샤쿠러스는 늘 음침하다.
고달픈 달빛. 맥없이 푸르께하다. 낮과 달라서 밤엔 몹시 흐릿하였다.
거칠은 푸른색 청토 장벽으로 앞서 좌우가 콕 막힌 좁직한 구덩이, 흡사히 무덤 속같이 더럽고 지저분하다. 싸늘한 침묵, 쿠더부레한 흙내와 징그러운 냉기만이 그 속에 자욱하다.
광선검은 뻔찔 흙을 이르집는다. 암팡스러이 내려쪼며,
슈왁……
이렇게 메떨어진 소리뿐, 그러나 간간 우수수하고 벽이 헐린다.
제라툴은 일손을 놓고 소맷자락을 끌어당기어 얼굴의 땀을 훑는다. 이놈의 줄이 언제나 잡힐는지 기가 찼다. 흙 한 줌을 집어 코밑에 바싹 들이대고 손가락으로 샅샅이 뒤져본다. 완연히 잡돌은 아닌 듯싶다. 그러나 운이 아주 다 풀린 것도 아니었다. 누르스름한 황토라야 카이다린 수정이 나온다는데 왜 이리 안 나오는지.
광선검을 다시 집어든다. 땅에 무릎을 꿇고 궁둥이를 번쩍 든 채 식식거린다. 광선검을 무작정 내려찍는다.
바닥에서 물이 스미어 무르팍이 흥건히 젖었다. 굴 천장에서 흙방울은 내리며 목덜미로 굴러든다. 어떤 때에는 윗벽의 한 쪽이 떨어지며 등을 탕 때리고 부서진다.
그러나 그는 눈도 하나 깜짝하지 않는다. 카이다린 수정을 캔다고 광물밭 하나를 다 잡쳤다. 약이 올라서 죽을 둥 살 둥, 눈이 뒤집힌 이 판이다. 손바닥에 침을 탁 뱉고 광선검을 한 번 고쳐 뽑더니 쉴 줄 모른다.
등 뒤에서는 흙 긁는 소리가 드윽드윽 난다. 아직도 잡돌을 다 못 친 모양. 이 자식이 일을 하나 딴청을 하나. 남은 속이 바직 타는데 웬 뱃심이 이리도 좋아.
제라툴은 살기 띤 시선으로 고개를 돌렸다. 암말 없이 테사다르를 노려본다. 그제야 꾸물꾸물 자루에 흙을 담아 등에 메고 사다리를 올라간다.
천장이 풀리는지 벽이 우찔하였다. 흙이 부서져 내린다. 전날이라면 이곳에서 셀렌디스 한 번 못 보고 생죽음이나 안 할까 털끝까지 쭈뼛할 게다. 그러나 인젠 그렇게 되고 싶다. 테사다르란 놈하고 흙더미에 묻히어 한껍에 죽는다면 그게 오히려 날 게다.
이렇게까지 몹시 미웠다.
이놈 허풍치는 바람에 애꿎은 광물밭 하나만 결딴을 냈다. 뿐만 아니라 모두가 낭패다. 앞마당 확장도 못 했다. 저그의 점막은 성큼 퍼진 채 어지러이 널려져 있다. 이를 알고 기사단 대의회는 대노하였다. 내년부터는 최전방에 나갈 생각 말라고 발을 굴렀다. 땅은 암만을 파도 카이다린 수정은 없다. 이만해도 다섯 길은 훨씬 넘었으리라. 좀 더 깊어야 옳을지 혹은 북으로 밀어야 옳을지 우두커니 망설인다. 금점일에는 풋뜸이다. 입때껏 테사다르의 지휘를 받아 일을 하여 왔고 앞으로도 역시 그러해야 카이다린 수정을 딸 것이다. 그러나 그런 칙칙한 짓은 안 한다.
“이리와 이것 좀 파게.”
그는 으쓱 위풍을 보이며 이렇게 분부하였다. 그리고 저는 일어나 손을 털며 뒤로 물러선다. 테사다르는 군말 없이 고분하였다. 시키는 대로 땅에 무릎을 꿇고 벽채로 잡돌을 긁어낸 다음 다시 파기 시작한다.
제라툴은 나머지 잡돌을 짊어진다. 커단 걸때를 뒤툭거리며 사다리로 기어오른다. 굴을 나와 흙더미에 흙을 마악 내리려 할 제,
"왜 또 파? 이것들이 미쳤나 그래!"
산에서 내려오는 알다리스와 맞닥뜨렸다. 정신이 떠름하여 그대로 벙벙히 섰다. 오늘은 또 무슨 포악을 들으려는가.
"말라니까 왜 또 파는 거야!"
하고 제라툴의 바지게 뒤를 지팡이로 콱 찌르더니,
"광물 캐내라는 밭이지 흙 쓰고 들어가라는 거야, 이 미친 것들아. 광물밭에서 웬 카이다린 수정이 나온다고 이 지랄들이야 그래."
하고, 목에 핏대를 올린다. 밭을 버리면 간수 잘못한 자기 탓이다. 날마다 와서 그 난리를 피고 금하여도 담날 보면 또 여전히 파는 것이다.
“오늘로 이 구덩을 도로 굳혀 놔야지 낼로 당장 징역 갈 줄 알게.”
너무 감정에 격하여 말도 잘 안 나오고 떠듬떠듬거린다. 주먹은 곧 사이오닉 폭풍이라도 쓸 듯이 허구리께서 불불 떤다.
"오늘밤 좀 해보고 고만두겠어요."
제라툴은 낯이 붉어지며 가까스로 한마디 하였다. 그리고 무턱대고 빌었다.
알다리스는 들은 체도 안하고 가 버린다.
그 뒷모양을 제라툴은 멀거니 배웅하였다. 그러나 광물밭 낯짝을 들여다보니 무던히 화통 터진다. 멀쩡한 밭에 구멍이 사면 풍풍 뚫렸다.
예제없이 흙더미는 무더기무더기 쌓였다. 마치 저그 만난 타소니스와도 같이 귀살적고 뒤우 을씨년스럽다.
반짝이던 광물들은 거반 흙더미에 다아 깔려 버리고 군데군데 어쩌다 남은 놈들만 달빛에 희끄무레하다. 그 꼴을 보는 것은 자식 죽는 걸 보는 게 낫지 차마 못할 경상이었다.
진급이나 작전사령관 자리는 모조리 떨어질 것이다. 그러나 대관절 올 전초기지 연결체 광물은 어디서 구해내야 좋을지. 게다 앞마당을 망쳤으니 자칫하면 징역을 갈는지도 모른다.
제라툴이 구덩이 안으로 들어왔을 때 테사다르는 땅에 주저앉아 쉬고 있었다. 태연무심히 선드롭만 뻑뻑 피는 것이다.
"언제나 줄을 잡는 거야?"
"인제 차차 나오겠지."
"인제 나온다?"
하고 코웃음을 치고 엇먹더니 조금 지나매,
"이 새끼!"
흙덩이를 집어들고 골통을 내려친다.
테사다르는 어쿠 하고 그대로 푹 엎어진다. 그러나 뻘떡 일어선다. 광선검을 집어들 새도 없이 손을 앞으로 모으자 대뜸 정신파 공격을 날린다. 그러나 정신파 공격 쯤이야, 제라툴은 차원변형검을 뽑지도 않고 실드로 퉁겨낸다. 그 순간에 서슬퍼런 녹색 빛 광선검이 정수리를 겨누고 날아드는 걸 보았다. 고개를 홱 돌린다. 광선검은 흙벽을 퍽 찍고 다시 나간다.
테사다르 이름만 들어도 제라툴은 이가 갈렸다. 분명히 홀딱 속은 것이다.
재라툴은 본디 운빨이라는 것에 이력이 없었다. 그리고 흥미도 없었다. 다만 샤쿠러스 언덕 위에 웅크리고 숨을 죽여 가며 꾸벅꾸벅 훈련만 하였다. 올해는 저그도 뜻밖에 잘 안보이고 맘이 좀 놓였다.
하루는 홀로 정신 훈련을 하노라니까,
"여보게 덥지 않은가, 좀 쉬었다 하게."
고개를 들어보니 테사다르다. 훈련은 안 하고 운빨로만 돌아다니더니 무슨 바람에 또 왔는지 싱글싱글한다. 좋은 수나 걸렸나 하고.
"풍부한 광물지대라도 발견했나. 나도 좀 알려 주게."
"발견하구말구. 맘껏 캐고 맘껏 쓰고 했네."
술에 거나한 얼굴로 신껏 주절거린다. 그리고 밭머리에 쭈그리고 앉아 한참 객설을 부리더니,
"자네 돈벌이 좀 안 할려나, 이 밭에 카이다린 수정이 묻혔네 카이다린 수정이……."
"뭐?"
하니까,
바로 이 산 너머 큰골에 수정 광산이 있다. 탐사정을 3백여 대나 부리는 노다지판인데 매일 소출되는 카이다린 수정이 7십만을 넘는다. 광전사로 치면 7000명 어치, 그 줄맥이 큰 산허리를 뚫고 이 광물밭으로 뻗어 나왔다는 것이다. 둘이서 파면 불과 열흘 안에 줄을 잡을 게고 적어도 하루에 광전사 삼십 명은 훈련시키리라. 우선 3000광물만 해두 어디냐. 우주모함을 산대도 열 대가 아니냐고.
그러나 제라툴은 귀담아 듣지 않았다. 운빨이란 4탐사정 빠른 광전사다. 잘되면 이어니와 못되면 행성만 조진다. 이렇게 전일부터 들은 소리가 있어서였다.
그 담날도 와서 꾀다 갔다.
세 번째에는 집으로 찾아왔는데 선드롭주(酒) 한 병을 손에 떡 들고 영을 피운다. 몸이 달아서 또 온 것이었다. 의자에 걸터앉아서 저녁상을 물끄러미 바라보더니 테사다르는 제라툴에게 몸을 훑인다는 둥, 최전방은 든든히 먹어야 한다는 둥 남들이 집정관을 훈련한다느니 확장을 하나 더 한다느니 떠드는데 요렇게 지내다 그만둘 테냐는 둥 귀찮게 주절거린다.
"셀렌디스, 이것 좀 먹게 해 주시게유."
그리고 비로소 셀렌디스에게 술병을 내놓는다.
그들은 밥상을 끼고 앉아서 즐겁게 술을 마셨다. 몇 잔이 들어가고 보니 제라툴의 생각도 적이 돌아섰다. 딴은 일 년 고생하고 기껏 퀴드라 몇 마리 잡으면서 세월을 보내느니보다는 카이다린 수정을 캐어서 저그를 단숨에 몰살하는 것이 슬기로운 짓이다. 하루에 잘만 캔다면 한 해 줄곧 공들인 추적자 열두 명보다 훨씬 이익이다. 올봄 보낼 제 새로 세운 수정탑 값이며에 빚진 7000광물 까닭에 나날이 졸리는 이 판이다. 이렇게 지지하게 살고 말 바에는 차라리 가로지나 세로지나 아둔의 영광을 걸고 한 번 해볼 것이다.
"낼부터 우리 파보세, 돈만 있으면야 그까짓 차원관문 리모델링 비용은……."
테사다르가 안달스레 재우쳐 보챌 제 선뜻 응낙하였다.
"그래 보세, 빌어먹을 거 안 됨 고만이지."
그러나 꽁무니에서 죽을 마시고 있던 셀렌디스가 허구리를 쿡쿡 찔렀게 망정이지 그렇지 않았더면 좀 주저할 뻔도 하였다.
셀렌디스는 나름대로의 셈이 빨랐다.
시대는 공허포격기가 판을 잡았다. 섣부르게 본전도 못 치는 우주모함이나 잡고 있다간 결국 비렁뱅이밖에는 더 못된다. 얼마 안 있으면 산이고 벌판이고 본진이고 할 것 없이 다 땅굴벌레 손에 구멍이 뚫리고 뒤집히고 뒤죽박죽이 될 것이다. 그때는 뭘 캐먹고 저그랑 싸우나. 자, 보아라. 탐사정들은 짜기나 한 듯이 일하다 말고 후딱 하면 수정 캐러들 내빼지 않는가. 탐사정이 없어서 올해 확장 기지를 질 수 없으니 마느니 하고 본진에서는 떠들썩한다. 그리고 탐사선조차 작전지도를 내어던지고 강변으로 개울로 수정을 찾으러 달아난다. 그러더니 며칠 뒤에는 속도 업글에다 시야까지 넓히고 여유를 부리는 것이 아닌가.
셀렌디스는 광물밭에서 수정이 날 줄을 아주 꿈밖이었다. 놀라고도 또 기뻤다. 올해는 노상 침만 삼키던 그 거신을 짜장 전력에 보태겠구나만 하여도 속이 메질 듯이 짜릿하였다. 뒷집 아르타니스는 수정 덕택에 새로 나온 신형 모선을 타고 나릿나릿 날아다니는 것이 무척 부러웠다. 저도 얼른 수정이나 펑펑 쏟아지면 모선도 타보고 거신도 타보고 하리라.
"그렇게 해보지 뭐. 저 양반 하잔 대로만 하면 어련히 잘 될라구."
얼떨하여 앉았는 제라툴을 이렇게 추겼던 것이다.
동이 트기 무섭게 광물밭이 있는 앞마당으로 모였다.
테사다르는 진언이나 하는 듯이 이리 대고 중얼거리고 저리 대고 중얼거리고 하였다. 그리고 덤벙거리며 이리 왔다가 저리 갔다가 하였다. 제 딴은 땅 속에 누운 수정을 어림하여 보는 맥이었다.
한참을 밭을 헤매다가 산쪽으로 붙은 한 구석에 딱 서며 손가락을 펴 들고 설명한다. 큰 줄이란 본시 산을 끼고 도는 법이다. 앞쪽으로 멀리 뻗은 산 중턱에 고대사원도 있지 않느냐. 조상들이 아무데나 사원을 지었을 리 없으니 여기서부터 파 들어가자는 것이었다.
제라툴은 그 말이 무슨 소린지 이해하지는 못했다. 마는 운빨 하나는 작살난다는 테사다르이니 그 말대로 하기만 하면 영락없이 카이다린이 나겠지 하고 그것만 꼭 믿었다. 군말없이 지시해 받은 곳에 다 광선검을 푹 꽂고 파헤치기 시작하였다.
수정도 수정이다만 앨 써 지켜온 앞마당 광물도 광물이었다. 허울 멀쑥하여 달빛에 반짝이는 놈들이 광선검 끝에 으스러지고 흙에 묻히고 하는 것이다. 그걸 보는 것은 썩 속이 아팠다. 애틋한 생각이 물밀 때 가끔 허리를 구부려서 광물 표면의 흙을 털어 주기도 하였다.
"아, 이 사람아, 맥적게 그건 봐 뭘 해, 카이다린을 캐자니깐."
"아니야 허리가 좀 아파서!"
핀잔을 얻어먹고는 좀 열적었다. 하기는 수정만 잘 터져 나오면 이까짓 광물밭 쯤이야. 이 밭을 엎고 우주관문 전용터도 만들 수 있을 것이다. 눈을 감아 버리고 흙을 아무렇게나 광물 위로 홱홱 내어던진다.
"주제에 맞게 광물이나 캐먹지 이게 무슨 지랄들이야!"
기사단 대의회 늙은이들은 뻔질 찾아와서 귀 거친 소리를 하곤 하였다.
밭에 구멍을 셋이나 뚫었다. 카이다린 수정인가 난장을 맞을 건가 그것 때문에 기지를 버렸다. 이제 필연코 샤쿠러스도 망하려는 징조이리라. 그 소중한 앞마당에다 구멍을 뚫고 이 지랄이니 샤쿠러스가 온전할 겐가.
대의회 의원들은 제 울화에 지팡이를 들어 삿대질을 아니 할 수 없었다.
"사이오닉 폭풍 맞지, 사이오닉 폭풍을 맞어……."
"염려 말아유, 누가 알래지유."
제라툴은 그럴 적마다 데퉁스레 쏘았다. 홧김에 흙을 되는대로 내버리고는 침을 탁 뱉고 구덩이로 들어간다. 그러나 마음 한구석에는 언제나 끈하였다. 줄을 찾는다고 앞마당을 통이 뒤집어 놓았다. 그리고 줄이 언제나 나올지 아직 까맣다. 훈련도 못 하고 전황도 못 보고 휘하 부하들이 어이 되었는지 그것조차 모른다. 밤에는 잠이 안 와 멀뚱하니 애를 태웠다.
테사다르는 낙담하는 기색도 없이 늘 하냥이었다. 땅에 웅숭그리고 느릿느릿 땅만 판다.
"줄이 꼭 나오겠나?"
하고 목이 말라서 물으면,
"이번에 안 나오거든 나를 간트리서에 태워서 초월체에 쳐박게."
서슴지 않고 장담을 하고는 꿋꿋하였다.
이걸 보면 제라툴도 마음이 좀 놓이는 듯싶었다. 전들 수정이 없다면 무슨 멋으로 이 고생을 하랴. 반드시 카이다린 수정은 나올 것이다. 그제서는 이왕 손해는 하릴없거니와 고만두리라는 절망이 스스로 사라지고 다시금 주먹이 쥐어지는 것이었다.
캄캄하게 밤은 어두었다. 어디선가 뭇 카카루가 요란히 울어 댄다.
제라툴은 진흙투성이를 하고 내려왔다. 풀이 죽어서 몸을 잘 가누지도 못하고 아랫목에 축 늘어진다.
이 꼴을 보니 셀렌디스는 맥이 다시 풀린다. 오늘도 또 글렀구나. 수정이 터지면은 연결체를 한 채 살거라고 자랑을 하고 왔더니 이내 헛일이었다. 인제 기세가 꺾이어 낯을 들고 나갈 의지조차 없어졌다.
제라툴에게 저녁을 갖다 주고 딱하게 바라본다.
"인제 꿔 온 광물도 다 썼는데……."
"새벽에 산제를 좀 지낼 턴데 한 번만 더 꿔와."
남의 말에는 대답 없고 맥빠지는 소리뿐. 그리고 드러누운 채 눈을 지그시 감아 버린다.
"탐사정 만들 광물두 없는데 산제는 무슨……."
"듣기 싫어. 요망 맞은 년 같으니."
이 호통에 셀렌디스는 고만 멈씰하였다. 요즘 와서는 무턱대고 공연스레 골만 내는 제라툴이 영 딱하였다. 환장을 하는지 밤잠도 아니 자고 소리만 빽빽 지르며 덤벼들려고 든다. 심지어 제 부관인 광전사가 문젯거리를 투덜하여도 이놈의 자식을 칼라의 품에 보내버리라고 북새를 피는 것이다.
저녁을 아니 먹으므로 그냥 치워 버렸다. 대장의 명령을 거역키 어려워 페닉스한테로 또 다시 안 갈 수 없다. 그간 광물은 줄곧 꾸어다 쓰고 갚지 못하였는데 또 무슨 면목으로 입을 벌릴지 난처한 노릇이었다.
그녀는 생각다 끝에 없는 용기를 쥐어 짜내어 다시 한 번 찾아가는 것이다마는 딱 맞닥뜨리어 입을 열고,
"낼 산제를 지낸다는데 광물이 있어야지유."
하자니 영 낯이 화끈하고 모닥불이 날아든다.
그러나 그들은 어지간히 착한 프로토스였다.
"암 그렇지요. 젤-나가들이 화나면 차원관문도 막힙니다."
하고 말을 받으며 빙그레 웃는다. 손수 광물 300덩이를 떠다 주며,
"산제는 안 지냄 몰라두 이왕 지낼래면 아주 정성껏 해야 됩니다. 젤-나가란 노하길 잘 하니까유."
하고 그 비방까지 깨쳐 보낸다.
광물을 받아 들고 나오며 셀렌디스는 고마움보다 먼저 미안에 질리어 얼굴이 다시 빨갰다. 그리고 페닉스네 기지 살아가는 살림이 참으로 참으로 몹시 부러웠다.
페닉스는 날마다 수정 광산으로 감돌며 흙더미를 뒤지고 잡석을 주워 온다. 그걸 온종일 장판 돌에다 갈면 수가 좋으면 이삼천 광물, 밑져도 칠팔백 광물 꼴은 매일 셈이 되는 것이었다. 그러면 불사조를 산다. 불멸자를 뽑는다. 장갑 업그레이드를 한다... 그런데 우리는 왜 늘 요 꼴인지. 생각만 하여도 가슴이 메이는 듯 맥맥 한숨이 연발을 하는 것이었다.
셀렌디스는 집에 돌아와 시름에 잠기었다. 낼은 무슨 수로 월급을 한참 못 받아 화가 머리끝까지 난 광전사들을 달랠는지. 웃목에 웅크리고 앉아서 맞은 쪽에 자빠져 있는 제라툴을 곁눈으로 살짝 할퀴어 본다. 남들을 돌아다니며 잘두 수정을 주워 오련만 저 망나니는 제 앞마당 하나를 다 버려도 수정 쪼가리 한 톨 못 주워 오나. 에에, 변변치도 못한 프로토스, 저도 모르게 얕은 한숨이 거푸 두 번을 터진다.
밤이 이슥하여 제라툴과 셀렌디스는 제를 하러 나왔다.
"왜 이리 앉었수, 불 좀 지피지."
준비를 하다가 얼이 빠져서 멍하니 앉았는 제라툴이 밉살스럽다. 남은 이래저래 애를 죄는데 저건 무슨 생각을 하고 저리 있는 건지, 사이오닉 에너지로 삭정이를 탁탁 쪼개서 던져 주며 셀렌디스는 은근히 훅딱이었다.
셀렌디스는 짐을 이고 제라툴은 겨드랑이에 자리 때기를 꼈다. 그리고 캄캄한 산길을 걸어간다. 비탈길을 얼마 내려가서야 앞마당은 놓였다. 전면에 우뚝한 검은 언덕에 둘리어 막힌 곳이었다.
앞마당 조금 못 미쳐 남은 걸음을 멈추자 뒤의 셀렌디스를 돌아본다.
"이리 줘, 그러구 여기 가만히 섰어."
선드롭 떡을 받아 한 팔로 껴안고 그는 혼자서 앞마당으로 내려섰다. 앞에 쌓인 것이 모두가 흙더미, 그 흙더미를 마악 돌아서려 할 제 아마 돌을 찼나 보다. 몸이 쓰러지려고 우찔근하니, 셀렌디스는 기급을 하여 뛰어내리며 그를 부축하였다.
"부정 타라구 왜 올라와, 요망 맞은 년."
제라툴은 몸을 고루 잡자 소리를 빽 지르며 셀렌디스의 뺨을 올려붙인다. 가뜩이나 죽으라 죽으라 하는데 불길하게도 계집년이. 제라툴은 마뜩찮게 투덜거리며 앞마당으로 들어간다.
앞마당 가운데다 자리를 펴고 그 위에 선드롭 떡을 놓았다. 그리고 앞에다 공손하고 정성스레 절을 커다랗게 한다.
"우리를 살펴 줍시사. 젤-나가께서 거들어 주지 않으면 저희는 죽을 밖에 꼼짝할 수 없습니다유."
제라툴은 손을 모으고 이렇게 축원하였다.
셀렌디스는 이 꼴을 바라보며 독이 뾰록하니 올랐다. 운빨로 밀어붙이네 하고 수정 한 톨 못 캐는 것이 버릇만 점점 글러간다. 그전에는 없더니 요새로 건듯하면 탕탕 때리는 못된 버릇이 생긴 것이다. 수정을 캐랬지 뺨을 치랬나, 제발 덕분에 고놈의 수정 좀 나오지 말았으면. 셀렌디스는 맞은 앙심으로 맘껏 방자하였다.
하긴 셀렌디스의 말 고대로 되었다. 열흘이 썩 넘어도 젤-나가는 깜깜 무소식이었다. 제라툴은 밤낮으로 눈을 까뒤집고 구덩이에 묻혀 있었다. 어쩌다 기지엘 올라오는 때이면 얼굴이 헐떡하고 어깨가 축 늘어지고 거반 병신이었다. 그리고서 잠자코 커단 몸집을 침대에다 퀑하고 내던지곤 하는 것이다.
"히드라 침에 녹아내릴! 죽어나 버렸으면……."
혹은 이렇게 탄식하기도 하였다.
셀렌디스는 바가지에 점심을 이고서 집을 나섰다. 등에는 부하 광전사들의 탄원서가 한가득이다. 이젠 모선이고 거신이고 생각조차 물렸다. 그리고 수정 하는 소리만 들어도 입에 신물이 날 만큼 되었다. 그건 고사하고 꿔다 쓴 광물에 졸리지나 말았으면 그만도 좋으련마는.
가을은 산으로 들로 누렇게 내리었다. 탐사정들은 즐거운 낯을 하고 서로 만나면 흥겨운 기계음, 그러나 제라툴은 앰한 앞마당만 망치고 기지조차 건살 못하였으니 이 가을에는 뭘로 광자포를 세우고 뭘로 저그를 막을런지. 그는 샤쿠러스 프로토스들의 이목이 부끄러워 산길로 돌았다.
언덕을 넘어서 멀리 밖에를 바라보니 둘이 다 나와 있다. 오늘도 또 싸운 모양. 하나는 이 쪽 흙더미에 앉았고 하나는 저 쪽에 앉았고 서로들 외면하여 선드롭만 뻑뻑 피운다.
“점심들 잡숫게유.”
제라툴 앞에 바가지를 내려놓으며 가만히 맥을 보았다.
제라툴은 망토가 찢어지고 얼굴에 생채기를 내었다. 그리고 두 팔을 걷고 먼 산을 향하여 묵묵히 앉았다.
테사다르는 흙에 박혔다 나왔는지 얼굴은커녕 온 몸이 흙투성이다. 눈 밑에는 피딱지가 말라붙었고 아직도 조금씩 흘러내린다. 셀렌디스를 보더니 열적은 모양 고개를 돌리어 모로 떨어지며 입맛만 쩍쩍 다신다.
수정을 캐라니까 밤낮 피만 내다 말라는가. 빚에 졸리어 남은 속을 볶는데 무슨 호강에 이지랄들인구. 셀렌디스는 못마땅하여 눈가에 살을 모았다.
"산제 지낸다구 꿔 온 것은 언제나 갚는다지유우."
하고 있는 제라툴을 향하여 말끝을 꼬부린다. 그러나 제라툴은 눈 하나 까딱하지 않는다. 이번에는 어조를 좀 돋우며,
"갚지도 못할 걸 왜 꿔오라 했지유."
하고 얼추 호령이었다.
이 말은 제라툴의 채 가라앉지도 못한 분통을 다시 건드린다. 그는 벌떡 일어서며 공허 에너지를 모아 놀랄 만큼 세게 셀렌디스의 골통을 후렸다.
"계집년이 방정맞게!"
다른 것은 모르나 공허 에너지에는 아찔이었다. 멋없게 덤비다간 골통이 소멸된다. 분을 참고 바르르 하다가 이윽고 셀렌디스는 등에 업은 탄원서를 끌러 들었다. 제라툴에게로 그대로 밀어 던지고는 돌아서서 혼잣말로,
“광물밭에서 카이다린 수정을 딴다는 숙맥도 있담."
하고 빗대 놓고 비양거린다.
"이년아, 뭐?!"
제라툴은 대뜸 달려들며 그 볼치에다 다시 울찬 황밤을 주었다. 적이나하면 직속부하이니 위로도 하여 주련만 요건 분만 폭폭 질러 놓을려나, 예이 배라먹을 거, 이판사판이다.
"너허구 안 산다. 오늘루 본대로 복귀하거라."
셀렌디스를 와락 떠다 밀어 젖혀 놓고 그 허구리를 발길로 퍽 질렀다. 셀렌디스는 입을 헉하고 벌린다.
"네가 허라구 옆구리를 쿡쿡 찌를 제는 언제냐. 요 종족 망할 년."
그리고 다시 퍽 질렀다. 연하여 또 퍽.
이 꼴을 보니 테사다르는 조바심이 일었다. 저러다가 그 분풀이가 다시 제게로 슬그머니 옮아올 것을 지레 채었다. 인제 걸리면 죽는다. 그는 비슬비슬하다 어느 틈엔가 구덩이 속으로 시나브로 없어져 버린다.
볕은 다스로운 가을 향취를 풍긴다. 주인을 잃고 광물은 달빛에 반사된 빛을 어룽어룽 흙에 굴린다. 맞은쪽 언덕 위에서 광물을 캐며 기뻐하는 탐사정들의 기계음.
"터졌네, 터져!"
테사다르는 눈이 휘둥그렇게 굴을 뛰어나오며 소리를 친다. 손에는 흙 한 줌이 잔뜩 쥐였다.
"뭐?"
하다가,
"수정줄 잡았어, 수정줄!"
"응!"
하고, 외마디를 뒤남기자 제라툴은 테사다르 앞으로 살같이 달려들었다. 허겁지겁 그 흙을 받아 들고 샅샅이 헤쳐 보니 딴은 재래에 보지 못하던 누르스름한 황토이었다. 그는 눈에 눈물이 핑 돌며,
"이게 원 줄인가."
"그럼 이것이 수정줄이라네. 한 포에 오천 광물은 넉넉 잡히지!"
제라툴은 기쁨보다 먼저 기가 탁 막혔다. 웃어야 옳을지 울어야 옳을지. 다만 입을 반쯤 벌린 채 수재의 얼굴만 멍하니 바라본다.
"이리 와 봐 이게 카이다린 수정이래."
이윽고 제라툴은 셀렌디스를 부른다. 그리고 내 뭐랬어. 그러게 해 보라고 그랬지 하고 설면설면 덤벼 오는 셀렌디스가 한결 예뻤다. 그는 엄지 가락으로 셀렌디스의 눈물을 지워 주고 그리고 나서 껑충거리며 구덩이로 들어간다.
"그 흙 속에 카이다린 수정이 있지요?"
셀렌디스가 너무 기뻐서 모선에 고래 등 같은 거신까지 연상할 제, 테사다르는 시원스러이,
"엔 타로 아둔, 한 포대에 5000광물씩 나와유."
하고, 오늘밤에는 정녕코 달아나리라 생각하였다.
거짓말이란 오래 못 간다. 들통이 나서 초월체에 갖다 박히기 전에 훨훨 벗어나는 게 상책이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