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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명박 경주이씨 호적 세탁? 반쪽 일본인?
게시물ID : bestofbest_74660짧은주소 복사하기
작성자 : favrika
추천 : 239
조회수 : 36990회
댓글수 : 13개
베오베 등록시간 : 2012/06/11 20:49:13
원본글 작성시간 : 2012/06/06 20:13:54
 http://cafe.daum.net/0099./a3ft/1035?docid=1IfuE|a3ft|1035|20100122202041&q=%C0%CC%B8%ED%B9%DA%20%BE%C6%B9%F6%C1%F6

 

이명박이 쓴 자서전 "신화는 없다"와 "어머니"에 실려 있는 출생부분의 내용은 모두 8개인데 모두가 허위다.

 

 

 

"신화는 없다"와 "어머니"에 실린 출생에 대한 설명은 아래와 같다. “우리 아버지 이름은 이충우, 3형제 중 막내였다. 할아버지의 땅뙈기는 두 형이 차지했고

 

아버지 혼자서 친구들과 함께 1935년에 총각으로 일본에 갔다. 자리 잡고 저축하여 한국에 나와 반야월 채씨 여인과 결혼을 하여 일본으로 건너가 6남매를 낳았다. 아버지는 전통적인 유교 풍을 이어받은 양반타입이었다. 남자 돌림자는 ‘상’자, 여자 돌림자는 ‘귀’자인데 나 혼자만 돌림자를 이탈했다. “명박이라 지은 것은 어머니 태몽 꿈에 크고 밝은 달이 치마폭으로 들어왔기 때문에 그렇게 지었다.”

하지만. 이명박이 숨겨놓은 호적을 보면 진실은 아래와 같다.

 

 

1. 이명박의 아버지 이름은 원래 떡쇠(德釗)였고 32세였던 소화 14년에 이름을 충우로 바꾸었다. 이덕쇠는 1907년 생, 어머니는 1909년 생. 서기 1925년이 소화 1년.

 

2. 할아버지 땅뙈기를 큰 아버지 두 사람이 나누어 갖고 아버지 혼자 일본으로 갔다는 말은 거짓이다. 할아버지의 땅뙈기는 무특-경특-덕쇠 3형제 중 경특이 혼자 차지했고, 무특과 덕쇠는 오사카에 건너가 나란히 이웃하여 대가족을 이루고 창씨를 스키야마(月山)로 고쳐서 살았다. 이명박의 일본 이름은 '스키야마 아키히로'.

 

3. 아버지 덕쇠가 1935년에 총각으로 일본으로 건너갔다는 것은 거짓말이다. 1935년에는 이미 3남매가 무럭무럭 자라고 있었다. 1930년에는 귀선이, 1933년에는 상은이, 1935년에는 상득이 태어나 있었다. 그런데 어머니 채씨 여인과는 1931년에 혼인했다. 이명박이 지금에서야 밝히고 있는 덕쇠의 도일 연도는 1927년이다.

 

4. 3형제 중 아버지 혼자만 일본에 갔고, 큰 아버지 둘은 조선에 남아 있었다는 말도 거짓이다. 2형제가 함께 일본으로 건너가 이웃하여 살았다.

 

5. 어머니의 본이 ‘반야월 채씨’라는 것도 거짓말이다. 그의 모친은 “인천 채씨”다.

 

6. 부친과 모친이 결혼하여 일본으로 건너가 6남매를 모두 낳았다는 말도 거짓말이다. 4째인 ‘귀애’는 1938년에 포항(영일군 의장읍 덕성동)에서 낳았다. 어머니가 귀국한 것이다. 어머니 채씨는 1938년에 귀국해 있었고 그 후 이명박과 이말분은 일본에서 태어났다. 이 사실은 이명박과 그 아래 동생 ‘말분’을 일본에서 다른 여인이 낳았을 것이라는 세간의 의혹을 밝히는 중요한 단서가 된다. 더구나 위 두 개의 책을 보면 이명박과 이말분은 어머니 채씨로부터 혹독한 서자 취급을 받았다.

7. 아버지가 전통적인 유교 풍을 이어받은 양반타입이라는 말도 거짓이다. 일본 총독부가 양반-상놈-노비의 계급을 없애면서 양반가에만 유지돼 오던 호적을 하류계급에도 만들어 주었다. 그 이전에는 양반가에만 호적이 있었고, 그 호적에는 노비들의 이름도 있었다. 호적은 즉, 양반가의 노비문서이기도 한 것이다. 호적에는 아무렇게나 불리던 노비들의 이름이 이런 식으로 기록돼 있었다.

‘개똥이’는 ‘개동(介童)’이로, ‘이쁜이’는 이분(伊粉)으로, 떡쇠는 덕쇠(德釗)로 이명박 가문에게는 ‘덕쇠(德釗)’라는 이름이 싫었을 것이다. 아버지인 덕쇠는 32세(1938년)에 이름을 충우로 바꾸었고 이 개명사실은 옛날 호적에 명백하게 기록되어 있다.

그런데 이명박은 1974년 구-호적을 버리고 새로운 호적으로 바꾸었으며, 새로운 호적에는 이 개명사실이 깨끗이 지워져 있다. 이충우는 태어날 때부터 이충우인 것으로 기록돼 있다. 소위 호적 세탁인 것이다.

이명박은 필자와의 법정 다툼에서 호적이 유실될 우려가 있어 1974년에 재-작성 하였다고 변명하지만 영일군에서 보관하는 호적이 수만 명에 이를 터인데, 유독 이명박의 호적만 유실될 우려가 있다는 것도 우습다. 또한 똑같이 영일군에서 보관하는 호적인데, 구호적은 유실우려가 있고 신호적은 유실우려가 없다고 주장하는 것은 더욱 더 어이가 없다. 또한 기록을 옮기려면 원래 것대로 옮겨야 한다. 가정법원 호적과에 가서 확인해 보니 개명사항은 필수 기록사항이라 한다.

8. 남자 돌림자는 ‘상’자, 여자 돌림자는 ‘귀’자인데 이명박은 자기 혼자만 돌림자를 이탈했다 변명한다. 이명박은 그의 자서전에서 자기 바로 아래 여동생의 이름을 ‘귀분’이라 기록했지만 호적에는 ‘말분’으로 분명하게 기록돼 있다.

명박이라는 이름은 일본에서 가장 흔한 이름이다. 이명박의 아래 동생의 이름이 ‘말분’이인지를 모르는 기자들은 이명박 한 사람만 돌림자를 이탈한 것으로 알고 왜? 이명박 혼자서만 돌림자를 이탈했느냐고 물었다. 이에 대해 이명박은 한자의 뜻 그대로 “어머니 태몽 꿈에 크고 밝은 달이 치마폭으로 들어왔기 때문에 그렇게 지었다”고 변명했다. 그렇다면 어머니로부터 이명박과 함께 서자 취급을 받은 말분이는 어째서 돌림자를 이탈하였는지 다시 물어야 할 것이다.

결론이다. 이명박이 스스로 기록해 놓은 두 개의 책(신화는 없다, 어머니)의 출생부분은 총 8개의 요소로 구성돼 있는데, 그 8개의 요소가 모두 거짓말이다. 이는 단순한 연도의 오해가 아니라 너무 황당한 거짓말이며 그 거짓말은 출생부분을 미화하고 이복형제라는 항간의 소문을 감추기 위해 기도한 의도적인 것이라고 생각한다. 특히 호적을 세탁한 사실은 가히 충격적이다. 더욱 충격적인 것은 호적을 세탁한 이유에 대한 변명이 유치하기 이를 데 없다는 사실이다. [펌]

 

 

 

 

이명박씨 집안은 본디 경주이씨 가문에 소속된 노비였습니다.

조선시대의 호적은 양인을 대상으로 한 것이었고,

양인에 속하는 양반과 상민들만이 독립된 주체로서 가문,집안 별로 호적을 부여받았습니다.

양인임을 증명할 호적이 있어야 과거시험에 응시할 자격, 관직에 오를 자격이 주어졌기 때문에,

조선시대의 호적이란 로마시대의 시민권과 비슷하다고 보면 됩니다.

로마에서도 시민권이 있는 사람만이 공직에 오를 수 있었죠.

양인신분이 아닌 천민,노비들은 국가로 부터 독립된 주체로 인정받지 못했기 때문에 별도의 호적이 없었고,

다만 양반가문에 소속된 노비들은 양반가문의 사유재산임을 증명하기 위해 양반가문의 호적에 등재되었습니다.

노비들의 이름을 한자로 표기하는 과정에서

남자 종 떡쇠는 덕쇠로, 여자 종 이쁜이는 이분이로 기재하는 게

일반적이었죠.

이명박씨 아버지의 본명은 덕쇠 인데,

후일 일제가 통치일환으로 천민들에게도 호적을 부여하는 과정에서

이명박씨의 아버지 덕쇠씨는 경주이씨 항렬 돌림자를 따 이충우 라는 이름으로 개명하였습니다.

이명박씨의 아버지는 덕쇠 아니 떡쇠로 불린 경주이씨 가문에 소속된 노비였다는 겁니다.

어쨌든 경주이씨 가문의 사유재산으로 호적에 올라있었으니

독립된 호적을 만들때,

경주이씨 행세를 하며 성을 이씨, 본관은 경주로 기재하게 됩니다.

독립된 호적을 부여받고,

경주이씨 행세를 하게 된 덕쇠(떡쇠)씨는 그 후

일본으로 건너가 집안식구들의 이름을 모두

일본이름으로 개명한 후

황국신민으로 살기 위해 부단히 노력합니다.

이명박씨는 아키히로 라는 이름으로 불렸죠.

그리고, 이명박씨와 여동생 말분씨는

덕쇠(떡쇠)씨가 본처에게 낳은 자식이 아닌

덕쇠(떡쇠)씨와 일본여성 사이에서 태어난 서자라고 합니다.

특히 덕쇠(떡쇠)씨의 본처는

서자에게 항렬 돌림자를 허용할 수 없다고,

이름을 명박이라 짓습니다.

일본식 이름을 한자로 표기한게 바로 '월산명박'이죠.

이명박씨의 형인 이상득씨는

경주이씨 항렬식으로 이름에 '상'자가 들어갔습니다.

형은 '월산상득' 이구요.

로마시대에도 평민 또는 천민신분이었다가 귀족을 의미하는 원로원에 편입된 사람들은

어렵게 진입한 귀족사회이니 만큼 귀족의 특권과 신분체계가 지켜지길 원했고,

지키기 위해 기존의 귀족들 보다 악날하게 평민과 천민들을 짓눌렀다 합니다.

경주이씨 가문의 한낱 사유재산이었던

덕쇠(떡쇠) 집안이 일제의 황국신민이 되기위해 몸부림쳤고,

한국에 돌아와서도 기득권 세력에 편입되기 위해 몸부림 쳤습니다.

위장전입,위장편입,부동산투기,탈세,투자사기 등 안해본 일이 없고,

마침내 노비집안 덕쇠(떡쇠)집안은 대한민국의 1%에 진입했습니다.

개 같이 번 돈으로 어렵게 진입한 기득권 사회인 만큼 덕쇠(떡쇠)집안은

이 기득권 사회가 천년만년 이어지기를 소망하며,

천년만년 이어나가기 위해

지금도 죄없는 시민들을 경찰방패와 쇠방망이로 내리치고 있다는 군요.

<'Khankorea:한국참역사연구'의 자료와 Google의 자료 인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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