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잿빛 길을 걷다 - 04
게시물ID : panic_75177짧은주소 복사하기
작성자 : Avalanche
추천 : 3
조회수 : 576회
댓글수 : 0개
등록시간 : 2014/12/08 15:22:37
방문 앞에선 상훈이가 기다리고 있었다.

 

주머니에 손을 찌르고 벽에 등을 기대고는, 뭔가를 곰곰히 생각하고 있는 듯 했다.

 

 ", 박상훈."

 

난 뭔가 패닉상태에 빠져 깊은 사색을 하는듯한 상훈이를 불렀다.

 

자신을 부르는 소리를 듣고, 상훈이는 내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 야 빨리 문 좀 열어봐."

 

상훈이는 내 방 문 앞에 서서는 말했다.

 

상훈이는 공포의 질린 눈빛을 하고선 나를 쳐다보고 있었다.

 

상식선에서는 이해할 수 없는 것을 본 후 느낀 미지의 공포인지, 상훈이는 공포에 떨고 있는 듯 했다.

 

 "니 방도 아니잖아."

 

 "아 닥치고 빨리 좀 열어봐. 진짜 지금 느낌 안 좋아."

 

상훈이는 뭔가 할말이 있는 듯 보였다.

 

얼굴에 드리워진 그 흙빛은, 무언가 안좋은 것이 일어날 거 같다는 느낌을 떨칠 수 없다는 걸 내게 넌지시 말을 하고 있는 것 같았다.

 

난 안주머니에서 내 방 열쇠를 꺼냈다.

 

 

상훈이는 뭔가 복잡한지 머리에 손을 짚고는 말했다.

 

 ", 정말 만약인데.. 정말 만약인데. 이게 만약 진짜 좀비 그거면... 어떡하지?"

 

상훈이는 머뭇거리는 듯 하면서, 나에게 넌지시 말을 다시 던졌다.

 

 "너도 알잖아. 우리 집, 여기서 차로 40분이나 50분 정도는 걸리잖아. 거제도라고 거제도."

 

난 방문의 잠금을 풀고는 문고리로 손을 가져갔다.

 

참혹한 광경을 보고 난 후 얼어버렸던 마음이, 문고리와 함께 잠시 풀리는 듯 했다.

 

지금 나는 내 시타델로 들어가는 것이다.. 나만의 공간으로...

 

난 문고리를 돌려 사실 문을 열었다.

 

안에선 널부러진 신문 스크랩과, 열려있는 베란다 문이 날 반기고 있었다.

 

 

 ", 경현아. 나 방에 가서 가방 좀 싸올게."

 

문 앞에서 신발을 벗으려고 하던 상훈이는 굳은 얼굴로 나에게 한마디를 던지며 다시 신발을 고쳐 신었다.

 

 "가방? 가방은 왜?"

 

궁금했다. 갑자기 무슨 가방을 싼다는 건지....

 

 "아니.. 그냥. 만약인데.. 그냥 만약인데... 그러니까 저스트 인 케이스..."

 

 "아 그래서 가방은 왜. 뭐하려고?"

 

상훈이는 뭔가 머뭇거리는 듯 했다. 뭔가를 어물어물거리던 상훈이는 조심스럽게 말을 꺼내기 시작했다.

 

 "만약 이게 진짜 좀비 바이러스가 퍼지는거라면.. 우리 여기 꼼짝없이 갇혀버릴 수도 있다는 거거든. 거기다가 우린 집에 가는 것도 쉬운 건 아니란 말야. 혹시 몰라. 진짜 혹시 몰라서 그러는거야. 만약 진짜 좀비들이 막 기숙사나 학교 안에 퍼져버린다면, 난 싸놓은 가방 들고 바로 학교 밖으로 튈 생각이거든."

 

학교 밖으로 튄다니 그게 무슨 소리인지 도통 이해가 안됐다.

 

설마 상훈이는 이걸 진짜 좀비 뭐시기 하는 그런 개소리로 믿고 있는 건지 한심해 보였다.

 

물론... 내가 본건 내가 아는 상식선이나 과학적으로 전혀 설명이 되지 않긴 하지만...

 

어찌보면 난 나 혼자 그렇게 위안 삼고 있는 것일지도 모른다.

 

 "나 가방 좀 싸올게. 니 방에 놔둘거니까, 나중에 진짜 큰일 터지면, 니 방에서 집합하자. 괜찮겠냐?"

 

 ". 난 문제 없지. 그렇게 하던가..."

 

 "고맙다. 나 금방 갔다 올테니까, 좀만 기다려줘."

 

상훈이는 말을 마치고 내 방 문을 놓고는 급하게 자기 방으로 뛰어올라 갔다.

 

닫히고 있는 문 너머로, 상훈이의 다급한 발소리가 울려퍼졌다.

 

 

난 닫힌 방문을 보곤 다시 내 방을 둘러봤다. 널부러진 신문 스크랩들, 그리고 밖에서 풍겨오는 희미한 피냄새.

 

그때까지만 해도 모든 것이 그냥 꿈만 같았고, 모든 것이 다 허상 같기만 했다.

 

난 바닥에 널부러진 신문 스크랩들을 다시 주으며 정리를 하려 했다.

 

그때, 내 발 바로 밑에 살짝 접힌 신문 하나가 보였다.

 

-영안실에서 사라진 환자. 행방은?

 

영안실에서 사라진 환자라......

 

난 문득 아까 굴러 떨어진 그 하늘색 환자복 시체가 생각났다.

 

그 시체가 했던 일들을 생각하면, 그것을 시체라고 부를 것이 아니라 '그 괴물'이라고 해야 할지도 모른다.

 

계단을 굴러 떨어져 내려와서 목이 부러진 채로도 살아 있었고, 사람을 물어 뜯었다는 사실이 내 머리 속을 뒤흔들고 있었다.

 

암만 생각해봐도 난 지금 꿈을 꾸고 있다는 생각밖에 들지 않았다.

 

하지만, 그것을 꿈이라도 단정짓기에는 내가 보고 듣고 냄새 맡고 있는 것들이 너무나 생생했다.

 

그 요소 하나하나들이 나에겐 '니가 본 것은 꿈이 아니라 현실이다' 라는 명제를 증명해 주고 있는 여러가지 증거들이었다.

 

'만약 일어났던 일련의 모든 사건들이 정말이라면....?

 

영화나 소설이나 게임에서나 보던 좀비들이 정말 생겨나고 있는 거라면?

 

만약 그렇게 된다면 어떻게 해야하지....?'

 

난 그런 생각에 사로잡혔다.

 

아까 상훈이가 말한 것이 다시 떠올랐다.

 

상훈이가 말한 것처럼, 학교에서 집까지는 꽤 거리가 멀었다. 차가 안 막힐 때는 40, 차가 조금 막힐 때는 50분 정도가 걸렸다.

 

아무리 거가대교가 생겨서 빨라졌다곤 하지만, 만약 그 먼 거리를 정말 걸어간다면 그건 미친 거나 다름 없었다.

 

그런데 만약 정말 좀비가 생겨서, 아니 좀비들이 이 주변을 가득 메우고 이 세상을 가득 메운다면...?

 

지금 당장 기숙사가 좀비로 가득 차서, 탈출 후에 거제도까지 걸어가야 한다면....?

 

생각하고 싶지 않았다.

 

애초에 그런 일이 아닐 거라고 믿고 있었고.. 그런 일이 일어나지 않았으면 하고 마음속으로 바라고만 있었다.

 

하지만, '이상한 일이 생기지 않을 것이다, 그런 대 재앙이 일어나지 않을 것이다' 라고 혼자 위안 삼기에는, 내가 본 광경은 너무나 처참했다.

 

계단 수십 칸을 굴러 떨어지고 목이 부러져 죽어버린거나 다름없는, 아니 그냥 죽어버린 그런 사람이 다시 몸을 일으킨다?

 

또 그 사람이 다른 사람을 물어 뜯어버린다...?

 

그리고 그 사람.. 아니 그 것.. 아니 그 괴물의 입에서, 그 괴물의 목구멍에서 나오는 소리는 사람이라곤 생각도 못할 그런 짐승의 소리다..?

 

아니기만 바랬다.

 

아니기만 바라고 있었다.

 

제발 내가 걱정하고 상상하고 있는 그런 일이 터지지 않기를, 또 혹시나 터진다고 한다면 제발 거제도는 안전하길 마음속으로 빌고 있었다.

 

제발 나는 살아남을 수 있길 마음속으로 간절하게 바라고 있었다.

 

 

 

 

 

 

 

 

 

 

 

10분 정도 바람을 맞으며 쉬니, 몸에 있던 피로가 조금은 풀리는 기분이었다.

 

주변도 조용하고, 시체 놈들의 위협도 없고, 정말 마음 편하게 쉴 수 있었던 것 같다.

 

난 신발을 다시 고쳐 신고는 가방을 멨다.

 

'다시 또 하염없이 이 길을 따라 걸어야겠지.

 

끝이 보이지도 않는 이 길을 따라 하염없이 걸어야겠지.'

 

그러한 생각이 머리 속에서 끊이질 않았다.

 

목표 없이 그냥 정처 없이 떠돌고, 정처 없이 걷고 있다는 생각이 머리 속에서 떠나질 않았다.

 

가끔씩은 무섭기까지 하다.

 

이렇게 아무런 목표 없이, 갈 곳도 없이 걸어다니고 있는 내가 좀비가 아닐까 싶다.

 

이 세상에 남은 '인간'은 나 혼자인데, 그 혼자 남은 인간 조차도 좀비처럼 정처없이 이곳 저곳을 떠돌고 있다는 생각이 머리 속을 가득 메웠다.

 

10분 정도 쉬면서 내가 처음 놈들을 봤던 때를 떠올려서 영 마음이 불편한데, 더 마음이 무거워지기 시작했다.

 

처음 좀비를 봤던 때라... 그게 밤이던 낮이던 간에 그 일을 다시 떠올리는 건 정말 불편하다.

 

그 다음에 터졌던 일이 더 악몽같긴 했지만,

 

언제나 시작이 가장 기억이 잘 남지 않는가.

 

난 옆에 놓아두었던 크로우바를 다시 들고, 모자를 고쳐 썼다.

 

다시 또 이 길을 따라 하염없이 걸어 나가겠지...

 

개인적인 바람으로는 해가 지기 전에 뭐든지 발견했으면 좋겠다.

 

하다못해 공중화장실 부스 하나라도 발견했으면 좋겠다.

 

이렇게 야외에 있을 때, 밖에서 밤을 맞이한다는 건 죽고싶다는거나 다름 없으니까......

 

난 원두막에서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 다시 길을 따라 걷기 시작했다.

 

그리곤 다시 생각해보기 시작했다.

 

다시 떠올려보았다.

 

내가 처음 놈들을 보고 나서, 어떤 일이 생겼는지를 다시 머리 속으로 되뇌여 보았다.

 

 

 

 

 

 

 

 

 

 

 

상훈이가 가방을 챙기러 간 후, 10분 정도가 지났던 거 같다.

 

복잡한 마음을 진정시키려, 듣던 노래를 다시 재생시켰다.

 

우울한 이이언의 목소리가 다시 내 방을 채우고, 난 그 우울한 목소리에 다시 몸을 던졌다.

 

한곡, 두곡, 세곡.

 

귀속으로 꽂혀대는 노래 곡 수가 늘어날 때마다, 내가 봤던 참상은 잊혀지기 시작했다.

 

네번째 곡의 중간 즈음을 듣고 있을 때, 상훈이는 다시 내 방문을 두드렸다.

 

 "경현아, 나다 박상훈. 문 좀 열어줘."

 

난 기다리고 있던 손님을 맞이하며 문을 열었다.

 

문을 열자마자 볼 수 있었던 건, 뒤에 매고 있던 가방이었다.

 

수학여행이나 멀리 가는 때 아니면 잘 쓰지 않는 검은색 가방을 매고 있었다.

 

정말 지리산 산행코스를 갈 거 같은 사람처럼, 빵빵할 정도로 가방을 챙겨왔었다.

 

 "이거 침대에다가 좀 놔둔다?"

 

 ". 내가 자는 쪽 말고 반대쪽에다가 놔둬라."

 

상훈이는 방안으로 들어와서는 가방을 침대위로 던졌다.

 

가방이 침대위로 떨어질 때, 덜그럭 하는 소리가 들렸다.

 

도대체 가방에 뭘 넣어놨길래, 떨어지면서 덜그럭 소리를 낼 수 있는건지 내심 놀랐었다.

 

 "혹시나 여기 갖혀있는다든가, 아니면 바로 못 떠날 때를 대비해서 먹을 거 싹 긁어왔거든? 그거끼리 부딪혔나보네. 드럽게 덜그럭덜그럭대네..."

 

그럼 그렇지...

 

역시 그런 것 같다.

 

고기도 먹어본 놈이 안다고, 하도 좀비소설을 읽어대던 상훈이다 보니, 이런 식으로 서바이벌 킷을 챙기는건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친구였다.

 

 "아까 보니까 저녁 정독실 자습은 그대로 시킬 분위기더라. 철진이도 어깨쪽에 붕대 감고 있고, 그러는 거 보니까 일단은 그렇게 놔둘 거 같은데... 난 왤케 불안한지 모르겠다 진짜..."

 

상훈이는 현관에 신발을 벗어 던지며 방안으로 들어왔다.

 

난 정리해뒀던 스크랩 파일을 상훈이에게 건네주며 말했다.

 

많이 불안해하는 상훈이를 조금은 진정시켜 주고 싶었다.

 

 ", 그래도 이게 하루이틀만에 확 퍼지는 게 아니잖아. 만약 진짜 그거라면, 아직은 전조현상 정도겠지. 만약 진짜 거제 갈 거 같으면 지금 당장이라도 뛰쳐나갈 수도 있어. 근데 아직은 그렇게 불안해 할 필요 없....."

 

 "이미 퍼질대로 퍼진 상태에서 우리가 못 보는 거라곤 생각 안해봤냐?"

 

상훈이는 굳은 얼굴로 나를 돌아보며 말했다.

 

 "자꾸 최악의 상황만 생각하는데, 우리가 막 지금 망상하는 그런 건 아닐 거라고 믿자고. 일단은 그렇게 좀 믿자. 일단은. 오케이?"

 

난 흥분해 있는 상훈이의 어깨를 툭툭 치며 말했다.

 

지금 상훈이가 여기서 분개한다고 해서, 일이 풀리리라는 보장도 없고, 좀비인지 뭔지 하는 게 진짜 나타난지도 모르는 거니까......

 

 ".. 그래.. 일단은 알겠으니까.. 나 정독실 갈 때까지 니 방에서 있어야 할거 같다. 방에 철진이가 있던데, 불안해서 같이 못있겠더라."

 

상훈이와 철진이는 같은 방을 쓰고 있었다. 그렇기에 더 불안해 했던 걸까....

 

 "알았어. 난 괜찮으니까 편하게 쉬던지."

 

 "고맙다..."

 

그렇게 상훈이는 침대 위에 몸을 뉘였다.

 

그땐 알지 못했다.

 

그게 마지막으로 우리가 마음을 놓고 쉴 수 있었던 때라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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