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실입니까?”
“알 수 없다. 모든 들려오는 말들이 그렇듯 말이다.”
왕은 메마른 시선으로 자신 앞에 부복한 아들들을 내려다보았다. 아들들을 바라보는 왕의 시선은 참으로 메말라 비틀어져있었다. 방금 전 공주를 보던 눈빛과는 사뭇 다르다. 그 모습에 왕자는 몸서리가 쳐졌다.
‘끔찍하군, 저 늙은이.’
아버지를 생각하는 좋은 단어라고 하기에는 하자가 있는 단어였지만 왕자는 신경 쓰지 않았다. 그리고 모두가 그리 생각하고 있었다. 그의 아버지는 공포의 제왕이었다.
“뭘 그리 골똘히 생각하느냐, 휴브리스.”
“아무것도 아닙니다. 아버지.”
놀란 아들은 고개를 내저었고 왕은 턱을 쓰다듬었다. 솜털하나 없는 미끈하게 면도된 턱이었지만 못 마냥 빠른 턱은 그를 오만하면서도 노회하게 보이게 만들었다. 주름 속에 박힌 자갈 같은 눈은 뱀의 혀 마냥 자신을 훑는 듯 했다.
소름이 끼쳤다.
“그래, 아무것도 아니느냐. 휴브리스?”
“예.”
“그럼 아무 생각도 없는 휴브리스야, 말해 보아라. 너는 이 정보를 어떻게 생각하느냐?”
휴브리스는 숨을 들이쉬었다.
“그것이 사실이든 아니든 우리는 그에 대한 방비를 준비해야 합니다. 혹여 이퀘스트리아가 진정 우리를 노린다면 마땅히 그에 맞는 방비를 해아만 하고 그것이 아니더라도 세 나라가 한 나라로 통합된 이 혼란스러운 시점에서 우리나라에 그에 준하는 위해에 처할 것은 분명한 사실입니다.”
“호오, 그러냐?”
변신수들의 왕은 휴브리스의 말에 아무런 반응도 보이지 않은 채, 자신의 둘째 아들을 바라보았다.
“그래, 사티로스. 넌 어떻게 생각하느냐?”
사티로스는 휴브리스를 힐끗 바라보았다. 도전적인 눈빛이었다. 휴브리스는 그런 동생의 눈빛을 싫어했다. 사티로스, 그는 언제나 그런 눈빛을 짓고 다녔었다. 비록 자신이 아비에게 혼났을 때에도, 형에게 꾸지람을 들었을 때에도 결코 그 눈빛의 활기는 줄어든 적이 없었다. 도리어 더 심해질 뿐이었다.
그 도전적인 눈빛엔 언제나 야심이 일렁거렸고 입매는 매서웠다. 사티로스는 불꽃같은 사내였다.
“전 분명 형님을 존경합니다. -휴브리스는 코웃음을 쳤다.- 허나 형님의 저 주장은 너무나도 기운 빠지는 소리일 뿐이지요. 삼국이 통일을 이루고 그 안에서 내적 혼란이 일어나고 있을 지금, 그들이 우리에 대한 전쟁을 상정하고 있던, 있지 않던 우리는 그들을 공격해야만 합니다. 지금이 기회입니다, 아버지!”
“알겠다. 자 펠롭스. 넌 어떻게 생각하느냐.”
기다렸다는 듯 펠롭스의 입이 열렸다. 아직은 어릴지 모르는 소년인 그는 자신만만했다.
“두 형님의 말씀은 엉터리입니다. 지금이 태평성대라고 지껄이는 자는 분명 권력에 눈이 먼 자이겠지요. 지금 나라를 보십시오, 아버지. 국민들은 끔찍한 혹세에 어려움을 토로하고 있고 전쟁을 일으키기에는 나라는 참혹한 제정에 허덕이고 있습니다. 현실을 똑바로 보십시오, 아버지. 지금 나라는 자신 하나 제대로 건제키 힘든 몸입니다! 저 전쟁광들의 말을 듣지 마십시오, 부디 지금 저 나라의 국민들의 면면들을 보십시오. 저것이 현실입니다, 저것이 사실입니다! 나라를 생각해 주소서!”
펠롭스는 야심만만하게 외쳤다. 그만이 옳다는 정의하에, 그는 당당했고, 형제의 칼 같은 비난을 맞이해야만 했다.
“얼간이 펠롭스! 넌 언제나 저 성 밖에서 빌빌대는 국민이란 것들을 걱정했지. 그게 뭔 대수란 말이더냐! 나라가 없으면 저들도 마찬가지로 없는 것이다! 국가가 모든 것을 지탱한단 말이다, 펠롭스! 네 잘난 그 '국민'은 이제 듣고 싶지도 않다!”
사티로스는 맹렬하게 펠롭스를 비난했고, 펠롭스도 가만히 듣고 있지만은 않았다.
“닥치십시오! 그것이 위정자의 말씀이란 말입니까! 위정자란 무릇 피통치자를 진심으로 생각해야만 하며......,”
“그런 헛소리가 실로 이루어질 것 같으냐, 펠롭스! 결국 우리는 지배한다. 저 얼간이들이 뭔 생각을 하든 상관없이 우리들은 지배하고 저들은 지배당한다. 이것이 진리고 사실이란 말이다. 너야 말로 현실을 직시해라 펠롭스! 저들을 끼어 들일 만큼 우리는 그렇게 한가하지 않아!”
“형님의 그런 모습이 국민들을 더욱 왕조에 등 돌리게 하는 모습이란 말입니다!”
“오냐, 한번 해보자는 것이로구나. 덤벼라, 펠롭스!”
“예, 바라던 바입니다. 형님. 마냥 어리기만 했던 제가 아니란 말입니다!”
두 명은 순식간에 패검한 왕자의 보검을 잡았고 왕의 탁자가 굉음을 울렸다. 왕이 왕홀로 탁자를 후려친 것이다. 순식간에 장내는 침묵만이 가득해졌고 왕은 눈을 부라렸다.
“두 놈 다 닥치거라! 감히 어느 안전이라고 언성을 높이느냐!”
다시 한번 왕홀이 탁자를 후려갈겼고 모두가 몸을 움츠렸다.
“휴브리스, 얼간이 같은 소리였다. 사티로스, 멍청한 소리였지. 펠롭스, 너의 말 잘들었다.”
펠롭스는 순간 얼굴을 폈다.
“그딴 개소리는 저기 돼지새끼들한테나 지껄여라!”
왕홀이 펠롭스의 얼굴로 날아들었고 펠롭스는 비명을 지르며 머리를 숙였다.
“온통, 온통 얼간이들뿐이군. 전부 나가라! 꼴도 보기 싫다!”
왕은 진저리 치며 문을 가리켰고 왕자들은 왕에게 머리를 조아리며 대전을 빠져나갔다.
묵언의 퇴장이었다.
“제길, 망할 늙은이. 죽을 때가 됐는지 히스테릭 만발이로군.”
“입 닥치거라, 사티로스. 그것이 네 아비한테 할 말이더냐.”
“허, 형님. 저게 진정 우리 아비라고 생각하시우?”
사티로스는 다시 그 불꽃같은 눈빛을 불태웠다. 휴브리스는 그 눈빛이 싫었다.
“저건 그냥 늙은이요. 그냥 죽을 때가 되어 미쳐 날뛰는 늙은이! 저딴 게 우리 아비라니.”
“형님. 그건 말씀이 너무 지나치시군요.”
“펠롭스, 너도 속으론 똑같은 생각을 하잖느냐. 저딴 늙은이, 빨리 죽어버렸으면 하지? 하! 그래도 난 알지, 왕이 누굴 왕세자로 지명할지. 뻔한 일이야.”
사티로스는 금세 만족스러운 미소를 지어보였다. 그리고 모두는 사티로스의 그 모습을 노려보았다. 모두가 쉬쉬하는 이야기지만 어차피 유명한 소리였다. 왕이 왕세자로 사티로스를 유념해 두고 있다는 것. 모두가 알고 있는 사실이었다.
왕은 그리 욕할 지라도 결국 자신의 통치 철학이 가장 잘 베여있는 사티로스를 왕세자로 지명할 것이다. 분명, 그럴 것이란 걸 알고 있었다.
“아뇨, 아버님은 결국 자신이 옳지 않은 일을 하신 것을 인정하시고 저를 왕세자로 임명할 것입니다!”
아직 야심만만한 어린 성군, 펠롭스는 그 사실을 인정하고 있지 않고 있었지만. 어린 성군의 말에 사티로스는 박장대소를 터뜨렸다.
“하, 하하하! 왓하하하하! 뭐, ‘옳지 않은 일을 하신 것을 인정해?’ 헛소리! 그 늙은이는 고집불통에다가 멍청이란 말이다, 펠롭스! 그 고귀한 이상은 접기를 바라지. 아니, 언제 한번 빈민굴을 견학시켜줘야겠군. 굶어 죽어가는 그들 앞에서도 지껄여보시지, 성군 나으리. 국가는 당신들을 사랑할 수 있고, 그들 또한 국가를 사랑할 수 있다고 말이야! 그게 네 명대사 아니었나, ‘착하디 착한’ 펠롭스! 와하하핫!”
잔뜩 비아냥 거리며 사티로스는 장내를 걸어나갔고, 펠롭스는 잔뜩 얼굴을 찌푸렸다. 울먹거리고 있는 그의 입속에선 중얼거림이 기어나왔고 바로 옆에 있던 휴브리스는 그 말을 들었다.
“......, 언젠간... 모두 사랑할 날이 올거야....... 모두가, 모두를 사랑할 수 있는 날이... 분명히.”
동생의 중얼거림에 휴브리스는 고소를 머금었다. 자신이 저런 생각을 했던게 언제더란 말인가. 분명 자신도, 저 오만방자한 사티로스도 모두 한번쯤은 그런 이상을 꿈꿨었다. 자신의 아버지인 왕마저도 그런 생각을 했을지도 모른다.
자신이 국가의 순수를 왕에게 주장했을 때도 있었다. 사티로스가 울면서 휴브리스의 방을 찾아와 사랑의 힘을 주장했던 때도 있었다. 허나 왕은 그 모든 것에 냉혹했다. 사랑이라 말하는 것들을 짓밟았으며 국민을 위한 나라를 주장하던 자들을 탄압했다.
이 나라에서, 적어도 저 왕 아래에서 그런 이상은 금기인 것이다.
휴브리스는 쓰디쓴 기억들을 곱씹으며 그림자 진 복도를 걸어 나갔다. 날은 가을의 중턱, 단풍들의 황혼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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즐거운 포요일 아침입니다, 여러분.
포니포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