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남매 양육 때문에 직장 그만두고 1년간 전업주부로도 살아봤는데, 나도 아이들도 별로 행복해지지 않길래 다시 일을 시작했다. 운도 따랐다. 내 사회생활 초창기는 여성들에게 기회가 막 열리는 시기였다.” (‘조선일보’ 2012년 5월 인터뷰▶바로가기)“학위(미국 매사추세츠 주립대 커뮤니케이션학)를 따고 한국에 돌아가서 대학에서 가르치려 했을 때 나를 환영할 것으로 생각했다. 완전히 오해였다. 그들은 성차별에 대해 노골적이었다. 대학 강사에 지원했는데도 ‘여성이 지원할 줄 몰랐다’며 놀라워했다. 난 3~4년간 최저임금을 받는 시간강사, 소위 ‘보따리 장사’를 했다. (…) 미국과 유엔에서 성차별은 훨씬 덜하다. 유엔은 반대 방향이다.” (‘NYCultureBeat’ 2013년 12월 인터뷰▶바로가기)
“남편과 처음부터 내가 일하겠다고 밝혔으며, 지원해주기로 했다. 어떤 여성들은 가사일에 행복을 느낄 수도 있다. 난 완벽한 아내거나 엄마는 아닐 것이다. 난 항상 말해왔다. “각자가 최선을 다하면 돼!” 난 점수에 연연해하지 않았다. 당신은 당신 일을 하고, 나는 나의 일을 하고.” (‘NYCultureBeat’ 2013년 12월 인터뷰)
출발은 여성 인권이었다. 국회의장실에서 국제담당비서관으로 일하던 1995년 베이징에서 열린 세계여성대회에 참석한 것이 계기다. 정부, 비정부기구가 함께 꾸린 대표단의 대변인으로, 우리 일본군 위안부 문제를 전세계에 알리는 등 2주 동안 정말 신나게 일했다. 그때 처음 내 문제가 나만의 문제로 끝나는 게 아니라 국제사회 전체의 문제가 될 수 있다는 것, 공동 의제를 세우고 새로운 규범을 만드는 일을 유엔이 한다는 걸 알게 됐다. (…) 2005년 뉴욕에서 열린 세계여성대회를 유엔여성지위위원회 위원장인 내가 주재했다. 유엔 장애인협약에 여성 장애인 관련 내용을 별도 조항으로 만들어 넣는 것을 3년에 걸쳐 추진해 성사시켰다.” (‘조선일보’ 2012년 5월 인터뷰)
그가 꼽은 ‘유엔에서 일한 최고의 순간’은 여성 성폭력 문제를 다루던 때다.
“가장 기억에 남는 일은, 유엔인권최고대표사무소에서 일할 때 콩고민주공화국에서 성폭력이 체계적으로 발생하고 있었다. 이들을 직접 만나서 그런 혹독한 경험에서 인간의 위엄을 어떻게 복구할 수 있을까?(고민했다) 그런데, 모든 여성이 좌절하지 않았다. 건강이 회복된 여성들은 “자식을 학교에 보내고 싶다”고 말했다. 잔인성이 상상을 초월하는 극도의 상황에서도 천사들, 의사들, 비정부기구들이 희생자를 돌보기 위해 나타났다. 여기서 인간성의 최악과 최선을 보았다.” (‘NYCultureBeat’ 2013년 12월 인터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