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게시물ID : gomin_1020683짧은주소 복사하기
작성자 : 메이파
추천 : 3
조회수 : 126회
댓글수 : 0개
등록시간 : 2014/03/03 01:59:47
오십도 한참 넘긴 아버지가 오십도 안된 어머니 목을 밟고 위협하는 것을 본 날부터

아버지를 사람 취급하기를 그만두었다.

20대 초반, 연년생인...가장 사랑했던 남동생을 잃은 뒤부터

별로 좋아하지 않는 가족일지라도 얼마나 소중한지 깨달아 버렸기에 잘 지내려 했었다.

하지만 알고 있었다.

경찰서 정보과의 어린 여경과 동네에 유명한 주먹대장 출신인 버스 운전사.

타고난 성향부터 다른 부모님이 무슨 운명의 장난인지 30년을 부부로 살며

어머니 아버지는 이미 같이 지낼 수 없을 정도로 감정의 골이 깊었다.

자식을 잃은 슬픔도 그 한을 희석시키지는 못했다. 

오히려 더 불을 지폈겠지.

나는 아버지를 도발하여 어머니에게서 떨어지게 했다.

아니, 아버지는 없었다.

한 마리 짐승이 내게 돌진했다.

피할 수가 없었다.

내 뒤에는 열 살 터울의 어린 여동생이 있었기 때문에,

저렇게 화난 아버지에게 맞서는 일 말고는 다른 방법이 없었다.

그 때 나이 스물다섯이었지만, 정말 무서웠다.



분명 두 분을 놓고 보자면 불쌍한 쪽은 어머니이다.

바람에, 폭력에, 심지어 자식들을 인질삼아 위협까지 당하셨으니까.

나이를 먹고도 아버지는 전혀 철이 들지 못했다.

그러나 나는 어머니를 일방적인 피해자라고 생각한 적은 없다.

나에게는 어머니야말로 무서운 가해자였다.

초등학교 내내 별 사소한 일로도 9시간씩 야구 방망이로 맞았다.

어쨌든 여경 출신이며 강원도 소녀였던 어머니의 매질은 어린 나와 남동생이 견딜 수준의 것이 아니었다.

나 자신이 20대 중반을 지나고 나서야 비로소 깨달은 것은 

겨우 20대 초반에 날 낳은 당신 역시 철부지 꼬마에 불과했을테니 얼마나 힘드셨을까, 라는 것.

딱히 대단히 현명할 것도 없는, 지금도 돌아다니고 있을 그런 젊은 처자들 중 하나였을 어머니.

그러나 그렇다고 내가 그 시절 맞은 것들을 잊을 수 있는 것은 아니다.

걸음마도 하기 전부터 계속 맞아왔다.

걸음마를 하기 전의 기억조차 남아있기 때문에 차라리 잊어버리고 싶지만

어머니가 아버지에게 당한 일들을 잊지 못할 것이듯

나도 어머니의 매질과 폭언들을 영영 잊지는 못하겠지.



내게서 아버지라는 단어가 짐승과 동급이 된 날 이후 3년 정도 흐른 것 같다.

그 날부터 아버지는 한 집에 살지만 생활비를 끊어 버렸다.

뭐 관리비 정도는 내는 것 같지만 당장 수입이 없던 나와 어머니는 큰일이었다.

다행히 백화점 직원이었던 나는 어찌어찌 돈을 벌어 생활비를 보탰고,

어머니도 당뇨에다 구타 때문에 성치 않은 몸으로도 이를 악물고 식당에 나가셨다.



이듬해, 대학에 입학했다.

별로 대단할 것 없는 학교였다. 

검정고시 성적으로 수시를 썼는데 과 수석이었다.

그리고 2년간, 졸업할 때까지 단 한번 차석을 제외하고는 계속 수석이었다.

물론 돈도 계속 벌었다.

2년제라 그런지 학점은 매 학기 23학점이었다. 

일하면서 수석을 유지하려면 하루 평균 3시간 이상 잘 수 없었다.

대학 시간제 강사 중 한 명이 나를 자신이 운영하는 학원의 강사로 쓰겠다고 했다.

백화점 직원에 비해 더 버는 것은 아니었지만 공부에 도움이 되니까 악착같이 일했다.

그렇게 2년을 보내고 수석으로 학교를 졸업했다.

수석이란 타이틀보다는 장학금 30만원이 더 기억에 남았다.

돈에 얽매이지 않고 살고 싶어 문학 공부를 시작한 것이었지만, 

나 혼자 먹고 사는 문제가 아니었기 때문에 별 수 없었다.

나는 히어로물의 주인공 따위가 아니었으니까.



졸업 후 편입 문제는 잠시 뒤로 미루고 일에 전념하려 했지만, 

어쩐지 마음이 공허했다.

학원 강사는 그다지 적성에 맞지 않았다.

그렇다고 전공대로 글을 쓰자니 생계도 문제였고,

무엇보다 내 글은 형편없었다.

좋아하니까 10년이고 20년이고 노력은 할 수 있을 것 같았다.

다만 그걸로 먹고 살 수는 없을 것이었다.

아직 공부를 더 해야했다.

그보다 일을 해야 했다.

어머니는 고된 일로 손톱이 몇 개 빠지고 말았다.

그리고 가난의 상징인 결핵에 걸렸다.

여동생은 고2가 되었다.

가족들이 사회 초년생이나 다름없는 내 월급에 의지해야 한다.

그것이 오히려 나를 기운 빠지게 하고 있었다.

애초에 내 목표는 독립하여 자유롭고 싶었다.



얼마 전 베오베에서 누군가의 어머니가 신춘문예 소설 부문 등단했다는 게시물을 보았다.

나도 기뻤다.

그런데 그 이상으로 아팠다.

작품을 읽으며 내내 답답했다.

나는 시를 쓰니까, 라고 말하기엔 시 필사조차 하지 않은 지 꽤 되었다.

창작에 도움도 안되는 교과서 작품들은 많이 보았다.

쉬는 날에는 정말 무기력했다.

기본적인 집안 일 말고 하는 일이라곤 오유 눈팅뿐이었다.



어제 갑자기 아버지가 여동생과 나에게 말을 걸었다. 

집이 팔린다고 했다.

그 시간, 어머니는 외출중이었기에 아버지는 내 핸드폰을 빌려 어머니에게 통화를 했다.

굉장히 오랜만에 하는 통화였음에도, 닫힌 아버지의 방에서는 금세 고성이 울려퍼졌다.

한참 뒤, 아버지가 문을 열고 나왔다.

빚을 갚고 남은 돈으로 연립주택 같은 곳에 집을 구해서 자신에게 방을 하나 내 달라고 했다.

이 집이 팔리고도 같이 살자는 뜻이었다.

당연히 거부했다.

3년 전, 그 사건 이후 다같이 모여 집이 팔리면 아버지와 떨어져 살기로 약속했었다. 

단지 상황이 여의치 않아 이런 불편한 동거를 한 것일 뿐, 가능하다면 당연히 갈라서야 했다.

아버지를 용납할 이유가 없었다.

생활비 때문에 무리하다 뼈만 남은 어머니인데, 아버지는 어떻게든 어머니를 나쁜 여자로 만들고 싶어 계속 거짓말을 했다.

나보다 스토리텔링에 재주가 있었던 것도 같다. 

모든 사실을 알고 있지 않았다면 사치스럽고 개념없는 아내 때문에 초라해진 

 시대의 아버지상으로 보였을지도 몰랐다.

아버지는 망상 속에서 살고 있었다.

나쁜 어머니로 인해 고통받는 착한 당신.

그렇게 좋을대로 조작되어버린 기억 속에 들어가 자아를 보호하고 있었다.

이미 미쳤거나, 미치지 않기 위해 도망친 그 모습이 정말 불쌍했다.

물론 그렇다고 아버지와 함께 살 생각은 없다.

여기 이 집에 불쌍하지 않은 사람은 단 한 사람도 없으니까.



집을 판 뒤 남는 차액을 받기로 했다.

아마 그 돈으로 어머니와 여동생과 나, 이렇게 셋은 새로운 곳에서 살게 될 것이다.

3년간 이를 악물고 살아가며 바랬던 결말이다.

악당이었던 아버지는 결국 처자식에게 버림받아 쓸쓸한 노년을 보내게 될 것이다.

정에 이끌려 아버지를 받아들이기에는 

어머니와 여동생의 한이 깊다.

나에겐 자비가 없다.

젊은 시절 좋을대로 힘을 과시했던 아버지.

세월이 지나는 줄도 모르고 계속 휘두른 업보라 생각하면 간단한 문제겠지만,

사실 저렇듯 못난 사람은 아버지가 아니라도 세상에 넘쳐나는데

아버지에겐 유독 세상이 가혹하다는 생각이 든다.



물론 아직 문제가 산더미지만 

큰 문제가 해결되었는데, 어쩐지 마음이 쓰리다.

남동생이 그리워진다.

우리 모습을 하늘에서 보고 있다면, 얼마나 통곡할까.

월요일 수업이 있는데

아무 준비도 하지 않고 무엇을 하고 있나.

나에게 쉴 시간은 없는데, 더 힘을 내야 하는데.

지금은 그저 주저앉고 싶다.

계속 식구들과 함께 있었는데

어쩐지 나 혼자 있는 것처럼 느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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