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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식의 흐름 기법으로 본 요동 정벌 -_-
게시물ID : history_15067짧은주소 복사하기
작성자 : 겨울왕궁
추천 : 6
조회수 : 1006회
댓글수 : 7개
등록시간 : 2014/03/27 21:02:08
아래 오르카 님 글의 답글로 시작했다가 의식의 흐름 기법에 따라 글이 길어져서 별도의 글로 올립니다.

유익이 남경에 사신을 보내기 전에 먼저 고려에 귀부할 의사를 타진하지요. 고려 정부가 어떤 의견이었는지 고려사에는 나와있지 않으나 국력을 생각해 거절을 했거나 여러가지로 내부가 소란스러웠기 때문에 (신돈이 1371년 8월에 처형됩니다. 신돈은 이미 정치적으로 사망한 상태였지만 잔당을 소탕하고 친정 체제를 갖추느라 여러가지로 정신 없었을 겁니다.) 그냥 씹었지 않을까 싶습니다. 그렇더라도 불과 1년 전 요동정벌을 단행했던 공민왕이 왜 이런 떡을 덥석 받아먹지 않았나 궁금하기는 합니다.  

논쟁을 다 본 건 아니라서 이미 나온 얘기일 수도 있고 .. 뭐 가상의 얘기이긴 하지만
고려가 공민왕의 정벌 이후 요동에 눌러앉았거나, 혹은 유익이 주는 요동을 덥썩 받아들었다면 요동 통치와 방어를 위해 생각하는 만큼 큰 힘을 쏟을 필요는 없었을 겁니다. 요동 자체가 이미 고려인들이 꽤 살고 있었고, 공민왕 자신이 심왕의 후계권을 주장하기도 했으니까요. 사실 공민왕이 요동 정벌에 나선 이유도 (자기한테 권리가 있는) 심왕이 유명무실해진 지역을 나가추가 점거했기 때문인 것도 있습니다. 말하자면 몽골 제후들 간의 영지 다툼인 셈이죠. 고려가 성공적으로 심왕의 영지를 인수받았다면 그 주민들이 반항할 이유가 거의 없어보입니다.

또 한가지 ..
1370년대 명은 내분을 대강 수습하긴 했지만 아직 만리장성을 경계로 아직 북원과 아옹다옹할 때입니다. 내몽골 지역으로 쳐들어가 북원을 끝장내려는 시도는 있었지만 요동에는 별 관심이 없기도 했지요. 오히려 이 시점에서 유익이 명에 투항하며 요동의 정보를 상세히 알려준 덕에 명의 요동 원정이 가능했던 측면도 있습니다. 이에 따라 1372년인가 서달이 만리장성 넘어 북원에 원정을 갔다가 개털리기도 하고 얼마 후에 또 반격에 성공하지만 70년대 후반까지 만리장성 밖에서는 명보다 북원이 더 영향력이 있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이 시기의 북원은 명에 대해 상당히 공세적으로 나오는데, 사실 이 시점에서 북원으로서도 고토회복을 바라고 명을 공격한 것은 아닙니다. 전통적으로 초원의 유목민이 그러했듯이 농경에 바탕을 둔 중원 왕조를 게릴라전으로 괴롭히면서 막대한 조공을 받아내기를 원한 것이지요. 초원 제국은 중원 왕조의 공납 없이는 유지되기 어려운 법이니까요. 

그런데 이 시점에서 명의 유목민에 대한 인식은 예전의 중원 왕조와는 크게 달라져 있었습니다. 
과거부터도 한족 왕조들은 유목민에게 공주도 상납하고 금과 비단도 뜯겨가면서 엄청난 침략을 받았었지만 한족들이 '유목민들이 우리 땅을 점령하고 통치할 것이다.'라는 두려움을 가진 적은 없습니다. 유목민은 언제나 몰려와서 깽판을 치고 깽값을 받아 돌아가는 존재였습니다. 앞서 말했듯이 이 시점에서 북원의 공세는 깽값을 받기 위한 깽판이었고요. 
하지만 원의 지배를 경험한 명나라에게 북원의 준동은 단순히 깽값을 받기 위한 것이라고 보이지 않았죠. 유목민들이 항상 중원 전체를 점령하기 위해 군사 행동이라고 판단합니다. 당연히 적극적으로 맞서야 했고 무리를 해가면서도 북원 정벌에 나서게 됩니다. (반면 깽값을 받지 못한 몽골인들은 점점 더 큰 깽판을 쳐야만 했었지요.)

요동 정벌이 불가능 혹은 하지 않는 것이 현명한 선택이라고 하는 근거 중 하나는 명나라가 눈을 시퍼렇게 뜨고 있는데 고려가 요동을 잠깐 점거했다 한들 어쩔 것이냐 .. 라는 것이 있는데, 이 문제가 발생하는 게 위의 상황 때문입니다. 
사실 1360년대까지 명의 관심은 내몽골에 있었지 요동에는 큰 관심이 없습니다. 그런데 유익이 투항하면서 명과 요동 지역의 몽골인들 사이에 매우 격렬한 다툼이 벌어집니다. 엄밀히 말하면 이 지역의 몽골인(나가추)은 북원과는 관계가 없지만 요동을 친몽골적인 몽골인이 점거하고 있느냐, 반몽골적인 한족이 지배하고 있느냐는 북원의 정세에도 대단한 영향을 미칩니다. 한마디로 명이 요동을 완전히 평정하면 북원은 완전히 고립되는 셈이지요. 
(과거 수-당에 대응하여 고구려가 돌궐-고구려-백제의 연결을 시도했던 사실이 연상됩니다. 아마 주원장의 머리에 북원-요동-고려로 이어지는 몽골 왕조의 연대 세력이라는 그림이 그려졌을 수도 있겠네요. 라고 하기엔 주원장은 좀 무식했을 듯 하지만) 

명은 이전의 한족 왕조와 달리 원의 절멸을 원했고, 그 절멸을 위한 가장 효과적인 방법이 요동의 점령에 있다는 것을 이제 알게 된 것이죠. 게다가 명나라 군주는 신경증 환자라고 할 수 있는 주원장이다보니 요동에 관심이 있는 모든 이들을 압박하기 시작합니다. 이쯤 되면 고려가 불쌍해지죠. 나름 북원 및 요동의 몽골인들과 격렬히 싸우고 있었고 공개적으로 친명 정책을 표명했는데 의심증 환자 주원장은 자꾸 고려를 원 왕실의 일원으로 보고 매서운 눈초리만 보냈으니까요. 심지어 사대의 나라 조선 초에도 주원장의 이런 의심은 계속됩니다. 정도전이 여기에 빡쳐서 요동을 .. 

아무튼 정리를 하자면 이렇습니다.
큰 그림에서 원의 지배를 이미 경험했던 명으로서는 북방 민족의 근본적인 절멸을 원했고, 그 와중에 초기에는 몰랐던 요동의 전략적 가치를 깨닫게 됩니다. 이 이후로는 여러 분들이 말씀하신 대로 근본적인 국력 차이로 인해 고려-조선이 요동을 점거할 수도 지켜낼 수도 없게 되었습니다. 

다만 한가지 재미있는 상상을 하자면, 명이 요동의 전략적 가치를 깨닫기 전에 고려가 재빠르게 요동을 점거한 상태에서 '명을 위해 반원 활동을 충분히 어필'했다면 어땠을까 하는 점입니다. 물론 당시의 고려 왕이 가지는 권위의 일정 부분은 몽골 왕가라는 데에서도 오기 때문에 친명반원에 투철하면서 국력을 하나로 끌어모을 수 있는 고려 왕이 존재할 수가 없었다는 근본적인 모순이 존재하긴 하지만 말입니다.

역갤이 어느 정도 학술적인 근거에 기반해 있어야 한다는 데는 동의하지만, 순수한 학자들의 모임도 아니고 다양한 역사적 상상 심지어 공상에 가까운 이야기도 충분히 할 수 있어야 한다고 봅니다. 
"정도전 계속 살아서 권력을 유지했더라면 조선은 어떤 나라가 되었을까?"라는 것은 실현 가능성을 보자면 절대 있을 수 없는 이야기겠지만, 우리같은 아마추어들은 그런 다소 허황된 공리공론을 해보는 것도 역사의 어떤 측면을 이해하는 데, 혹은 재미로 알아둘만한 사실들을 알게 되는 데 도움이 될 수도 있습니다. 
제가 생각할 때 "고려의 요동 정벌이 만약 성공했다면 어떻게 되었을까?" 라는 얘기도 (다소 강한 어조로 주장했다고 해서) (사실 논쟁을 보면 그렇게 우기기만 하는 것도 아니라고 보이는데) 그렇게 과민하게 환단고기 급으로 까일만한 내용은 아니라고 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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