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민족의 특성을 이야기할 때 자주 나오는 표현이 ‘은근과 끈기’다. 왠지 짠 하고 나타나 별처럼 반짝여야 할 걸그룹과는 잘 안 어울리는 표현인데, 은근과 끈기라는 말이 참 잘 어울리는 걸그룹이 바로 걸스데이다. 2010년 여름 데뷔 당시에는 소진·지해·지선·지인·민아로 이루어진 5인조였는데 9월에 지선과 지인이 탈퇴하고 새 멤버 유라와 혜리가 들어왔다. 후에 지해까지 개인 사정으로 탈퇴하면서 4인조가 됐다.
내가 기억하는 한 걸스데이는 최악의 데뷔 무대를 펼친 걸그룹이다. 데뷔 전 에스엔에스(SNS)를 통해 홍대에서 춤을 추는 동영상을 공개한 사전 작업은 성공적이었다. 많이들 기대를 하고 첫 무대를 지켜보게 했으니까. 드디어 2010년 7월9일 데뷔 음반 발매와 동시에 <한국방송>(KBS) <뮤직뱅크>에서 데뷔 무대에 올랐다. 이토록 충격적인 데뷔 무대라니…. 무대 매너는 과하거나 괴이했고 노래는 오디션 프로그램 예선을 절대 통과할 수 없는 수준이었다. 시청자들의 비난과 항의가 빗발쳤고, 데뷔곡 ‘갸우뚱’은 인터넷 연관 검색어로 ‘병신춤’, ‘각설이 그룹’을 한참 동안 달고 다녔다.
뭐 이 정도면 나오자마자 망하는 수순을 밟는 게 보통이었다. 하긴 나오자마자 1년도 활동 못하고 나가떨어지는 아이돌 그룹이 한두 팀인가? 데뷔를 하고 얼마 안 있어 멤버 두 명이 탈퇴하는 모습까지 보고 나는 걸스데이에 대한 관심을 접었다. ‘곧 해체하겠구나. 적어도 <컬투쇼>에 부를 일은 없겠네’ 싶어서.
그런데 걸스데이는 데뷔 무대의 충격을 용케도 버텨내고 후속곡을 연이어 발표하고 예능 프로그램에도 출연했다. 참 많이도 노래를 발표했으나 다들 반응은 미지근했고 차트 성적도 시원찮았다. 2011년에도, 2012년에도 계절마다 노래를 발표하며 활동을 이어갔다. 그때까지도 걸스데이는 열심히 하지만 못 뜨는 수많은 걸그룹 중 하나였다.
이재익 에스비에스 피디·소설가
흔히들 말하는 치고 올라오는 움직임이 보인 것이 2013년이었다. 3월에 발표한 ‘기대해’가 대박이 났다. <뮤직뱅크> 4위에 올랐고 <에스비에스>(SBS) <인기가요>에서는 1위 후보에까지 올랐다. 기세를 몰아 6월에 발표한 ‘여자대통령’으로 데뷔 뒤 첫 지상파 1위에 올랐다. 이제는 누가 뭐래도 걸스데이는 대세다.
지금까지 열 팀이 넘는 걸그룹을 소개했지만 걸스데이처럼 끈기 있게 올라온 그룹은 없다. 데뷔하자마자 바닥을 치고 나서 한 계단씩 부지런히 올라왔다. 차트 순위에도 잡히지 않는 노래들을 한 해 몇 곡씩 발표하고 활동하면서 인지도를 쌓고, 결국은 20위, 16위, 15위, 2위, 1위까지, 정말 일부러 그렇게 하래도 못할 정도로 꾸준히 올라왔다. 차트 순위뿐만 아니라 실력도 매력도 점점 키우면서. 어디를 봐도 드라마틱한 점프는 없다. 전교 꼴등이 매달 10등씩 올려 결국 우등생으로 졸업하는 격이랄까?
걸스데이가 처음으로 1위를 차지한 곡 제목이 ‘여자대통령’이라는 점도 흥미롭다. 그동안의 성실함으로 모자라는지 얼마 전 걸스데이는 이런 포부를 밝혔다. 한 쇼케이스에서 리더 소진은 “3사 지상파 음악 순위 프로그램 1위와 광고 20개”가 올해 희망사항이라고 밝혔다. 혜리는 “올해는 티브이만 켜면 우리가 나오도록 만들겠다”고 했다. 걸스데이는 정말 걸그룹계의 대통령이 되고 싶은 걸까? 장기 독재 중인 소녀시대를 몰아내고?
그렇다면 나도 한 표. 난 근성 있는 걸스데이가 예뻐 죽겠다. 그중에서 누가 제일 좋냐고? 부끄러워서 차마 소진이라고 고백은 못하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