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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사IN 천관율기자에게 '분노한 남자들'로 명명된 이들을 위한 변명
게시물ID : sisa_755935짧은주소 복사하기
작성자 : 청자엽
추천 : 17/24
조회수 : 2880회
댓글수 : 57개
등록시간 : 2016/08/24 23:55: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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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긴 글이고, 개인적인 생각이라 습관적인 반말을 사용하는 점, 양해해주시길 거듭 부탁드리며 미리 죄송하다는 말씀 드립니다.> ----(추가)--- 반대가 많이 달리고, 오해를 많이 사고 있네요. 천관율기자 및 진보진영의 논리를 따른다 하더라도 메갈은 문제가 있고, 그들과 관련된 기사에 오류가 존재한다는 글인데, 댓글에서도 지적해주신 바와 같이 의식의 흐름에 따른 기법으로 한번에 쉽게 적은 글이라 오해의 소지가 많나 봅니다. 반대가 많은 글이라 오히려 지우지 못하겠다는 생각이 들어 글은 남겨두겠습니다.   
 
 
 
시사인이 메갈을 옹호하니 마니 하는 글로 들어가는 커뮤니티마다 난리가 나고 절독을 인증하는 글들이 있더라도,
 
 고제규 편집국장의 말 대로 "이명박 대통령 내곡동 사저, 국정원 정치개입 사건, 일베(일간베스트저장소) 분석기사 등 그동안 <시사IN>이 보도한 기사들을 한 번쯤은 떠올려"주었기 때문에,
 
절독을 할 의향은 현재도 없다.
 
메갈리아와 워마드에 대해 처음 접했던 나의 느낌은 "뭐여 이 사쿠라들은?"이었다. (경상도 사람이라 실제 이렇게 생각했다)
 
십수년 전 학부생시절 여성학 수업시간에도 만나보지 못한 새로운 형태의 (그들의 말에 따르면) 페미니즘을 접했던 내가 느낀 최초의 감정은 당혹감이었다.
 
당혹감이 어느정도 가시고 나서 든 생각은 80~90년대 페미니즘의 과정이었다.
 
남성화되기에서 여권신장으로의 전환, 그럼에도 이루지 못한 양성평등. 유리천장에 대한 울분이 인터넷문화와 결합하여 이제 2010년대에는 혐오의 언어로 분노가 표출되는 것이라 생각했다.
 
대부분의 경우 그들의 할머니와 어머니세대가 겪은 차별은 겪지 않았더라도,
 
변화하는 사회의 흐름에 때라 새로운 차별을 느끼며 살아온 당사자에게는 상대적 약자의 젠더를 지닌 자신들을 차별하는 기득권에 대해 빅엿을 선사하고 싶은 마음이 생기는 것은 인지상정이라고 생각했다.
 
일베가 김치녀라고 하면서 한국여자를 비하해도 여친이 일베에게 관심을 갖지 않는 것처럼,
 
나도 한남충이라고 메갈 및 워마드에서 비하한다고 해도 관심을 두지 않았다.
 
불특정 다수를 넘어 성별 전체에 대한 분노가 나를 특정한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그런데 페미니즘에 대한 공부는 셀프라는 기사에 이어 오늘 "분노한 남자들"에 대한 분석기사를 흥미롭게 읽게 되었다.
 
원래 글은 복잡하고 어려울수록 쉬운 이야기를 자신의 프레임에 맞추어 각색하려는 노력이 많이 가미된 것이라는 나의 평소지론에 따라, 그래서 결국 천관율기자가 무엇을 말하고 싶은지에 관심이 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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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나무위키를 통해 남성들의 심리를 치밀하게 분석한 기사의 요점은(내가 개인적으로 생각한) 결국 혐오의 대상은 공포를 느끼게 되는데, 메갈과 워마드의 미러링을 '분노한 남자들'이 남혐이라고 하고 있지만, 실제 남성들에게서 공포의 반응이 표출되지 않으므로 남성들의 반응은 결국 "부르투스 너마저"라는 강자의 자의식일 뿐이며, 혐오발화를 거세한다고 하더라도 '분노한 남자들'이 나설지는 매우 불투명하다.'는 것이다.
 
위의 긴 문장을 나는 셋으로 나누어 보고 싶어졌다.  1) 혐오의 대상은 공포를 느낀다. 2) '분노한 남자들'의 반응은 강자의 자의식일 뿐이다. 3) 혐오발화가 없다손, '분노한 남자들'이 나서지 않을 것이다. 요렇게 ㅇㅇ
 
2)와 3)에는 적극 동의한다. 아..2)는 부분동의라 해두고 싶다.
 
3)을 먼저 생각해 볼 때, 우리나라는 분명 젠더간의 불평등이 존재하는 나라임에는 틀림이 없고, 남성이 상대적 우위에 있는 것 또한 분명하다.
 
다만 과거에 비해 지금의 세대들은 그 성별에 따른 차별을 덜 느끼고, 덜 경험한 것은 사실이기에 대부분의 남성들의 경우 성차별의 정도가 과거에 비해 '완화되고 있다'고 믿는 것 또한 부인할 수는 없다.
 
하지만 현시대를 살아가는 여성들의 경우 그들이 받는 차별이 완화된 것은 아니기에 그에 동의할 수 없으리라는 것 또한 사실이다.
 
이러한 간극에 대한 인식을 바탕으로 하여 볼 때 인터넷에서 몇줄의 글을 싸지른다고 해서 나아질 것은 없다는 사실이 암담함에도 불구하고 오늘 나는 1)의 의견에 전제의 오류가 있다고 생각하여 '분노한 남자들'로 지칭되는 이들을 위한 변명을 조금 해보고자 한다.
 
천관율 기자는 혐오의 대상은 공포심을 수반한다고 가정하고 있는 듯 하다. 여성들의 경우 그러할 지도 모르겠다. 아니 그럴할 것이다. 다수가 아닌 소수가 혐오의 대상이 될 때 공포심이 드는 것은 당연할 것이다.
 
하지만 기자도 알고 있다시피 남성의 경우는 다수이기에 소수로부터 오는 혐오의 감정을 느낀다고 하여 그것으로 공포를 느끼는 것은 아니다. 이는 위협의 정도가 상대적으로 낮기 때문일 것이다.
 
따라서 남성들에게서 공포의 감정이 읽히지 않는다고 하여 메갈 및 워마드의 발언들이  남혐이 아니라고 보기는 어렵다.
 
또한, 기자는 메갈 및 워마드의 발언들이 포비아(phobia)에서 기인한 것임을 간과하고 있다. 기자가 말한대로 여혐에 노출된 여성들은 공포를 갖는다. 이를 기반하여 생겨난 미러링의 경우 그 혐오의 기저에 공포가 깔려있는 것은 자연스럽다.
 
그런데 이것은 혐오의 주체가 갖는 감정이지 혐오대상이 갖는 감정이 아니다. 기자는 혐오의 주체와 혐오의 대상을 혼동하고 있다. 여성들의 경우 여혐의 대상이 되기도 하지만, 메갈 및 워마드의 경우는 혐오의 대상임과 동시에 혐오의 주체임을 간과하고 있는 것이다. 
 
아... 물론 미러링의 기법을 사용한 것이기 때문에 그들을 혐오의 주체로 보지 않는 것은 기자의 입장에서는 자연스러울지도 모르겠다.
 
미러링의 기법이 전가의 보도가 아니라고 생각하는 나의 입장에서는 메갈 및 워마드 유저들은 혐오의 대상임과 동시에 혐오의 주체로 보이며, 따라서 그들의 경우 포비아에 기인한 반응들을 보인다.
 
하지만 남성들의 경우 특히 '분노한 남성들'의 경우는 포비아가 존재하지 않으므로 공포심이 존재하지 않는 것이다. 따라서 분노의 감정이 촉발 되는 것은 매우 자연스럽다.
 
이것은 남성과 여성이 그간 살아온 환경적인 차이에서 기인하는 것이다. 혐오의 감정을 수용하는 태도에 있어서 조차 젠더에 따른 차이가 존재한다는 사실은 매우 개탄스러운 것이나, 아쉽게도 그러하다.
 
누군가 나를 싫어한다면 그 존재가 특히 위협적이라면, 공포와 혐오가 동시에 일어나겠지만, 메갈 및 워마드들이 말하는 대로 여성은 상대적 약자이기 때문에 위협적이기 어렵다. 그래서 분노만 일어나는 것이다.
 
이 차이를 인지하지 않고 치밀한 분석만 한다고 한들 제대로 그 분석의 결과가 제대로 된 것이라고 보기에는 무리가 따른다.
 
남성과 여성의 처지가 다름에 분노하면서, 남성과 여성의 처지가 달라 수용의 태도에 차이가 있을 수 있음을 간과했다는 사실은, 기자가 보여준 치밀한 분석을 생각해 볼 때 그 노력을 짐작해 보면 매우 안타깝다는 생각이 든다.
 
메갈리아를 IS로 등치시키는 공식이 파괴되는 까닭은 공포의 유무에 있지 않다. 실제 한국인 중 IS에 공포를 느끼는 사람의 비율이 얼마나 될까?
 
메갈리아와 IS를 등치시키는 까닭은 공포에서 기인하는 것이 아니라, 그들의 행태가 유사하기 때문이다.
 
지극히 편협하고, 타인을 위협하고, 하지만 상대적 약자이며, 그럼에도 약자들의 집단 내에서도 차별이 존재한다는 것이다. IS의 경우 여성인권을 유린하고 워마드의 경우 성 소수자의 인권을 유린한다.
 
이러한 표면적인 유사성 때문이 '분노한 남자들' 및 당신들에게 동의하지 않는 여자들이 IS와 메갈리아를 동치시키는 것이다.
 
내 말을 왜 상대방이 이해하지 못할까라는 생각이 들 때는, 상대방을 이해 시키기 위해 이해하지 못하는 원인을 생각해 보아야 한다.
 
점마들이 무식해서 이해 못한다고 생각 하면 대화의 대상이 되지도 않지만, 동료 혹은 동지가 될 수도 없다.
 
차라리 메갈리아의 탄생 원인을 '과거 이래봐도 저래봐도 실패한 아픔을 지닌 페미니즘의 소산'인데, 그것이 왜곡된 방향으로 변질되는 경우가 존재하기도 하지만, 이를 제거할 것이 아니라 가다듬어서 '여성이라는 담론'을 형성하고, 그 담론을 제대로 풀어나갈 시점이 이제는 되었다는 기사를 썼다면 '분노한 남자들' 및 '한남충' 중 적지 않은 인원의 지지를 얻었을 것이다.
 
다만 그 지지가 '너희들 입맛에 맞추었을 때만 주어지는 시혜성 지지라 나는 사양한다'라고 생각한다면 어쩔 방도가 없다.
 
타협의 여지가 없을 땐 한쪽의견을 따르게 되기 보다 각자의 입장만 주장하기 바쁜 것인 대부분 인간들의 속성이기 때문이다.
 
 
 
그래도 나는 페미니즘을 지지한다.
 
내 어머니도, 내 여친도 여자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내가 딸을 낳을 수도 있기 때문이다. 필요에 의한 지지를 비난한다면 충분히 인정하고 비난을 받아들이겠다.
 
왜냐하면 비난할 이들도 알다시피 나는 남자라 여성들의 처지에 대해 '짐작'은 할 수 있지만 '완벽한 공감'은 할 수 없는 태생적 한계를 지니고 있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내가 페미니즘을 지지하는 부차적인 이유는 개인적인 경험을 토대로 비추어 볼 때, 나는 장손으로 살아오면서 각종 제사 및 집안에서의 역할 등 나름 여성들에 비해 힘든 점들이 있기는 했지만, 혜택을 누린 것도 사실이기 때문이고, 아직도 우리집안은 명절에 남녀가 겸상을 하지 않음에 대한 비판적인 의식이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남자들을 한남충이라고 칭하는 것도 개의치 않는다. 그것은 오죽하면이라는 생각이 드니까.
 
그래도 독립운동가, 민주투사, 위인, 아버지, 존경받아 마땅한 시대의 어른들은 특정하여 반인륜 패륜적 화법으로 농단하지 말자.
 
남자와 여자로 나뉘긴 했지만 우리는 어차피 같은 인간이라는 존재 아니겠는가?
 
 
끝으로 문학비평용어 중 폐제(除)라는 단어가 있다. 네이버의 설명을 참조하면 다음과 같다.
 
폐제(foreclosure)는 배척 혹은 배제로 옮겨지기도 한다. 폐제는 주체가 부성적 기표(부성적 은유, 아버지의 이름, 아버지의 법)를 수용하길 거부하는 것이며 정신병의 원인이 된다. 주체는 이 세상에 태어나서 자신이 대면하는 인물과 일차적 동일시, 상상적 동일시를 한다. 동일시의 대상은 주체를 돌보아주는 인물이며 보통 어머니라고 여겨진다. 그런데 주체는 상징계, 언어체계에 진입하면서 '아버지의 이름'이라는 부성적 은유를 수용하고 거세되어야 한다.

아버지의 이름, 부성적 기표(S2), 혹은 남근(phallus)이라는 기표는 어머니(를 향한 욕망)의 기표(S1)를 무의식 속에 억압하고 그 기표를 대체한다. 최초의 기표(S1)을 대체하는 또 다른 기표들의 일련(S2, S3, ...)은 주체의 분열과 소외를 불러오면서 욕망의 주체를 탄생시키고, 향후 주체의 상징계의 의미작용을 이끄는 기표들이 된다. 그런데 만약 주체가 '아버지의 이름'이라는 이 부성적 기표(S2)를 아예 처음부터 폐제하고 어머니와의 이자적 관계를 고수한다면 정신병이 촉발된다. 라캉은 정신병적 주체가 최초의 기표에 단단히 고착되어 있다고 언급한다(S 11, 238).

따라서 정신병적 구조에 위치한 주체는 자신의 결핍을 인식하지 못하고 상상적인 세계 속에서 살아간다. 그에겐 상징적 대타자(the Other)가 폐제되어 있기 때문에 그 대타자가 빠진 상징계의 결손, 구멍을 상상적 소타자(the other)로 메울 수밖에 없다. 슈레버(Schreber)의 사례에서 그는 아버지의 이름이라는 상징적 대타자가 부재하는 곳에 자신의 망상체계로 구축한 신을 위치시킨다.

라캉에 따르면 정신병적 주체는 상징적 대타자가 아닌 상상적 소타자에게 말을 건네는 것이다(S 3, 36-38). 정신병은 상징계에서 폐제된 것이 실재계에서 귀환하므로 상징적 언어를 매개로 하지 않으며 특수한 언어적 환각, 망상의 언어를 보여준다. 이 경우 주체는 기표와 기의가 일시적으로라도 연결되는 봉합지점(point de capiton, quilting point)이 없어 상징적 의미작용을 일으키지 못한다(S 3, 268-69). 따라서 정신병적 주체는 현실감을 상실하고 그가 창조해낸 새로운 현실인 망상, 환각, 환청 속에서 살아가는 것이다(S 3, 13).(정진만)
[네이버 지식백과] 폐제 [廢除, Foreclosure, Forclusion] (문학비평용어사전, 2006. 1. 30., 국학자료원)
요즘 세상이 아무리 미처돌아간다지만 우리는(현대 한국 사회를 살아가는 입장에서의) 미치지 말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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