게시판 즐겨찾기
편집
드래그 앤 드롭으로
즐겨찾기 아이콘 위치 수정이 가능합니다.
아빠에 대한 그리움은 있지만.. 새아빠는 역시 거부감이 있나봐요
게시물ID : gomin_771131짧은주소 복사하기
작성자 : 익명bW1rY
추천 : 0
조회수 : 142회
댓글수 : 3개
등록시간 : 2013/07/17 04:36:47
안녕하세요 오유 눈팅하는 여학생입니다.. ^^
 
뭐라고 시작할지 모르겠지만 혹시 나쁜 사람이라고 욕할지도 모르겟지만
누구한테 의지하는 것이 매우 서툰 저이기에 이렇게 익명으로 글을 남겨봅니다..
 
대부분이 사람들이 그렇겠지만 저희집도 IMF 이후로 가정형편이 매우 안좋아졌습니다..
제가 아는 사실보다는 부모님이나 할머니가 말해주신 말로는 그 전에도 아빠는 잦은 출장으로 인해서 집에 많이 계시진 않으셨던거 같아요..
 
친가는 미국에 외가는 부산쪽이였고,
저는 부산에서 태어나 4살가량정도로 부산에서 자랐다가
그 이후엔 인천에서 자라 7살 초반정도까진 인천에 살다가 미국의 친할머니 댁으로 갔네요..
 
미국에 잠시라도 살았다고 하면, 할머니든 부모님댁이든 거기에 있다고 하면 부러워도 했지만..
저와 동생, 어머니에겐 매우 힘든 시간들이였어요..
3살차이나는 동생도 (그땐 제가 일곱살이니 동생은 네살때겠죠)
미국에서 겪었던 일들이 기억나서 막무가내로 미국이 싫다고 햇을 정도였죠..
 
아빠는 친할머니가 아빠를 낳으신 뒤 미국으로 건너가셔서 미국인인 할아버지와 저희 아빠가 있다는 사실을
말하지 않은 체 재혼하셨고
그래서 미국에 저희 엄마와 동생, 제가 갔을 때 그냥 사촌? 친척쯤으로만 알고 잠시만 잇다가
너무 오래있을 순 없어서 엄마가 있던 고기집, 교회로 옮겨서 지냈습니다.
 
고기집 사장님에 얻혀있을 땐, 작은 방에 엄마와 저 동생이 있었고,
처음엔 친절해보였던 사장님 부부와 오빠, 언니, 동생은 .. 점점 막대했고,
동생은 오빠,언니가 방에서 나오지말라고해서 방안에서 소변을 싸기 일수였고,
그들은 저희 엄마에게 저희를 돌본다고 같이 논다는 명목하에 돈을 받아갔죠..
 
정말.. 그 어린 동생이 네살때의 기억을 한다는게 너무 슬펐어요
제가 일곱살 때 그 유치원에서 말도 안되는 선생님의 말을 이해했다는 것도 ..ㅋㅋ 왜 지금은 못하지..
 
그래서 다시 한국으로 와서 잠시 인천에 잇다가
외할머니와 함께 다시 부산으로 돌아갔네요
 
부산에서 또 이사하고.. 저는 사투리도 표준어도 아닌말로..
아니.. 뭐가 문제였을까.. 잠시 왕따같은 걸 당하고..
 
그 모든게 기억나서 사람과에 거리를 두게되고..
동생이 혹시 나와 같은 일을 당할까..
..
 
쓰다보니 길어졌네요..
나는 그다지 나쁜 인생인거 같진 않아요
힘들다, 나는 왜 이럴까.. 할때마다 나는 괜찮다. 아프리카 아이들을 생각하자..
 
...
새벽이라 술마셔서 그런지 제목이랑 전혀 다른 내용이 됬네요.. 미안해요
이해해줘요..
 
실은 정말 제목과 관련된 이야기를 쓰면 혼날까봐.. 그래서 그런가봐요
모두
 
모두 다 힘내요!!
전체 추천리스트 보기
새로운 댓글이 없습니다.
새로운 댓글 확인하기
글쓰기
◀뒤로가기
PC버전
맨위로▲
공지 운영 자료창고 청소년보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