변신의 여왕은 낭만을 꿈꾸는가
서(序)
난파된 듯 우리는 중심부를 향해 죽어간다.
심장 쪽으로 익사하듯이,
혹은 피부로부터 영혼으로 무너지듯이.
파블로 네루다, nothing but death
솔직히 이해하기 힘들었다. 이해할 수 없었다. 이해에 닿기에는 너무나도 먼 감정이었으니까, 라고 편하게 생각할 수도 있겠지만, 아, 그렇다. 이해하기 싫었다. 그런, 말도 안 되는, 웃기지도 않는. 전혀 받아들일 수 없는 상황이 자신의 주위에 가득하다는 것이 이해와 동떨어진 행동을 보이게 만들었다.
그래서 미친 듯이 소리 질렀다. 윽박질렀다. 날뛰었다. 부쉈다. 욕했다. 울었다. 눈물을 흘렸다. 부정했다. 인정할 리가, 인정할 수 있을 리가, 없어.
이리저리 부서진 가구들의 파편이 튀고, 조각난 파편에 살이 찢어져 피가 흘렀다. 이해가 되지 않는다는 표정으로 그는 바라봤다.
‘어찌 그러느냐,’
왜 그럴까요, 아버지.
천천히, 지친 남자는 자신의 아들이 난장을 핀 자리를 둘러보았다. 가관이라 할 만 했다. 멀쩡한 곳은 찾을 수가 없었고 이리저리 부서진 조각들이 피를 묻히거나 하며 땅바닥을 굴러다니고 있었다.
무심히 눈길을 돌리던 남자는 구석에 던져진 한 나무 조각상에 잠시 관심을 가졌다. 왜, 왜 이런 별 것 아닌 조각상이 나의 눈길을 잡는가, 남자는 이해할 수 없었다.
거짓이었다. 남자는 그것이 무엇인지 잘 기억하고 있었다.
한 때, 두 아들과 한명의 딸이 자신을 위해 조각상을 만들어 선물한 적이 있었다. 아, 내가 아직 저것을 가지고 있었던가. 이곳까지 저 물건을 가져온 자신을 남자는 이해할 수 없었다. 그리고 저 조각상을 보자마자 미친 듯이 괴성을 지르던 그의 아들도 남자는 이해할 수 없었다.
남자는 그 조각상에 다가갔다. 유심히 들여다봐도 조각상이 무엇을 본 딴 것인지는 알 수 없었다. 무엇을 본 딴 것이었던가?
기억이 나지 않는다.
“저게, 무엇이었던가, 기억하고 있는 자가 있는가?”
남자는 주위에 질문을 던졌다. 아무도 대답하지 않았다. 남자의 주위엔 아무도 있지 않았다.
“저것은 아버지를 위해 만든 것이었습니다.”
대답이 들려왔다. 남자의 주위엔 단 한명의 체인질링이 서 있었다. 남자는 그 낯선 체인질링에게로 눈길을 돌렸다. 어딘가 익숙해 보이는 얼굴,
그러고 보니 언젠가 대전에서 뒹굴고 있던 머리와 비슷해 보였다.
그것이 누구였더라, 기억이 나지 않는다.
“너는 누구냐.”
“당신의 슬픔입니다, 아버지.”
남자는 웃었다.
그가 듣고 싶었던 말이었다.
나의 형제는 여태껏 없었고, 앞으로도 없어야할, 최고이자 최악의 지도자였다.
-사티로스, 휴브리스를 생각하며.
“야, 이게 무슨 뜻이냐?”
남자는 거리에 붙은 벽보를 가리켰다. 여자는 뒤를 돌아보더니 중얼거렸다.
“‘신이시여, 왕을 보호하소서.’ 라고 적혀 있습니다.”
“웃기는군. 이놈들에게도 신이 있었나?”
“네.”
“뭐, 그렇겠지.”
남자, 즉 이퀘스트리아 군의 사직이었고, 지금은 참령인 테판은 머리를 긁적였다. 아무리 생각해도 로제니아에게 어떤 말을 해야 할지 감이 잡히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무슨 말을 하든 로제니아의 마음엔 닿지 않을 것임이 분명했기 때문이었다.
체인질링과의 화해를 위해선 그들의 글과 문화를 아는 사람이 필요할 것이라고 주장했던 소녀에게, 그러면서도 체인질링이라는 종족 자체를 몰살하기 위한 군대에 소속된 섭사직에게, 도대체 무슨 말을 할 수 있을까.
테판은 화를 내고 싶었다. 하지만, 누구에게 화를 낸단 말인가. 테판은 땅을 발로 찼다.
“이봐, 로제니아.”
“네. 테판 참령님.”
“너무, 자책... 하지 않았으면, 좋겠는데...”
“테판 참령님, 겨울의 밤은 깁니다.”
테판은 입을 다물었다.
“태양이 없는 것만 같습니다.”
“그런, 것 같지.”
테판은 마른 침을 뱉었다. 탁, 거리는 소리와 함께 침이 벽에 눌어붙었다. 침이 진득이 붙은 벽 사이의 균열을 따라 시선을 옮기다 보면 어느새 이 영락한 도시의 천장에 눈길이 닿게 돼버린다. 폭격으로 무너져 내린 천장들의 구멍 사이사이로 겨울의 달빛이 새어나왔다.
겨울은 밤이 길다,
“너무 길어, 망할.”
“내일 아침 6시, 해가 뜰 무렵 보웬세나 궁성을 공격하겠습니다.”
그 팬시의 말에 앉아있던 몇 명이 무심결에 한 곳을 바라보았다. 멀지 않은 곳에 우뚝 서 있는 보웬세나 궁성의 모습이 달빛을 받아 빛나고 있었다. 그 섬뜩한 아름다움에 누군가는 몸을 떨었다.
“쇠퇴해있는 체인질링 군은 야습을 꿈꾸기에는 너무나 약합니다. 하지만 궁지에 몰렸으니 털끝 정도는 뽑을지도 모르지요. 그러니 장교들은 주의를 기울여주시기 바랍니다. 분명 전쟁은 끝을 달리고 있습니다만, 어떤 일이 일어날 지는 아무도 알지 못합니다.”
장교들은 엄숙히 고개를 끄덕였다. 이렇게 벼랑 끝에 몰아붙였는데 자신의 실책으로 그 모든 것이 허사가 되어버린다면, 누구도 다시는 웃음을 얼굴에 담지 못할 것이다.
“정확한 계획은 내일, 아침에 알려드리겠습니다. 오늘은 이만 해산해주십시오. ... 모든 것은 이퀘스트리아를 위해.”
“모든 것은 이퀘스트리아를 위해!”
장교들의 우렁찬 복창과 함께 회의는 끝이 났다. 아니, 끝이라고 할 것도 없었다. 이제 그들에게는 마지막 숨통을 조이기만 하면 되는 간단한 일만 남은 것이다. 간단하다면 간단하고, 어렵다면 어려운 일이지만 이제 더 이상 팬시의 얼굴에 망설임은 없었다.
막사 안에는 이퀘스트리아군 총사령관 팬시와 총사령관 보 스마트 쿠키밖에 존재하지 않았다.
“이제 곧 전쟁이 끝나겠군요.”
“그렇지요, 전쟁은 곧 끝나지요.”
“정말, 정말 긴 전쟁이었습니다. 삼 부족 통일 전쟁도 이렇게나 지치진 않았는데 말입니다.”
스마트 쿠키의 농에 팬시는 살짝 웃음을 흘렸다.
“성격이 다르니까요. 그때의 우리의 전쟁은 통일을 위한 전쟁이었지만, 아니, 통일로 귀결된 전쟁이었지만 이번 전쟁은, 서로의 몰살을 위한 전쟁이니까요. 지치는 것도 당연하다고 생각합니다.”
“후련, 하십니까?”
“글쎄요, 곧 고국으로 돌아간다는 생각을 하니 기쁘긴 하군요. 다만, 다시는 이런 전쟁을 하고 싶진 않습니다.”
“모든 전쟁이 그렇지요.”
두 수뇌부의 정점은 그렇게 다시 웃었다. 막사 안에선 계속해 웃음이 흐르다, 갑자기 그 소리가 끊겨버렸다. 무료한 침묵이 웃음을 대신했다.
“근데 말입니다, 총사령관.”
“네, 말씀하세요.”
“전 체인질링을, 아직도 이해하지 못하겠습니다.”
그 말에, 팬시는 입을 다물었다. 시엔본 평원에서의 대첩 이후 벌어진 일들이 그의 머리에 스쳐지나갔기 때문이었다. 화려한 승리를 거두고 얼마 지나지 않아, 체인질링 군 측에서 휴전을 제의하기 위해 사절이 왔었다.
휴전의 이유는 다름 아닌 제 1 왕자, 휴브리스의 장례를 위함이었다.
전쟁 중, 왕족이 죽는 것은 그렇게 대단한 일은 아니지만, 이퀘스트리아 군은 휴브리스를 죽이지 않았다. 체인질링 군에서 발표한 사망 이유는 오래된 지병의 악화라고 했지만, 그렇다고 하기엔 그가 죽기 직전의 제 1군단의 움직임이 너무나도 체계화되어 있었다.
물론 그때는 일단 부대를 정비할 필요도 있어 승낙하였지만 그 다음 사절이 전한 소식은 더욱 큰 충격이었다.
체인질링의 왕 루데셉툰이 급사한 것이다.
“전쟁 중의 내전이라도 일어난 것이었을까요? 그렇다고 해도 너무 그 행동이 이상합니다. 명령체계는 크게 무너지지 않았고, 어떤 방식으로 해석하든, 서로서로를 죽일 이유가 없습니다. 이 오래된 역사를 자랑하는 체인질링의 왕족들이 그렇게 멍청할 것이라고는 생각하기가 힘들어요.”
“그렇지요,”
“게다가 만일 이것이 우리들의 혼란을 노리기 위한 거짓이라고 생각하기도 힘든 것이, 그들은 정말 장례 기간 동안 어떤 수상한 행동도 보이지 않았습니다. 정말, 장례에 열심히 였습니다.”
팬시는 고개를 끄덕였다. 직접 체인질링의 장례에 참가해 부대를 살펴보았지만 그들은 슬퍼할지언정 이퀘스트리아의 총사령관인 그녀를 구류하지도, 어떤 적의도 내비치지 않았다. 도리어 장례에 참가해준 것에 대해 감사하는 내색을 내비쳤다.
“죽음은, 사실이겠지요. 그런 것으로 거짓을 고할 것 같진 않습니다.”
“네, 동의합니다. 그래서 더 이상해요. 분명 내부에서 어떤 마찰이 일어난 것으로 생각되긴 합니다만,”
계속해 스마트 쿠키는 자신의 추측을 읊어가려 했지만, 그 말을 팬시가 끊어버렸다.
“아마, 휴브리스는 루데셉툰이 죽였을 것이라고 생각됩니다.”
“네?”
“제초제를 뿌리자고 했던 것은 휴브리스의 계략일 것입니다. 하지만 당신도 알다시피 그 계략은 도리어 체인질링 스스로의 목을 조르는 사태로 이어졌지요. 그 책임을 추궁하던 사이에 어떤 마찰이 일어났고, 루데셉툰이 직접 죽였든 아니던 살해를 명령했든, 그렇게 사망을 맞이했을 것입니다.”
“어떻게, 그런 추측이,”
“우리 둘 다 휴브리스가 병사하진 않았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우리가 그러니 체인질링 측 또한 마찬가지겠지요. 하지만 장례절차 사이에는 어떤 일도 일어나지 않았습니다. 왕자들 사이에서 싸움이 일어나 휴브리스가 죽었다면 분명 그 문제는 크게 비화되었을 테지만 그러진 않았지요. 즉, 이런 사태를 무마할 만한 사람이 휴브리스를 죽였다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혹시 체인질링 군에 첩자라도 심어두셨습니까?”
“그렇다면 여지껏 우리가 패전한 이유가 모호해지지요. 어디까지나 저의 추측입니다.”
스마트 쿠키는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그렇다면, 루데셉툰은 어떻게 죽었을까요?”
“스마트 쿠키, 당신은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음... 역시 사티로스가 죽였다고 보는 것이 타당하겠지요. 루데셉툰 다음으로 왕위에 오른 것이 사티로스니, 게다가 제 3왕자 펠롭스는 왕위에 크게 신경을 쓰지 않는다는 평이 많으니까요. 왕위를 노리고 사티로스가 루데셉툰을 죽이고 급사로 꾸민 것이라고 생각됩니다.”
“역시, 그렇게 보시나요.”
스마트 쿠키는 팬시를 바라보았다. 석연찮은 그녀의 얼굴에 스마트 쿠키는 갈기를 긁적였다.
“틀린 것 같나요?”
“아니, 저도 그렇게 생각했습니다. 다만 저번에 푸딩헤드가 얘기했던 것이 신경 쓰여서 말이죠.”
“푸딩헤드 총리대신 말입니까?”
“그런 특이한 이름을 가진 포니가 또 있습니까?”
스마트 쿠키는 낳지도 않은 자신의 딸의 이름을 ‘푸딩헤드’라고 지어둔 사실을 말하진 않았다.
“푸딩헤드가 뭐라고 말했습니까?”
“자살했다더군요.”
“자, 자살이요?”
“네.”
“도대체, 무슨 근거로 말입니까?”
“푸딩헤드가 본인의 생각에 근거를 다는 모습을 본 적이 있습니까?”
“하긴, 그렇죠.”
스마트 쿠키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의 생각이 맞든 틀리든 그녀는 단 한 번도 생각의 근거를 제시한 적은 없었다. 변명을 하지 않는다. 어떤 말을 들어도 그녀는 생각을 정정하지 않는다. 그런 성격의 포니였다, 푸딩헤드는.
“...... 만일 자살했다면, 역시 죄책감 때문일까요. 아들을 죽인.”
“그렇게 보는 게 가장, 타당하겠지요. 스마트 쿠키.”
“네.”
“잠시 바람이라도 쐬러 나갈까요?”
막사 밖의 공기는 차가웠다. 벌써 날씨가 이렇게 추워진 것인가, 스마트 쿠키는 갑옷위에 걸친 망토를 여몄다.
“이퀘스트리아에서는 쉽게 느낄 수 없는 추위지요, 스마트 쿠키.”
“그렇네요.”
“체인질링의 땅은 하늘이 맑아 별이 잘 보입니다.”
그 말에 스마트 쿠키는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그녀의 말이 맞았다. 이퀘스트리아의 하늘에선 보기 힘든 밝은 별들이 하늘을 수놓고 있었다. 팬시는 하늘을 올려다보고 있던 스마트 쿠키를 슬쩍 쳐다보았고, 스마트 쿠키는 피식 웃음을 흘렸다.
“피셔도 됩니다.”
“아, 고마워요.”
팬시는 품에서 묘하게 생긴 막대기를 꺼냈다. 중간을 관통하는 구멍이 나있고 끝이 올라와있어 마치 잔처럼 되어있는 막대기였다. 팬시는 그 잔같이 생긴 곳에 어느 가루를 넣은 후 불을 붙였다. 얼마 안 있어 그 구멍과 팬시의 입에서 하얀 연기가 피어올랐다.
“후우-,”
“그걸, 뭐라고 부르던가요? 연, 연초였던가?”
“네. 체인질링들의 기호품이라고 합니다.”
스마트 쿠키는 코를 킁킁댔다. 좋다곤 할 수 없는 냄새에 절로 얼굴이 찌푸려졌다.
“죄송합니다, 냄새가 역하지요?”
“뭐, 참을 만은 합니다. 근데 총사령관은 왜 그걸 피십니까?”
“...... 글쎄요. 술 같습니다. 머리는 멍해지고, 생각은 짧아지죠. 저도 솔직히 이걸 왜 피는지는 모르겠군요. 그냥, 이 멍한 기분이 좋은 것 같네요.”
그러며 팬시는 활짝, 웃었고 스마트 쿠키는 고개를 숙였다. 확실히 그녀의 말이 맞는 모양이다. 이번 전쟁에 들어서면서 그녀는 웃는 법이 없었지만 이 연초라는 걸 피울 때면 그녀는 곧잘 웃음을 보였다.
“너무 오래 피지는 마십시오. 내일마저 멍한 상태면 어떡합니까.”
“그럴 겁니다. 하하핫, 절 걱정해주시는 겁니까?”
“당연하죠, 내일이 가장 중요한 전투일 테니까요.”
“고마워요. 적당히 피다 들어가죠. 이만 스마트 쿠키도 들어가 쉬세요, 총사령관 보가 잠이 부족해서 곯아떨어졌다는 소문이 돌면 체인질링 군의 수뇌부가 이게 정보전인지 아니면 진담인지 곤란해 할 테니까요.”
“분부대로 하지요, 총사령관님.”
스마트 쿠키는 본인의 막사로 발을 옮겼다. 문득 뒤돌아서 본 팬시의 모습이 더없이 처량해 보였다.
“팬시!!”
팬시가 고개를 돌렸다. 그녀는 여전히 연초를 피우고 있었다.
“고국으로 돌아가시면 그 냄새나는 것 좀 끊으십시오, 안 그래도 없는 혼사 완전히 끊기면 어쩌려고 그러십니까!!”
스마트 쿠키는 그렇게 외치고는 자신의 막사로 도망치듯 뛰었다. 멀리서 시끄러운 고함 소리가 들리는 듯 했다.
체인질링의 중심지, 보웬세나 궁성은 전에 없이 조용했다. 단지 궁성의 체인질링들이 침묵을 좋아하기 때문은 아니었다. 앞으로 일어날 일들을 모두가 예감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사티로스는 창밖을 내다보았다. 달빛이 비추는 도시에는 아무도 보이지 않았다. 이미 수도 내의 모든 시민들은 대피했다. 남아있는 자들은 병사와 몇몇 대신들뿐이었다. 사티로스는 뒤를 돌아보았다. 그곳엔 체인질링들의 마지막 희망이 있었다.
“펠롭스, 크리살리스.”
“예, 폐하.”
“네, 오라버, 아니, 폐하.”
“아니, 괜찮아. 지금 와서 너희한테 폐하라고 불리고 싶진 않거든.”
사티로스는 쓰게 웃었다. 정말, 지금 와서 왕위라니, 무슨 소용이란 말인가.
“하지만, 폐하,”
“됐다니까, 펠롭스. ......많이 컸구나. 이제 형만 한걸?”
“그럼, 형님으로 부르겠어.”
“나 원 참.. 뭐, 그걸로 됐다.”
사티로스가 도리질을 쳤고, 크리살리스가 말했다.
“오라버니.”
“응?”
“휴브리스 오라버니가, 정말 죽었어?”
펠롭스의 얼굴이 구겨졌다. 그녀의 질문이 마음에 들지 않아서는 아니었다. 단지 휴브리스가 죽을 때의 모습이 떠올랐기 때문이었다.
“난, 난, 아직도 휴브리스 오라버니가, 보웬세나 궁성으로 돌아오는 꿈을 꿔,”
“크리살리스, 작작 해. 휴브리스 형님은 죽었어, 망할, 아버지가 형을 죽였다고! 도대체 몇 번을 말해야,”
“펠롭스!”
“...... 미안.”
“크리살리스에게 사과해라.”
“크리살리스, 미안해...”
“아니, 오라버니, 내가 나빴어.. 미안해.”
사티로스는 한숨이 나오려 하는 것을 참았다. 동생들이 한심스러워서 만은 아니었다. 더 이상 이 한심스러운 동생들을 못본단 사실을 짐작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사티로스는 마음을 다잡았다. 어찌되었건 지금의 자신은 왕이다.
“펠롭스, 크리살리스, 얘들아. 아마, 이번 전쟁은 질 거다. 이제 너희한테 거짓말을 할 만큼 여유가 남아있지가 않아.”
크리살리스는 당장이라도 울 것만 같은 표정을 지었다. 예전의 사티로스는 이런 약한 소리를 하지 않았다. 거짓일지언정 언제나 당당했다. 그렇기 때문에, 휴브리스와도 그렇게 다툴 수 있던 것이었다. 하지만 지금은 아니다, 그의 눈에서 언제나 일렁였던 불꽃은 이미 사라져있었다.
“최대한 멀리 도망쳐. 너희가, 아니, 펠롭스 네가 우리에게 남은 마지막 왕자다. 아니, 이제 세제(世弟)라고 부르는 게 옳을려나. 마음 같아선 대관식을 치르게 해주고 싶지만, 그건 나중에 돌아와서 하도록 해. 왕명은 아무렇게나 지어. 뭐, ‘사티로스 2세’로 지어도 난 상관하지 않을 거야.”
펠롭스는 형의 농담에 웃지 않았다.
“난 죽을 거다. 형이나 아버지처럼 명예롭지 못한 죽음은 아닐 테니, 이 정도에서 만족해야겠지.”
“형, 형!”
“뭐야, 펠롭스.”
“나도, 형이랑 같이 싸우고 싶,”
“입 다물어, 펠롭스. 난 왕이니까 죽으러 가는 거다. 네가 왜 세제인지 몰라? 다음을 기약하는 왕이라고, 이 멍청아. 넌 살아남는 게 목표다.”
“하지만, 형, 나는...”
“시끄러워. 넌 마지막까지 형을 실망시킬 거냐?”
“......”
“죽지 마.”
“...형도.”
펠롭스는 고개를 돌리다가, 다시 사티로스를 바라보았다. 눈물이 당장이라도 흐를 것 같은 눈이었지만 펠롭스는 그 눈을 숨기려 하지 않았다.
“형도, 죽지 마. 나보고는 죽지 말라고 하면서, 형은 죽으러 간다니, 치사해.”
사티로스는 웃었다.
“그래 맞아. 난 치사해, 몰랐어? ...... 그리고 크리살리스.”
“... 응, 오라버니.”
“형님이랑 같이 오지 못해서, 미안하다. 너는 로덴부레트 집사장이랑 같이 도망쳐. 집사장이 너를 잘 보좌해주실 거야. 처음으로 부탁드리는 것이 이런 것이라 죄송합니다, 집사장.”
“아닙니다, 폐하. 이 노구는 신하된 몸으로서 마지막까지 왕실을 보좌한다는 사실이 기쁠 따름입니다.”
“오라버니, 나도 펠롭스 오라버니랑 같이,”
“안 돼. 따로 도망쳐.”
“왜, 왜 오라버니들은, 전부 다 안 된다고만,”
“전쟁은, 무슨 일이 벌어질지 모르기 때문이야. 크리살리스.”
“그게, 무슨 뜻이야 오라버니?”
“어느 한쪽이 발각되어 죽는다고 해서 다른 한쪽은 살아남아 왕위를 이을 수 있을 거라고 하는 거야, 크리살리스. 그게, 누가 될지는 모르겠지만.”
사티로스는 다른 짐작을 얘기하지는 않았다. 망국의 대신들은 국가를 배신하고 자신이 살 구멍을 만들기 위해 최선을 다한다고, 그렇기에 신하들을 두 부류로 나누었다고, 그 두 부류를 자신은 전부 믿지 못하겠다고, 다만 너희가 살았으면 좋겠다고 말하지는 않았다.
“최대한 살아. 돌아와서 왕위를 이어. 아마 이 보웬세나 궁성은 함락당할 거다. 무너지겠지. 이퀘스트리아는 너희를 찾기 위해 애를 쓸 거다. 나는 너희가 죽었다고 그들에게 얘기하겠지만, 믿지는 않겠지. 그러니까, 몇 년이 좋을까..., 모르겠군. 어찌되었든 체인질링들에겐 너희가 마지막 희망이라는 사실을 알아둬. 할 말은 끝났어,
나중에 보자.”
자신의 인사가 슬프게 들리지 않기를 바라며 사티로스는 웃었다.
햇빛은 하늘을 적셨다.
“날씨 좋네!”
테판은 위세 좋게 외쳤다. 주위에 대열한 그의 병사들도 동의한다는 듯 웃음을 내비쳤다.
“야, 이것들아. 뭐가 좋다고 그렇게 실실 쪼게냐?”
“참령님은 안 좋습니까?”
“나? 당연히 좋지! 곧 우리나라로 돌아간다, 이보다 더 좋은 소식이 어딨겠냐, 응? 그리고 말이지,”
테판은 살짝 뜸을 들였다.
“전쟁 후의 병사는 은근히 인기 많거든,”
“에이, 참령님은 얼굴이 쪼까...”
“방금 지껄인 놈 누구야!”
모두 테판의 눈을 피할 뿐, 아무도 대답하지 않았다. 테판은 웃었다.
“네들도 똑같아, 이것들아. 자, 어찌됐든 이번 전투가 마지막이 될 거다. 저 체인질링 놈들을 남김없이 씹어 먹으러 가자!”
“예!!”
테판은 슬쩍 자신의 옆을 쳐다보았다. 여전히 로제니아의 얼굴은 굳어있었다. 테판은 말을 걸려 했지만 그 순간 진군을 알리는 나팔이 울렸고, 모든 소리가 병사들의 발소리에 묻혀버렸다.
테판은 병사들이 향하는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말은 그렇게 했지만 공성은 언제나 불리한 법이다. 게다가 여태까지의 체인질링의 지하 축성법과는 다르게, 수도의 성은 이퀘스트리아의 일반 성과 마찬가지로 하늘 위로 높이 솟은 성곽의 모습을 띄고 있었다.
이제는 이런 축성법이 익숙하지 않을 체인질링들이 수성전에서 실수를 저지르기를 바라며, 테판은 칼을 뽑았다.
참살의 막이 올랐다.
페가수스들은 하늘로 솟아올랐다.
튀퓐은 얼굴을 찌푸렸다. 그는 시엔본 전투에서 써먹었던 방법이 다시 쓰일 것이라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분명 체인질링 측은 방도를 준비했으리라. 하지만 페가수스 군의 군단장인 도렌 파시우스는 어째서인지 이 방법을 고수했다.
저번 전투에서 본인을 뺀 채 작전을 진행시켰던 팬시 총사령관에 대한 항의, 로 보이긴 했으나 만일 진정 그렇다면 튀퓐은 그의 정신 상태가 정상인지 의심하고 싶었다.
“망할, 네놈들의 쓰잘데기없는 싸움에 병사를 말로 쓰지 말란 말이다.”
마음만 같아선 그 말을 도렌의 앞에서 하고 싶었지만 목숨이 아까운 탓인지라 묵묵히 그는 명령을 받들었다. 조금만 더 날아간다면 곧 체인질링의 성곽 앞이다.
그렇게 생각한 순간, 날카로운 바람소리가 들렸다.
“크학!!”
거대한 화살에 배가 꿰뚫린 페가수스 한 명이 땅으로 추락했다.
“바, 발리스타! 상승, 상승하라! 발리스타다!!”
튀퓐의 명령이 무색하게, 그렇게 말하는 순간에도 수많은 화살이 페가수스의 배나 머리를 꿰뚫었다.
“망할, 왜 저딴 걸 가지고 있는 거야!”
“아마 그리핀들의 공습을 막기 위해 설치한 것이 아닐까 합니다. 그들이 지대공무기를 가지고 있을 이유는 그것 하나뿐이니까요. 잠시 뒤로 후퇴해야 합니다.”
“그걸 말이라고 하는 거냐, 너 총사령관님 작전개요 못 들었어?”
물론 튀퓐도 자세히 들은 것은 아니었지만 대충이라도 들어뒀던 자신에게 튀퓐은 감사를 했다. 어쨌든 이렇게 부하를 윽박지를 수 있다는 것 사실 만으로도 작전개요는 훌륭하게 쓰인 것이다.
“이번 전투의 핵심은 페가수스 군단과 유니콘, 어스포니 군단의 합동 공격이다. 좀, 웃기긴 하는데, 하늘과 땅의 합동 공격이라고. 아 젠장, 역시 이건 좀 이상한데.”
“이상한 걸 뛰어넘어서 웃깁니다, 티핀 수사과님.”
“시끄러, 네 사투리가 더 웃겨. 난 튀퓐이다. 티핀이 아니라. 어떻게 그것만 딱 발음을 못하는 거야?”
“지역 차별적 발언입니다.”
“시끄러, 넌 지금 내 이름을 차별하고 있다고.”
“티핀 수사과님,”
“망할, 또...!”
“저기, 땅 군대가 옵니다.”
말은 농담같이 했지만 그 말에 담긴 환희를 튀퓐은 느낄 수 있었다. 당연히 느낄 수 있었다. 튀퓐 자신 또한 말로 표현할 수 없는 기쁨을 느끼고 있었다.
“좋았어, 야! 이것들아! 쉴 틈 없이 발리스타에 네들 몸을 내리 꽂아라! 저것들 싸그리 죽여보자, 마지막이다!”
튀퓐의 부대는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대답했다.
“예! 티핀 수사과님!!”
“야이, 망할 것들아!”
“쏴, 씨발, 다 쏴버려!!”
체인질링 군의 수사과들은 성곽을 뛰어다니며 정신없이 외쳤다. 스스로의 목숨을 버린 것 마냥 쏟아지는 페가수스 군단에 누굴 노려야 할지를 몰라 발리스타는 우왕좌왕했고, 그 순간 철컥, 성곽에 밧줄이 매달렸다.
“쳐내!!”
병사들은 수사과들이 무엇을 쳐내라고 하는 것인지 몰라 우왕좌왕하지는 않았다. 발리스타의 화살을 옮기기 위해 대기하고 있던 병사들은 득달같이 달려들어 밧줄을 쳐냈다.
“화살, 화살 가져와!”
“망할, 저 빌어먹을 밧줄 좀 쳐내라!”
“저 쌍것의 새끼들이,”
“화살 가져오라는 말 안들리냐!”
“지금 가고 있습니다!!”
“미쳐버리겠군,”
“궁시렁 거릴 시간 있으면 한 놈이라도 더 쏴 죽여!”
땀냄새와 쇠냄새가 온갖 소음들과 뒤섞여 성곽을 메우기 시작했다. 쉬지 않고 수사과들은 병사들을 다그쳤고 병사들의 얼굴은 갈수록 구겨졌다. 앞이 캄캄했다. 아무리 쏴 죽여도 쏟아지는 페가수스들은 멈출 생각을 하지 않았고, 아무리 쳐 내도 새로운 밧줄들이 성곽에 매달렸다.
점처럼 멀리 보이던 페가수스들이 이제 손이라도 뻗으면 잡힐 것 같이 보일 때, 대기하고 있던 사직이 목이 터져라 외쳤다.
“그리핀 부대, 상승하라!”
그 명령과 동시에 무수히 많은 그리핀들이 하늘로 솟아올랐다. 철창이나 쇠망치를 들은 그들의 눈은 살기로 불타오르고 있었다.
하늘의 수많은 병사들이 격돌했다.
“저 거지같은 궁수놈들, 젠장!”
테판은 화살이 스친 어깨를 싸맸다. 화끈거리는 통증이 가시질 않았다. 그렇지만 들쳐 업은 방패를 내려놓을 순 없었다. 놓는 순간 자신의 머리는 자랑할 만한 선인장이 되겠지.
아직도 저 견고한 성벽은 뚫릴 기미가 보이질 않았다. 성벽 위로 밧줄을 쏘아 올리는 작전은 좀 무리였지 않았을까, 싶지만 어찌됐든 그것이 정말 노리는 수는 아니었으니 상관은 없었다.
“테판 참령님, 준비는 이미 다 끝났습니다! 얼마든지 가능합니다, 명령만 내려 주십시오!”
“시끄러워,”
테판은 지금 당장이라도 저지르라고 말하고 싶었지만 그러기엔 때가 좋지 않았다. 밧줄이 위장이라는 것을 알아챈 것인지, 아니면 페가수스들이 생각보다 쉽게 추락해서인지 쉽사리 경계의 눈이 가시지 않았다.
그리고 다시, 머리를 굴렸다. 아니, 어차피,
경계하고 있어봐야 체인질링 쪽에서는 불가항력일 것이다. 테판은 결정했다.
“심어!”
“알겠습니다!!”
테판의 지시를 받은 몇 명이 해자 밑으로 달려갔다. 이를 발견한 체인질링 몇 명이 화살을 쏘았지만 짊어지고 있던 방패에 튕겨나갔다.
성벽 위에서 바위가 굴러 떨어졌다, 수많은 포니가 짓이겨지고 터져나갔다. 작은 투구 하나가 하늘을 날았다. 그 사이를 포니들은 달려 나갔다. 성벽 위에서 썩은 내 풍기는 똥물이 부어졌다. 포니들은 똥물을 아랑곳 않고 뒤집어썼다. 성벽 위에서 비린내가 나는 기름이 쏟아졌다. 포니들은 불타올랐다.
쉬지 않고 포니들은 죽어나갔고, 그 죽은 포니들의 시체를 방패삼아 또 다른 포니들이 앞으로 뛰쳐나갔다. 도저히 눈 뜨고 볼 수 없는 참극이었지만, 테판은 눈을 돌리지 않았다. 그저 하얀 구슬을 만지작 거리고 있을 뿐이었다.
또 한 명이, 또 한 명이, 머리가 터지고, 팔이 잘려나가고, 불타오르고, 비명을 지르고, 그 사이에 또 다른 한 명의 페가수스가 발리스타에 꿰뚫려 추락하고, 또 여러 명의 포니가 화살을 목에 맞고, 또 누군가는 밧줄을 성벽으로 던지다 바위에 찌그러졌다.
틈도 없이 포니들과 페가수스들은 순간순간을 죽음으로 메꾸어나갔다. 그러던 와중, 한 포니의 비명 같은 목소리가 들려왔다.
“심었습니다!!!”
그 순간, 정적이 전장을 장식했다. 아니, 그곳의 모든 소리를 정적이라고 의심케 할 만한 끔찍한 괴음이 모두의 고막을 울렸다. 무시무시한 굉음과 함께, 요란한 먼지가 성벽 한 구석에서 터져 나왔다. 모든 생물체들의 눈길은 그곳으로 몰렸다.
겨울의 세찬 북풍이 먼지를 몰아갔다. 먼지 사이로 모습을 드러낸 것은 기가 찰 정도로 거대한 나무의 줄기였다.
그리고 그 줄기는 명백하게, 의심할 여지없이, 이루 말할 필요도 없이, 이를테면, 완벽하게, 확실히,
성벽을 꿰뚫고 있었다.
그 동시에 동시다발적으로 방금 전과 비슷한 굉음이 성벽을 울렸다. 그 순간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양군을 지휘하고 있던 장군들의 목소리가 전장을 울렸다.
“전군, 돌격!! 목표는 보웬세나 궁성이다!!”
“전군, 목숨을 바쳐 수도를 사수하라!!”
성벽을 중심으로 미노타우루스의 무리와 포니의 무리가 격돌했다.
그 모습을 바라보며, 테판은 하늘 높이, 자신이 들고 있던 하얀 구슬을 던졌다.
“승리군요.”
저 멀리 폭발하는 마법구슬들을 보며 팬시는 중얼거렸다. 스마트 쿠키도 고개를 끄덕였다.
“수고 많으셨습니다.”
팬시는 스마트 쿠키의 말에 대답하지 않은 채, 연초에 불을 붙였다. 숨을 빨아들이는 소리가 나고 얼마 지나지 않아 연기가 피어올랐다. 스마트 쿠키는 계속해 말했다.
“이제 남은 것은 전후 처리군요. 적국의 지도자 처리부터...... 영토 문제 까지...”
“그리고 전사자들을 추려 유족들에게 알려야 하겠지요.”
“...네.”
일부러 말하지 않은 사실을 꼬집는 팬시에게 스마트 쿠키는 약간의 위화감을 느꼈다. 팬시는 깊게 들이마신 숨을 내뱉었다. 연기가 퍼지며 그녀들 사이를 휘돌았다.
“...... 연회는,”
“네?”
“연회는 고국에 돌아가서 하지요. 짧지 않은 기간 동안 저를 보필해주셔서 감사했습니다, 스마트 쿠키 법무대신 각하.”
스마트 쿠키는 잠시 숨을 들이마셨다. 그럴 시간이 필요했다.
“저야말로 감사했습니다, 팬시 총사령관.”
스마트 쿠키는 눈물이 흐르는 것을 참지는 않았다.
끔찍한 굉음이 울렸다. 크리살리스는 뒤를 돌아보았다. 익사하듯이, 유서 깊은 보웬세나 궁성이 무너져 내리고 있었다. 저 떨어지고 있는 벽돌 하나하나에 담긴 이야기들은 얼마나 거대한가, 저 스러지고 있는 기둥 하나하나에 담긴 감정들은 또 얼마나 아름다운가.
모든 것이 무너지고 있었다.
크리살리스의 무릎이 무너졌다.
“아, 아, 사티로스, 오라버니...” “아바마마,” “휴브리스, 오라버니,” “펠롭스 오빠-” “아바마마” “어마마마” “왜,” “도대체 왜” “어째서!” “왜!!” “꼭 이래야만,” “도대체,” “무엇을 잘못했길래,” “...” “어마마마,” “아버지,” “오빠,” “보고 싶어요,” “어떻게, 어떻게” “이런, 일이..”
크리살리스의 입술이 달싹이며 몇몇 말 같은 무언가를 내뱉었지만 로덴부레트는 그것을 말이라고 생각하지 않았다. 만일 그것이 말이라면, 자신 또한 크리살리스처럼 무너지리란 것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로덴부레트는 천천히 칼을 빼들었다.
곧 포니들이 쳐들어 올 것이다. 그 안에 끝내야만 한다.
“크리살리스 공주님.”
“...... 네, 네. 집사장.”
크리살리스는 멍한 눈빛으로 로덴부레트를 바라보았다. 정신이 무너진 탓인지 그녀는 로덴부레트가 들고 있는 것이 칼이라는 것을 알아보지 못했다. 로덴부레트는 멍한 그녀의 표정을 보면서 이유에 대해 설명해야 하는지 고민했다.
설명하지 않아도 된다. 자신의 왕은 어디까지나 루데셉툰이니까.
설명해야만 한다. 자신은 체인질링의 왕가를 모시는 집사장이니까.
“크리살리스 공주님, 나라가 전쟁에 패배하게 되면 어떻게 되는지 알고 계십니까.”
“멸망, 해요...”
“예, 멸망합니다. 하지만 그것은 일반적인 전쟁의 이야기입니다. 우리들의 상대는 이퀘스트리아입니다. 그들의 전쟁이 왜 유명한지 알고계십니까.”
“전쟁 후, 통일이 되었기 때문인가요...?”
“아뇨, 전쟁이 끝난 다음 통일이 되는 것은 의외로 흔한 일입니다. 그들의 전쟁이 유명한 이유는 서로를 완전히 파괴할 심산이었기 때문입니다. 서로를 완전히 파괴할 수 있다는 소리는 서로를 완전히 이해할 수 있다는 뜻입니다. 완전한 이해는 가득히 차있습니다. 우리와는 다릅니다. 우리는 상대의 모습을 모방해 사랑을 얻습니다. 이해하지 않습니다, 단지 모방할 뿐입니다.
그렇기에 우리는, 구멍이 뚫려있습니다.”
크리살리스는 자신의 발굽을 바라보았다. 숭숭 뚫려있는 구멍들이 자신을 바라보고 있었다.
“이번의 전쟁으로, 그들은 다시 우리들을 완전히 파괴하려 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우리는 완전히 파괴될 수 없습니다.”
“완전한 파괴는, 멸망인가요?”
“아니요 공주님, 멸망은 또 다른 시작의 발판입니다. 하지만 완전한 파괴는 다시 시작할 수 없습니다. 없어지니까요. 하지만 우리는 완전히 파괴될 수 없기 때문에, 그들은 우리에게 그들의 방식을 강요하게 될 것입니다.”
“그게, 무슨 뜻인가요?”
“이퀘스트리아의 방식을 모방하고, 이퀘스트리아의 삶을 모방하고, 이퀘스트리아의 역사를 모방하고, 이퀘스트리아의 나라를 모방하게 될 것입니다. 공주님, 체인질링은 없어질 것입니다. 아무 것도 없게 되겠지요. 단지 그곳에는 체인질링을 모방한 이퀘스트리아가 있을 것입니다. 그렇게 만들기 위해 이퀘스트리아는 체인질링의 목 위에 가짜 머리를 올려둘 것입니다.”
“가짜 머리...?”
“공주님, 당신을 뜻하는 것입니다. 체인질링을 모방한 이퀘스트리아를 만들기 위해선 가짜 머리가 필요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선왕 루데셉툰께서는, 만일 그렇게 될 시에는,”
로덴부레트는 칼을 공주에게 겨누었다. 공주는 이제야 그 칼을 알아볼 수 있었다. 황혼의 어스름이 지나고 이제 막 떠오른 달빛에 칼은 시리게 빛났다.
“아바마마께서, 저를, 죽이라고...?”
“저에게 명령하셨습니다. 펠롭스 왕자님 또한, 죽음을 맞이하시겠지요. 펠롭스 왕자님의 수급을 이퀘스트리아에게 바친다면 목숨을 보전할 수 있게 될 지도 모른다고 왕자님의 호위병사에게 귀띔해두었으니,”
“...... 그럼, 사티로스 오라버니도...?”
“그분은 제가 말씀드리지 않아도 본인의 죽음을 달게 받으실 거라고 생각했습니다. 공주님,”
“어째서... 어째서 이러는 거야, 집사장!”
“모든 것은 체인질링을 위해섭니다, 공주님.”
“나는, 나는 집사장의 말을 하나도 이해 못하겠어, 완전한 파괴라니, 가짜 머리라니, 그걸 위해 죽으라니, 어째서, 어째서 그런 말들을 하는 거야...? 맞아, 우리는 구멍이 뚫려있어, 하지만, 엄마는, 어마마마는, 그게 체인질링의 장점이라고 했어, 우리는 구멍이 뚫려 있기 때문에, 서로를 도와주고, 닮으면서 얼마든지 더 나아질 수 있다고 하셨어,”
“공주님, 체인질링은, 사랑을 먹고 삽니다, 우리는 다른 것을 모방해야하지 우리를 모방해버리면 우리는 죽어버리고 말 것입니다. 그때야 말로 정말 체인질링의 멸망이 될 것입니다, 공주님,”
“내가, 내가 체인질링을 사랑하겠어!! 내가 모든 체인질링의 구멍을 메꿔버릴 만큼 체인질링을 사랑하겠어!”
로덴부레트는 눈을 감았다.
멸망을 막기 위해 새로운 시작의 가능성을 죽이는 것, 자신이 평생 동안 따라왔던 왕을 배신하는 것, 왕의 유언, 왕의 죽음, 자신이 사랑하는 종족의 새로운 시작, 멸망의 가능성, 파괴의 가능성, 이 칼의 무게, 저 어린 공주의 결심, 앞으로 일어날 수 있는 미래들, 역사상 최초의 공주에 대한 체인질링들의 시각,
그 모든 것들이 감긴 눈꺼풀사이로 지나쳐가는 것을 느꼈다.
로덴부레트는 눈을 떴다.
“공주님, 무릎을 꿇어주십시오.”
크리살리스는 살짝 로덴부레트를 바라보고는 무릎을 꿇었다.
“머리를 숙이십시오.”
“지, 집사장...?”
“이 칼을 잡으십시오. 지금부터 크리살리스 여왕의 즉위식을 거행하겠습니다. 위대한 영광의 보검의 주인이신 켄터베리가 굽어 살피시길. 폐하께서는 체인질링과 기타 여러 속령들을 법과 관습으로 다스리실 것을 엄숙히 서약합니까?”
“어, 엄숙히, 서약합니다.”
“폐하께서는 왕권을 법과 공정함과 자비로 행사하시겠습니까?”
“그렇게, 하겠습니다.”
“폐하께서는 체인질링을 율법과 규율로 보호하시겠습니까? 폐하께서는 체인질링을 외적으로부터 군사와 외교로 보호하시겠습니까? 폐하께서는 전통과 관습을 보호하시겠습니까?
폐하께서는, 체인질링을 사랑하시겠습니까?”
크리살리스는 보검을 굳게 쥐었다.
“그와 같이 할 것을, 선왕의 영광과 저의 목숨으로 맹세하겠습니다.”
종장(終章)
어느 어린 소녀는 쉬지 않고 숲속을 내달리고 있었다. 그녀의 허리에는 어울리지 않게 큰 검이 대롱대롱 매달려 있었고 온 몸은 검은 망토로 둘둘 말려 있었다.
그런 그녀의 눈에서는 눈물이 흐르고 있었다. 눈물이 멈추지 않았다. 발은 아파왔고 어디로 가야할지 감도 잡히지 않았지만 그녀에게 당부하던 어떤 남자의 말이 잊혀지지가 않았다.
‘도망치세요, 저 멀리 도망치세요, 어느 누구의 눈에도 띄지 않으셔야 합니다.’
하늘의 해는 진지 이미 오래였고 단지 달빛만이 어두운 숲속을 비추고 있을 뿐이었다. 숲이 어두워 이미 여러 번 나무에 부딪혀 살갗에선 피가 흐르고 있었다. 넘어지고, 부딪히고, 까졌지만 소녀는 발걸음을 멈추지 않았다.
언제 어디서 자신이 붙잡힐지 몰랐다. 그저 지금의 그녀가 할 수 있는 것은 죽을 힘을 다해 도망치는 것 뿐이었다.
나무의 뿌리인지, 땅에 박힌 돌멩이인지, 그녀의 발굽을 잡아챘고 소녀는 요란하게 넘어졌다. 울고 싶었다. 정말로 울고 싶었다.
“윽, 으흑...”
그리고 그 순간, 눈앞에 달빛을 등진 포니 병사의 모습이 나타났다.
체인질링의 여왕, 크리살리스의 눈앞에 체인질링 병사의 모습이 나타났다.
“여왕 폐하,”
“뭐, 뭐야.”
“모시러 왔습니다.”
크리살리스 여왕은 서둘러 눈물을 훔쳤다. 보았을까? 보았나? 봤으면 어떡하지? 이런 망할!
“짐이, 여기 있단 건 어떻게 알았지?”
“어떻게 알았긴요. 여기저기 들쑤시고 돌아다니다 보니 드디어 찾은 것 뿐입니다.”
“그, 그렇군.”
“찾게 되어서 다행입니다. 여왕 폐하께서 후사가 없으셔서 어떡하나, 원로원의 늙은이들이 걱정했습니다.”
“쓰, 쓸데없는 걱정 하지 말라고 그래! 입만 열면 후사, 후사,”
“여왕 폐하.”
“뭐!”
“기운이 나신 것 같아 다행입니다.”
“...뭐라는거야.”
“혹여나 이번 침공이 실패해서 잔뜩 풀이 죽어계시면 어쩌나,”
“라고 원로원의 늙은이들이 고민했겠지.”
“아니요, 신하들과 병사들이 걱정했습니다.”
“......”
“조금만 더 걸어가면 풀숲에 냇물이 흐릅니다. 거기서 얼굴 좀 씻으셔야 할 것 같습니다.”
“... 그렇게 엉망이야?”
“장관입니다.”
크리살리스는 웃었다.
포니 병사의 눈은 분명 소녀를 바라보고 있었다. 소녀는 공포에 온몸을 떨었다. 들켜버렸다. 포니에게 자신이 여기있다는 사실을 들켜버렸다. 이제 자신은 죽음을 맞이하게 되겠지, 아니, 그가 말했던 대로 체인질링은 멸망보다 심한 멸망을 맞이하게 될지도 모른다.
무릎이 후들거려 일어날 수 조차 없었다. 당장이라도 도망치고 싶었지만 그 열망은 단지 땅바닥을 긁고 있는 발굽으로 밖에 표출되지 않았다. 뒤를 돌아봤지만 어두컴컴한 숲속에서 보이는 것은 단지 무한히 펼쳐진 나무들뿐이었다.
“사, 사, 살려주세요...”
“당신은 체인질링의 공주 크리살리스입니까.”
“예..., 아니, 아니에요, 아니에요, 아니에요.”
“...... 건투를 빌어요. 이름 모를 체인질링.”
거짓말처럼, 포니 병사의 그림자는 돌아섰다.
묘하게 아름다운 목소리라고 생각하며, 소녀는 다시 일어섰다.
도저히 끝이 있을 거라고 생각되지 않는 숲속의 그림자 사이로, 그녀는 다시 걸어 나갔다.
더 이상 울음소리는 들리지 않았다.
[변신의 여왕은 낭만을 꿈꾸는가]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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변신의 여왕은 낭만을 꿈꾸는가, 완결입니다.
봐주신 모든 분들께, 깊은 감사의 말씀을 올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