게시판 즐겨찾기
편집
드래그 앤 드롭으로
즐겨찾기 아이콘 위치 수정이 가능합니다.
광복 전쟁과 백범 김구, 그리고 백의사
게시물ID : history_7725짧은주소 복사하기
작성자 : 밤바람
추천 : 11
조회수 : 1241회
댓글수 : 2개
등록시간 : 2013/02/19 10:53:06

다들 아시겠지만 이분이 백범 김구선생이시다.

 

 

짧은 머리 두꺼운 뿔테안경 환하고 선한 웃음 그리고 흰옷

무척이나 선하시고 유순해 보이는 친근한 이미지의 선생님이시다.

그러나 이분 보기와는 다르게 엄청 열혈 남아이시다.

불교,기독교,동학,유학, 풍수, 관상,손자병법,육도, 삼략 에다가 현대적 사상까지 배우시고

엄청난 문장력을 자랑하시는 학자풍의 인물이시지만 선생님은 근본적으로 다혈질의 무인이셨다.

선생님은 1876년 황해도 해주에서 태어나셨.

본명은 창수로 '구'라는 이름과 백범 호는 나중에 만들게 된다.

그의 집안은 본래 양반 집안이었지만 조상을 잘못 둔 탓에 신분을 속이고 해주에

정착해 살고 있었던 것이다.

잘 못둔 그의 조상 방조 김자점에 대해서 잠깐 짚고 넘어가보겠다.

조선의 성리학자, 정치가이며,무관이기까지 참 다양한 이력을 가지고 있는 그는

인조반정 때 이괄의 난으로 유명한 이괄과 함께 모의에 참여하여 반정 공신이며

왕실의 인척으로 한때 영의정에 자리에까지 오르게 된다.

병자호란 당시 남한산성으로 유명한 임경업 장군을 방해한것 뿐만 아니라 이후

제거까지하는 행동을 한다.

강력한 북벌론자인 효종이 송시열등을 등용하면서 북벌을 준비하자

이를 청나라에 밀고까지하는 아주 희안한 양반이다.

이것이 걸려 한때 유배를 갔는데 얼마 후 그의 아들 김익이 역모를 꾸민것이 들켜 유배지에서 참형을 당하고 만다.

이때부터 김자점 가문은 신분을 속이고 도망가서 살게되는데 해주에 살고있었던 선생의 집안이 바로

김자점이란 조상을 잘못 둔 그 집안이었던 것이다.

아주 제대로 잘못된 조상이다.

선생은 4세때 천연두에 걸려 죽을 고비를 한차례 넘긴 후 일생 동안 죽을 고비를 달고 살게 된다.

양반 신분을 속인 덕에 양반들의 멸시와 가난으로 9세가 되어서야 겨우 국문을 배우게 된 선생은

신분 상승을 위해 과거 중에서 소과인 생원, 진사 시험을 준비하면서 당시(唐詩), 대학(大學),

과문(科文) 등을 공부하였다.

17세가 되던해에 과거에 나갔으나 낙방하고 만다.

이후 과거 시험에 대한 꿈을 접고 손자병법,육도, 삼략, 풍수지리, 관상 등 다양한 학문에

몰두하게 된다.

18세가 되는 1893년 동학에 입도하여 이듬해 1894년 19세의 나이로 충북 보은에서 최시형 대수주(大首主)를 만나 팔봉도소접주(八峰都所接主)란 첩지를 받고 고향인 해주성의 탐관오리의 척결을 목표로

동학군의 선봉장이 되어 첫번째 전투에 나서게 된다.

그러나 19세의 어린 그에게 첫번째 전투는 패배로 끝나고 패잔병을 이끌고 해주성 근처 화학동이란 곳에 진지를 구축하며 군세를 정비하고 있었다.

당시 선생의 진지에서 20리 쯤 떨어진 청계동 이란곳에 안태훈이라는 진사가 의병을 이끌고 동학 혁명군에 맞서 마을을 지키고 있었다.

동학 혁명군은 관군하고도 싸우고 일본군하고도 싸우고 의병하고도 싸웠으며

의병들 역시 일본군하고도 싸우고 동학 혁명군에게서 마을을 보호하기 위해서도 싸웠다.

아주 혼란스러웠던 시기였다.

청계동의 안진사는 학문이 띄어나고 식견이 넓으며 그 지역에서 이름이 널리 알려진 양반으로서 무골기질이 다분하였다고 한다.

그에게 3명의 뛰어난 아들이 있었으니

큰 아들은 안중근, 둘째는 안공근, 세째는 안경근 이었다.

그 중 맏아들 안중근은 15세의 어린 나이에 의병을 이끌고 동학 혁명군과의 전투를 지휘하였다.

백범 김구선생이 이끄는 동학 혁명군의 선봉부대와 마을을 지키는 의병장 도마 안중근 의사의 전투가 이듬해 1895년에 벌어질뻔 하였으나 불발로 끝난다.

두분다 무탈하게 싸움이 없었다니 참 다행스러운 일이다.

이들 두분은 훗날 명성황후 시해에 직접적 연관이 있는 인물 한명과

의심되는 인물을 각각 공개 처단하게 된다.

각설하고 두분의 일전이 불발된것이 어찌 된것이냐면 젊은 김구 선생에 대해 호감을 가진 안진사가

밀사를 보낸 것이다.

안진사가 보낸 밀사를 만난 김구 선생의 측근은 이렇게 이야기를 전했다고 한다.

"안진사는 안목이 높은 사람으로 인재를 아낄 줄 알며 전부터 김접주(김구) 님을 매우 아끼고 있다는 것, 그런데 화학동(김구의 진지)와 청계동 사이의 거리가 20리 밖에 안되니 만약 김접주가 무모하게 청계동을 치려다가 실패하면 김접주의 생명과 성명을 보장하기 어려울 것이라는 점, 그리되면 아까운 인재를 하나 잃게 될 것인즉 거동을 신중히 하라는 호의의 충고를 전하더라."는 것이다.


정덕현은 이어서 김구
에게 "안진사는 인재를 아낄 줄 아는 사람입니다. 안진사의 됨됨이가 보통이 아니니 그의 호의를 받아들이는 것이 좋을 것 같습니다."라고 진언하였다.

이에 선생은 참모들을 소집하여 회의를 열었다.

"저편에서 이편을 치지 아니하면 이쪽도 저쪽을 치지 아니할 것, 피차에 어려운 지경에 빠질 경우에 서로 도울 것이라"는 데에 합의하였다.

일종에 밀약이 성립된 것이다.

이런 사유로 하여 선생은 청계동에 머물게 되었다.

청계동에서 선생은 두명의 스승과 3명의 동지를 얻게 된다.

그리고 그 관계는 '운명적'이라 할 만큼 질긴 인연으로 이어졌다

선생의 스승중 한명은 안중근 의사의 아버지 안태훈 진사이며 굳은 의지와 넓은 식견을 배우고

명망이 높은 고능선에게서 한학을 배웠다.

어느날 고능선이 이런 말을 하였다.

“예로부터 흥해 보지 않은 나라도 없고 망해 보지 않은 나라도 없다.

그런데 나라가 망하는 데는 거룩하게 망하는 것이 있고 더럽게 망하는 것이 있다.

의(義)로써 싸우다가 힘이 다하여 망하는 것은 거룩하게 망하는 것이요, 또 백성이 여러 패로 갈려서 한 편은 이 나라에 붙고 한 편은 저 나라에 붙어서 망하는 것은 더러운 것이다.

이제 왜의 세력이 궐내까지 침입하여 마음대로 하고 있으니 이제 우리에게 남은 것은 일사보국(一死保國)하는 길밖에 없다.”

이에 선생께서 되물으니 “망하는 나라를 망하지 않도록 붙들 도리는 없습니까?”

고능선은 “청국이 갑오싸움에 진 원수를 반드시 갚으려 할 것이니 우리 중에 상당한 사람이 그 나라에 가서 국정을 조사하고 그 나라 인물과도 사귀어 두었다가 뒷날 기회가 오거든 서로 응할 준비를 하여 두는 것이 필요하다.”라고 말하니 선생도 이에 동감을 표시하였다고 한다.

이때 당시 선생이 안진사에게 '의병기의(義兵起義)'를 제의했다가 뜻이 맞지 않아 고능선의 말대로 청계동을 떠나 청나라로 향하였다.

안진사에게 하직 인사차 들린 자리에서 만난 김형진과 같이 길을 떠나게 된다.
압록강 건너 관전에서 임경업 장군의 비각을 보게되는데 선생의 조상인 김자점의 모함으로 북벌의 숙원을 이루지 못한 영웅이며 충신인 임경업 장군의 비각앞에서 어떤 심정이었을지 헤아려 본다.
다시 길을 떠나 삼도구에 다다라 그곳에서 300여 명의 의병을 지휘하고 있던 의병장 김이언 의병진에
가담하여 활동하였다.
선생은 김이언 의병진의 소속으로 1895년 강계(江界)를 공격하였으나 실패하게 되자 할 수 없이 고향을 향하여 귀국길에 올랐다.

1895년 (고종 32) 명성황후 시해사건인 을미사변 이후로 전국적인 의병항쟁이 있었고,

이런 상황에서 선생은 한반도를 둘러싼 정국의 변화를 관망하기로 하고 해주로 되돌아 오던 중에

1896년 2월에 치하포 주막에서 변복한 일본인 쓰치다(土田讓亮)을 만나게 된다.

선생은 보통 무역이나 장사를 하는 일본인 같으면 이렇게 변복하고 다닐 까닭이 없으니 이는 필시

국모를 시해한 삼포오루(三浦梧樓) 놈이거나 그렇지 않으면 그의 일당일 것이요, 설사 이도 저도

아니면 우리 국가 민족에 독균임이 분명하니 저놈 한 놈을 죽여서라도 국가의 수치를 씻어 보리라

결심하였다.

선생은 그가 차고 있던 칼을 빼앗아 그를 찔러 죽이고 ‘국모의 원수를 갚으려고

이 왜놈을 죽였노라’라는 내용의 글과 함께 ‘해주백운방기동 김창수(海州白雲坊基洞 金昌洙)’라는

서명까지 한 후에 이 포고문을 길가에 붙이고 유유히 고향으로 돌아왔다.

후일 선생은 자신의 자서전 백범일지에 쓰치다 조스케가 일본육군 중위이자 일본군 밀정 군사간첩이라고 기술해 놓았다.

그러나 이 쓰치다란 사람이 2003년에 작가 김완섭에 의해 논란이되었는데

1896년 2월 무역을 목적으로 배편으로 평안도 진남포로 가는 도중에 황해도 안악군 치하포에 정박하였다가, 선생에게 살해당한 민간인이란 이야기인것이다..

김완섭은 이걸 뭐 여의도 국회의사당까지 방문하여 국회 과거사진상규명특위 공청회에서 “김구 선생은 ‘민비’의 원수를 갚기 위해 무고한 일본인을 살해한 뒤 중국으로 도피한 조선 왕조의 충견(忠犬)”이라는 내용의 문건을 배포[하는 오지랍 넓은 행동을 하였다.

여기서 멈추지않고 그는 "김구가 무고한 일본인을 살해했다"는 내용의 인쇄물도 배부하였는데 문건을 받아 본 일부 국회의원과 시민들은 즉석에서 그에게 비난을 퍼부었고, 일부는 이를 근거로 검찰에 들고가 그를 고소했다.

검사 정현섭은 김완섭을 허위사실 유포죄로 기소하였다.

2004년 7월 검찰은 공소장에서 “김구 선생이 1896년 10월 황해도 안악군 치하포항에서 살해한 ‘쓰치다’는 당시 조선인으로 위장한 일본군이라는 사실이 밝혀졌고 김구 선생이 쓰치다를 처단한 뒤 체포돼 사형 선고까지 받았다가 1919년 중국으로 망명했는데도 도주한 것처럼 허위 사실을 적시했다”고 밝혔다.

서울고검 정현태(鄭現太) 검사는 7월 27일 그를 백범 김구 선생의 명예를 훼손한 혐의(사자명예훼손)로 소설 ‘친일파를 위한 변명’의 작가 김완섭을 불구속 기소한다.

100년뒤 조국에서 오지랍 넓은 저 행동을 보기 위해 선생이 목숨걸고 독립운동을 하셨는지 실로 안타까운 일이다.

선생은 다시 청계동에서 안태훈, 고능선과 만나 자신이 직접 돌아보고온 저간의 내외 사정을 전하고

함께 의병을 일으킬 것을 제의하였으나안진사는 "아무 승산이 없이 일어났다가는 실패할 수 밖에 없으니 기의할 생각이 없고, 천주교를 믿다가 후일 기회를 보겠다."는 뜻을 밝혔다.

이에 선생은 후일을 기약하며 청계동을 떠나 고향으로 돌아간다.

이후에도 안중근 의사 가문과 선생은 긴밀하게 인연을 유지하게 되며 특히 안중근 의사가 1909년

하얼빈 역에서 이토히로부미를 저격한 사건은 선생의 향후 일생에 큰 영향을 주게된다.

다음편에선 안중근 의사의 의거와 한인애국단의 특무공작등을 포스팅하도록 하겠다.

------------------------------

아쉽게도 이글을 내 블로그체 올렸을 때 인기 드럽게 없어서

다음편은 작성하다 때려쳐서 다음편 같은것은 없다.

 

원본글 출처 '내 블로그' 

이미지 출처 '위키백과일껀데...'

꼬릿말 보기
전체 추천리스트 보기
새로운 댓글이 없습니다.
새로운 댓글 확인하기
글쓰기
◀뒤로가기
PC버전
맨위로▲
공지 운영 자료창고 청소년보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