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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벌레 이야기>, 이청준
게시물ID : readers_7542짧은주소 복사하기
작성자 : 릴케
추천 : 2
조회수 : 1514회
댓글수 : 2개
등록시간 : 2013/06/01 21:21:28

알려진 대로 ‘벌레 이야기’(표제작)는 영화 <밀양>의 원작이다. 이창동 감독은 1988년(작품은 1985년 작) 이 소설을 ‘광주항쟁에 관한 이야기로 읽고’, 꼭 영화로 만들겠다고 결심했다고 한다. 이 놀라운 이야기의 정치적, 지적 자극을 견뎌낼 독자는 많지 않을 것이다. 원작과 영화는 서로 빼어남을 다툰다. 영화의 내용은 약간 다른데 제목처럼(密陽, 시크릿 션샤인) 다소 밝다.

이 작품은 자식이 유괴 살해된 엄마의 고통, 가해자의 회개, 엄마를 신앙으로 인도하려는 교회 집사, 이를 지켜보는 작중 화자인 아버지의 이야기다. 아이를 죽인 남자는 옥중에서 주님을 만나 구원받고 안식을 얻는다.

그는 자신과 같은 경지에 이르지 못한 피해자 가족에게 “…제 영혼은 이미 하느님께서 사랑으로 거두어 주실 것을 약속해 주셨습니다…저는 새 영혼의 생명을 얻어 가지만, 아이의 가족들은 아직도 무서운 슬픔과 고통 속에 있을 것입니다. 저는 지금이나 저세상으로 가서나 그분들을 위해 기도할 것입니다”(42쪽)라고 간증하고, 이 말을 들은 아이 엄마는 자살한다.

더 이상 주님의 능력과 사랑을 믿지 않는 인간(25쪽), 하나님의 사랑보다 더욱 힘차고 고마운 고통받는 인간을 견디게 하는 분노, 저주, 복수심(27쪽), 사람이 할 수 있는 일과 할 수 없는 일(33쪽), 용서라는 피해자의 권한마저 빼앗아버린 신(39쪽). ‘벌레 이야기’는 다리가 불편한 4학년 소년의 유괴 살인이라는 현실만큼이나 감당할 수 없는 주제를 던진다.

나는 이 작품을 가해자와 피해자의 권력관계로 본다. 더불어 피해자가 가해자에게 행사할 수 있는 ‘권리’는 어디까지 보장되고 이해될 수 있는가를 생각한다. 사법처리도 여론도 엄마 편이지만, 압도적인 권력의 차이는 두 사람의 마음에 있다. 가해자에 대한 사법적 처벌도 피해자의 고통을 상쇄하지 못할 판에, 가해자는 피해자가 그토록 몸부림치며 갈망했던 신의 구원을 받고, 피해자는 가해자의 측은지심과 구원을 받아야 할 처지다. 우리 사회에서 가해자가 피해자에게 암묵적으로든 노골적으로든 용서를 강요하는 상황은 낯선 일이 아니다. 광주민주화운동이 대표적인 예다.

분노, 고통, 복수에 비해 용서, 화해, 평화는 우월한 가치로 간주된다. 종교는 말할 것도 없고 진보진영이나 여성운동, 평화운동 세력도 후자를 좋아한다. 분노와 복수는 극복해야 할 비정상 상태라는 것이다. 나는 탐욕이 아이를 죽였다면 용서와 화해라는 인간의 ‘고상한’ 욕망이 아이 엄마를 죽였다고 생각한다.

고통의 감정은 물질이다. 달리 해석될지라도 크기는 작아질지라도, 없어지지는 않는다. 그것은 몸에 있다. 가해자의 몸은 고통 경험이 없으므로 온갖 절대자의 이름으로 자기 마음대로 구원, 용서, 평화라는 관념의 향연을 주관할 수 있다. 초월(超越, dis/embodiment)은 득도가 아니다. 경험 없는 몸은 현실과 무관하므로 구원도 마음의 평화도 쉽다.

반면 피해자의 구원은 ‘고문하는 자’도 피해자도 지칠 만큼 고문의 노동이 지난 후, 잠시 들이마시는 숨 같은 것일지 모른다. 분노와 평화는 그 자체로는 아무런 뜻이 없다. 누구의 분노, 누구의 평화인가가 의미를 결정한다. 따라서 나는 용서가 저주보다 바람직한 가치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가해자의 권력은 자기 회개와 피해자의 용서를 같은 의무로 간주하는 데서부터 시작된다.

분노는 개인의 마음 상태가 아니라 구조적 권력관계다. 마음으로 다스릴 수 있는 감정이 아니다. 피해자의 분노는 관리나 통제의 대상이 아니라 불가능에 가까운 타인에 대한 헤아림, 지성의 영역이다. 나는 용서와 평화를 당연시하는 사회에 두려움을 느낀다. 2차 폭력의 주된 작동 방식이기 때문이다.

이 작품에서 아이의 죽음보다 더 잔인한 사건은 피해자에게 요구되는 용서와 치유라는 당위다. 사람들, 심지어 남편조차 피해자가 조용하기를 원한다. 가해자와 사회는 자신이 져야 할 짐을 피해자의 어깨에 옮겨 놓고, 불가능을 감상한다. 평화가 할 일은 그 짐을 제자리로 옳기는 고된 노력이지, 평화 자체를 섬기는 자기도취가 아니다. 


정희진.여성학 강사

http://www.hani.co.kr/arti/opinion/column/589999.htm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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