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실 난 의무병 보직을 받고 자대에 갔다. 동원사단이었는데, 동원사단의 특수성 때문인지 부대가 무척이나 작았다. 중대가 상비대대 소대급이었으니 말이다. 거기에 일반 보병도 아니고 포병이었다. 동원사단 포병대대엔 군의관이 없다.
이런 제반사항을 알지 못하고 자대배치를 받은 나는 훈련소에서 보던 밴드오브브라더스에 나오는 유진같은 침착하고 이성적인 의무병이 되리라 하고 마음을 먹게 되었다. 그 굳은 마음은 의무병이 오질 않아 세달동안 의무병 역할을 하던 선임이 던져준 의무함을 보고 접게 되었지만. "..이게 어떤겁니까?" "의무함 새끼야. 이거 잘 보고 써라. 나보단 후반기 교육 받고오신 니가 더 잘알겠지"
전전 사수가 말년휴가때 사왔다는 의무함은 애기들이 병원놀이 할때 들고다니는 의무함 딱 그것이었다. 안에는 붕대 한롤과 만병치료제 빨간약, 약통 두개가 있었다. 약통엔 '소염진통제'와 '소화제'라고 씌여있었다.
그래도 소염진통제는 있으니 이것저것 써먹을수 있겠구나 생각하며 내용물을 확인도 안하고 의무함을 닫아버린 나는 바로 안이함에 벌을 받게된다. 그날 저녁이었다.
"메딕..! 메딕..!! 큰일났어!!" "어디 다치셨습니까?" "전역이 얼마 안남아서 뭐하고 놀지 생각에 머리가 너무 아파!!" "진통제 드리겠습니다!"
주섬주섬 해열진통제 약병을 연 나는 짧게 한숨을 내쉬었다. 약병안은 자갈로 가득 차 있었다. 전전 사수의 마지막 빅엿인지 전 사수의 눈속임인지는 모르겠지마는 그 엿을 내가 먹게 되리란건 쉽게 깨달을 수 있었다. 초롱초롱한 눈망울로 메딕을 바라보는 말년병장이 언제 흉포한 눈망울로 니 위로 내 아래로를 외칠지 모르는 긴박한 상황이 아닌가. '살려야 한다'는 군의학교 구령을 속으로 몇번 외쳤다. 여기서 살려야 할것은 무료함에 신병 의무병을 놀리기 위해 온 말년병장이 아닌 자대배치 2일차의 가련한 의무병이었다.
조심스럽게 옆 약병을 열어보았다. 다행이다 알약 몇개가 굴러다니고 있었다. 어차피 소화제니 먹는다고 죽진 않겠지. 메디컬 드라마에 스쳐지나가던 플라시보 이펙트에 내 군생활을 걸고 조심스레 소화제에 손을 넣었다. "여기 두통약입니다. 그런데 약효가 강해서 한알을 다 드시면 잠이올지도 모릅니다. 반알로 갈라서 지금 드시고 자기전까지도 아프면 나머지 반알을 드시면 될겁니다" "오~ 뭐좀 있어보이는데~ 땡큐"
말년병장은 반알만 먹으라는 내 최소한의 배려도 무시하고-말년병장한테 잠이 잘온다는건 반기던 일일지도 모른다- 한알을 입에 털어넣더니 자기 생활관으로 가버렸다.
일은 여기서 끝나지 않았다. 신병은 2주동안 막사밖으로 나갈 수가 없었다. 그 뜻은 내가 빌어먹을 의무함을 채울 방도가 없다는 뜻이기도 했다. 다음날 저녁, 말년병장이 근심 가득한 표정으로 다시 찾아왔다. "메딕" "이병! ㅇㅇㅇ!" "어제 두통약을 먹었을땐 괜찮았는데 또 머리가 아프네? 어제 준것좀 줘봐" "이틀 연속 아프시면 의무대에 가시는게 낫지 않겠습니까?" "귀찮아.. 약이나 달라고" 말년병장의 눈빛에 귀기가 서리기 시작했다. 우는 심정으로 소화제를 건냈다. "반알로 나누셔서.." "알아알아 땡큐"
걱정이 앞섰다. 저자식은 전역하는 날까지 두통약을 받으러 올것이고 언젠가는 탄로나는 순간이 오리라. 두려움에 떨며 잠에 들었다. 다음날, 행보관에게 찾아가 말을 했다. 약이 없는데 신병이라 받을수가 없다고. 행보관은 쌍욕을 퍼붓더니 점심시간이 지나가 빵빵한 구급낭을 건냈다. 살았다.
예의 저녁시간이 찾아오고 말년병장은 날 찾아왔다. 구급낭을 꺼내서 두통약을 주려던 나는 지금 그에게 두통약을 주면 어떤일이 생길지 생각해 보았다. 전일과 전전일에 줬던 약과 다른 모양새에 날 추궁할테고 난 분명히 사실을 털어놓을 것이다. 그러고 말년병장은 저승사자로 변하겠지.. 내 손은 다시 소화제로 향했다.
"이거 반알.." "알아 임마. 내가 빠간줄 알아? 그런데 또 물어볼게 있어" "또 아프신데가 있으십니까?" "이상하게 밤시간이 되면 배가고파. 전역이 다가와서 그런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