휴브리스의 말이 끝나고, 체인질링의 수뇌부 일동은 침묵을 지켰다.
그들이 특별히 침묵을 선호하기에 일어난 일은 아니었다. 그저 휴브리스의 계획이 너무나도,
“어처구니없는 소리야. 그딴 게 가능할 리가 없다고!”
사티로스는 결국 자신의 성질을 참지 못하고 말을 내뱉었다. 당연한 소리였다. 그의 계획은 어찌 보면 허무맹랑했고 어찌 보면 낭만적이었으며 수뇌부에게 있어서는 의미가 없다는 면에 있어서 개소리와 별반 다르지는 않았다.
그것을 휴브리스는 충분히 인식하고 있었다.
“그래, 이해가 안 되는 것이 당연하겠지. 사티로스. 그리고 여러분들 또한, 그렇게 내심 생각하고 계시리라고 사료됩니다.”
휴브리스는 조용히 자신의 아버지를 올려다보았다. 그에 사티로스는, 자신의 실책을 깨달았다. 전쟁의 모든 권력은 결국 루데셉툰에게로 집중된다. 그런 지금, 휴브리스가 왕에게 전술을 진언하는 중간에 끼어들어 반발을 했다는 것은, 루데셉툰에게 반하는 행위와 다를 바가 없는 소리다.
사티로스는 불쾌함이 뒤섞인 공포에 몸을 떨었다.
체인질링의 왕, 루데셉툰은 차가운 눈길로 휴브리스를 내려다보았다. 마치 그대로 굳어버린 석상마냥 움직이지도 않던 루데셉툰이 입을 열었다.
“자신있느냐, 휴브리스 군단장.”
“네. 물론입니다, 폐하.”
루데셉툰의 노회한 눈길이 한번 휴브리스를 훑고는, 단상 아래로 흘렀다.
“휴브리스 군단장의 의견을 받아들이겠다. 이견은 받지 않겠다.”
루데셉툰은 선언했고, 모두는 그 말에 번복이 없을 것임을 마음속으로 되새겼다. 그것은 말만으로도 절대성을 지니는 왕의 선언인 것이다.
“그리고 또 한 가지, 말씀드릴 것이 있습니다.”
“무엇인가.”
“......, 사실 제가 그들의 무기가 우리 체인질링의 국토로 들어온 것이라 상정한 이유는, 휴전협정을 위해서입니다.”
거대한 수군거림이 그 말을 뒤따랐다. 그에 엔반 군단장이 조심히 의문을 달았다.
“하지만, 휴브리스 군단장님. 도대체 어떤 이유에서의 휴전협정입니까?”
휴브리스는 얼굴에 불안을 기반으로 한 웃음을 띄었다..
“그러니까, 그들에게 있어서 이 전쟁은 단순한 수단이 아닌가. 하는 의문에서 출발했습니다. 네, 나무들의 회수이지요. 그리고 그들은 이미 그 목적을 달성했고 이 상황에서 우리는 휴전협정을 맺을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합니다.”
“방금 전 형님의 의견을 개소리로 치부해서 미안해. 형님은 더한 개소리를 얼마든지 할 수 있었는데 말이야. 형님, 그건 미친 소리야, 더없이 미친 소리라고!”
“하지만 이게 사실이다!”
휴브리스의 고함이 대전을 울렸다. 그의 눈은 격정으로 뒤덮였다.
“이게, 사실이다! 분명 우리는 그들에게서 계속해 연전을 거듭했지. 하지만 그 연전은 어디까지나 우리들의 전술적 우월성 덕분이었지 특별히 이퀘스트리아군의 전술이 형편없어서 승리를 거듭한 것은 아니다.”
“무슨 소리를...!”
“레베타토스 참사를 되새겨보아라.”
사티로스는 입을 다물 수밖엔 없었다. 어느 대비도, 어느 방비도 없이 속수무책으로 매몰되어버린 레베타토스. 이미 지도상에서는 없어져버린, 이제는 형체조차 찾아볼 수 없는 지하도시의 이름은 그의 입을 막아버리기에 충분했다.
“그들은 멍청하지 않다, 사티로스. 멍청한 군대였다면 애초에 2년간의 거듭되는 패전으로 이미 전멸했겠지. 하지만 그렇지 않았어. 도리어 그들은 지금까지의 패전을 기반으로 승전을 이룩해냈다.”
“입을 조심해, 형!”
“사실이다. 사실을 말하는데 까지 입을 조심하라고 말할 생각이더냐. 나는 지금 그들의 위대함을 말하고자 하려는 것이 아니다. 그들의 위험함을 말하려고 하는 것이지. 그들은 위험하다. 쉽게 보기 힘든 위험함이다. 우리는 지금껏 단 두 종족에게 밖엔 위협을 받지 않았다. 미노타우루스와 그리핀이 그것이지. 하지만 우린 지금 새로운 위험에 처했고, 그것은 분명 보다 강력한 위험일 것이다. 그들의 전술은 강력하고, 그리고 멍청하지 않아. 인정해야 합니다, 여러분.”
휴브리스는 주위를 둘러보며, 말했다.
“우리는 그들의 강력함을 인정하고, 휴전협정을 맺어야 합니다. 그들이 가지고 있는 무기는, 앞서 말했던 방법이 타개책이 될 수도 있을 테지만, 위험할 겁니다. 우리는 이성이 무엇인지 아는 종족입니다.
휴전을 맺어야 합니다.”
왕은 그 말의 시작부터 끝까지 아무런 미동도 없이 듣고 있었다. 휴브리스의 말이 마치 바람소리인 것 마냥 정말 아무런 반응도 없이. 그리고 그가 말을 끝마쳤을 때야 비로소 그의 입이 열렸다.
“인정하겠다, 휴브리스 군단장.”
휴브리스의 얼굴에 순간 화색이 돌았다.
“너의 멍청함을 말이다.”
“... 페하!”
“닥쳐라, 휴브리스 군단장. 이번 전투의 패전으로 인해 우리는 이천 삼백 명에 달하는 병사를 잃었다. 그것의 값을 메겨보라고 하진 않겠다. 하지만 비어버린 잔은 다시 채울 수밖엔 없는 것이다. 우린 그만큼의 피를 다시 메꿔야만 한다.”
“폐하, 제발 그러지 말아주십시오! 우리는 부나방이 아닙니다! 그것이 불인 줄 알면서 그것에 뛰어드는 멍청이는 없습니다! 우리는 우둔함을 증명할 필요가 없습니다, 제발 폐하! 다시 한 번 더 생각해주십시오!”
“타죽는 것은 이퀘스트리아일 것이다. 휴브리스 군단장. 우리는 수많은 잔을 가지고 있는 것이 아니다. 단 하나의 잔뿐이다. 수많은 잔이 있다면 우리는 그 개개의 용량에 큰 관심을 가지지 않는다. 하지만 휴브리스. 단 하나 뿐이다.
패배의 의미는 귀관이 생각하는 만큼 단순하지 않다.”
“폐하!”
“아들아.”
그 말에 휴브리스 뿐만이 아닌 그곳에 자리한 전부가 경악했다. 그들이 아는 그들의 왕은 그런 말을 하는 자가 아니었다. 모두의 주목 위에서, 루데셉툰은 입을 열었다.
짧은 문장이었다.
“그렇기에 너는 왕이 될 수 없다.”
휴브리스는 그 말에 갑자기 더없이 슬퍼졌다. 이유모를 슬픔에, 그는 눈물을 흘렸다. 터무니없이 맑은 눈물이었다. 모두는 그 눈물을 왕위계승권 박탈을 선고받은 왕자의 눈물이라고 생각했지만, 몇몇은 그것이 결코 그런 의미가 아니란 사실을 알 수 있었다.
왕은 권좌에서 일어섰다.
“오늘의 회의는 이것으로 마친다. 내일까지 휴브리스 군단장이 말한 계획을 실행할 수 있는 채비를 갖추도록. 이만 물러가도 좋다.”
왕은 휘장사이로 걸어 나갔고, 모두도 휴브리스의 눈치를 보며 슬며시 자리를 빠져나갔다. 모두가 빠져나간 자리에 남은 것은 휴브리스와 사티로스 뿐이었다.
여전히 휴브리스는 이유모를 슬픔에 빠져있었다.
“오늘 회의엔... 펠롭스가 참가하지 않았어, 형.”
눈물에 의해 도리어 깨끗해진 눈망울로 휴브리스는 동생을 바라봤다.
“그래, 알고 있다. 회의가 시작하기 전에 지적했었지.”
“펠롭스는, 자신의 군대가 참전하지 못한 것을 못마땅하게 생각하는 모양이더라고.”
“펠롭스의 일렉소(月桂樹) 중대는 전투 부대가 아닌 의전용 부대에 가까우니까. 참전하기엔 무리가 있었지.”
“형도, 나도. 의전용 중대의 대장이었지... 체인질링 왕가의 전통에 따라서,”
“하고 싶은 말이 뭐냐, 사티로스.”
“형,”
“위로할 거라면 관두어라, 사티로스. 너는 나의 슬픔의 이유를 알지 못한다. 나도 알지 못하는 슬픔이니.”
사티로스의 많은 지분을 차지하고 있는 반항이 발동했다.
“내가 형을 위로나 하려고 지금까지 기다린 줄 알아?”
“그러면, 무엇을 위해 남아 있느냐?”
“당연히, 형을 비웃어주기 위해.”
휴브리스는 실소를 터뜨렸고, 사티로스도 웃음을 터뜨렸다. 실로 오랜만인 형제끼리의 웃음은 길게 이어졌다. 그렇게 재밌을 수가 없다는 듯. 그 옛날 보웬세나 궁성의 정원에서 같이 뛰어놀던 때처럼 그들은 뒹굴며 웃었다.
이슬이 호박잎에서 굴러 떨어질 만큼의 시간이 흐른 후, 그들은 웃음을 멈췄다.
“그래, 형. 그래서, 형이 말한 방법이 정말 효과가 있을 거라고 생각하는거야?”
“그러길 희망하지.”
형의 그 말에 사티로스는 웃음을 지었다.
“맞아, 나도 그래.”
그들은 다시 웃음을 터뜨렸다.
달이 지고, 해가 하늘로 떠올랐다. 어제까지 내리던 비가 거짓말같이 느껴지는, 밝은 날이었다.
목숨을 위협받는 상황일 지라도, 자신이 그것을 알기 때문이든 모르기 때문이든 하던 일을 멈추지 않는 사람들이 있다. 주위 사람들은 그들을 보통 미친놈들, 이라고 부르길 선호하며 그들 스스로는 그것을 도리어 자랑스럽게 여긴다.
체인질링의 유서 깊은 학문과 진리의 전당, 천년의 상아탑 – 빌렌트뤼나 대학 또한 그 미친놈들의 반열에 올라서 있었다. “빛의 진리에 다가서려고 하는 학도들의 의지를 겨우 폭도의 전쟁으로 막으려 들 수는 없다.” 이것이 징병요구에 대한 총장의 답변이었고 체인질링 군 수뇌부는 이에 대해 잠정적 동의–침묵-를 보였다.
물론 애국심이 마음속에서 불타오르는 열혈 청년은 어디에나 있기 마련이고, 휴학계를 신청하고 곧바로 전쟁터로 달려 나간 학생들도 있었으나 빌렌트뤼나 대학 자체는 전쟁의 혼란과는 무관한 것처럼 모두가 학문에만 집중하고 있었다.
그랬기에, 오늘 아침 느닷없이 빌렌트뤼나 대학에 들어 닥친 체인질링 군대의 뤽센 소대에게 우르하리나 뮌센 총장은 아침인사를 질펀한 욕으로 대신했다.
“이 천하의 무도한 것들아, 더 이상 빨아먹을 피가 부족해서 이젠 이 학문의 성당까지 그 발을 들이미는 구나! 이곳이 감히 어디라고 그 모습을 들어 낸 것이더냐! 당장 꺼져라! 나의 학생들은 단 한명도 줄 수 없다!”
살벌한 병장기를 가진 병사들에게 저런 폭언을 날렸다는 사실에 그의 용감한 면모를 감탄할 수도 있을지 모르나 정작 소대장 뤽센은 이 미친 늙은이가 뭐라고 지껄이는 건지 이해가 안 될 뿐이었다. 허나 일반인에게 폭력은 휘두를 수 없다는 그의 군인으로서의 윤리관과 실재로 폭력이 일어날 경우의 질책 때문에 그는 폭력을 휘두를 수는 없었다.
초마(超馬)적인 인내력으로 뤽센은 총장에게 보여야 할 존경심을 지킬 수 있었다.
“반갑습니다, 우르하리나 총장님. 저는 사티로스 왕자님의 2군단에 소속되어 있는 뤽센 소대의 소대장 뤽센 지레나라고 합니다. 우선 학문의 전당 빌렌트뤼나 대학의 학도들을 징병키 위해 방문한 것이 아님을 저의 존경과 함께 말씀드리는 바입니다.”
“...... 그럼 무엇 때문에 이곳에 당도하신 건가, 지레나... 부사과(副司果).”
뤽센은 아마 알려진 계급명 중 가장 오래되었을 이름을 듣고는 저도 모르게 웃음을 흘렸다. 과연 빌렌트뤼나 대학의 총장이라는 생각과 함께, 우르하리나의 실수를 정정해주었다.
“뤽센 소대장으로 부르시면 됩니다. 총장님.”
“뤽센 소대장.”
“처음으로 당도한 학문의 전당에 이런 것을 요구하게 되어 대단히 유감스러운 일입니다. 총장님, 이 대학에서 이것을 빌릴 수 있을까요?”
뤽센은 억지로 주머니에 쑤셔 넣느라 잔뜩 구겨진 종이를 우르하리나에게 건넸다. 우르하리나는 그 종이를 펼쳐보고는 고개를 갸웃했다.
“물론 이 물건에 대한 합당한 보상금은 전후 왕실에서 처리해 드릴 것입니다.”
“아니, 뭐... 크게 어려운 부탁은 아니네만. 어디에 쓸 생각인가, 이걸?”
뤽센은 그 말에 싱긋 웃었다.
“저도 모릅니다.”
이와 비슷한 일은 비단 빌렌트뤼나 대학뿐만 아니라 다른 대학에서 또한 비일비재하게 일어났다. 병사들 중 임무의 목적을 알고 있는 병사는 극소수였고 그들 또한 목적을 말하지는 않았기에 실제로 자신들이 무엇을 하는지 아는 자는 아무도 없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터였다.
물론 대학 또한 그런 상태는 매한가지였다. 아무도 이해하지 못한 채, 혹은 어느 정도의 통찰력이 있는 교수들만이 사실을 깨닫고 곧 일어날 참극에 몸을 떨며 그것을 내주었다. 비록 대다수의 ‘그것’이 대학의 연구용이라 할 지라도 그 양은 실로 엄청났다.
군수품에 쌓여가는 ‘그것’들을 보며 휴브리스는 미소를 지었다. 억지로 입술을 비틀며 신음을 흘리는 것이 ‘미소를 짓는다’라고 표현할 수만 있다면, 분명 그럴 것이었다.
그렇지 못했기에 모두는 신음을 흘리고 있는 휴브리스를 무시하고 지나쳤다. 그것이 휴브리스가 혐오보다 못하다는 무관심을 받고 있다고 해석되어선 안 될 것이다. 도리어 깊은 사려에서 나온 행동이라고 할 만한 것이었다. 어찌되었든, 스스로를 동정하고 있는 자에게 관심이란 도리어 뼈아픈 것일 태니까.
물론 그렇지 않은 자도 있을 태였다.
“형, 어디 아파?”
휴브리스는 차게 식은 눈길을 목소리가 울려온 곳으로 돌렸다. 그곳엔 사랑하는 동생, 펠롭스가 있었다. 펠롭스, 불쌍한 펠롭스. 펠롭스는 본인의 나이에 의해 직접 전장에 나서지 못하는 것을 크게 안타까워하고 있었지만, 휴브리스는 도리어 그것을 다행이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전쟁이라는 것은 펠롭스 같이 착한 아이가 감당할 것이 못된다.
“아프긴 무슨, 왜 그렇게 생각하는데?”
“표정이 어두워, 형.”
휴브리스는 굳이 거울이 필요하지는 않았다. 자신을 바라보고 있는 펠롭스의 얼굴에서 자신이 어떤 표정을 짓고 있는지 보였으니까. 휴브리스는 그 대신 웃어보였다.
“괜찮아.”
“뭐가 괜찮아, 전혀 그렇지 않은 걸.”
“아니, 괜찮아. 너 덕분에 괜찮아 진 것 같아.”
거짓말은 아니었다. 휴브리스는 펠롭스 앞에서 자신을 속이는 짓 같은 건 하고 싶지 않았다. 휴브리스는 펠롭스의 어깨 건너 저물어가는 태양을 보았다. 영원히 타오를 태양이여,
“펠롭스.”
“응?”
“돌아가자.”
펠롭스는 그 말의 의미를 되묻는 짓 같은 것은 하지 않았다. 굳이 해야 할 필요는 없는 말이었기 때문임에 동시에, 말 대신 울음이 벅차올랐기 때문이다. 휴브리스는 그런 소년들이 이 땅에 많기를 바랐다. 죽기를 각오하는 청년보다 꿈을 꾸는 소년이 많기를 바랐다. 어느 무엇도 살해를 정당화할 수는 없다. 그렇다고 휴브리스는 굳게 믿었다.
석양이 짐과 동시에 체인질링의 사령부에서 명령이 내려왔다. 무한한 살해를 내포한 명령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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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빨이 아프네요.
열심히 이빨을 닦아야 할 필요가 있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끄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