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종인 노선이 기존 야당 주류 노선과 근본적으로 결별하는 대목은 경제나 대북 문제가 아니라 오히려 여기, 리더에 부여하는 초월적인 지위다. 이 단호한 엘리트주의자의 세계에서 리더는 지지자의 뜻을 따르는 게 아니라 침묵하는 다수의 목소리를 예측한다. 리더가 쓰는 도구는 직감과 관찰과 사색과 지혜와 결단이다. 모조리 리더의 내면에서 일어난다. 그게 정확한 예측인지 외고집인지, 탁월한 결단인지 지지자를 외면하는 독단인지, 미리 알 방법은 없다. 리더의 고독한 판단에 민주적으로 개입할 경로도 막혀 있다.
선거 결과가 리더의 지혜와 결단의 ‘품질’을 사후에 확인해준다고 믿는 이 모델에서 리더란 무엇보다도 ‘선지자’다. 김종인 대표는 자신이 그런 선지자형 리더라고 믿는 것을 굳이 숨기지도 않았다.
이 세계관은 야권 주류와 결정적으로 충돌한다. “정치 과정에 시민 참여를 확장한다”라는 방향성은 야권 주류가 공유하는 가치다. 문재인 전 대표는 온라인 입당제로 10만 당원 가입을 이끌어내며 시민 참여 노선을 또 한 걸음 밀어붙였다. 하지만 선지자 모델로 보면, 시민 참여의 확장이란 리더의 지혜와 결단에 별 도움이 되지 않으며, 대체로 방해가 될 가능성이 높다. 이들은 리더가 지혜를 동원해 들어야 할 침묵하는 다수의 목소리와 결이 다르다. 이를 따라가면, 선거는 진다. 그래서 김종인 대표는 ‘지지자의 목소리에 구속받는 정치인’을 그릇이 작은 정치인으로 평가절하한다. 야당 지지층과의 갈등은 필연이다.
더민주의 고정 지지층은 새누리당 고정 지지층보다 작다. 게다가 더민주는 고정 지지층의 입맛이 까다로워 표 확장 시도가 간단치 않은 정당으로 정평이 나 있다.
김종인식 선지자 모델은 그 문제에 대한 해법 중에서도 하나의 극단이다. 다수 국민이 원하는 바가 무엇인지는 리더가 지혜와 결단력으로 잡아낸다. 거기에 동의하지 않는 기존 지지층은 그냥 무시한다. 총선 막바지, 기존 지지층이 문재인 전 대표의 호남 순례에 환호할 때, 핵심 전선을 교란한다며 김종인 대표가 시큰둥했던 장면은 누가 옳았든 간에 아주 상징적이었다.
선지자형 리더십은 특출한 리더에게 거의 초법적인 권한 위임을 요구하는 모델이다. “그래야 이긴다”라는 것이 김종인 체제 8개월이 내놓는 핵심 주장이다. 이것이 민주주의 원리에 맞는가라는 원론적인 질문은 제쳐두고라도, 이 모델은 리더가 오판할 때 제어할 방법이 없다는 중요한 약점이 있다. 2012년부터 양쪽 진영을 넘나들며 치른 전국선거 세 번에서 모두 이긴 김종인 대표는 자신이 충분히 검증받았다고 여긴다. 반면에 절차적 민주주의, 정치 과정의 투명성, 더 많은 시민 참여를 중요한 가치로 여기는 더민주 지지층은 선지자 리더십을 받아들이기가 더 어렵다.
더민주는 김종인 모델이 해결했다고 주장하는 과제에 대해 ‘선지자 모델을 뺀 해법’을 준비해야 그를 넘어설 수 있다. 아니면 대선이 다가오면 결국 선지자 모델을 대안으로 수용할 수도 있다. 김종인 체제를 겪은 더민주는 그가 한 번도 다녀가지 않았던 것처럼 굴 수는 없다. 이 독특한 리더가 남긴 숙제가 만만치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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