믿음의 유형
종종 믿음은 신앙과 동일시되기도 하지만 둘 사이에는 약간이나마 분명한 차이가 있다. 그러나 사전적인 정의로는 믿음과 신앙은 크게 구별되지 않는다. 대부분의 사전은 믿음에 대하여 "사람이나 사물에 대한 신뢰를 뜻하며, 증거가 뒷받침되지 않는 것에 대한 확신과, 이성으로 증명할 수 없는 것을 받아들이는 행위도 포함된다"라고 정의한다. 이 경우 종교적인 가르침이나 기적을 받아들이는 것도 믿음에 포함된다.
종교인들은 흔히 반대자들에게 믿음의 정의를 함부로 적용하는 경향이 있다. 예를 들면,
ㅇ 미국에 쌍둥이 빌딩이 있었으나 테러로 무너진 것, 이라크를 미군이 점령하였다는 것은 직접 보지 않고 메스컴으로 접한 것인 한은 믿음에 불과하다.
ㅇ 토성에 고리가 있다거나, 명왕성의 자전축이 누워 있다는 것도 직접 목격한 것이 아닌 천문학자들의 주장일 뿐이므로 결국 믿음을 주장하는 것 아닌가?
ㅇ 블랙홀의 경우 아예 관측조차 되지 않았으며 오직 가능성만 제기되었을 뿐이니 블랙홀을 주장하는 것과 유신론자들이 신의 존재를 주장하는 것 사이에는 별로 틀린 점이 없다.
결국 종교인들의 주장은 증거를 요구하는 반대자들에게 나름대로 피장파장의 논리를 펴고 있는 셈이다. 하지만 그들의 기대와는 달리 피장파장이 될 수 없으니 "안타까운" 일이다! 이라크 사건은 시간과 금전적인 여유만 있다면 직접 확인이 가능한 것이다. 911사건은 우리가 TV나 신문 같은 메스컴이 가진 메커니즘을 이해만 한다면 얼마든지 인정할 수 있는 실제사건이다. 토성의 고리의 경우는 성능 좋은 천체망원경을 구입하여 관찰하면 해결될 문제이다(명왕성에 대해서는 자신없다. 그런 것을 관측할 수 있는 장비를 내 능력으로는 마련할 수 없으니).
블랙홀의 경우 조금 양상이 다르다. 블랙홀은 물리적/천문학적 현상을 탁월하게 설명해주는 여러 과학이론들이 제기한 개념으로, 만약 블랙홀의 존재를 부정하게 되면 각 이론들의 다른 부분도 부정되어 자체모순이 되기에 블랙홀의 존재를 새로운 증거가 나오기전까지 잠정적이나마, 인정할 수밖에 없으며(이런게 반증의 원리라는 거다), 현대천문학은 가능성 있는 블랙홀의 후보를 다수 확보하였다.
여기에 대한 종교인들의 반응은 "기적"이라고 불리는 현상의 경우 많은 사람들이 체험한 것이므로 증거로서의 입지가 충분히 성립하며, 신의 존재에 대한 문제도 언젠가는 마치 아인슈타인의 광전효과나 중력렌즈 현상처럼 입증이 가능해 질지 모른다는 것이다.
(신비주의자들도 비슷한 주장을 하지만 종교인들과는 양상이 조금 다르다. 그들은 구체적인 과학이론까지 제시한다. 물론 그들은 그 이론이나 결과물에 대한 검증을 거부하기 때문에 주창자들의 말은 사기행각에 불과할 가능성이 높다. 그리고 동조자들의 경우는 종교인들과 차이가 없다고 보면 된다.)
다른 회의주의자들은 어떨지 모르지만 필자의 경우 기적이나 신의 존재에 대해서는 입증(부정적 입증까지)의 가능성에 대해 잘 모른다고 대답한다. - 긍정이든 부정이든 입증된 바가 없다는 것은 현재의 상태이며, 입증의 가능성조차 알 수가 없다는 것은 미래까지 포함한다 -
다만 지금까지 보고된 기적들은 거의 모두 허위/조작 또는 착각에 불과하며, 아직 규명되지 않은 "기적"들도 결국은 같은 결과일 것이라는 기대에 그칠 뿐이다.(기대와 믿음은 별개의 문제임을 분명히 밝혀둔다)
CSICOP(초자연현상의 주장에 대한 과학적 조사를 위한 위원회) 회장인 폴 커츠의 믿음의 유형에 대한 정리에 살을 붙여 소개하기로 한다.
커츠는 믿음을 3가지 유형으로 나누었다.
ㅇ 1 유형 : 타협하지 않는 믿음
이 유형은 아무리 강력한 반대의 증거가 나와도 자신의 믿음을 수정하거나 반대증거와 타협하지 않으려는 믿음이다. 이런 유형은 사실 종교인들보다 신비주의자나 초과학 주장자들 사이에서 더 많이 나타난다. 예를 들어 피라밋 파워를 주장하는 자들은 자신들의 주장과는 반대되는 실험결과를(심지어 자신이 직접 행한 실험조차도) 받아들이지 않는다. 영생교, JMS나 만민교회의 신도들이 그들의 교주나 교리를 대하는 태도도 이 유형에 들어간다(어디 이런 종교들만 그러랴!). 이 유형의 사람들이 반대증거에 대해 할 수 있는 일과 실제로 보이는 반응은 "믿음의 부족"을 탓하는 것과 상대방이 "부정적 사고방식을 가졌다"고 우기는 것이다.
ㅇ 2 유형 : 의지에 의한 믿음
이 유형은 사전적인 정의와 같은 믿음으로, 증거가 없거나 불충분함에도 불구하고 믿고자 하는 의지로써 가지는 믿음이다. 기독교인들이 흔히 말하는 신앙고백이 전형적인 케이스가 되겠다. 이들은 상대적 가치우월성을 절대적인 가치우월성이라며 보편화를 시도한다. 하지만 어디까지나 증거가 나오기 전까지는 각자의 판단과 선택의 문제에 불과한 것들이 대부분이다. 그리고 판단과 선택 이전에 유보의 자세가 더 적절하지 않을까?
이 유형에 속하는 믿음을 가진 자들은 강력한 반대증거가 나타날 경우 자신의 믿음을 버릴 수도 있다. 하지만 강력한 반대증거가 제시되는 경우는 매우 드물다. 여기에서 "드물다"는 말은 수적인 희귀성이 아니라 강력한 반대증거를 이해할 능력이 부족하여 그들로서는 이전의 믿음을 고수하는 것이 용이하다는 말이다. 또한 강력한 반대증거를 받아들이는 것보다는 이전의 믿음을 고수하는 것이 마음의 안식을 제공해주는 경우도 있다. 한편 반대증거를 받아들이지 않는 자신에 대해 마음이 편치 않다고 해도, 지금까지 가졌던 믿음 때문에 투자한 것들에 대해 미련이 남아서 쉽게 믿음을 버리지 못하기도 한다.
ㅇ 3 유형 : 증거에 기초한 가설
이 유형은 관찰한 것과 확립된 이론들을 기반으로 가설을 설정한 후에 가설의 타당성을 조사(실험, 자료수집, 분석 등등)하고, 3자에 의한 철저한 검증을 거친 후에 비로소 가지는 믿음이다. 만약 반대되는 증거가 나타나면 이 믿음은 수정되거나 철회된다. 종교인들은 절대적이며 확고하고 불변인 진리를 추구하지만, 인간에게는 그런 것이 주어지지 않았음을 볼 때 앞으로도 그럴 가능성이 없으며, 따라서 증거에 의해 수정되거나 철회되는 것은 자연스러운 것이고 진리에 접근하는 방법이 될 것이다. 새로운 증거를 부정하고 과거의 이론을 고집하는 순간 그는 2유형의 믿음에 빠지는 것일 뿐이다.
이상에서 본 바와 같이 종교인이나 신비주의자들이 종교반대자나 회의주의자들의 주장을 "믿음"의 하나라고 주장한다면 이를 받아들일 수는 있다. 하지만 검증된 증거의 유무에 따라 보편화된 믿음이 될 것인지 아니면 독단이 될 것인지가 결정된다는 점을 다시 한번 강조하고 싶다. 무조건적이고 편하디 편한 믿음보다는 "철저한 검증에 의한 힘든" 믿음을 갖기 바란다.
앞으로 "무신론자, 반기독교주의자, 회의주의자들도 결국은 자신의 믿음의 체계에 기반한 주장을 하고 있지 않느냐"는 억지는 부리지 말기를 바라며, 관련된 버트런드 러셀의 글 몇가지를 함께 소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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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교가 주는 해악에는 두 종류가 있다.
하나는 종교에 반드시 주어져야 한다고 여겨지는 믿음의 성질에 좌우되는 것이고, 또 하나는 믿어지고 있는 특정 신조들에 좌우되는 것이다.
우선 믿음의 성질에 관해 살펴보자. 여기서는, 신앙을 갖는 것, 다시 말해 반대 증거가 있더라도 흔들리지 않는 확신을 가지는 것이 도덕적인 것으로 여겨진다. 아니, 반대 증거로 인해 의심이 생기면 그 증거들을 억압해야 한다고 주장된다. 이러한 근거 위에서, 러시아의 경우 자본주의를 옹호하는 주장을 못 듣도록, 미국의 경우 공산주의를 옹호하는 주장을 못 듣도록 젊은이들의 귀를 막아버린다. 그 결과 양측의 신념이 원상 그대로 보존되면서 사생결단식의 전쟁만 준비될 뿐이다.
비록 자유로운 탐구의 뒷받침을 받지 못하는 믿음이라 하더라도 이것 혹은 저것을 믿는 것이 중요하다는 식의 확신은 거의 모든 종교들에서 볼 수 있는 현상으로서 바로 이것이 국가교육제도를 자극해 댄다. 그 결과 젊은이들은 정신을 차릴 수 없을 지경이 되어 자신들과 다른 광신주의를 가진 상대편에 대해 광적인 적대감으로 가득 차게 되며, 특히 모든 종류의 광신주의에 반대하는 사람들에 대해 더한층 적의를 가지게 된다. 증거에 입각해 확신하는 습관, 증거가 확실하게 보장하는 정도까지만 확신하는 습관이 일반화된다면 현재 세계가 앓고 있는 질환의 대부분이 치유될 것이다. 그러나 지금 대부분의 나라들에서는 그러한 습관의 형성을 방해하는 것이 교육의 목표로 되어 있으며, 근거 없는 독단 체계를 믿지 않겠노라고 하는 사람들은 2세를 가르칠 자격이 없다고 여겨지는 형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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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독교 신자들은 자신들의 신앙은 좋은 것이고 다른 신앙은 해로운 것이라고 한다.
또한 공산주의에 대한 신앙에 대해서도 그렇게 주장한다.
그러나 내가 주장하고 싶은 것은 모든 신앙은 해롭다는 것이다.
우리는 ‘신앙’을 증거가 없는 어떤 것에 대한 확실한 신뢰로 정의할 수 있다.
증거가 있을 때는 아무도 신앙이라고 말하지 않는다.
우리는 2더하기 2는 4, 혹은 지구는 둥글다를 신앙이라고 말하지는 않는다.
단지 감정으로서 증거를 대신하고 싶을 때만 신앙이라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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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을 안이하게 만들어 주는 꾸며 낸 이야기의 도움 없이는 삶의 위험을 정면으로 대하지 못하는 사람에게는 연약하고 상당히 비열한 면이 숨어 있다.
그의 어떤 부분은 거의 필연적으로 그것이 꾸며 낸 이야기에 불과하며, 그것을 믿는 이유는 단지 편안하기 때문이라는 것을 알고 있다. 그러나 그는 감히 이런 생각에 정면으로 맞서지 못한다!! 게다가 희미하게나마 스스로의 의견이 비이성적이라는 것을 스스로 알고 있기 때문에 자신의 의견이 논박 당하면 굉장히 화를 내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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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끊임없이 다음과 같은 질문을 받곤 한다. 즉, ‘당신의 냉정한 합리주의가 독단적 신앙으로 보호되고 있는 아늑한 가정 같은 편안함과 비교될 수 있는 구원을 추구하는 사람에게 무엇을 줄 수 있는가?’이다.
이 질문에 대한 대답은 다양하다. 우선 나는 이성의 포기에 의해 얻을 수 있는 것과 같은 큰 행복은 줄 수 없다고 말한다. 또 나는 술이나 마약 또는 과부나 고아의 돈을 사취함으로써 모은 재산 등에 의해 얻을 수 있는 것과 같은 큰 행복을 줄 수도 없다고 말한다.
나의 관심은 개인의 행복이 아니라 인류의 행복이다. 만약 당신이 진정으로 인류의 행복을 원한다면 어떤 형태의 사소한 개인적 행복도 당신에게 주어지지 않을 것이다.
당신의 아이가 병에 걸렸다고 가정해 보자. 만약 당신이 세심한 부모 라면 아무리 의심스럽고 비관적이라 해도 의사의 처방을 따를 것이다. 그러나 당신이 돌팔이 의사의 기분 좋은 의견을 받아들여 결과적으로 당신 아이가 죽었다면 돌팔이 의사에 대한 믿음의 유쾌함이 당신을 용서해 주지는 않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