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 오클라호마주 법원이 처음으로 도요타자동차의 캠리에 대해 '전자장치 불량'으로 급발진이 일어났다는 평결을 내 국내외 자동차업계가 촉각을 곤두세우고 있다. 도요타는 미국에서 수많은 급발진 소송에 휘말렸지만 법원이 운전자 과실이 아닌 기술결함 문제로 결론을 낸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이번 판결로 국내외 시장에서 자동차 전장부품에 대한 규제가 더욱 강화될 것으로 보인다. 국내에서 제기됐거나 진행 중인 급발진 관련 소송에도 영향을 미칠 것으로 보인다. 현대.기아자동차 등 국내 업체들은 선제적으로 리콜을 실시하는 한편, 관련 기술력 확보에 전력을 기울여왔다.
■도요타 美서 700건 이상 소송
27일 업계에 따르면 미국 오클라호마주 법원은 지난 25일(현지시간) 2007년 일어난 도요타 캠리 사고와 관련해 피해자들에게 300만달러(약 32억원)를 배상하라는 평결을 내렸다.
도요타는 이제껏 "운전자가 실수로 가속페달을 밟았거나 바닥 매트가 페달을 눌렀을 것"이라며 맞서왔다. 도요타가 급발진 사고 관련 소송에서 진 것은 이번이 처음으로 앞서 2건의 소송에서는 책임이 없다는 판결을 받았다.
이번 판결은 수백건에 달하는 도요타 급발진 소송에 중대한 영향을 끼칠 전망이다. 도요타는 2009년 이후 급발진 문제로 지금까지 200건의 집단 소송과 500건 이상의 개인 소송에 연루된 것으로 알려져 있다.
도요타는 이번 평결로 인한 파장이 확대되는 것을 막기 위해 이미 피해자들과는 합의한 것으로 나타났다.
도요타 측 대변인은 "법원의 평결에 전혀 동의하지 않지만 피해자들과 서로 받아들일 수 있는 합의점을 찾았다"고 밝혔다. 회사 측과 피해자들은 합의 금액을 비공개로 한다는 조건에 동의했다.
■국내도 전자장치 오류 논란
재판과정에서 중점적으로 다뤄진 것은 '전자식 연료분사제어장치(Electronic Throttle Control System·ETCS)'다. ETCS는 운전자가 가속페달을 밟는 깊이를 인식해 엔진에 전자식으로 연료분사량을 조절하는 역할을 한다. 페달을 깊숙이 밟으면 이를 인식해 연료분사속도를 높여 차에 붙은 속도와 힘을 높이도록 해준다.
과거에는 가속페달과 연료분사장치가 물리적으로 연결돼 있었지만 자동차제조업체들이 전자장치 장착비중을 높이면서 현재는 대부분의 차들이 이 같은 방식으로 작동한다. 배심원들은 연료분사를 제어하는 이 전자장치에 대해 소프트웨어적 결함이 있다는 사실에 동의했다.
이번 평결로 국내 완성차 업체들도 위기감이 높아졌다. 대부분의 완성차 업체들이 급발진 소송에 휘말린 상태에서 전자적 오류에 따른 사고 위험성을 줄이는 것이 핵심 과제로 떠올랐다. 특히 유럽을 중심으로 자동차 전장부품에 대한 안전기준도 강화되고 있어 국내 업체들도 이에 적극 대비해야 한다는 지적이 나온다.
실제 독일자동차공업협회 주도로 국제표준화기구(ISO)는 2011년 11월 15일 ISO 26262를 공표했다. ISO 26262는 차량용 전장부품시스템에 적용되는 기능안전 국제표준으로 중량 3500㎏ 이하 승용차에 설치되는 전장부품시스템 가운데 안전과 관련한 부품은 반드시 이 표준을 따라 제작돼야 한다.
ISO 26262를 도입하게 된 결정적 계기는 2009년 미국에서 발생한 도요타 리콜 사태였다. 당시 연료 분사를 제어하는 전자제어 스로틀 시스템이 급발진의 원인으로 지목됐을 때 도요타는 설득력 있는 반론을 제시하지 못해 11억달러(약 1조2000억원)라는 천문학적 비용을 지불해야 했다.
반면 국내 ISO 26262 대응 역량은 기대에 크게 못 미친다는 평가다. 실제 BMW 등 이미 ISO 26262 준수를 요구한 해외 완성차 업체에 수출하는 대기업을 제외하고 대응체계가 전무하다. 현대차 등 대기업의 주도로 대응책을 마련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힘을 얻는 이유다.
현대차는 그룹 차원에서 '차량 전장화 역량'에 초점을 맞춘 대규모 투자를 진행하고 있다. 현대모비스는 지난 16일 전자연구동 준공에 맞춰 2015년까지 총 1조8000억원에 이르는 연구개발(R&D) 투자계획을 포함한 중장기 전략을 발표했다.
백정국 현대모비스 기술전략팀장은 "세계 각국의 안전과 환경에 관한 규제가 강화됨에 따라 친환경.멀티.메카 부문의 기술개발에 회사의 연구개발 역량을 집중할 것"이라며 "이를 바탕으로 해외 완성차 업체를 대상으로 한 수주경쟁에도 주도적으로 참여할 예정"이라고 말했다.
한편, 민주당 이윤석 의원이 국토교통부로부터 제출받은 국정감사 자료에 따르면 최근 5년간 자동차 급발진 사고 신고건수는 2009년 7건에서 지난해 136건으로 급증했다. 급발진 사고 신고가 가장 많은 차종으로는 현대차 쏘나타 LPG가 꼽혔으며 르노삼성차 SM5 LPG와 SM3가 뒤를 이었다.
김필수 자동차급발진연구회 회장(대림대 교수)은 "완성차 업체의 입장에서는 급발진이라는 사안이 치명적일 수 있다"며 "현재 기술과 발전 속도라면 수년 이내 (급발진 원인에 대한) 최종 결과를 도출할 수 있을 것"이라고 설명했다.
[email protected] 박하나 김병용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