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게시물ID : cyphers_76822짧은주소 복사하기
작성자 : Manyuate
추천 : 6
조회수 : 264회
댓글수 : 5개
등록시간 : 2014/02/24 00:42:50

<서장, 서점에서의 만남>

 

날씨가 흐리다. 이곳에 온 뒤로 한 번도 햇빛이 제대로 드는 걸 본적이 없다.

오늘도 서점은 한산하다. 구석진 곳에 위치해서 손님이 적은 것임에는 틀림없지만 근처에 사는 손님들이 간간히 들려주셔서 그럭저럭 운영되고 있는 듯도 하다.

물론 그렇다고 지나가는 사람들이 아예 가게에 들리지 않는 것은 아니다.

서점이 좀 오래된 듯 겉으로나 속으로나 제법 고풍스러워서 사람들의 발걸음을 잠시 멈추게 하는 멋이 있다. 10명중 한두명쯤은 그 멋에 끌려 들리기도 하는 것이다. 물론 책사는 건 별개지만...

그렇게 가게에 들린 손님들이 구경하다 묻는 것은 이 가게의 고풍스러움이 내 취향이냐는 것이다. 책장이나 테이블들을 구성하고 있는 나무 재질이나 거기에 달려있는 장식들은 내 취향이 맞다. 어두우면서도 중간 중간 실내를 밝히고 있는 은은한 램프들도 굉장히 맘에 든다. 하지만 이 가게의 주인은 내가 아니지.

이 가게의 주인은 발씨이다. 이름이 굉장히 특이한 이 사람은 도무지 가게를 보는 일이 없다. 지금도 나에게 가게를 맡겨 놓고선 어디론가 사라진 참이다. 상당히 불만스럽지만 여하튼 본론으로 돌아와서 발씨는 오래된 것들을 사랑한다. 가게가 이렇게 고풍스러워진 것도 어디선가 고전양식들을 보고 반했기 때문이 틀림없다. 그래서 그런지 서점에도 오래된 책들이 많다. 손님들에게 이러한 사실을 이야기해주면 발씨가 굉장히 교양있는 사람인줄 알지만... 글쎄... 그저 사랑할 뿐... 그 이상 그 이하도 아닌 듯하다.

그런 발씨의 취향에 따라 서점에 있는 책들도 오래되었다. 이런 구하기 힘든 책들이 많으니 한두권정도 읽어보려고 했었는데, 딱히 읽을 맘이 드는 책이 없었다. 아니 그냥 책이 읽기 싫은 걸지도. 결국 찾아낸 책이라곤 지금 책을 펼칠까 말까 고민하고 있는 이 두꺼운 양장책 하나. 이 책은 굉장히 맘에 든다. 가게의 2층에서 따로 보관되고 있는 책들 중 하나로 푹신푹신한 가죽으로 책겉면이 싸여있어 만질때마다 보드라운 느낌에 기분이 좋다. 책의 표지엔 금색으로 수놓아진 제목과 함께 다채로운 색으로 빛나는 그림이 수놓아져 있다. ‘소녀와 영웅이 책의 제목. 영웅 소설일까? 그림은 소녀가 두꺼워보이는 책을 들고 있다. 에이... 제목이 소녀와 영웅이면 소녀랑 영웅이 그려져 있어야지 소녀랑 책이라니.... 왠지 책을 펼쳐보지 않아도 재미없을 것 같다. 사실은 그냥 펼쳐보기 싫은 거지만.

괜히 바보같아서 책을 빤히 들여다보고 있자니 그림이 반짝반짝 거리는 것 같다. 실이 보통 재질이 아닌가본데? 반짝반짝. 그림 속에 소녀가 날 보고 웃는다. 이젠 지루하다 못해 졸린 걸지도. 그래. 웃고 있으니까 좀 낫네. 하지만 속으론 울고 있을 것 같다. 그런 미묘한 표정을 짓고 있다.

 

-똑똑.

 

!”

 

깜짝 놀랐다. 진짜. 너무 놀란 나머지 턱을 괴고 있던 한쪽 팔이 미끄러져 책상에 턱을 박을 뻔 했다. 책상에 쓸린 팔꿈치가 아프다.

 

... ... 죄송합니다. 찾는 책이 있어서 잠시 들렸는데... 책을 찾는데 도움이 좀 필요할 것 같아서요.”

 

고개들어보니 언제 왔는지 모를 손님이 책상을 두들기던 모습 그대로 놀란 표정으로 서있다. 아마 나도 같은 표정이겠지?

책상을 살짝 두들긴 것만으로 이런 반응이 온다면 누구나 놀라겠지. 잠깐 졸아서 손님이 온 걸 몰랐던 것 같다.

빠르게 몸을 바로세우고 책상을 짚고 일어서며 말했다.

 

... 죄송합니다, 손님. 찾으시는 책이 어떤 책이죠?”

 

살짝 웃는 낮으로, 오케이.

 

손님은 살짝 고민하는 표정으로 나를 바라보다가 책상위에 내가 올려놓았던 책을 바라본다. 표정이 미묘한 걸로 봐서는 사려고 했던 책이 이 책일까?

 

... 혹시 찾으시는 책이 이건가요..?”

 

곤란하다. 이 책은 따로 보관되고 있던 만큼 누군가에게 팔지 않는 책이다. 만에 하나 복잡한 일이 생길까 조마조마 하면서 손님을 바라봤다. 내 실수로 인해 일이 커진다면 발씨한테 혼날 거야. ... 그건 싫다.

 

. 이 책이 제가 찾던 책 같군요. 혹시 팔지 않는 책인가요?”

 

손님이 내 표정을 읽고선 조심스레 물어본다. 뭐라고 대답하지. 있는 그대로만 얘기해도 되겠지?

 

...... 이 책은 판매하지 않는 책이에요. 죄송합니다.”

 

살짝 고개를 숙이며 손님한테 사과했다.

 

, 괜찮아요. 책이야 다른 곳에서도 구할 수 있는 거니까요.”

 

손님은 그렇게 말하며 나에게 미소 지었다. ..... 좋은 사람. 살짝 지은 미소만으로도 사람을 편하게 한다는 게 이런 걸까.

그 편안함에 살짝 긴장을 풀고 나도 손님에게 마주 웃어주었다.

 

방금 많이 놀라셨죠? 제가 잠깐 졸았나 봐요. 손님이 안 깨워주셨으면 계속 졸다가 점장님한테 혼날 뻔 했네요. 감사해요.”

 

아니요. 그런데 팔꿈치는 괜찮으세요? 아까 보니까 책상에 미끄러지면서 좀 다치셨을 것 같은데.”

 

손님이 그렇게 말하면서 내 팔꿈치를 가리킨다. 아 잊고 있었는데 인식하니까 아프고 화끈거린다. 소매를 걷어 확인해보니 옷에 쓸려서 피부가 살짝 벗겨졌다. .. 에이, 뭐 어때. 금방 낫겠지.

 

.. 저런.. 정말로 다치셨네요. ... 집이 바로 앞인데 약이라도 가지고 올까요? 저 때문에 다치신 것 같아서 죄송하네요.”

 

아뇨, 아뇨. 괜찮아요. 서점 2층이 생활하는 곳이라 약은 바로 가져올 수 있어요. 물론 이런 상처 정도는 치료 안 해도 금방 나을 걸요!”

 

나는 그렇게 얘기하며 소매를 다시 내렸다. 그저 살짝 벗겨졌을 뿐인, 심한 상처는 아니니 금방 낫겠지 싶다.

손님이 목걸이를 만지면서 미안한 듯 웃는다. 남자치곤 가냘픈 이목구비에 살짝 웃으니 이쁘다.

 

그런데 집이 바로 앞이시라니 요 앞 아파트에 사시나 봐요?”

 

, . 어제 이 동네로 이사 온... 필이라고 해요. 집 앞에 이런 서점이 있다니 저는 운이 좋네요. 앞으로 자주 올 것 같은데 잘 부탁드려요.”

 

어쩐지 못 보던 얼굴 같았는데. 이 동네 사람을 모두 아는 건 아니지만 요 근처 사람이라면 대충 얼굴은 안다. 적당히 긴 금발에 갈색 눈을 가진 사람도 동네엔 꽤 있지만 이런 미모를 가진 사람은 없었으니까. 며칠 전에 이사 간 집에 새로 온 사람 인 것 같다.

 

책을 좋아하시는 군요. 잘됐네요. 저희 서점은 오래된 책을 주로 다뤄서 세간에 보기 힘든 책들이 많거든요. 아마 둘러보시다보면 맘에 드시는 책이 많을 거 에요.”

 

그렇군요. 그렇다면 저... 책 좀 둘러봐도 될까요?”

 

손님, 그러니까 필씨가 흥미로운 눈빛으로 주변을 둘러본다. 찾던 책 말고도 다른 책을 찾을 수 있게 되면 좋겠네. 안 그럼 조금 미안하니까.

 

. 천천히 둘러보세요. 손님용 탁자랑 의자가 있으니까 조금 읽다가 맘에 드시면 구매하셔도 되요. 그리고, 제 이름은 아이에요. 저야말로 잘 부탁드려요.”

 

그렇게 말하며 살짝 웃었다.

 

, 아이씨.”

 

그런 나를 필씨가 미소 띤 얼굴로 바라본다. 그리곤 아무 말 없이 목에 걸린 목걸이를 만지다 몸을 돌려 책장으로 향했다.

...목걸이를 만지작거리는 건 습관인 걸까.

책장 한켠에서 책을 둘러보는 필씨의 옆모습을 지켜보다 자리에 앉았다. 그런데 정말로 책을 좋아하긴 하는 모양이다. 책을 고르는 필씨의 표정이 진중하다. 어떤 책을 고를지 고민하는 걸까. 있다가 책 고르시면 차라도 갖다드려야지.

책상에 다시금 턱을 괴고 앉아 주변의 종이를 집어 들고 낙서를 시작했다. 아무래도, 오늘이 가기 전엔 읽을 책을 찾아야겠다. 더 이상 낮잠 잤다간 혼날 테니까.

 

****

 

어디선가 누군가의 대화소리가 들려온다. 익숙한 목소리.

 

“....그건 안 돼.”

 

어째서죠...? 그때 이후로 저희는...”

 

그건 좋아. 하지만 난 그럴 수 없어.”

 

발씨와 필씨의 목소리다. 고개를 살짝 들었다. 가게 입구 쪽으로 등을 보이며 서있는 발씨와 손님용 탁자 앞 의자에 비스듬히 이쪽을 향해 앉아있는 필씨가 있다. 살짝 눈부셔서 서점의 전면에 위치한 창밖을 실눈으로 보니 하루를 밝히느라 지친 태양이 거리를 붉게 가라앉히는 것이 보인다. 아아... 내가 또 낮잠을 잤구나. 그럼...

 

“...그렇군요. 그렇다면 어쩔 수 없죠. ! 아이씨, 일어나셨나요?”

 

... 왠지 분위기가 어두워서 계속 자는 척하려고 했던 나를 필씨가 봤는지 금세 아는 척을 한다. 이런 분위기라면 낮잠잔 것 때문에 좀 크게 혼날지도 모르는데... 필씨가 아까와 같은 미소를 짓고 있지만 왠지 사악해 보인다.

 

“....아이, 일어났어?”

 

필씨의 말에 발씨가 바로 뒤를 돌아본다. 지는 노을에 붉은 기 감도는 푸른 머리카락이 빛난다. 눈을 덮을 정도로 긴 머리카락. 잘랐으면 좋겠는데. 돌아본 그의 붉은 눈동자엔 약간의 놀람이 담겼다. 그렇게 놀라실 거 없는데... 제가 낮잠 자는 거 하루 이틀도 아니고. 하하하하. 시덥잖은 생각을 하며 멋쩍게 다시 누우려고 했던 몸을 일으켰다. ..? 밑에 있던 양장책이 보이질 않네. 침흘릴까봐 발씨가 책장에 돌려놨나... 치사해! 어쩐지 자기 불편하더라니. ...두배로 혼나겠는걸.

 

-스륵

 

상체를 일으키자 어깨에서 뭔가 흘러내린다. 고개를 돌려보니 누군가의 겉옷이다. 고개를 돌려 발씨와 필씨를 바라봤다. ... 필씨가 벗어줬구나. 친절하신 분이시네... 는 세배로 혼나려나.

 

, 아이씨가 피곤하신지 주무시기에... 잘 때는 체온관리가 안되니까요.”

 

잠이 덜 깨서 멍하니 날 덮고 있던 외투를 보고 있던 나에게 필씨가 그렇게 말하며 상냥한 미소를 짓는다.

 

감사합니다...”

 

발씨의 눈치를 보며 필씨에게 감사인사를 했다. 발씨 표정을 보니 딱히 내가 잔 사실에 대해서 염두에 두고 있지 않은 듯한 표정이다. 그저 뭔가 생각하는 듯 시선에 초점이 없다.

다행이네! 그런 발씨를 제쳐두고 재빨리 어깨에서 흘러내린 기다란 코트를 집어 들어 필씨에게 가져다주었다. 그리고 이제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2층으로 올라가기만 하면...

 

걱정마세요. 발씨가 설마 지루한 서점에서 낮잠 잤다고 혼내겠어요?”

 

바로 몸을 돌려 위층으로 향하려던 나를 필씨가 말로 붙들었다. ... 이 사람은... !!

당황해서 필씨를 보자니 날 향해 빙글빙글 웃는다. 그래, 일부러....

 

아아~ 지루하긴 하지. 하지만 그렇다고 용돈을 삭감당하고 싶지는 않을 걸.”

 

발씨가 허공을 보며 생각하던 시선을 돌려 옆으로 다가온 나를 내려다본다. 으아~ 결국 그런 거야? 그냥 넘어갈 수 있을 줄 알았는데...

 

“...그리고 너한테서 그런 소리를 듣고 싶지는 않군. 어서 돌아가, 불청객.”

 

~ 불청객이라뇨. 오랜만에 만났는데...”

 

그래. 오랜만에 만나긴 했지... 반갑지 않을 뿐.”

 

필씨가 그렇게 쏘아붙이는 발씨를 바라보며 씁쓸하게 웃는다. 어느새 손은 목걸이를 만지고 있는 채다. 인상 쓴 표정으로 필씨를 내려다보던 발씨의 시선이 목걸이에 닿았다.

 

그 목걸이... 그게 그 차단가능하다던?”

 

. ...교훈을 얻은 게 조금 있어서요.”

 

발씨의 물음에 필씨가 쓸쓸한 표정을 짓는다. 나는 알 수 없는 두 사람만의 기억에 대한 이야기인 걸까. 필씨가 이내 어색한 미소를 지었다. 발씨는 허공을 보고 짧은 한숨을 내뱉더니 옆에 어정쩡하게 서있던 나에게 말을 걸었다.

 

“.... 그래. 오랜만에 만났는데 저녁이라도 같이 먹자. 아이, 외출준비하고 내려와.”

 

? 외식하는 거예요? 신난다!”

 

둘 사이에서 머릿속에 물음표만 띄우던 나에겐 희소식이다. 가장 중요한건 이래저래 나에 대한 일이 넘어갔다는 거지만. 나는 양손을 마주쳐 가볍게 손뼉을 치고는 2층으로 올라가는 계단으로 향했다. 등 뒤로 둘이서 이야기하는 소리가 들린다. 두 사람이 아는 사이였다니... 우연도 보통 우연이 아니네. 뭔가 한쪽은 서글서글하고 한쪽은 무뚝뚝한 느낌에 상극 같은 느낌이지만. 오늘은 왠지 느낌이 묘하다.

 

*****

 

세수를 하고선 외출복으로 갈아입었다. 아까 자고 일어났을 때 미쳐 신경을 못 썼었는데 얼굴에 낮잠 잔 자국이 조금... 나 있었다. ~ 여자애들이 손거울 같은 걸 괜히 들고 다니는 게 아니었어. 다음번에 나갈 때 나도 하나 사야겠다. 물론 용돈이 허락하는 한에서.

괜히 거울 앞에서 작게 푸념을 하며 계단을 내려갔다. 내려가 보니 발씨는 어디로 갔는지 보이지 않고 필씨 혼자만 있다. 책장 앞에 서있는 필씨는 책을 보는 데 빠진 듯 내가 내려온 걸 모르는 것 같다. 그런 필씨에게 천천히 걸어가서 어깨를 손가락으로 콕콕 찔렀다.

 

필씨?”

 

? , 아이씨.”

 

-

 

필씨가 방금 전까지 들고 있었던 책을 놀라서 덮으며 날 돌아본다.

 

... 죄송해요. 저 때문에 책이 덮였네요.”

 

아뇨, 아뇨. 그냥 잠깐 무슨 내용인가 살펴보려고 중간을 열었을 뿐이라서.”

 

그렇게 말하며 필씨는 책을 원래 꽂혀 있던 곳에 찾아 끼웠다.

 

그렇다면 다행이지만...”

 

숙녀분이신지라 시간이 조금 걸렸군요. 발씨는 밖에서 기다리고 계세요. 나갈까요?”

 

필씨가 그렇게 말하며 내게 손을 내밀었다. ... 마주 잡으면 되는 걸까...

약간 머뭇거리는 손을 뻗어 필씨의 손을 잡았다. 필씨가 내 손을 잡고선 살짝 웃는다.

그 미소에 지금 이 상황이 부끄러워 져서 고개를 조금 숙였다. ...그런 얼굴로 그렇게 웃으면 반칙.

필씨가 이내 내 손을 이끌고 밖으로 향한다. 밖에는 가게 벽에 기대어 서있는 발씨가 보인다. 아무래도 창을 피해 벽에 기댔기 때문에 가게 안에서 못 본 것 같다.

발씨가 필씨의 손을 잡고 나오는 나를 보고 입을 열었다.

 

오늘따라 오래 걸렸네. 얼굴에 난 자국 없애느라 오래 걸렸나?”

 

돌직구... 차마 아니라고는 못하겠다. 어떻게 없애야하나 우왕좌왕 했지만 시간 조금 지나니까 없어지던데... 발씨가 봤으면 필씨도 봤겠지? 처음 보는 사람한테 무슨 추태람.

 

그보다... ? 아이 손은 왜 잡고 있는 거야?”

 

, 숙녀분은 당연히 에스코트 해드려야죠.”

 

어디로 가는지는 알아?”

 

물론 그게 가게 문 앞까지라고 할지라도?”

 

그 말에 필씨는 냉큼 그렇게 대답하며 나를 발씨에게 데려갔다. 그리고 내 손을 천천히 놓으며 말했다.

 

숙녀분 이제 이 분께서 길안내를 해주실 겁니다. 짧은 만남이었지만 만족하셨기를 바랍니다.”

 

그리곤 빙글빙글 웃는다.

 

... 하아... 가자, 아이. 요전에 갔던 그 레스토랑이면 괜찮지?”

 

... .”

 

발씨는 내 대답을 듣자마자 가게 벽에서 떨어져 걸어가기 시작했다. ... 방금 전까지 필씨에게 잡혀있던 손을 내려다봤다. ...발씨는 잡아주지 않는 거네.

 

어서 가죠. 발씨를 놓치겠어요.”

 

옆에 있던 필씨가 내 등을 살짝 밀었다. 정신을 차리고 발씨가 간 방향을 보니 벌써 멀어진 채다. 평소보다 조금 더 빠르게 걷고 있는 걸까. 필씨와 함께 뒤따라서 걸었다.

오늘 처음 본 사람이랑 단둘이 걷고 있으니 어색하다. 아까는 서점이라서 아무렇지도 않았지만 지금은 저녁 먹으러 가는 길이니까. 앞에 걷던 발씨가 조금 천천히 걷는지 거리는 조금씩 가까워지기 시작했다. 날 버리고 가다니!

 

아이씨는... 언제부터 서점에서 일하신 거예요?”

 

.. ?”

 

발씨랑 가까워지는 것만 신경쓰고 있었기에 갑작스런 질문에 놀랐다. 살짝 고개를 들어 필씨를 쳐다보니 옅게 미소 짓고 있다.

 

~ 서점에서 일한지... 2년 쯤 된 것 같네요. 맞아요. 아마 그쯤이었을 거예요. 그때도 지금처럼 막 추워지기 시작할 즈음이었으니까.”

 

아마도. 그 무렵의 기억은 희미해서 잘 기억나지 않는다. 아무래도 별로 신경을 쓰지 않았던 것 같다.

 

“2... 인가요. 오래 일하셨네요.”

 

필씨는 어떤 일을 하세요?”

 

저는 지금 아무 일도 하고 있지 않아요. 말 그대로... 백수? 라고하면 될까요. 하하. 사실은 다니던 직장에서 잠시 쉬라는 권고를 받아서.”

 

, 그럼 언제 복직할 수 있을지 모른다는...”

 

아뇨, 아뇨! ... 설마요. 좀 오래되긴 했지만... 설마 직장에서 절 잊어버린 건 아니겠죠...”

 

내 말을 부정하던 필씨가 갑작스레 풀이 죽었다. ... 말실수 했구나. 으아...

급 가던 길을 멈추고 필씨의 손을 양손으로 잡았다.

 

아니에요! 쉬라고 한 거니까 곧 다시 복직할 수 있을 거예요! 그럼요! 필씨같은 사람을 내친다니 그런 손해 보는 일을 할 회사가 어딨겠어요?”

 

필씨가 내 말을 듣더니 얼굴이 안 보이게 고개를 돌린다. ... 사실은 내심 신경 쓰고 계셨던 걸까. 내가 말을 잘못했어... 울고 계신 건 아니겠지? 마음씨약해보이셨는데... 상처받으셨을까.

고개를 돌린 필씨의 어깨가 살짝 떨린다. 누군가 자신의 필요성을 인정해 주지 않는다면 슬프겠지... 가슴이 아파온다. 필씨를 위로해주고 싶은 마음에 등에 손을 올렸다. 떨림이 강해지는 게 느껴진다.

 

... 필씨...”

 

.. ...”

 

“...필씨?”

 

... 아하하하하하.”

 

필씨가 몸을 숙이더니 무릎을 잡고 웃기 시작했다. 고개를 숙여서 표정을 확인하니... 엄청 즐거운 듯 한 표정.

 

아니에요, 아니에요. ... 잠시만요. 웃음이 멈추질 않아서.”

 

내 얼굴을 보고선 뭔가 변명하려고 한 것 같은데... 웃음 때문에 실패.

...뭐야...

 

설마 지금 저 놀리신 거예요?”

 

난 진짜 진심으로 걱정했는데. 놀린 거라니... 너무해. 약간 화가 난다.

몸을 일으켜 세우곤 잡고 있던 손을 놓았다. . 거기서 혼자 웃고 있으라지 뭐. 난 혼자 가야지. 앞에 가던 발씨의 모습은 보이질 않는다. 아무래도 놓친 것 같지만, 길은 알고 있기 때문에 상관없다. 가서 발씨한테는... 필씨가 길을 잃었다고 해야겠다.

 

-

 

앞으로 가려는데 뒤에서 필씨가 나를 잡았다.

 

왜요. 그냥 거기서 계속 웃고 계시죠?”

 

... 죄송해요. 제가 장난이 조금 심했군요.”

 

아뇨! 진심으로 생각했던 제가 멍청한 것 뿐이죠~”

 

보통은 다들 대충 겉치레로만 걱정하기 때문에 가볍게 장난 식으로 끝내려고 했는데, 정말로 진지하게 받아들이셔서...”

 

그게 웃기던 가요!”

 

몸을 돌려서 필씨를 똑바로 바라봤다. 그런 나를 본 필씨의 표정엔 당황한 기색이 역력하다.

 

알고 있었으면서 계속 놀리신 거잖아요! 적어도 진지하게 생각한 상대방의 마음 같은 건 생각 안하시는 거네요!”

 

“....”

 

급 필씨의 표정이 침중해진다. 아 내가 너무 윽박질렀나... 오늘 처음 본 사인데 그럴 수도 있지. 왜 갑자기 예민해져선...

 

“...제가 너무 심했네요, 죄송해요.”

 

아뇨. 맞는 말이에요. 이전에 익숙했던 게 있어서 실수했군요. 정말로 죄송해요. 그리고 지금 이런 말 하긴 그렇지만... 하나 좋은 사실을 알았네요.”

 

필씨가 나를 똑바로 바라보며 이야기한다.

 

아이씨는... 상냥한 사람이군요.”

 

필씨의 얼굴에 미소가 어린다. 지금까지 보던 미소와는 조금 다른...

 

그리고 사실 아까 장난이 심했던 건 아이씨의 반응이 귀여워서였던 것도 있어요. 이런저런 말로 포장하려는 게 아니고, 진심으로.”

 

... 진심으로 라는 말. 아무데나 쓰는 거 아니라구!!! 귀가 달아오른다. 갑자기 그런 말 들으면 부끄럽다구요.

필씨로부터 등을 돌렸다. 지금 내 표정이 어떤지를 모르겠어.

 

... 진심으로 사과하셨으니까 됐어요. 앞으로는 주의해주세요!”

 

그렇게 말하고선 앞으로 걸었다. .. 아까보다 더 어색해진 것 같아. 그냥 조금 화가 나더라도 참을 걸.

혼자서 앞서 걷고 있는데 어느새 다가온 필씨가 내 팔을 살짝 잡았다.

 

날씨도 좋은 데 조금 천천히 걷죠. 늦게 가도 발씨는 기다려주실 거예요.”

 

내가 당황해서 빨리 걸은 것 같다. 필씨의 말에 걸음을 늦추며 하늘을 올려다봤다. 막 노을이 지기 시작한 하늘이 보인다. 드물게도 구름이 거의 없어 계속 보고 있으면 하늘 너머 우주까지 보일 것 같은 기분.

 

오늘은 달이 잘 보일 것 같은 날씨네요.”

 

필씨가 옆에서 작게 말한다. ... 최근 짙은 안개나 구름 때문에 보이지 않던 밤하늘을 볼 수 있는 걸까. 있다가 저녁엔 오랜만에 밤하늘을 구경해야겠다. 달이나 별이 아니더라도 구름 때문에 가려져 있던 새로운 걸 보게 될지도 모르니까.

그렇게 레스토랑까지 필씨도 나도 아무 말 없이 하늘을 보며 걸었다.

 

*****

 

뭐하느라 늦은 거야?”

 

레스토랑 앞에서 발씨가 약간 짜증난 어투로 물었다. 입구 근처 벽에 기대고 서있는 폼이 꽤나 오래 기다린 것 같다.

 

... 그게...”

 

제가 걸음이 조금 느려서 아이씨가 제 걸음에 맞춰 걷다보니 늦었네요.”

 

필씨가 내가 얘기하려던 걸 자르고 말했다. 틀린 말은 아닌데...

 

“... 빨리 따라오면 되잖아.”

 

에이, 정확하게 얘기하자면 먼저 앞서 걸어간 쪽이 나쁘죠. 따라오는 지도 신경 안 쓰고 혼자가다니...”

 

... 그건 그렇지만.”

 

발씨가 멋쩍은 듯 주변을 살피더니 가게 안으로 들어간다. 아무래도 아까부터 느낀 거지만 필씨는 발씨를 곤란하게 하고 싶어 하는 것 같다. 아까 있던 일을 얘기하려고 했는데 다른 얘기를 하는 걸 보면. 나야 발씨가 곤란해 하는 걸 보는 게 재밌기는 한데.

발씨의 뒤를 따라 나도 가게로 들어갔다. 오랜만에 맛있는 거 잔뜩 먹어야지!

 

-콰광!!

 

.. 뭐야?”

 

멀리에서 들리는 알 수 없는 폭발 소리에 가게 안 소음이 일순 잦아들었다. 앞서 들어갔던 발씨가 소리에 놀란 듯 잠시 멈췄다가 뒤돌아 입구 쪽으로 뛰어 나갔다.

발씨가 밖에 나가는 걸 보고 주변 사람들도 밖에 나가보거나 일어나서 창밖을 살펴보거나 하기 시작했다. 멀리서 사고라도 난건가...?

나도 주변의 창문에 기웃기웃해보았지만 건물들 때문에 잘 보이지가 않는다. 갓 어두워진 하늘의 한쪽이 밝게 빛나는 것 같긴 한데. 아무래도 자세히 보려면 밖에 나가봐야 될 것 같다.

 

-

 

밖으로 나가려고 하는 나를 필씨가 잡았다. 의아함에 필씨를 돌아보자 필씨가 약간 굳은 얼굴로 나를 바라본다.

 

....?”

 

밖은 위험한 것 같군요.”

 

멀리서 난 소리인데...?

 

-! 우르르르...

 

순간 문밖에서 뭔가 충돌하는 소리와 함께 건물이 무너지는 소리가 들렸다. 그리고 사람들의 비명소리도. 그 소리에 놀라서 뒤를 돌아보니 밖에 나갔던 사람들이 급하게 가게 안으로 들어오는 게 보인다.

 

능력자야!!”

 

다급하게 들어온 사람들 중 누군가가 소리친 소리를 들었다. 능력자? 싸움이라도 난건가...? 하지만 건물 내에 있으니까 안전하지 않을까...? 오히려 나가면 능력 때문에 섣불리 다칠지도 모른다. 사람들도 그런 생각을 한지 뭔가 몸을 사리긴 하지만 선뜻 움직이거나 하지 않는다.

입구에서 뒤늦게 발씨가 뛰어 들어오는 게 보인다. 화가 난 얼굴을 하고선 다급히 다가온다. 그리고선 필씨를 쏘아보며 잠시 망설이다가 말을 꺼낸다.

 

“... . . 솔직히 말해. 여기 온 이유가 뭐야.”

 

“....?”

 

필씨가 갑작스런 발씨의 행동에 의아해 했다. 그리곤 이내 알아차린 듯한 표정을 지으며 표정이 굳는다.

 

설마...”

 

발씨가 그런 필씨를 보고 인상을 팍 찌푸리더니 멱살을 잡고 당겼다. 두 사람이 가까워지자 발씨가 작게 속삭인다.

 

주변에 복제인간들이 널렸어. 이게 뭘 의미하는지는 알겠지?”

 

안타리우스가... 돌아왔다는 건가요?”

 

필씨가 믿기지 않는다는 얼굴로 발씨를 본다. 그 표정을 본 발씨는 한숨을 쉬며 필씨를 다시 밀쳤다.

 

모르면 됐어. 별로 상황이 좋지 않아. 건물에 있는 사람들을 끌어내리는 걸로 봐선 누군가를 찾고 있는 것 같아.”

 

그리곤 필씨를 의미심장하게 쳐다본다. 둘 사이에 미묘한 긴장감이 흐른다. 뭔가... 있나.

 

-!

 

밖에 나갔던 사람들이 들어오면서 닫았던 입구가 갑작스레 열리며 누군가 들어왔다. 연분홍 색 머리카락을 한 여자다. 여자는 주변을 살펴보더니 짧게 말했다.

 

다 나와.”

 

그러나 알지도 못하는 여자의 말에 움직이는 사람들은 없다. 발씨가 내 옆으로 다가온다. 살짝 고개를 들어 쳐다보니 긴장한 표정이다. 저 여자가 능력자인가...?

 

-화르르륵

 

순간 가게 내 벽을 따라서 불길이 치솟아 올랐다. 벽에서 불이 사람들을 덮칠 것처럼 타오른다. 놀라서 여자를 쳐다보니 여자는 여전히 무표정한 표정으로 사람들을 바라볼 뿐이다.

 

안 나오면. 죽어.”

 

그 말을 끝으로 여자는 가게 밖으로 나갔다. 그리고 그와 동시에 불이 사람들을 덮치기 시작했다.

 

-꺄아악!

 

살아 있는 것처럼 넘실대는 불의 벽에 사람들이 벽에서 떨어져 가게 중심부로 모였다. 하지만 가게 내에 있으면 모두 불타 죽을 뿐. 그렇게 판단한 듯 대부분이 입구로 향했다. 나갈 수 있는 길은 가게 입구 밖에 없기 때문에 좁은 입구로 나가려는 사람들의 몸싸움이 시작됐다.

모두 살기위한, 질서라곤 없는 난장판. 순식간에 모든 것이 엉망이 됐다. 나는... 어떡해야하지.

 

아이, 정신차려! 밖으로 나가야해.”

 

잠시 멍하게 주변을 바라보던 나를 발씨가 소리쳐서 깨웠다. 하지만 이 상황에서 어떻게...?

 

주방에 있던 사람들도 이쪽으로 대피하는 걸로 봐선 뒷문도 봉쇄됐다고 봐도 되겠군요.”

 

필씨가 주방을 가리키며 말했다. 주방에서 요리사들이 허겁지겁 뛰어나오는 게 보인다.

 

-퍼엉!

 

주방에서 터지는 소리와 함께 불길이 확 하고 치솟았다. 불길이 가스를 건드린 모양이다.

 

“...설사 있다하더라도 나가는 건 무리네요.”

 

몸싸움 때문에 입구가 막혔어... 나오라고 하는 거면 당장은 죽일 생각이 없을 텐데. 하긴, 죽일 생각은 없어도 죽을 지도 모르지.”

 

발씨가 폭발이 일어났던 주방을 돌아보며 말했다. 화염이 이쪽으로 오려고 몸부림치는 게 보인다. 발씨가 내 손목을 잡고 불길이 없다면 창문이 있었을 벽으로 다가갔다. 그리곤 주변의 의자를 하나 집어 들었다.

 

길은... 만들면 돼.”

 

그리곤 그대로 창문이 있었을 자리에 내려쳤다.

 

-콰창창!

 

금세 의자에 불이 옮겨 붙는다. 조금 부서진 의자를 바로 멀리 던져버렸다. 불벽 뒤로 바깥에서 들어오는 공기의 흐름이 느껴지긴 하지만 아무래도 불벽은 사라지지 않는다. 여기로 나가는 건.... 무리야.

?! 순간 말릴 틈도 없이 발씨가 불벽으로 손을 뻗었다.

 

뭐하는....!!”

 

-화악

 

발씨의 손이 불벽에 닿는 것과 동시에 불길이 유리창을 중심으로 사그라들었다. 어떻게...?

이해할 수없는 표정으로 발씨를 바라봤지만 발씨는 아무렇지 않게 창문을 넘어 밖으로 나갔다. 그리곤 밖에서 내게 손을 뻗는다.

 

발씨...?”

 

“...나중에. 나중에 설명해줄게. 일단 나가자.”

 

그렇게 얘기하며 웃는 발씨의 얼굴이 쓸쓸하다. 나중에... 말이죠.

발씨의 손을 잡고 필씨의 도움을 받아 밖으로 나왔다. 필씨까지 밖으로 나오자 불길이 다시금 제자리로 돌아왔다.

나온 곳은 레스토랑 옆 골목길. 골목길 끝에 보이는 대로에는 사람들이 연분홍 머리 여자의 감시를 받으며 광장 쪽으로 이동하고 있다.

 

어서 이쪽으로!”

 

필씨가 반대편으로 손짓했다. 발씨가 내 손목을 잡고서 뛰기 시작했다. 하지만 뛴 것도 잠시. 반대쪽으로 나가는 대로에도 연분홍 머리 여자가 있는 게 보인다. 뭐야...? 쌍둥인가?

 

다른 길은 없어?”

 

발씨가 당황해서 주변을 살핀다. 광장 근처에 있는 레스토랑이기 때문에 다른 곳과는 다르게 골목길이 복잡하게 얽혀있지 않다. 결국 이곳을 벗어나려면 대로를 지나갈 수밖에 없다. 그 사실을 깨달은 듯 발씨가 인상을 찌푸렸다.

이제... 어떡하지. 오늘 낮까지만 해도 이런 일이 벌어질 거라곤 상상도 못했다. 그저 발씨가 오랜만에 만난 필씨와 저녁을 먹고 집에 돌아가서 밤하늘을 구경하려고 했을 뿐. 그저 평소와 다름없는... 아니, 조금은 특별한 하루였을 텐데. ...?

하늘을 보려고 올려다본 위쪽에 보여야할 하늘을 무언가가 가로막고 있다. 주변이 어두워서 몰랐는데 자세히 보니 건물 외벽에 위치한 비상계단이다. 조금 위험하긴 해도 옥상이라면 저 사람들의 눈을 피할 수 있지 않을까.

 

발씨, 비상계단이에요!”

 

발씨가 내 말을 듣자마자 고개를 들어서 계단을 확인했다. 전혀 안전하지 않은 계단이지만... 도망칠 곳은 여기밖에 없다. 옆에 서있던 필씨가 뛰어서 접혀있던 사다리를 내렸다.

 

-촤르륵

 

사다리가 내려오자 발씨가 먼저 올라갔다. 올라간 후 나에게 올라오라는 눈짓을 보낸다. 조금 오래 된 계단은 올라가서 걸을 때마다 삐걱거린다. 필씨까지 올라온 후 조심스레 계단을 한 층 한 층 올랐다. 비상계단 근처에 있는 창문으로 층마다 불길이 넘실거린다. 아무래도... 건물에 있던 사람들을 모두 밖으로 내보낸 모양이다.

5층밖에 안 되는 건물이었기 때문에 금세 옥상에 도착했다. 이제... 뭘 해야 하지.

 

, 지원이 오려면 얼마나 걸릴까.”

 

안타깝지만... 확신할 수가 없네요. 각 지역에 파견되어 있는 능력자들만으로는 이들을 막기 역부족이라 급이 높은 능력자가 와야 해요. 하지만 오는데 시간이 얼마나 걸릴지...”

 

...”

 

이런 갑작스런 상황에도 두 사람은 냉정하게 상황을 판단하고 있다. 뭔가 익숙한 느낌... 두 사람이 대화하는 동안 광장의 상황이 어떤지 보려고 광장 쪽으로 다가갔다. 올라온 건물이 하필이면 광장 바로 옆에 붙어있는 건물이었던지라 광장이 한눈에 보인다. 도망치기 좋은 위치는 아니라는 거네. 광장에 이곳저곳에서 이끌려온 사람들이 잔뜩 모여 있다. 곳곳에 연분홍색 머리카락의 여자들이 사람들을 포위하듯 서있고... ? 뭐야?

위화감에 그 여자들을 자세히 살펴봤다.

 

얼굴이... 다 똑같아.”

 

생긴 게 다 똑같다. 얼굴만이 아니다. 모든 게 다 똑같다. 마치 복제 인간처럼. 저건... 뭐야? 사람이 어떻게 다 똑같이 생길수가 있어? 말도 안 돼!

놀라서 다시금 주변을 둘러보다가 이곳에서 그리 멀리 떨어지지 않은 무대 위에 누군가 올라오는 걸 발견했다. 붉은 머리를 한, 검은색 원피스를 입은 여자다.

 

시간이 없어! 어서 찾아야 된다고. 그런데 너무 많아.... 많다고!”

 

뭔가가 맘에 안 드는 듯 강제로 끌려나온 사람들을 쳐다보더니 짜증을 내기 시작했다. 이 일을 벌인 사람인가. 도대체 무슨 목적으로...!

 

이 도시에 있는 건 분명한데... ... 그래, 하나씩 죽이다보면 나오겠지 뭐. 자기 목숨이 위험한데 설마 끝까지 숨기고 있겠어?”

 

여자가 손을 들어 앞에 있는 사람을 손가락으로 가리킨다. 사람을 찾기 위해... 죽인다고? 사람을?

 

-화악!

 

-으아아악!!

 

곧이어 손가락으로 가리켰던 남자가 바로 불에 타오르기 시작했다. 갑작스레 타오르는 몸에 공포에 가득찬 비명을 지르던 남자는 움직임이 차즘 줄어들기 시작하더니 바닥에 쓰러진다...

 

우욱!”

 

아이?!”

 

내가 구토감에 몸을 움츠리자 뒤에서 발씨가 다가와 나를 돌려세웠다. 사람이... 죽었어. 어지럽다. 사람은 저렇게 쉽게 죽는 거였어...? 능력자라는 게 뭐야? 그저 손짓 한 번에 사람을 죽일 수 있는 사람? 아무리 힘이 있다고 해도 그러면 안 되잖아!

떨리는 눈으로 발씨를 올려다봤다. 내가 보고 있던 광장의 참혹한 모습을 발씨가 굳은 얼굴로 바라본다.

 

이래도 안 나와? 나올 때까지 얼마나 죽게 될까?”

 

-화아악!

 

-꺄아아악!

 

뒤늦게 사람들의 비명이 울린다. 그 비명소리에 아까의 광경이 생각나 다리에 힘이 빠진다. 비틀거리는 나를 발씨가 안았다. 빠르게 뛰는 심장소리가 들린다. 발씨... 뒤에서 사람이 죽어가고 있어요. 만약 발씨가 없었다면 저도 저 중의 하나였겠죠. 그렇죠...?

 

아이, 고개 돌리지마. 보면 안 돼.”

 

발씨가 나에게 작게 말한다. 지금까지 대수롭지 않게 생각했던 능력자라는 말이 와 닿는다. 일반 사람들과는 다른. 힘을 가진 사람들.

 

발씨... 저는 할 수 있는 게 없겠죠?”

 

“....”

 

내 말에 발씨가 침묵한다.

 

사실 지금... 저 사람들 중의 하나가 아니라는 사실이 안심이 되요. 하지만 그걸로 된 건 아니겠죠... 아니죠. 그런데 저는 아무것도 할 수 있는 게 없어요.”

 

날 안고 있는 발씨를 밀어내고서 뒤로 돌았다. 처참한 광경이 펼쳐진다. 사람들이 죽고... 죽고.

 

“...주변 사람들이 죽어나가는 데도 고작 할 수 있는 거라곤... 그저 여기서 다른 누군가가 올 때까지 사람들의 고통을 외면하는 것밖에... 더 이상 사람들이 죽는 걸 보고 싶지 않은데.”

 

아이....”

 

할 수 있다면 모두를 구하고 싶은데... 저는 왜 이렇게... 무력한 거죠. 능력을 갖지 못했다는 이유로... 그렇다면 저도 능력이 있었다면 좋았을 텐데... 사람들을 죽이는 데 쓰진 않을 텐데!”

 

눈물이 난다. 광장에서 들리는 참혹한 소리는 끊이질 않고 있고, 나는 그걸 이 자리에서 구경만 할 뿐. 모두가 죽게 되는 걸까. 더 이상... 누군가가 죽는 걸 보고 싶지 않아. 그들은 아무것도 잘못한 게 없는데... 다른 사람의 이기심 때문에 하나 둘씩 계속해서 죽어나간다.

 

그래. 그랬었지. 능력이 있다면... 모두를 지킬 수 있었을 텐데.”

 

발씨가 천천히 내 옆으로 다가와 슬픈 눈으로 광장을 바라본다. 그의 붉은 눈동자가 광장의 불빛에 일렁인다. 눈에 어린 게 불빛인지 슬픔인지 분간할 수 없는 가운데 발씨가 내게 말했다.

 

미안해, 이런 슬픈 일을 겪게 해서. 내가 착각했어. 지금까지 잊고 있었네.”

 

발씨가 나를 보고 안타깝게 웃는다. 손을 뻗어 내 머리를 살짝 쓰다듬고는 필씨에게 다가간다.

 

. 아이를 부탁해.”

 

. 걱정하지 마세요.”

 

발씨...? 눈물 때문에 시야가 흐리다. 그 탓에 눈가에 고인 눈물을 잠시 닦는 사이 발씨가 사라졌다. 그가 있던 자리에서부터 차가운 바람이 불어 얼굴을 스친다.

 

필씨, 발씨는...?”

 

“....”

 

필씨가 아무런 말없이 광장을 응시한다. 그 시선을 따라 고개를 돌려 아래를 봤다. 사람들이 모두 광장의 무대에서 멀어지려고 아비규환이다. 이건.... 지옥이라고 밖에 표현할 수가 없다. 다시금 보게 된 참혹한 광경에 정신이 아찔해진다. 사방이 불, , ....

 

-화륵, 화르륵

 

사람들이 붉은 머리 여자의 손가락을 피해서 도망친다. 한사람, 두사람... !! 발씨... 설마 광장으로 간 건 아니겠지..? 설마하는 표정으로 필씨를 봤지만 거기에 돌아오는 건 쓸쓸한 표정뿐.

안돼... ... ...?

 

-

 

몸을 돌려 내려가려고 하는 나를 필씨가 잡았다.

 

필씨! 내려가야 해요, 발씨가 광장으로 내려갔을지도 모른다구요!”

 

이미... 늦었어요.”

 

필씨가 아무 말 없이 광장의 한복판을 가리켰다. 거기엔 후드를 뒤집어 쓴 사람이 사람들과 붉은 머리의 능력자 사이에 서있다. 저 후드는... 발씨다.

 

언제 저기에!! 미쳤어, 이 바보가!!!”

 

놀라서 소리쳤다. 뭐하는 거야... 지금! 발씨가 사람들을 대신해서 죽는다고 일이 해결되진 않는다고...! 이번엔 다른 사람도 아닌 발씨가 죽는 모습을 지켜봐야 하는 거야...? 아까처럼 불에 타서...?

주변의 소리가 희미하게 들린다. 심장이 두근대는 소리에 머리가 터질 것 같다. 어떻게... 해야...

 

걱정하지 마세요.”

 

얼핏 들린 필씨의 목소리에 정신이 깬다. 걱정 말라니, 그게 말이 되는...! 필씨를 화난 눈으로 돌아봤지만 돌아오는 건 희미한 미소. 애써 짓는 웃음에 깨달았다. 필씨는 발씨의 과거를 아는 사람... 이다. 과거... 구나.

광장에 있던 사람들이 발씨의 등장과 함께 사방으로 도망치기 시작했다. 아까까지 사람들을 포위하고 있던 능력자들은 모두 어디론가 사라졌는지 보이지 않는다. 붉은 머리 여자가 잔뜩 찡그린 얼굴로 도망치는 사람들을 본다.

 

... 뭐야? 정말, 복제인간들은 쓸모가 없어! 이거하나 지키는 것도 제대로 못하나...? 다 어디 간 거야? ~ 어쩔 수 없지. 쫓아가서 죽일 수밖에. 그건 그렇고... 넌 뭐야?”

 

찾는 다면서?”

 

? 내가 찾는 건 너 같은 녀석이 아냐. 하여튼 나 바쁘니까... 죽어!”

 

-퍼엉!

 

여자의 손짓과 함께 화염이 발씨가 있는 자리에서 터진다. 아까 다른 사람들을 공격하던 것들보다 불의 세기가 훨씬 더 세서, 그 자리에 있던 사람의 형체마저 보이지 않는다. 여자가 심드렁한 표정으로 자리를 벗어나려는 찰나,

 

글쎄, 나도 찾고 있던 거 아니었나.”

 

불속에서 목소리가 들린다. 어떻게....?

 

... 뭐야?”

 

발씨를 감싸고 있던 불길이 흰 연기와 함께 사라졌다. 어디 한군데 다친데 없이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그대로 무대로 걸어간다.

 

-퍼엉! 퍼엉!

 

걸어가는 발씨에게 여자가 커다란 불덩이를 던졌다. 하지만 모두 발씨 근처에 가자마자 흰 연기를 남기곤 사라진다. 여자는 믿기지 않는 듯 한 눈으로 발씨를 응시한다.

 

... 말도 안 돼. 내가 찾아온 건... 네가 아니라...!”

 

하지만 찾았던 건 맞잖아?”

 

-촤자자작

 

바닥에 얼음으로 된 길이 생기며 발씨가 빠르게 여자에게 다가갔다.

 

... 오지마!”

 

-화르르륵

 

순간 여자를 중심으로 주변에 화염이 퍼졌다. 높게 솟은 불길에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다. 발씨는...?

 

-푸욱

 

뭔가가 꿰뚫리는 소리와 함께 솟아올랐던 불길이 서서히 잦아든다. 불길이 사라지고 난 무대 위에는 발씨가 여자의 가슴팍에 손을 꽂고 있는 게 보인다.

 

쿨럭. ...... 연합의...”

 

-촤악!

 

가슴에 꽂혀있던 손이 빠지며 피가 솟구친다. 분수처럼 쏟아지는 피에 나도 모르게 헛구역질이 나온다.

 

이젠... 아니야.”

 

피를 뒤집어쓴 발씨가 곧이어 움직임이 멈춘 여자를 내려다보며 말했다. 그리곤 이쪽을 올려다본다. 발씨...? 피로 범벅이 된 가운데 빛나는 붉은 눈동자에 섬뜩함을 느꼈다. 나를 잠시 바라보던 발씨는 그대로 얼음으로 된 길을 타고 어디론가 사라졌다.

모두가 사라지고 시체만이 남은 광장은 지금까지와는 다른 고요함만이 남았다. 그저 멍하게 발씨가 사라진 방향을 보고 있던 나를 필씨가 깨웠다.

 

아이씨, 빨리 자리를 피해야 해요.”

 

...?”

 

필씨의 말에 멍하게 반문하는 나에게 필씨가 광장의 한쪽을 손가락으로 가리켰다. 광장과 이어진 대로 중 하나로 어떤 사람의 실루엣이 보인다. 곳곳에 아직도 타고 있는 불덕에 겨우 보이는 거라곤 흰 머리카락 뿐. 거리도 멀어서 아마 이 건물과 일직선상에 있는 대로가 아니었다면 보이지도 않았을 것이다. 이쪽으로 오고 있는 것 같다.

 

지원으로 온 게 다이무스씨라니... 저 사람한테 발각되면, 쉽게 넘어가지 못할 겁니다. 잘못하면 발씨까지 위험해 질 수 있어요. 어서 가죠!”

 

필씨가 내 등을 밀며 계단 쪽으로 향했다. 하지만 도와주러 온 사람인데... 서두르는 필씨를 따라 계단을 내려간다. 계단 아래쪽 어둠이 나를 집어삼키는 기분인 든다. 발씨는... 어디로 간 걸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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