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개강 첫 주에 여성문학관련 수업을 들었다. 교수님이 학생들에게 여성문학과 관련하여 이것저것 질문을 하셨는데, 김훈의 소설 <언니의 폐경>에서 생리통의 묘사와 관련하여 여성의 관점에서 쓰이는 작품의 작가의 성(性)에 대한 이야기가 오갔다. 학생들의 의견은 대부분 남성이 여성의(혹은 그 반대도 가능하겠지만) 고통(특히 신체구조가 다른 부분)을 묘사하는 데에는 한계가 있다는 명제에 어느 정도 동의하는 듯 했다. 더 나아가면 이렇게 생각해 볼 수도 있다. “내가 정말로 (어떻게)고통스러운1지는 나만이 알 수 있다고. 다른 사람은 짐작만 할 수 있을 뿐이지.”라는 식으로.
2. 비트겐슈타인의 설명을 빌려 조금 돌아가는 길을 선택해보자. 이를테면, 나만이 아는, 내가 지각하는 특정한 고통(p)을 느낄 때 p'라고 일기에 기록하는 것이다. 어떤 때는 p'인 것 같기도 하고 아닌 것 같기도 하지만 기록하기도 하고, 그렇게 하지 않기도 한다. 이 때, 사적언어p'를 기록하느냐 마느냐에 대한 기준은 완전히 사적(자의적)인 기준이 됨이 틀림이 없다. 이때 정합적인 사적언어는 불가능함을 알 수 있다. 그리고 매우 엄밀하게, 이 사적 언어는 공적 언어로 사용 불가능 하다.(나만이 그 지시대상을 안(다고생각하는) 용어 이므로)
3. 그렇다면 내가 나의 고통을 ‘안다’는 말은, ‘안다’라는 말이 널리 쓰이는 방식으로 사용될 때, 상대방도 나의 고통을 잘 ‘알게’ 된다는 비트겐슈타인의 말을 다시금 떠올려볼 필요가 있다.
4. 과학의 발달로 모든 통각지각을 원자단위까지 미분하여 정확하게 표현할 수 있게 되었다고 해보자. 이를테면 ‘p1133~’으로 시작하는 긴 일련번호가 붙는 통각을 상상해 볼 수 있다. 기호화된 통각은 우리에게 어떤 관념을 주는가?
5. 반면 문학은 차라리 고통을 문법적 언어로 말하지 않는 대신, 우리에게 그것을 (공)감각적인 그림으로 보여준다. [나는 어떤가. 나는 몸의 안쪽에서부터, 감당할 수도 없고 설명할 수도 없는 우울과 어둠이 안개처럼 배어나와서 온몸의 모세혈관을 가득 채운다. 물기를 잔뜩 머금은 스펀지가 물을 떨구듯이, 게눈에 거품이 끓듯이 조금씩 조금씩, 겨우겨우 몸 밖으로 비어져 나온다. 그런 날 나는 대낮에도 커튼을 닫고 어두운 방 안에서 하루 종일 혼자 누워 있었다.] <김훈 - 언니의 폐경 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