왔다. 쓸쓸한 마음을 달래려고 술을 마시는데, 술을 마실수록 더 쓸쓸해지고 있었다. 이제 좀 취기가 올라와서 잠들려고 했는데, 그녀에게서 전화가 왔다.
‘빡! 대리님!’
‘취하셨네요?’
‘네! 취했어요! 빡! 대리님!’
‘그럼 자야죠. 안자요?’
‘잠깐 쫌 나와 봐요! 네?’
그녀가 우리 집 앞에 와 있다고 했다. 서둘러 옷을 챙겨 입고 나갔더니, 그녀가 그녀의 친구와 함께 우리 집 앞에 와 있었다. 그녀의 친구는 술 취한 그녀를 달래다가 날 보고 먼저 가보겠다며 내게 인사를 했다. 그리고 내게 한심하다는 표정으로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어린 것이 버르장머리가 없다.
남겨진 그녀는 날 보고 조금 울먹였다. 무슨 일이 있나?
“왜 그래요?”
“박 대리님!”
“네.”
“제가 뭘 더 어째야 해요!”
왜 화를 내고 그래요. 울긴 또 왜 울어요.
눈치가 없는 편이긴 하지만, 그래도 이 순간 그녀를 안아줘도 괜찮을 거라는 건 알고 있다. 계속 그러고 있을 수는 없어서 내 방을 구경하지 않겠냐고 했다. 그녀는 울다가 웃었고, 남자 앞에서 울다가 웃으면 키스를 당할 수 있다. 그날 밤 그녀는 내 방에서 잤다.
우리는 한동안 우리가 사귀는 사실을 다른 사람들에게 숨겼다. 우리가 나이차이도 좀 있고 그러니까, 아무래도 눈치가 좀 보여서 그랬다.
시간이 좀 흘러 여자팀장도 다른 부서로 옮겼고, 그녀가 더 늦기 전에 공개를 하자고 졸라서 그러기로 했다. 좀 좋은 분위기에서 밝히는 게 좋을 것 같아서 일부러 회식자리를 마련했고 전 팀장님도 모셨는데, 그 재수 없는 놈이 팀장님과 사귀고 있다고 발표했다. 재수 없는 놈.
우리는 조금 더 미루기로 했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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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님 말
이번 이야기는 전편과 달리 당연히 소설입니다. 시간이 나서 급하게 이야기를 짜맞추다보니 전개가 확실히 느리고 좀 처지는군요. 끝까지 읽어주신 분들에게 감사합니다.
뭐 또 다른 이야기가 있긴 하지만, 댓글 주는 속도를 봐서는 이쯤에서 멈추는 게 맞는 것 같습니다. 이번 이야기는 기대에 부응하지 못해서 죄송합니다. 노력하겠습니다.
출처 MLBPARK BULLPEN의 northwind(북풍)님 글입니다.
죄송합니다 게시판을 제대로 못지켰었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