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이 '취향'의 문제라는 것에는 님 둘다 동의하시는 것 같아서, 거기에 대해서 비판하려 합니다.
취향이란 우리의 미적감각의 쾌 와 불쾌를 일으키는 것에 대한 선호도를 이야기하는 것이다.
즉 취향이라는 것은 분명 윤리나 형이상학적 문제가 아닌, 미학의 문제일 수 있다.
칸트는 그의 '판단력비판' 에서 취미판단에 대해 규정하는데,
취미판단은 미적 판단 양식의 하나로서, 미의 인상을 결정하는 것이 취미라고 보는 입장에서 어떤 대상을 아름답다거나 미적으로 쾌감을 준다고 단정하는 일을 이른다.
심미적인 범주의 문제에 윤리적인 기준을 가져다 놓는 것은 분명히 오류일 수 있다.
하지만 반대로 윤리적인 것을 심미적인 것으로만 해석하는 것 역시 오류일 수 있다는 사실을 간과해서는 안 될 것이다. 이를 위해 필요한 것은 무엇인가? 성性 이 인간에게 있어서 어떤 방식으로 해석되어지는 지에 대한 고찰이 있어야만 한다. 나는 성性이 심미적인 관점에서만 해석된 다는데에 의구심을 지니고 있다. 물론 성의 경험이 우리에게 쾌와 불쾌의 경험을 하게 하는 것은 맞으나, 그것이 전부는 아닐 것이다. 분명히 성은 윤리적 감정 또한 불러일으킨다. 성은 단순히 육체적 결합의 의미 뿐만 아니라, 생명의 잉태와 관계된 것이고, 또한 성은 사회적 의미또한 가지기 때문이다. 인간의 생명의 가치에 대해서 여러 관점이 있을 수 있으나, 인간을 단순히 하나의 기계가 아닌 존엄성을 지닌 존재로 인식한다면, 그런 생명을 갖을 수 있게 하는 어떤 행위에는 필연적으로 그만큼의 존엄성을 떠 받칠만한 숭고한 의미를 지니고 지니고 있는 것이 된다. 어떤 이가 피임을 하거나, 전혀 생명의 잉태와는 관계없는 성행위를 했다 할 지라도, 성 자체에 이미 의미론적으로 그러한 중요성을 지닐 수 밖에 없게 되는 것이다. 왜냐하면 의미라는 것은 하나하나의 현상에 부여되는 것이 아닌, 하나의 관념 자체에 부여되는 것이기 때문이다. 또한 성에는 사회적 의미가 있는데, 그것은 결혼이라는 관계가 성을 그 기저에 전제로 하고 존재하는 것이기 때문이며, 이러한 사회적 관계안에 윤리적 의미가 없다 할수 없다. 물론 결혼을 전제하지 않는 성관계는 어디에서나 일어날 수 있으나, 성적 결합이 인간의 사회적 관계를 필연적으로 야기시킨다는 것은 자명하다. 설사 단순히 육체적 관계만을 위해 성행위를 했다 할 지라도, 그 둘은 이미 '성적 파트너' 라는 사회적 관계안에 구성되어 있으며, 이 관계사이의 문제를 전적으로 윤리적 문제에서 해방시킬 수 없기 때문이다.
또한 존재론적으로 본다 하더라도, 성의 문제는 여전히 있다. 성이라는 것을 우리가 '추상화'하여 하나의 사물로 여기고, 그것을 대한다는 것 자체가 이미 잘못된 것이라고 본다. 왜냐하면 성이라는 것은 결코 관계밖에서 존재하지 않는 것이기 때문이다. 즉, 성이라는 것은 하나의 '관념'이 아니라, 이미 인간들의 '실존'이 그 자체내에 관계적으로 녹아져 있는 것이다. 그것을 성 이라는 개념을 통해 해부하고 그것을 호불호의 입장에서 논한다는 것 자체가 이미 '성은 이용하는 것이다' 라는 무의식적 전제내에서 가능해 지는 것이며, 그것은 성의 실제적인 모습에 있어서는 실상은 인간을 이용하는 것이 되는 것이다.
그러나, 요즘 사회의 인식은 성을 단순히 취향적 문제로 취급하는 듯 하며, 동성애 옹호가 또한 그런 점에서 이루어진다면, 그것은 건전한 옹호방식이라 볼 수가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