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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수가 낳은 필연의 혼외자, 국정원게이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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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 거북이두루미
추천 : 28
조회수 : 1899회
댓글수 : 6개
베스트 등록시간 : 2013/10/24 20:08:39
원본글 작성시간 : 2013/10/24 10:37:51
원문 : http://www.whysnews.com/news/articleView.html?idxno=313

> 칼럼
보수가 낳은 필연의 혼외자, 국정원게이트
이기적 비원칙적인 가짜보수

지난줄거리 칼럼니스트  |  [email protect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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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인 2013.10.24  08:38: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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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연말 치러진 18대 대선을 뜨겁게 달구었던 수많은 이슈 중 거의 1년이 지나도록 여전히 가장 ‘핫’하게 남아있는 문제는 이른바 “국정원게이트”로 대표되는 국가기관의 조직적 인터넷 여론개입, 조작 사건일 것이다. 이제는 이 “국정원게이트”라는 작명이 사건의 정체성을 제대로 투영한 것인지조차 불분명해질 만큼 국방부, 보훈처, 통계청, 선관위 등 다수의 기관들이 다각적으로 개입해 있다는 정황이 포착되고 문제가 제기되는 가운데 정부와 정치권의 제대로 된 해결이나 적극적이고 납득할만한 입장정리가 없다면 이번 18대 대선은 아무리 많은 시간이 지난 후에라도 그 정통성에 묻어있는 부정과 비리의 얼룩으로부터 완전히 자유롭기는 힘들 것이라는 예측을 가능케 한다.

   
▲ 국가정보원 CI <사진=국가정보원 홈페이지>

이 사건을 접하는 국민들의 “국정원게이트”에 대한 입장은 크게 두 가지 정도로 정리 될 수 있는데,

첫 번째는 정권의 정통성에 의구심을 제기해야 할 정도의 절대적인 부정, 비리 사건으로 규정하는, 즉 결과가 수단을 정당화할 수 없다는 입장.


두 번째는, 몇 개의 댓글과 트위터글이 과연 대선에 얼마나 영향을 줬겠느냐며 침소봉대하며 호들갑 떨지 말고 결과에 승복하라는 입장이다.


즉 일단 도출된 결과를 중요하게 생각하느냐 결과만큼 수단과 과정도 중요하게 생각하느냐에 대해 각자의 위기의식을 바탕으로 한 입장차이인 것이다.


하지만, 이 두 입장 모두 현상에 경도되어 본질에 대한 논의가 부제되어 있지 않은가 하는 생각이 들게 하는 면이 있다. 어쩌면 “국정원게이트”로 대표되는 이번 대선의 부정비리는 정치권이 가진 전근대적이고 보수적인 본질의 한계로부터 탄생할 수 밖에 없었던 다소 떳떳하지 못하지만 필연적일 수밖에 없는 결과가 아닐까 한다.


우리는 흔히 보수와 진보를 대척점에 두고 사람들의 성향을 가르기를 즐긴다. 그러다보니 진보와 보수는 대립하지만 서로에게 상호보완적인 면이 있으며 새의 양날개와 같은 역할을 하기에 두 가치 모두 동일하게 존중되어야 한다고 생각하게 된다. 다만 우리나라의 정서와 역사적, 지리적, 국제적 특성상 “대한민국 보수”의 특성이 본래 “보수”가 가진 의미와 괴리감이 생겼을 뿐이라고 생각한다. 그래서 “진짜보수”가 가진 의미와 가치를 되세기고 “보수의 품격”을 다시 바로세워야 한다고 주장하는 이들의 주장이 설득력을 얻는다. 하지만 과연 그럴까?


본래의 의미에서 진보란 그 어휘 안에 발전과 향상이라는 개념을 내포하고 있으며 보수는 전통의 유지를 기반으로 하고 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안정성에 영향을 주는 변화에 두려움과 거부감을 느끼기 때문에 넓게 보아 사회적 안정을 유지하기 위해서는 보수의 존재란 분명 필수적인 것이다. 그렇지만 단순히 불안감의 해소를 위해 존재하는 보수가 사회에서 얼마만큼의 영역에 지대한 영향력을 행사해야 마땅한가는 숙제로 남는다. 지난 몇 세기동안 보수집단이 지키고자 했던 중대한 가치중 이제는 더 이상 논의조차 되지 않는 비논리적이고 부도덕한 가치들이 산재해 있기 때문이다. 인종차별이나 남녀차별, 동성애자차별, 노예제도, 종교탄압 등이 그 예가 될 것이다. 그렇다면 이런 가치의 존속은 그 사회를 이루는 구성원중 누구의 불안감을 해소하기 위해서인가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흔히 보수가 말하는 사회적 안녕은 사회 구성원 누구의 안녕을 말함인가?


<고래가 그랬어>의 발행인이자 칼럼니스트 김규항은 “진보란 무엇인가?”라는 질문에 “사회가 더 행복해지는 것”이라고 대답한 적이 있다. 그리고 덧붙여 사회가 행복해지는 것은 소수의 지배계급에게 보장된 집중적인 행복을 통해서가 아니라 정직하게 일하는 선량한 다수의 행복이 확대될 때 가능하다고 주장하였다. 어쩌면 이것은 이른바 민주주의국가인 대한민국에서 너무나 당연한 얘기여서 따로 논의하는 것조차 어색한 테제이다. 이 이야기틀 통해 김규항은 다수 국민의 행복, 즉 국민대다수의 이익이 바로 국익이라고 주장한다. 이것은 누가 들어도 당연한 얘기일 수 있겠으나 실제로 “국익”이라는 타이틀이 달린채 이행되는 일들이 과연 “선량한 대다수의 국민들의 이익”을 위해 진행되는가는 생각해보아야 할 문제이다. 이에 김규항은 이 “국익”으로 위장된 케이스들에서 “지배 계급의 이익”을 발견하고 지배 계급의 이익을 위하여라고 표현할 수 없기 때문에 대체된 표현이 “국익”이라고 역설한다. 생각해보라. “극소수 지배계급의 이익”을 위하여라고 말한다면 과연 어느 국민이 그들의 편을 들어주겠는가? 그들에게 “국익”이라는 언어적 포장지는 반드시 필요했던 것이다.


보수가 지키고자 하는 가치안에는 항상 그런 논조들이 숨어있다. 흔히 영국은 온고이지신의 미덕을 추구해온 보수적인 국가라고 말한다. 근대 이후 세계 최초로 의회민주주의를 받아들였고 최초로 보통선거가 시행되었지만 여성이 투표할 권리를 갖게 된 시기는 뉴질랜드보다 30년 이상이나 늦으며 재산에 따라 1인2표 행사가 가능했던 제도가 폐지된 것은 1950년대에 이르러서이다. 그들은 혼란에 대한 경각심을 내세워 급진적 변화를 제재하는 것에 정당성을 부여한다. 그렇기에 권리와 행복의 확대가 느릴 수밖에 없었다. 권리와 행복의 확대가 느린만큼 유보되는 시간동안 그것들은 특정계층에게만 향유되며 확대된 이후에도 더욱 특정계층 중심으로 발언권이 유지할 수 있는 논의가 만들어질 시간 또한 벌 수 있다. 마찬가지로 1960년대 중반이 지나서야 흑인의 투표권 행사가 인정된 미국을 비롯하여 세계 유수의 선진국 또한 보수의 관점이 지배적일 때 행복의 확대가 유보되는 시간은 길어진다.


한국국적의 오슬로 대학 교수 박노자는 21세기 대한민국의 국가성격을 과두제(올리가키)로 정의한적이 있다. 거칠게 요약하자면 그것은 국익을 얘기할 때 그 이득의 대상이 이 과두제의 정점에 있는 특권 계급층이라는 말이 된다. 재벌 중심의 경제구조와 족벌중심의 특권층 형성에 대한 지적이라고 볼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이 구조에서 가질 수 있는 득과 실을 모두 안고 살아야 하는 것은 한국국적을 가진 모든 민중일 수밖에 없기도 하다.


그러므로 한국인이 보고 듣고 체감하는 한국의 보수는 위에 얘기한 외국의 예에서보다 더 복잡하고 교묘하고 실제 문제와 밀접하게 연결될 수 밖에 없겠지만, 기존에 검증된 가치들을 유지하며 사회의 안정성을 오랜 기간동안 지속해오며 자신들이 추구하는 바를 지키기 위해 진보에 대비하여 수없이 많은 장치들을 구비하고 있다는 점에서 세계의 어떤 보수와도 근본적인 차이는 없다고 보여진다.
한국적인 보수의 현상 예로써 대표적인 것이 사상적 편가르기, 즉 현실에서 종북이나 좌파라는 개념에 대한 적의로 표출되는 분단국가 특유의 감성에 대한 적절한 조절이다.



이 부분이 바로 기존의 수많은 장치들을 통해 보수가 필연적으로 탄생시킬 수 밖에 없었던, 하지만 결코 올바르다고는 할 수 없는 “국정원게이트”의 본질이다. 바꿔말해 국정원게이트는 주적인 북한에 대항하며 “다소” 원칙이 깨지는 한이 있더라도 기존가치질서를 유지시키기에 급급한 보수가 사용할 수밖에 없었던 결과적으로 자충수에 가까워진 수단이라는 것이며 보수가 취하고 있던 기득권에 대한 원칙론적 위협이 그 발로라는 얘기가 된다. 흔히 말하는 보수적인 사람들이 이 사건의 결론 부분에만 더 집착하고 보수적인 정치집단일수록 대수롭지 않게 말하려고 드는 이유 역시 바로 여기에 있다. 그들은 실제로 중대한 사건을 벌인 것이 아니라고 생각할 가능성이 높다. 원래 해오던 방식으로 이번에도 했는데 단지 재수가 없어서 사태가 커졌을 뿐 그게 뭐 대수인가 싶을지도 모른다. 겨우 댓글 몇 개 쓴 것이 과거 머리통에 권총을 들이대고 국가원수 자리를 찬탈하던 때에 비하면 사소한 불협화음정도 이상의 무슨 호들갑을 떨만한 일인가? 그보다는 더 중요한 것. 이 나라의 근본을 지키는 것. 즉 휴전선을 사이에 두고 사상적으로 대립하고 있는 '무시무시한 북괴집단의 위협으로부터 효율적으로 대한민국을 지키는 것이 훨씬 중요한 것이다'라는 생각이 들것이다. 관습적으로 입혀져 버린 옷, 스스로의 의지로는 쉽게 벗어낼 수 없는 의복과도 같은 정서위에서 가능한 판단이다. 이것은 관습과 그 관습으로 인해 만들어져 온 지배적 정서에 경도되어 원칙을 등한시하게 되는 보수의 닫힌 계에서 충분히 가능한 심급전복으로 파악하면 적당할 것이다.



기실 보수는 사회가 진보되는 방향이 너무 급진적이거나 브레이크 없는 변화로 인해 생길 피해자들을 지켜낼 정도의 가치기능을 수행하는 것이 가장 바람직하다. 지금과 같이 발전과 향상보다 고여서 머물고 좁은 집단의 실익을 지키는 것에만 천착되어 있는 것은 올바른 “진짜 보수”의 역할과도 거리가 멀다고 할 수 있다.


다시말해, 국정원게이트를 옹호하는 보수인사들과 국정원게이트를 대수롭지 않게 생각하는 보수적인 사람들에게 그들의 경험을 바탕으로 본 국정원게이트는 용납가능한 범위의 작은 소요일뿐 정말로 대단치 않은 정도의 일인 것이다. 이들에게 원칙보다 중요한 것이 습관화 된 가치들이라고 봤을 때 보수는 어쩌면 이미 탈보수 되었는지도 모르겠다. 다만 그 탈보수의 방향이 이기적이고 비원칙적이라는 것이 안타까울 따름이다.



이들은 본능적으로 국민주권이나 천부인권과 같은 원칙이 국가존립의 대전제가 아닌 문서상의 이상일 뿐이라고 여긴다. 그런 것은 현실이 아니라고 주장한다. 자신들의 기득이 위기에 처했을 때, 자신들의 이득이 국익이고 그것이 이 나라를 지키는 최우선의 가치라고 여길 때 이들은 작은 불협화음을 감수하고 얼마든지 “약간“ 부당하더라도 제2, 제3의 국정원게이트를 만들어 낼 수 있고 또한 그 모든 준비가 되어있다.


보수가 경도되어 있는 이런 시각과 인식의 한계로부터 국민과 여론의 전반이 탈출할 수 없다면 우연히 이번 한 번의 국정원게이트는 극복할 수 있을지언정 더 교묘하고 치밀하게 무장되어 그들만의 국익을 지키는데 모든 것을 바치는 보수의 울타리에서 벗어나기는 어려울 것이며 더 많은 사람들에게 기회와 권리와 행복을 확대하기는 그보다 훨씬 어려울 것이다. “국정원게이트”라는 기호의 표상에서 가장 중요하게 보아야 할 것은 이런 본질의 문제이다. 단지 극복해야 할 현상만으로 파악하는 것은 결코 다양하게 표출되는 문제들에 있어서 근본적인 해결의 방안이 되기 힘들 것이라고 보여진다. 보수와 그들의 커넥션이 이 사회에서 보다 자신들에게 유리한 가치를 유지할 수 있는 동안 “국정원게이트”와 같은 원칙에서 벗어난 비윤리적 혼외자는 언제든지 수태되고 탄생할 여지가 남아있는 것임을 우리는 명심해야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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