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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파공작원 실제 사진
게시물ID : humordata_76992짧은주소 복사하기
작성자 : 이런디질랜드
추천 : 10
조회수 : 931회
댓글수 : 8개
등록시간 : 2004/01/24 20:49:14
그는 특수요원이었다는 긍지를 잃고 싶어하지 않는다. 그러나 그의 긍지에는 뿌리가 없다.  김중석씨(가명·48)는 73년 4월 북파공작특수부대, 속칭 설악개발단에 입사했다. 그에게 접근한 "봉첩(물색요원)"은 계약금 500만원과 생계지원, 사회 진출시 직업 알선과 정착금 지급 등을 내걸었다. 생활고로 방황하던 18세 청년에게는 거부하기 힘든 조건이었다. 김씨는 입사를 약속한 뒤 친구들과 거하게 술파티를 벌이며 앞날을 자축했다. 그러나 이틀 뒤 눈이 가려진 채 당도한 곳은 김씨의 이후 30년 삶을 파괴한 장소였다.  당시 경험에 대해 김씨는 "그곳에는 인권이 존재하지 않았다"고 말했다. 김씨가 받았던 훈련은 사진촬영, 폭파, 방화, 납치, 암살 등 30여가지. 하루 24시간이 모두 훈련이었다. 낙오는 용서되지 않았다. 교관들은 무장구보 때 뒤처지는 대원들을 대못으로 찔러가며 다그쳤다. 동료 가운데 일부는 정신이상 증세를 보여 달리는 열차에서 뛰어내리기도 했다.  인간임을 포기해야 했던 기억은 아직도 김씨를 괴롭힌다. 77년 김씨는 해상훈련 도중 죽어가는 동료를 두눈을 뜨고 지켜봐야 했다. 김씨는 "동료 한명이 힘이 달려 물 아래로 가라앉았다. 구명조치를 취하면 살 수 있었지만 교관들은 지시를 내리지 않았다"고 회상했다.  77년 허리와 무릎에 부상을 당한 김씨는 전역을 요구했다. 부대에서는 요구를 묵살하다 78년 11월 일방적으로 그를 퇴출했다. 처음의 달콤한 약속은 오간데 없었다. 김씨는 "5년 동안 살인기계로 키워졌다"고 말했다. 그러나 아무런 적응훈련도 받지 못하고 사회로 내던져졌다. 사회생활이 순탄할 리 없었다. 별것 아닌 말에도 흥분하기 일쑤였고, 때로 폭력을 휘두르기도 했다. 감정은 쉽게 극에서 극으로 오갔다. 가족과 친구들마저 그를 두려워했다. 정보요원들에 의한 감시도 그를 위축시켰다. 그는 5번이나 멀리 이사해야 했으며, 13번이나 직업을 바꿨다. 김씨는 가정생활에 대해서는 입을 다물었다.  부대에 있을 때는 비인간적인 상황을 당연하게 받아들였다. 김씨는 맹목적인 애국을 강요당했던 그 과정을 "세뇌"라고 불렀다. 그러나 다시 사회로 나왔을 때 그는 자신이 단지 소모품이었음을 깨닫게 됐다. 절망은 증오를 낳았고, 자신을 무너뜨렸다. 인터뷰 도중 김씨는 때로 논리적이었지만 때로 히스테리컬했다.  김씨는 본지와 인터뷰한 다음날인 18일, 기자회견장에 군복을 말끔하게 다려 입고 나왔다. 그 자리에서 김씨는 "나는 민간인이었다"고 주장했다. 그는 "국가는 내가 특수부대원임을 자랑스러워할 수 있을 어떤 것도 해주지 않았다"고 절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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