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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숙집 이야기 - 입성
게시물ID : freeboard_751237짧은주소 복사하기
작성자 : Croite
추천 : 0
조회수 : 333회
댓글수 : 0개
등록시간 : 2014/03/09 22:07:13
나는 24살 공대 10학번이다.
 
본래 1학년을 마치고 바로 군대를 갔다와 지금쯤이면 3학년이 되어있을 때지만 여의치않은 사정으로 나는 1년을 공장바닥에서 구르다가 입대를 해
집 근처 순댓국을 파시는 할머니의 저 시베리아한복판에서얼어죽고귤이나까먹을 양평의 한 부대에서 기나긴 약 2년 안되는 기간의 복무를 마치고
너무나도 싸늘하고 심장에 비수가 꽂히는듯한 제야의 종소리를 들으면서 신정때 전역했다.
 
그렇게 신정때 전역이라는 눈물겨운 전역하고나서 말년때부터 생각해온 고민, 이제 학교를 어떻게 다니냐라는 문제가 전역한 나에게 사회에서 처음으로 겪게한 문제거리였다.
내 학교는 지방에 있는 국립대학교다. 대한민국에서 최저하의 공부인권을 자랑하는 고등학생신분이었던 당시의 나는 평범한 고등학생도 아닌 여자도 남자로 만든다는 산천초목도 벌벌떠는 위명을 자랑하는 공고생이었는데 그 때의 나의 장래희망은 나름 진지하게 생각해서 고등학교 교사였다.
그렇기에 당시 고3이던 나는 1층 3층 5층 각 과의 교무실에 화장실가듯이 들락날락거리며 수업때 나름 덤벼들어서 뇌리에 남겼다싶은 선생님들을 갱을가 교사가 되는 방법을 물으면서 진로를 어떻게 잡는지에대해 물어댔었다. 그 것이 거의 1학기 전반야를 차지하면서 그랬으니 요즘 가끔씩 훼미리주스한상자를 들고 찾아가면 단박에 알아보시고 반겨주실정도다. 물론 여기에는 졸업때의 공중파에 나온 사건으로 인해 더 컸지만 그건 다른이야기니 생략하겠다.
 
아무튼 그렇게 물어물어 가면서 정보를 모아보니 방법은 사범대나 교직이수받는 학과를 나와서 임용고시라는 것을 치고 배치받으면 된다. 혹은 우리학교처럼 사립학교에 원서를 내서 취직한다. 등등의 정보를 모을수 있었다.
 
하지만 나는 공고생이라 사범대는 역시 무리, 라고 일단 그 선택지는 접었다. 실제로도 수능을 보고 물리교육과와 수리교육과에 원서를 냈지만 탈락했고.
그 다음에는 교직이수받는 학과를 나오는건데 문제는 당시 우리집의 경제는 그렇게 좋은 편은 아니었다.
 
그 때 스스로 말하긴 부끄럽지만 상당히 철이 든 상태였기에 부모님께 효는 못할망정 빚을 지우지말자라고 스스로 생각하고 있었기에 서울과 수도권에 있는 대학은 등록금을 알아보고나서 생각을 그만두었다.
 
그러고나니 남는 선택지는 하나, 지방에 있는 국립대의 교직이수 학과, 라는 것이었다.
 
당시 나는 고등학교에서 공고지만 그래도 걔중에서도 공부하는, 전교상위권 성적이라 일단 대학으로 진학이 가능한 성적을 보유하고 있던 상태였다.
게다가 그 쪽 지방에 외가 친척들이 몰려있어서 지원받기도 쉽고 그런면에서는 이미 나는 그쪽 지방국립대를 선택하는게 어떻게보면 이미 정해진 일인것 처럼 된것이었다.
또 그것을 나는 학원하나 안다니고 스스로 독학하면서 이뤄낸 성과라서 지방국립대는 그야말로 떡볶이에 순대를 섞어먹는 것처럼 간단하다고 생각하고 있었기에 목표가 정해지자마자 몰입, 결국 다마 한큐에 뽀록나샷이 터지듯이 정시로 지원한것이 한 번에 합격했다.
 
그렇게 해서 나는 2010년도에 첫 캠퍼스 생활을 했고, 학교의 정책상 1학년, 그 것도 타지에서 거리가 있는 학생은 기숙사가 우선배정이라는 메리트로 기숙사에서 생활했다.
 
그리고 최선을 다해 장학금을 목표로 공부했지만 거짓말같이 40퍼센트를 낙제했다.
 
 
현재..
이번 학기부터는 정말 빡세게, 전 굴욕의 잃어버린 2010년도 2학기 낙제 성적을 복구하리라 맹세하면서 부대에서 땅을 파고, 컴퓨터 조립나사를 조이며 이를 갈고갈아 제대한 나에게 현실은 가혹했다.
 
그렇게 필사적으로 공부했지만 시험에서 말아먹어 40퍼나 날린 학점으로 인해 기숙사 배정 심사에서 바로 낙제당하고, 그 성적때문에 한국장학재단인지 한국사채재단인지 모를 국가에서 해준다는 국가학자금대출기준에서도 떨어져 200만원 남짓한 등록금을 개강 일주일전에 겨우겨우 납부한다던가 연이어 악재가 많았었다.
그리고 기숙사로 들어갈 수가 없다는 통보를 받고 이제 어떻게 해야하는지 고심에 고심을 거듭하는 나날이어져갔다.
 
하지만 아무리 고심해도 해결은 되지않고 복학신청을 해야되는 날짜가 다가와 나는 어쩔수없이 고민을 안고 지갑에 노란색 어떤 현모양처의 대가이신 귀부인 한 분과 초록색이 기분좋은 고기좋아하시는 아저씨 세 분을 구겨넣고 대학이 있는 곳을 향하는 버스에 몸을 실었다.
 
 
과사에 복학원을 내면서 제출하는 전역증이 남모르게 으쓱해짐이 곧 버스시간을 기다리면서 학교 밖 번화가를 거닐며 점차 사라져갈 무렵, 나는 또 그 곳에서 길을 잃고 말았다.
지금도 나는 한 번 와본길은 잘알지만 모르는 길은 5분거리의 길도 50분을 돌아서가는 남들은 잘 모르는 길치속성을 지닌 나라 40분 후면 버스시간이라는 것을 알고는 꽤나 골치아파했었다.
 
하지만 다행히 어찌어찌 가보니 터미널로 가는 아는 길이 나와 안심이 되었다.
 
그리고, 우연히 그 가던길 골목에서 한 현판을 볼 수 있었다.
 
'하숙생 모집' 이라는 고딕체의 45포인트정도 크기의 굵게라는 설정인듯한 현판.
 
하숙ㅡ 이라는 울림이 나는 말년시절 당직사관의 눈초리를 피해가면서 볼수 밖에 없게하던 재미를 느끼게한 명 드라마 '응답하라 1994'를 되새기게 하여 주머니속 얼마전에 큰맘먹고 교체한 G2의 시간을 보고 걸음을 놀려 그 현판에 적힌 하숙집을 찾아갔다.
 
막상 간 하숙집의 이모님은 정말 1994의 그 것과는 틀리긴해도 정말 친절하셨고 달에 37만원이라 조금 부담된다 하자 35만원까지 저기저 멀리 LA에서 안타를 후려치는 류현진투수처럼 후려치는 호쾌함에 이끌렸고, 결국 나는 당시 마음에 가장 들었던 1층의 외딴 방을 달에 35만원이란 가격으로 얻을 수 있었다.
 
물론 년간 계약이라는 조건이었지만 이 방의 전 주인은 대학원까지 마치니라 5년 반을 살다 갔다고 하셨다라고 하고 나도 그에 비슷한 학력을 갖추려 하니 상관은 없었기에 나는 만족했고 생각보다 저렴한 가격에 부모님도 통장의 잔고를 아낄 수 있어 대단히 만족하셨다.
 
 
그렇게 나는 개강 이틀 전, 하숙이라는 미묘하고도 낯선 이름을 가진 그 것과 대면하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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