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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승만이 안창호 선생이 조직한 대한국민회 망가뜨린 과정
게시물ID : muhan_75463짧은주소 복사하기
작성자 : 반백백마법사
추천 : 36
조회수 : 1770회
댓글수 : 17개
등록시간 : 2016/08/20 19:28:48
박용만 계열 인사들은 이승만이 교포사회에서 잔악한 위험인물" 이라는걸 서슴없이 증언하고 있다.

'재미한인 50년사'를 저술한 김원용에 의하면 '이승만은 미주 한인사회에서 파쟁과 모함과 비난과 재판으로 세월을 보내다가 마침내 대한인 국민회와 별도로 자기를 지지하는 '동지회'라는 단체를 따로 조직해서 국민회와 적대관계를 지속하여 한인사회를 분열시켰다.'고 비판하였다.

1983년부터 하와이 이민 1세대 중 장금환의 딸 로베르타 장은 지금 살고 있는 하와이 이민 1세대를 상대로 인터뷰를 하였는데, 하와이 이민 1세대들의 증언에 따르면, 이승만을 부정적 시각으로 증오하는 사람들과 긍정적으로 보는사람들 등등 각각 서로 반반씩 존재했었다. 이승만에 부정적 시각가진 이들은 대한인 국민회 철폐한것과, 자신의 부모를 죽이려고 든 기억이 있었다고 증언한다.






1912년에 대한인국민회는 확대회의를 통해 대한인국민회 중앙총회, 상항지방총회, 하와이지방총회, 만주리아지방총회 서백리아지방총회를 상항에 조직함으로써 조직의 범위를 넓혔다. 

대한인국민회는 샌프란시스코에 중앙총회와 북미지방총회, 하와이에 하와이지방총회, 만주리아지방총회, 서백리아지방총회를 결성하였다. 지방총회 아래에는 지방회가 있었다. 

이는 한국 최초의 세계적인 조직이 되었다. 1915년, 신한민보 이대위 목사가 인터탑입한글 식자기를 발명하였다. 

이를 이용해서 신한민보를 발행하는 등 활발한 활동이 있었다.  그러나 1921년 이승만이 대한인국민회를 탈퇴해 동지회를 설립한 후 안창호가 속해 있는 대한인국민회와의 갈등이 시작되면서 쇠퇴의 길을 걷게 되었다.  

1932년 4월 이후 국민회는 이승만의 영향력하에 놓이게 되었다. 상하이 훙커우 공원 사건으로 안창호가 체포되었던 것이다. 

뒤에 출소했으나 1938년 안창호가 병으로 죽으면서 국민회 역시 이승만이 장악하게 되었다. 

그 뒤 1945년 이승만이 귀국한 뒤에는 임병직, 이원순 등을 통해 국민회에 영향력을 행사하였다. 1960년 이승만이 하야한 뒤 특별한 영향력을 발휘하는 지도자 없이 순수 교민 단체로 변모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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