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크림 타타르 인들의 역사에 관한 두서없는 짧은 이야기입니다.
게시물ID : history_14425짧은주소 복사하기
작성자 : Lemonade
추천 : 16
조회수 : 1647회
댓글수 : 5개
등록시간 : 2014/03/03 12:37:37
최근 우크라이나의 분쟁에 있어 흔히들 동부와 서부의 이분법을 많이 사용합니다, 실제로 그 것이 틀린 것은 아니지만 꼭 맞는 것은 아니지요, 가령 우크라이나 전체를 놓고 보았을때 친러계는 얼추 40% 남짓에 불과하며, 친러계의 중심이라 하는 크림반도를 보더라도 타타르 무슬림 그러니까 크림 타타르 인들은 극렬하게 반러 운동의 중심에 서있지요.
 
이 들 크림 타타르인들의 역사를 간단하고 두서없게 나마 적어보려 합니다, 크림 타타르인들의 기원은 저 멀리 몽골이 세계를 주름잡던 혹은 위명을 떨치던 시기, 탄생한 크림 칸국으로 거슬러 올라갑니다,
 
킵차크 칸국을 세웠던 바투의 동생 토카 티므르의 후손인 하지 기레이가 서로간의 목표가 틀리지 않았던 리투아니아의 도움을 받아 그러니까 하지 기레이는 자신의 세력을 가지고 킵차크 칸국으로 부터 독립하기를 원했고, 리투아니아는 킵차크 칸국의 분열을 원했기에 크림반도의 바흐치사라이를 기점으로 독립하여 건국한 크림 칸국에서 시작하는데, 크림 칸국은 건국 초기에 같은 크림 반도의 카파에서 활동하던 제노바 인들과 거의 필연적인 충돌을 반복했으나 배척보다 공존이 이득이 된다는 사실을 체감하여 손을 잡게 됩니다.
 
첨언을 하자면 이 당시 크림반도는 당연하지만 무주공산이 아니었습니다, 제노바인들이나 타타르 인들도 있었지만 그리스 계의 공국도 있을 정도로 여러 민족들이 북적북적대는 동네였고, 당연히 서로 피를 흘려 약점을 보이기 보다는 이득이 되는 공존의 길을 찾는 것이 유리했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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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의 페오도시아가 카파가 있던 곳입니다
 
여담이지만 이 카파가 유럽의 흑사병이 초래되게된 주요한 원산지로 꼽히고 있습니다, 당시 중앙아시아에서 만연하던 흑사병을 킵차크 칸국의 병사들이 고스란히 감염된채 공성전을 펼쳤고, 이때 병으로 죽은 병사 혹은 포로들을 투석기를 통해 성 안으로 던져넣었는데, 당연히 이 걸 처리는 하지만 일손이 부족한 바람에 처리하지 못한 시체에서 성 내부로 흑사병을 전염시켰고, 이후에 킵차크 칸국의 군대가 흑사병을 이기지 못해 철군한 이후 카파로 도망온 피난민들과 기타 사람드링 고향으로 돌아가기 위해 배를 몰고 유럽으로 가는 것은 좋았는데 그 안에 흑사병 보균자들이 있었던 것이지요
 
당연히 유럽이 항구에서는 병자가 있으니 맞아들었다가 이게 뭔가 아니다 하는게 삘이 오니 내쫓기를 반복해서, 콘스탄티노플, 메시나, 제노바, 마르세이유 등등의 주요한 항구마다 흑사병이 만연했고, 이게 내륙으로 전파되어 참사가 벌어졌다는 것이지요
 
아무튼 본론으로 돌아오자면 어쨌거나 이렇게 어려웠던 건국 초기의 굴곡을 잘 견디고 이대로 발전하나 싶었던 크림 칸국은 하지 기레이의 사후에 분열되고 맙니다, 처음에는 둘째인 누르 다울라트가 우세를 점했으나 여섯째인 멩글리 기레이가 제노바 인과 손을 잡게 되어 전세를 역전시켜버리지요
 
그리하여 멩글리 기레이가 칸의 자리에 오르나 싶었는데, 이 당시 이 들을 주목하던 세계 최강을 논하는 이가 있었으니 바로 오스만 제국입니다
 
당시 비잔틴 제국을 갈아버리며 국력을 주체할수 없었던 메메드 2세는 기세를 살려 크림반도로 진군합니다, 아닌 밤중에 홍두깨라고 난데 없는 위기에 봉착한 멩글리 기레이는 제노바 인들과 함께 격렬하게 저항을 펼치나 결국 무너지고 곧 크림반도 전역는 오스만 제국의 손아귀에 떨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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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렇게 크림 칸국은 당대에 끝나나 싶었는데, 여기서 멩글리 기레이는 줄을 갈아탈 생각을 합니다, 크림 칸국은 오스 만 제국의 신하의 나라로서 충성을 다하겠다는 맹세를 한 것이지요, 오스만 제국이 원할때 언제든지 군대를 보내야 한다는 조건이 붙었지만 속국이 된것은 언제나 그 들을 상대할때는 뒤의 오스만 제국이라는 세계 최강국과도 전쟁을 벌여야 한다는 말이니 그리 나쁘지 않은 선택이었습니다, 오스만 제국 역시 다른 속국들과 다르게 높이 평가하고 또 대해주었으니 멩글리 기레이는 줄을 잘 탄 셈이겠지요.
 
그렇다고 모든 국가들과 큰 문제 없이 잘 지냈나 하면 그것도 아닙니다, 크림 칸국의 인접한 국가들 간의 대략적인 외교 관계를 보자면 폴란드 - 리투아니아 연방과는 항상 그래왔듯 오직 전쟁뿐이었고, 코사크와는 조금 미묘한게 항상 서로 약탈을 반복하는 관계였으나 폴란드 - 리투아니아와의 관계상 서로 손을 잡는 일도 잦았고, 특별한 일이 없을 경우는 친하게 지내는게 보통이었습니다, 러시아와는 처음에는 동맹관계였으나 카잔 칸국의 칸 계승 문제를 놓고 대립한 이래 척을 지게되었고, 크림 타타르인의 역사에 있어 러시아 라는 것은 물론 역으로 모스크바를 불태우고 노예들로 부를 축척하는등 주고 받는 관계였으나 대체로 우리네 일제 강점기와 비슷한 감정의 관계를 품게 되었습니다.
 
카잔 칸국은 킵차크 칸국의 칸 울루 무하마드가 반란으로 내쫓긴 이후 카잔에 세운 나라로 건국 한지 얼마 안되어 함께 도망온 아들 마흐무데크가 일으킨 반란에 따라 울루 무하마드가 죽고, 주동자인 마흐무데크가 칸의 자리에 올랐는데, 이때 그의 동생 카심은 모스크바 공국으로 도망갑니다
 
여기서 이제 얼마 안지나 모스크바 공국의 내전이 벌어지는데, 승리자 바실리 2세 측에 선 것이 이 카심이고, 반대측에 선 것이 마흐무데크입니다, 첨언을 하나 하자면 바실리 2세를 장님으로 만든 것도 마흐무데크입니다.
 
그 공을 높이 평가 받아 카심은 카시모프라는 영지를 수여받아 카시모프 칸국이라는 까놓고 말해서 모스크바 공국의 괴뢰국을 세우게 되는데 이후에 이제 이 카시모프 칸국을 도와 모스크바 공국은 카잔 공국을 공격하게 됩니다, 그리고 마흐무데크의 아들 이브라힘은 연합군의 공세에 못이겨 결국 항복하게 되는데 여기서 끝이 아닙니다.
 
이제 이브라힘이 죽고 칸의 자리를 계승해야 하는데 그의 두 아들 일함과 무하마드 아민간에 내전이 벌어집니다, 일단 일함의 승리로 끝나나 싶었는데 무하마드 아민이 모스크바 공국에 지원 요청을 하여 결국 무하마드 아민이 칸의 자리에 오르나 무하마드 아민은 얼마 않있어 모스크바 공국에 대한 반란을 일으킵니다
 
처음에는 모스크바 공국에 대하여 승승 장구 하나 싶었는데, 얼마 지나지 않아 이 무하마드 아민이 죽고 다음 계승자를 찾아야 하는데 여기서 모스크바 공국과 크림 칸국간의 분쟁이 벌어지는 것입니다.
 
처음에는 카시모프칸국의 칸 샤 알리가 칸이 되었다가 3년 남짓 지나고 크림 칸국의 칸 무하마드 기레이가 쳐들어와 그를 몰아내고 동생 사힙 기레이를 앉혔는데 얼마 지나지 않아 노가이 인들과의 전쟁중 무하마드 기레이가 죽자 사힙 기레이는 자기 아들에게 카잔 칸국을 양도하고 크림 칸국으로 돌아갔는데, 그 틈을 노리고 모스크바 공국에서는 샤 알리의 동생 잔 알리를 칸으로 앉혔으나 모스크바 공국의 괴뢰국이 되는 것을 참을 수 없던 카잔의 귀족들은 곧 반란을 일으켜 사힙 기레이의 아들을 다시 복위시켰지요.
 
그러나 모스크바 공국에서는 얼마 지나지 않아 다시 개입하여 샤 알리를 앉혔지만 모스크바 군대가 떠나자 마자 또 사파 기레이가 복위하는데 이제는 러시아 제국이라 불리게 될 이 들은 다시 개입해 사파 기레이의 아들 외테미쉬를 폐위시키고 샤 알리를 앉혔지만 역시나 다시 반란이 일어나 이번에는 아스트라한 칸국 출신의 야디야르가 칸이 되었습니다.
 
아수라장도 이런 아수라장이 없는데, 그만큼 감정의 골도 깊어졌고 무엇보다 이는 작금에 이르르는 러시아와의 악연의 시작이었습니다.
 
그 악연의 시작은 그리 멀지 않아 찾아왔는데, 다름이 아닌 빈 공방전이었습니다, 유럽의 운명을 결정짓는 이 전투에서 오스만 제국이 이빨빠진 나약한 호랑이인것을 체감한 러시아 제국의 표트르 대제는 직접 크림 칸국을 침공하여 아조프 등을 점령하였고, 이후에 오스만 제국과 러시아 제국간의 평화 조약으로 돌려받았다 하나 이후에 러시아와 오스만 제국이 벌이는 전쟁은 대개 이 크림 칸국의 영토에서 벌어졌고 그 피해를 크림 칸국은 고스란히 뒤집어 써야 했습니다.
 
동방의 어느 나라의 쇠락을 보는 것 같은 기분이 드는데, 이후에도 상황은 비슷합니다, 퀴치크 카이나르자 조약으로 인하여 오스만 투르크는 크림 칸국이 독립된 나라임을 명시하였고, 러시아는 자신들의 꼭두각시나 다를바 없는 인물을 칸의 자리에 올립니다.
 
당연히 그 꼴을 못보는 귀족들은 들고 일어났으나 예카테리나 여제에게 진압되었고 꼭두각시로 앉혀놓았던 샤힌 기레이가 처형당하면서 결국 크림 칸국은 러시아에 병합되게 되는데, 수 많은 크림 타타르 인들은 쇠락한 나라의 운명을 피해 오스만 제국으로 이주 아니 도망을 택했습니다만 그 와중에 남아있던 이 들은 인고의 세월을 거쳐 러시아 혁명을 틈타 크림 공화국을 건설하게 됩니다, 물론 직후에 볼셰비키에 의하여 멸망당하고 말았지만 말이지요.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크림 타타르어의 사용을 규제 받는등 문화적으로 억압을 받기 시작하는데 이건 시작에 불과했습니다, 조지아의 백정 스탈린 께서는 크림 반도가 독일군에게 점령당했을 당시의 크림 타타르인들의 행보에 대하여 의심의 눈초리를 거두지 않았고, 남녀 노소를 가리지 않고 크림 타타르 인이라면 모조리 중앙 아시아로 이주를 시켰습니다, 대략 고려인들의 강제 이주와 비슷한 시기에 행하여진 이 정책으로 이주 도중에만 46%에 해당되는 인구가 죽은 것으로 추산되고 있습니다.
 
이후 흐루시쇼프에 의하여 귀환이 허락된 이래 약 20만명 정도가 고향으로 돌아간 것으로 파악되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현재는 우크라이나에는 약 25만 남짓한 인구가 남아있다고 하는데 물론 터키에도 10만여명이 남아있는등 크림 타타르인의 인구는 전 세계적으로 150여만명 정도 됩니다.
 
문제는 그 들의 반 러시아적 성향입니다,  크림 타타르인들의 문화가 구 소련의 말살 정책에 따라 상당수 소실되어 지금은 거의 러시아 화 되었다는 사실을 떠나 오랜기간 그 들 아래에서 억압과 착취, 고난의 시간을 보내야 했기에 이번 러시아 군의 진주는 그 들에게 달갑지 않은 일로 보입니다, 어찌보면 당연한 일일지 모르겠는데, 크림 자치 공화국에서 적극적인 구애의 손길을 보내는 것도 이 때문이겠지요,
 
크림 타타르 인들에게는 당연하게도 러시아 보다는 우크라이나 이지만 오랜기간 차별과 여타의 불합리함을 감내해온 드류네프 동쪽 크림 반도 일대의 주민들에게는 우크라이나 보다는 러시아이고, 겨우 독립의 시기가 온 지금 다시금 그 들 내부의 갈등으로 이 기회를 놓치고 싶지 않을테니 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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