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철학과 철학사
아래 글은 예전에 썼던 글인데, 여러모로 시의적절한 듯 하여 그대로 가져왔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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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학을 공부할 때, 고대부터 시작해서 철학사를 쭉 공부해야 한다는 말을 마치 옛것이 좋은 것이다, 온고지신이다, 무슨 그런 고리타분한 개념에 입각한 거라고 생각하면 오산이다. 진짜 이유는, 후대의 철학자들이 자신의 철학 이론을 정립할 때도 기존의 철학을 공부해서 이를 토대로 자신의 철학을 만들었기 때문이다.
여기에는 두가지 측면이 있다.
첫번째로는, 새로운 이론은 기존 이론에 대한 이해를 기반으로 이루어진다는 것이다.
예를 들어, 아인슈타인의 상대성 이론이 혁명적인 것은 기존의 뉴턴 역학을 뒤집었기 때문이라고들 하는데,
뉴턴 역학이 뭔지 모른다면 아인슈타인의 이론이 갖는 의미를 이해할 수도 없는 것이다.
천동설이 뭔지 모르면, 지동설이 무슨 의미를 갖는지 이해할 수 없는 것과도 비슷하다.
마찬가지로, 쇼펜하우어나 니체가 그 이전 철학을 신랄하게 비판할 때에, "그 이전 철학"이 무엇인지를 알아야 하며,
이성과 의식의 철학에서 떠나 몸으로 관점을 옮기고자 한 현대 현상학자들의 의도를 읽어내려면
기존 이성과 의식의 철학에 대해 알고 있어야만 하는 것이다.
그리스 철학에 대해서는 한 글자도 모르고, 플라톤 철학에 대해서는 전혀 아는 바가 없는데도 헤겔을 들먹인다거나,
아리스토텔레스나 플로티누스, 데카르트에 대해서는 전혀 모르는데 칸트의 철학을 논한다는 것은 그래서 그만큼 심각한 한계가 있다.
두번째로는, 새로운 이론은 기본적으로 기존 이론에서 정의된 용어와 개념을 차용하고 있다는 것이다.
이것은 사실 생각해보면 당연한 얘기다.
새로운 이론을 만드는 장본인들 역시, 기존의 이론을 공부했기 때문이다.
예를 들면 위의 예에서, 지동설은 그 자체로도 이해할 수 있겠지만, 현대 철학이나 상대성 이론의 경우 경우가 다를 것이다.
상대성 이론을 이해하려면 뉴턴 역학에서의 개념과 거기서 사용되는 수학 개념을 먼저 이해하고 있어야 한다.
마찬가지로, 신플라톤주의나 중세의 형이상학적 이론, 혹은 칸트의 철학이나 헤겔의 정신현상학을 이해하려면
플라톤의 이데아론, 더 먼저는 파르메니데스 등의 "존재"에 대한 이론을 먼저 알아야 하는 것이다.
철학사를 공부한다는 것은 절대 단순한 역사학이 아니며,
철학의 변천과정, 발전과정, 그리고 그 축적 및 분해의 과정을 되짚어 오는 작업이다.
개인의 취향이나 입맛에 따라 취사선택하기 이전에,
전반적인 철학사에 대한 기본적인 이해가 선행되어야 하는 것은 이 때문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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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문, 예술, 기능, 수작업 등과 같은 경우에는 흔히 이를 터득하는데 다방면의 노력을 수반하는 학습과 훈련이 필요하다는 확신을 하면서도 철학에 대해서는 엉뚱한 편견이 널리 퍼져 있는 것이 요즘의 현실이다. 즉 눈과 손가락이 있고 거기에 가죽과 도구가 있다고 해서 누구나 구두를 만들 수 있는 것은 아니듯, 이성에만 의존하여 이를 철학의 척도로 삼는다고 해서 누구나 거리낌없이 철학을 하거나 철학을 판정할 수 있는 것은 아닌데도 그런 주장을 한다는 것은 마치 발만 있으면 누구나 구두장이가 될 수 있다고 하는 것과 다름없다. ... (중략)
"본래의 철학에서는 정신이 오랜 교양의 도정을 거치며 심오하고도 활력적인 운동 속에서 자기의 지에 도달하게 마련이다. 그런데 이런 것에는 아랑곳하지 않고 신의 직접적인 계시라거나 본래적인 철학의 지(知)나 이외의 지도 갖추지 않은 건전한 상식이라는 것을 내세워 이를 장구한 교양의 도정을 송두리째 대신할 수 있는 완전한 등가물로 간주하는 나머지, 마치 치커리가 커피의 대용품인 양 치켜세워지는 것과 같은 정도로 여기게 되었다. ... (중략)
"이와는 달리 더욱 여유만만하게 건전한 상식이라는 안락한 침대에 기대어 있는 자연적인 철학함은 내세울 거리도 못 되는 진리를 요란한 수식어로 부풀려대곤 한다. 이때 그러한 진리는 무의미한 것이 아닌가라는 물음에 부딪히면 참으로 충실한 의미는 자기의 마음속에 있고 또 타인의 마음속에도 있게 마련이라는 식으로 대꾸한다. 끝내 이렇게 내세우는 것이 심정의 순결함이나 양심의 순수함이라고 할진대, 도대체 그 앞에서는 아무런 항변이나 요구도 할 수 없는 실정이다."
- 헤겔, 『정신현상학』 서설 중 발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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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허수아비 공격의 오류
허수아비 공격의 오류는 대강 다음과 같이 정의됩니다.
"상대방의 입장과 피상적으로 유사하지만 사실은 비동등한 명제(즉, "허수아비")로 상대방의 입장을 대체하여 환상을 만들어내고, 그 환상을 반박하는 것이 바로 허수아비 때리기이다." (위키피디아)
이를테면 백과사전에 나오는 내용을 말했을 때 너는 백과사전식으로 밖에 모르는구나, 자신만의 생각이 없구나, 라고 규정하는 것이 전형적인 허수아비 만들기입니다.
레고맨님과 슬픈백수님은 각각 서로 약간 다른 모양의 허수아비를 만들어놓고 제 이름을 붙여놓으셨더군요.
레고맨님은 어느 시점부터 갑자기 저에게 정식철학교육이니, 전공자니, 전문가니, 영역 안의 언어니 하는 딱지를 붙여놓으셨고
슬픈백수님은 거의 의식적으로 자신이 가진 몇가지의 스테레오타입을 조합해서 덧씌워주셨습니다.
이러한 허수아비 만들기는 몇가지 방어기제가 조합된 발현으로 해석할 여지가 있습니다. 대상 혹은 자신을 특정하게 규정함으로써 상황을 자신이 받아들이기 편한 쪽으로 왜곡하는 것이죠. 실제로 제가 여러분의 교수도 아니고 대단한 전문가도 아니며 어떤 권위를 가진 사람 역시 아닙니다. 각자 나름 접하고 경험한 만큼의 앎이 있는 것이며 그 앎으로부터 말하는 것일 뿐입니다. 학문에는 기실 자격증이 없는 것입니다. 이는 한편으로는 누구나 자격이 있음을 의미하는 것이지만, 한편으로는 누구도 권위나 자격을 방패삼을 수도 도구로 삼을 수도 없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기도 합니다.
이러한 허수아비 만들기의 방어기제로서의 다른 이면은 대상을 특정하게 규정함으로써 허수아비로 만드는 것 뿐만 아니라, 종종 자신 역시 특정하게 규정시킴으로써 합리화를 동반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이 때 위에 허수아비를 만들 때 사용된 권위, 자격, 정식교육, 전문가, 백과사전 등의 반대에 놓인 것들을 끌어오게 됩니다. 그것들이 상상력, 창의력, 자신만의 생각 (주체성), 일상어, 비전문가 등등입니다. 제가 "왜곡된 아마추어리즘"이라고 묶어서 가리킨 것이 이러한 것들, 더 정확히는 "이러한 것들을 합리화에 사용하는 방식"입니다. 이는 전문가 - 아마추어의 대립적 구도를 먼저 만들어 그 구도에 상황을 고착화시킴으로써, 대상을 공격하는 것이 아닌 전문가 일반을 공격하고, 자신을 방어하는 것이 아닌 아마추어 일반을 방어하는 식으로 이루어집니다.
바로 이것을 두고 "아마추어리즘을 방패로 삼는다"고 가리킨 것입니다. 그러나 그 어떤 권위도 자격도 방패가 될 수 없다는 말은, 전문가라는 가상의 불특정 다수에만 적용되는 것이 아니라, 아마추어로 규정된 가상의 집단에도 똑같이 적용되는 것입니다. 이는 아마추어라는 집단에 부여된 속성 - 이를테면 상상력이니 주체성이니 하는 것 - 이 전문가라는 집단에게선 결여되어 있으며, 전문가라는 집단에 매몰된 이들에게도 이것이 필요하다, 라는 주장이 그 자체로는 타당성이 있는만큼, 전문가라는 집단에 부여한 속성이 한편으로는 아마추어에게도 요구되는 것이며 필수불가결한 것이기도 하다는 의미입니다. 건강한 아마추어리즘이 대담함과 겸허함의 균형 속에서 찾아진다는 말의 의미는 그러한 것이며, 그런 맥락에서 전문가와 아마추어를 나누는 것은 무의미한 일이 되는 것입니다.
3. 창의성과 주체성의 신화
마지막으로 철학을 공부함에 있어서 아마추어리즘의 표어처럼 부르짖어지는 주체성과 창의성에 대하여 첨언하겠습니다. 기존 철학에 대한 이해가 미약한 편이었던 비트겐슈타인이나, 기존 미술의 형식주의를 해체하고 파괴시킨 피카소에 대한 동경은 한편으로는 이러한 발상의 근간이며 한편으로는 이러한 발상에 전용되는 전형적인 사례이기도 합니다. 이 발상을 정리하자면 한 측면은 자유로운 상상력, 창의력 등으로 말해지며, 다른 한 측면은 "자신만의" 생각을 가지는 것으로 말해집니다. 이 둘은 미묘한 차이가 있지만 기존의 체계에 대한 반작용이자 기존의 체계로부터의 자유를 말한다는 점에서 공통점이 있습니다.
그러나 바로 그렇기 때문에 이 두 개념 - 창의성과 주체성 - 은 그 자체로 모순적인 개념이 되고 맙니다. 사변적으로 말하자면, 그 개념 자체가 스스로 자신의 부정으로 삼은 것 - 기존 체계 - 에 절대적으로 의존하고 있는 개념이라는 점에서 모순이 되는 것입니다. 하지만 일단 여기서는 사변적인 논의로 나아가지 않고 간단한 일상적 예시로 설명하겠습니다.
간단하게 말하자면 이런 것입니다. 수학과 기하학의 기초를 배운 학생이, 아직 배운 적이 없는 피타고라스의 정리를 스스로 유도하여 증명해냈다고 가정합시다. 이것은 분명 창의력과 주체성이 발현된 사례에 틀림없습니다. 그러나 이것 자체만을 놓고 볼 때 이것이 실질적으로 가지는 의미는 어떤 것일까요? 당연히 수학적으로는 - 학문적으로는 - 아무 의미가 없습니다. 물론 그 학생 본인의 입장에서는 몹시 만족스러운 것일 수 있으며, 그 학생의 능력, 더 나아가서는 잠재력에 대한 증거가 되어주는 것이기도 합니다. 그러나 이렇게 말한다는 것 자체가 "언젠가는 그 능력/잠재력이 발현되어 유의미한 무엇인가를 해낼 수 있을 여지가 있다"는 말로, 지금 이것 자체로는 유의미한 무엇이 되지 못한다는 것을 이미 함축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위의 예를 잘 보면 이미 학생에게는 주어진 것이 있었습니다. 바로 수학과 기하학의 기초지요. 따라서 이 예시를 사용한 제 주장을 반박하기 위해 조건을 좀 더 극단적으로 만들어 수학이나 기하학을 전혀 배운 적이 없는 학생으로 바꿀 수도 있습니다. 그렇다해도 학생에게는 여전히 기본적인 언어 이해에 수반된 합리적 사고와 직관적 논리 이해가 주어져 있습니다. 물론 이것도 빼버릴 수 있습니다. 이렇게 예를 점점 더 극단적으로 만들 수록 학생이 스스로 피타고라스의 정리를 유도해낼 가능성은 점점 더 낮아지며, 학생은 무한히 유아에 수렴하게 됩니다. 갓 태어난 신생아에게 언어도 무엇도 학습시키지 않은 채로 스스로 피타고라스의 정리를 유도해내기를 기대하는 상황이 되는 것이죠.
이러한 극단적인 조건을 부정할 수 밖에 없다면, 우리는 무엇이든 주어진 것으로부터 출발할 수 밖에 없음을 인정할 수 밖에 없습니다. 그리고 주어진 것을 임의로 제한시켜야 할 근거, 다시 말해 교육의 의미나 범위를 축소시킬 수 있는 근거, 무지를 상상력이라는 미명으로 미화시키는 아마추어리즘을 방패로 삼아 학문에 대한 현실적 어려움을 정당화시킬 근거는 아무데도 없습니다. 그 어려움조차 하나의 주어진 것일 뿐인 것입니다. 인간의 유한한 인생에서 알아봤자 얼마나 알 수 있겠는가? 그렇기에 계속해서 알고자 노력할 뿐입니다. 물론 모든 사람이 반드시 학자가 되어야 한다고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러나 알고자 하지 않는 것은 학문을 멈추는 일일 뿐, 그것이 학문을 향유하는 한 방식으로 여겨져서는 안된다는 것을 말하는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