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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ch] 가난한 후배
게시물ID : lovestory_64152짧은주소 복사하기
작성자 : 세나트라
추천 : 11
조회수 : 1594회
댓글수 : 34개
등록시간 : 2014/02/27 16:49:46

278 名前:エロじゃなくてごめん! 投稿日:02/05/23 15:40


우리 집은 작은 빵집을 하고 있었다.

아버지가 빵을 구워, 어머니가 가게에서 파는 식의 점원 두 명인 작은 가게였다.

나는 유치원 다닐 무렵부터 가게에서 일손을 돕고 있었다.

바로 옆에는 숙부가 하고 있는 두부 가게도 있어서, 같이 도왔다.

친구와 노는 것도 좋았지만, 가게에서 손님과 이야기 하는 편을 더 좋아했다.


내가 중학생 시절, 우리 가게에 자주 오는 아주머니와 자식이 있었다.

굳어진 식빵과 러스크와 빵의 가장자리를 사 갔다.

어머니는 언제나 함께 오는 여자아이에게 팥빵을 주고 있었다.

어머니는 “그 사람은 불쌍한 사람이란다.” 하고 말하고 있었지만 나는 그 의미를 잘 알지 못했다.

그러나 팥빵을 주었을 때의 기쁜 듯한 얼굴은 정말로 그림으로 그린 듯한 미소였다.



그로부터 얼마 후, 가게에 온 손님이 한 이야기로 어머니가 말한 말의 의미를 알게 되었다.

그 가정은 모자 가정으로, 자식이 네 명이나 있었는데 일찍 남편을 여읜 아줌마 혼자서 자식들을 기르고 있었다.

게다가 그 형제 한 명이 중학생으로, 내가 속한 동아리 후배라는 것도 알았다.

그 후배는 여자아이로 평범한 아이였다.

다만, 떠올려보면 도시락을 안 가져오는 날이 꽤 있었다. 나는 그 일과 들었던 이야기를 단번에 연상했다.

쇼크였다.

어째서 지금까지 깨닫지 못했던 걸까 하고 후회했다.

딱히 뭔가를 해줄 수 있는 것도 아닌데, 어쨌든 자신의 무신경함에 화가 났다.


다음날부터 그 후배에게 말을 걸었다.

가능한 한 가깝게 있으려고 했다.

그렇게 하지 않으면 마음이 풀리지 않았다.


도시락을 2인분을 가지고 등교를 하게 되었다.

우리 중학교는 도시락은 부실에서 먹는 것이 기본이었으니까, 후배가 도시락을 안 가져왔다고 알았을 때는 “나는 이제 배부르니까 하나 먹어 주지 않을래?” 라며 주기로 했다.

사양하면서도 “감사합니다.” 라고 기쁜 듯한 얼굴을 해주는 것이 무엇보다도 기다려졌다.



어느 날, 우리 가게에 후배와 평소의 여자애가 쇼핑을 왔다.

내가 알고 있는 한, 후배가 우리 가게에 온 것은 처음이었다. 

후배는 부끄러운 듯이 평소의 쇼핑을 했다. 그 때에 소근 소근 하며 “언제나 신경 쓰게 해서 죄송합니다. 저희 집이 가난해서….” 라고 후배가 말했을 때,

나는 눈물이 나왔다. 어머니도 울고 있었다. 후배도 울고 있었다.

나는 닥치는 대로 가게 빵을 봉투에 채워, 근처 숙부네 가게의 두부도 낚아채 와서 후배에게 건네주었다. 그러나 후배는 받지 않았다.

“먹고 살 수는 있어요. 사치스럽지는 못해도 괜찮아요!”라며 밝은 미소를 보이며 말했다.

나는 부끄러워졌다. 스스로가 한심하다고 느껴졌다.

그러자 아버지가 나와서는 “한 번 봉투에 들어간 빵은 판 물건이 되니, 그 아이한테 잘 부탁해서 가지고 가게 해라!”며 한 마디 하고는 다시 들어가 버렸다.

완고한 아버지다운 말이었다. 

어머니는 “무거워서 큰일이니 들어다 주렴.” 하고 나를 배려해주시는 것 같았다.


집까지 바래다주는 도중에 여러 이야기를 했다.

지금까지 살아온 이야기, 지금 살고 있는 이야기, 여읜 아버지 이야기, 장래 이야기.

가능한 한 천천히 걸으며 말을 나눴다.

내가 모르는 고생을 해오고 있다고 생각했다.

내가 일부러 도시락을 두 개 들고 다니는 일은 눈치 채고 있었다. 


집에 바래다 준 직후에, 후배네 아주머니가 사과하러 왔다.

“쓸데없는 소리를 해서 거지같은 짓을 하다니 죄송합니다.”라며 도게자로 사과했다.

내가 쓸데없는 일을 해버린, 지금까지의 경위를 아주머니께 말하자 돈만은 지불하겠다며 막무가내셨다.

어머니와 내가 곤란해 하고 있자, 아버지가 나와서는 “우리 집 빵 가격을 정하는 건 나요, 손님이 아니라. 내가 돈은 필요 없다고 하니 필요 없는 거요. 그게 내가 정한 가격이오.” 라고 말했다.

후배네 아주머니도 겨우 납득해 주셨다.



다음날, 후배가 내 도시락을 만들어 와 주었다.

이게 바로 날아갈 듯이 기쁜 일이구나 하고 생각될 정도로 기뻤다.

그리고 그 때 후배가 “무언가 답례를 하고 싶은데요….”라고 말했다. 

집에 돌아가 부모님께 상담한 결과, 우리 가게를 도와주기로 했다.

월급은 없지만 그 날 남은 빵은 전부 갖고 돌아가도 좋다는 조건이었다.

후배는 매우 기뻐했다. 


다음날부터 후배가 가게에 오게 되었다. 매우 밝아진 것 같았다. 

아버지도 낮부터는 빵을 거의 굽지 않았는데 , 저녁이 되어 남은 것들이 적어질 것 같으면, 서둘러서 빵을 굽게 되셨다.

제법 신경을 쓰고 있는 것 같았다. 

후배는 감기에 걸려도 매일 우리 가게를 도우러 왔다.

가게가 휴일인 때는 청소 같은 걸 도와 주고 있었다.

있는 것이 당연한 존재가 되어갔다.



어느덧 나는 집에서 제일 가까운 공립 고등학교에 들어가게 되었다.

후배는 고등학교로 진학하지 않고 일할 생각이었다.

후배가 우리 집에 지금까지처럼 고용해주지 않겠냐고 말했을 때,

“우리는 고졸 이상이 아니면 고용 안해. 하지만 고등학교에 다니면서라면 고용한다. 근로학생의 학비는 우리가 내마.”라며 아버지가 내쪽을 보곤, 히죽 웃으면서 후배에게 말했다.

후배와 어머니는 “죄송합니다, 죄송합니다.”, “괜찮단다, 괜찮아.” 하며 울기 시작했다. 

아버지는 혼자 고개를 끄덕이고 있었다. 나는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알 수 없었다.

결국 후배도 나와 같은 고등학교에 입학해, 중학교 때처럼 사이좋게 지내게 됐다.



고등학교를 졸업 해서, 나도 아버지께 빵 굽는 법을 배우게 됐다.

1년 늦게 후배도 우리 가게에서 본격적으로 일하게 되었다. 

후배의 남동생과 차녀도 나와 같은 고등학교에 들어가면서, 숙부네 두부가게에서는 남동생이, 우리 가게에서는 여동생이 일하고 있었다. 


지금은, 남동생은 숙부의 오른 팔로서 더부살이로 일하고 있다. 

여동생도 우리 가게가 업무 확대했을 때부터 멤버여서, 없으면 안 되는 존재가 되었다. 

제일 어린 여동생도 우리 가게에서 아르바이트를 하면서 고등학교에 다니고 있다. 


나와 후배는 올해 여름, 아이가 생겼다.




331 名前:エロじゃなくてごめん! 投稿日:02/05/24 16:01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나서 결혼하기까지의 일을 쓰겠습니다. 



나는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나서 아버지 밑으로 들어가 필사적으로 일을 배우고 있었다.

그렇지만 한 시기, 마에 씌였던 시기가 있어서, 친구의 소개로 동갑 여자애와 사귀고 있었다. 

일에는 지장가지 않게 했지만, 새벽에 귀가하는 일도 적지 않았다.

그 여자애의 방에 묵는 일도 많았다.

즐거웠지만, 언제나 마음 한 켠에 후배가 걸리고 있었다. 

일도, 판매장에 거의 가지 않게 되어서 후배와 이야기할 기회가 휴식 시간 정도 밖에 없었다.

그 얼마 안 되는 시간에도 내가 먼저 말을 건네기가 어려웠고, 또 무슨 이야기를 해야 할지 몰랐다.

후배는 가게에서의 웃는 일이 적게 된 듯한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매우 슬픈 눈을 하고 있게 되었다. 



어느 날, 후배가 가게에서 쓰러졌다. 점포 앞 정리정돈을 하고 있을 때였다.

어머니가 새파란 얼굴로 “구급차, 구급차!”라며 외치고 있었지만, 아버지는 가게를 뛰쳐나와 근처 진료소 선생님을 데려 왔다.

선생님의 이야기에 의하면 과로였다.

후배는 내 방 침대에 재워서 그날 밤은 우리 집 묵게 하기로 했다. 

나는 후배의 옆에 앉아 간병하고 있었다. 후배는 링겔의 효과가 있었는지, 일어나지는 못했지만 이야기는 할 수 있게 되었다.

후배는“죄송해요. 저는 이제 괜찮으니 여자친구분께 가 주세요.”라며 미소 띤 얼굴로 말해 주었다.

그러나 그 날은 갈 마음이 들지 않았기 때문에 후배의 곁에 있었다. 

나중에 어머니에게 불려 “○○ 쨩이 이렇게 된 건 네가 걱정을 끼쳐서야.”라고 지독히도 혼났다.

나도 그렇게 생각하고 있었기 때문에 아무런 반론도 할 수 없었다.

어머니는, 지금 사귀고 있는 애랑 헤어지고 후배랑 사귀어라, 그게 속죄다. 라며 울면서 내게 말했다.



확실히 사귀고 있던 그녀에게는, 후배에게 만큼이나 깊은 마음이나 친근감은 없었다.

믿지 않을지도 모르지만, 후배와는 우연 아니면 손도 잡은 적 없었다. 

키스는 물론 섹*는 생각도 못할, 확실히 순애였다.

중학교 때부터 어울려, 매일 함께 있었으니까 몇 번이나 그러한 충동에 사로잡힌 적도 있었지만 이성으로 어떻게든 억누르고 있었다.

지금 생각해 보면, 엣찌한 짓을 해서 싫어하게 되는 일이 무서웠으니까 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여자 손을 잡은 적도 없는 채로 고등학교를 졸업한 나라도 성욕은 확실히 있어서, 어디선가 발산하고 싶어서 어쩔 수 없었다.

그런 때에 친구가 소개해 준 그녀와 만났던 것이다.



그녀는 후배와는 전혀 타입이 달라서, 매우 적극적이었다.

만난 그 날에 팔장을 껴 오고, 키스도 했다.

다음날에는 그녀의 방에 불려 묵는 것 같은 관계가 되었다. 

그녀는 내 욕망의 전부를 알고 있는 것처럼, 전부  채워 주었다.

그녀도 좋아했다고 생각한다. 몇 번이나 응해 주고 있었다.

그러나 욕망이 채워지자마자, 후배의 얼굴이 떠올랐다.

그녀를 좋아했나? 하고 묻는다면, 좋아했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후배를 생각하는 감각과는 전혀 다른 것이었던 것은 확실하다.

그것이“우정”과“애정”의 차이인지, “애정”과“가족사랑”의 차이인지는 몰랐지만··· 

굉장히 미안한 말이지만, 그녀를 섹* 프렌드라고 생각하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매우 제멋대로인 생각이지만··· 



어머니가 울어서 말을 할 수 없게 되자 아버지가“어느 쪽을 선택하든 네 자유다. 단, 잘 생각해서 선택해라. 어중간하게 선택하고 ‘역시 바꿀래’ 따윌 말해서 ○○ 쨩을 울리면 내가 용서 안 한다. 정말로 좋아하는 애를 선택해라.”며 나를 노려보며 말했다.


나는 다시 후배의 곁에서 간병을 했다. 후배는 자고 있었다.

이상하게 이런 풍족한 환경에 있으면서도 음란한 감정은 일절 솟구쳐 오지 않았다.

곁에서 얼굴을 보고 있는 것만으로 매우 행복했다. 

나는 그대로 마루에 누워 자 버렸다. 정신 차리면 후배는 침대에는 없었다.

가게에 가보자 후배와 어머니가 말다툼을 하고 있었다.

“하루 더 쉬렴.”“이제 괜찮아요.” 하는 말다툼이었다.

결국, 아버지의 한마디로 하루 더 내 방에서 쉬게 되었다.

나는 간병을 명령 받았다.

그 날은 하루 내내 후배와 이야기했다.

중학교 무렵 모두에게 놀림 받은 일이나, 학창시절 추억이야기, 놀러갔던 때의 이야기.

즐거운 일도 괴로운 일도, 추억은 언제나 후배와 함께였다. 



내가 중 2, 후배가 중 1 때부터 줄곧 함께 있었으니까 당연하다고 하면 당연하지만, 그것을 깨닫자 마음이 정해졌다.

그 날도 후배를 우리집에 묵게 해서 하루 내내 이야기를 했다.

집에 돌아가는 편이 쉴 수 있었을지도 모르겠지만··· 

다음날, 나는 사귀고 있던 그녀에게 헤어져 달라고 부탁하러 갔다.

뭐라고 하면 어쩌지 하고 내심 생각하고 있었지만, 시원스럽게 OK 되었다.

나중에 친구에 들었던 이야기로는, 나 외에도 그 밖에 사귀고 있는 사람이 있던 것 같다. 

나는 서둘러 돌아가 후배를 불러냈다.

그리고 그녀와 헤어진 것을 말하고는 나와 사귀어줬으면 좋겠다고 고백했다. 

후배는 멍하니 있었지만, 잠시 후에는 울기 시작했다. “저 같은 건 안 돼요. 저 같은 건 안 돼요.”라며 반복할 뿐이었다.

어쨌든 생각해달라고 해서 그 날은 바래다 주었다.

집에 돌아가, 부모님께 그녀와 헤어진 일과 후배에게 고백한 일을 보고하자 두 분 모두 기꺼워 하셨다.

하지만 “네가 지금까지 해 온 일을 생각하면, ○○ 쨩에게 차여도 조금도 이상하지 않으니 각오해 둬라!” 하고 아버지께 들은 한 마디가 마음에 깊게 박혔다. 



다음날, 후배는 평상시보다 한 시간 일찍 왔다. 우리 가게는 새벽 4시부터 일하는데, 3시 전에는 벌써 와 있었다.

어제의 대답을 하고 싶다는 일이었다.

대답은 No였다. 

이유를 묻자 어렸을 적부터 신세 지고 있는 집 아들에게 더 이상 폐를 끼칠 수 없다, 교제는 뻔뻔스럽고 터무니 없다 라는 것이었다. 

부모님이 “오늘은 둘이서 차분히 이야기 해라.”며 휴일을 받았으므로 내 방에서 이야기를 하기로 했다. 

나는 지금까지 사귀고 있던 그녀의 일이 원인이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그러니까 그것을 어쨌든 사과했다. 전부 후배에게 말해, 이게 원인이라면 그리 말해달라고 부탁했다. 

그녀와의 일이 원인이라면 “자업자득”이니까 순순히 포기하려고 했다.

그러나 신세를 졌다든가 어쨌다든가 하는 억지같은 이유는 그만 두어 줬으면 했다.



후배는, 그녀가 원인은 아니라고 말했다. 그녀에 대한 것은 몹시도 분했던 것 같다.

자살하려고까지 생각한 적도 있던 것 같다.

그러나 내게 “그녀와 헤어져줘.”라고 떼를 쓸 수도 없어서 참고 있던 것 같다. 

후배는 꽤나 사양하는 마음이 깊어서, 정말로 나와 사귀는 것을 뻔뻔스러운 일이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나는 그런 거라면 내가 부탁할테니, 내 소원을 들어달라고 간절히 부탁했다. 그러자 가까스로 OK를 받았다. 

그 날, 우리 집에서는 축하파티가 있었다. 후배의 가족도 불러서, 두부 가게를 하는 숙부네 가족도 불러“교제 기념 파티”를 열었다.

나의 어머니와 후배네 아주머니, 그리고 후배는 줄곧 울면서 이야기하고 있었다.

그 때 후배의 남동생이 숙부의 마음에 들어 두부 가게에서 아르바이트를 시작하게 되었다. 



나와 후배와의 교제는 학생 무렵처럼, 손도 잡지 않는 데이트를 하고 있었다.

그러나 왠지 성욕은 채워지고 있는 듯한 생각이 들었다.

물론, 매일 자기위로는 하고 있었지만··· 

나도 타이밍이 안 좋아, 프로포즈하려 하면서도 좀처럼 하지 못하고 10년이 지나버렸다.

그녀와의 교제는 변함없었지만, 애정은 깊어져 갈 뿐이었다. 

우리 가게도 배달 등의 일도 많아져 , 점포가 꽤나 비좁게 되어 신축 하기로 했다. 

이 기회에 후배의 어머님도 우리 집에서 같이 살면 어떨까 하는 아버지의 제안에 나는 대찬성 했다. 



이것을 후배에게 알려주었다. 그리고 단번에 프로포즈를 했다.

평소처럼 후배는 울기 시작했다.

“저 같은 건 안 되요.” 병이 도졌기 때문에, 과감하게 껴안았다.

잠시 후 “부탁드릴게요.”라며 작은 목소리로 OK 해줬다. 

나는 약 10년간 계속 갖고 있던 약혼 반지를 겨우 건네줄 수 있었다. 


후배는 “저 같은 건 안 되요.” 병이었지만, 후배의 어머니 님은 “터무니없어요.”병의 소유자였다.

결혼 허가는 바로 받았지만, 같이 사는 일에 대해서는 한 달 이상 걸렸다. 

후배의 어머님도 우리 집에서 살면서 일하는 더부살이라는 일로 겨우 납득해, 지금은 우리 부모님 , 우리 부부 , 어머님, 여동생 2명, 다해서 7명이 살고 있다.

이제 곧 8명이 되지만. 

덧붙여서 남동생은 숙부네 딸과 사귀는 중이다. 데릴사위가 되는 것 같다.





후배네 아버지가 "없어졌다(なくなった)"가 원문입니다만,

집을 나간 건지 죽은 건지 몰라서 후자로 의역했습니다.


1차 출처 : 2ch

2차 출처 : http://blog.livedoor.jp/gunshot_x/archives/65199414.html

3차 출처 : 비공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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