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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주서 ‘사면초가’에 빠진 중공…기댈 곳은 북한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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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 자주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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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시간 : 2014/03/31 23:16:19

만주서 ‘사면초가’에 빠진 중공…기댈 곳은 북한뿐이었다

 
                                                                                   등록 : 2014.03.31 20:36수정 : 2014.03.31 20:36
 
 
 
1948년 9월 지린성 쑹화강 철교 개통식에 참석해 연설하는 천윈(왼쪽 사진). 중공 중앙 조직부장을 지낸 그는 중공 최고 지도부와 북한의 인연을 맺게 해준 인물이기도 하다.
 

김명호 교수의 북-중 교류 60년 ⑦ 마오쩌둥 특사 맞이한 김일성
 

 
태평양전쟁이 막바지에 달하자 미국은 중국에 60억달러를 지원했다. 106개 사단, 200여만의 국민당 군을 현대식 무기로 무장시킨 뒤 이들의 훈련을 위해 군사 고문단까지 파견했다.
중국 총통 장제스의 이중외교는 빛을 발했다. 미국의 지원을 받아내자 장남 장징궈(蔣經國)와 행정원장 쑹쯔원(宋子文), 외교부장 왕스제(王世杰)를 모스크바로 파견했다. 1945년 8월14일, 소련과 중-소 우호동맹조약 체결에 성공했다. “중소 양국은 상호 주권과 영토보호를 존중하고 내정 불간섭을 준수한다.” 대충 이런 내용이었다. 8월26일부터 효력이 발생하고 유효기간은 30년으로 했다.
 
 
체결 당일, 쌍방은 중국의 동북지역에 관한 협정도 체결했다. 그 내용은 다음과 같았다. “일본이 동북지역에 수립했던 만주국을 무장해제시킨 소련은 동북3성이 중국의 일부분임을 인정하고, 이 지역에 대한 국민당 정부의 주권 행사를 존중한다. 중국 국민당은 다롄(大連)에 대한 소련의 이익을 보장하고, 다롄항을 자유무역항으로 개방하는 데 동의한다. 창춘철도(長春鐵道)도 양국이 공동운영한다. 소련군은 일본 항복 3개월 뒤 동북에서 철수한다.”
 
국공합작 시기였지만, 미국의 원조에 이어 소련과 조약을 체결한 장제스의 국민정부는 중국의 유일한 합법적 정권으로 자처했다.
 
무장한 야당인 중국 공산당도 맥 놓고 있지 않았다. 8월11일, 팔로군 사령관 주더(朱德)가 6호 명령을 선포했다. “소련 홍군과 함께 중국과 조선 경내에 진입해라. 현재 중국 화북 지역에서 일본군과 작전중인 조선의용대의 무정(武亭)과 부사령관 박효삼(朴孝三), 박일우(朴一禹)는 부대를 이끌고 팔로군과 함께 동북으로 이동해라. 일본의 괴뢰인 만주군을 소멸하고, 동북의 조선 인민을 조직해 조선 해방을 달성해라.”
 
중공은 병력 13만명을 동북으로 이동시켰다. 이들을 통솔하기 위해 간부 2만명도 동북으로 파견했다. 펑전(彭眞), 리리싼(李立三), 천윈(陳雲), 가오강(高崗), 장원톈(張聞天), 뤄룽환(羅榮桓), 린펑(林楓) 등 중앙위원과 동북 사정에 밝은 전 동북군 출신 뤼정차오(呂正操), 러시아어에 정통한 우슈취안(吳修權)도 포함시켰다.
 
소련에 가 있던 동북항일연군 출신 조선인들(88여단)은 이들보다 동작이 빨랐다. 영수로 추대한 젊고 패기왕성한 김일성과 함께 소련군을 따라 평양에 입성해 38선 이북의 안방을 차지했다. 일부는 동북으로 이동해 ‘민주대동맹’을 결성했다. 국내에서 일본에 저항하던 민족 세력들은 무장투쟁으로 일관해온 동북항일연군 출신들에게 기가 죽었다.
동북을 장악해야 중국에 군림할 수 있다는 생각은 장제스도 마찬가지였다. 한동안 일본군한테 밀려 서남과 서북 지역에 주둔중이던 병력 일부를 동북으로 이동시켰다. 순식간에 도시와 철도를 장악하고 동북 출신 셰원둥(謝文東)을 파견군 보안사령관에 임명했다.
 
그러나 장제스는 첫 단추를 잘못 끼웠다. 셰원둥은 동북항일연군 제8군 군장까지 지냈지만 일본군에 투항한 경력이 있었다. 일선 부대 지휘관들도 일본과 관련있는 사람들 중에서 선발했다. 그러다 보니 별난 사람이 다 있었다. 항일운동을 하다 관동군 특무기관과 함께 술집과 사창가를 운영한 사람이 있는가 하면, 일본 관동군의 밀정 출신도 있었다. 조선인 밀집 지역인 연변지역의 국민당 대표 마융산(馬永山)은 일본군 패잔병들을 규합해 동북항일연군 출신들을 박살내겠다고 큰소리치던 사람이었다. 장제스도 나름대로 속셈이 있었다. 일본군이 소유하고 있던 무기와 군수물자를 몰수하고, 철도와 항만 등 요충지를 접수하려면 일본과 가까웠던 이런 부류들이 필요했다
 
만주의 설원을 말 타고 질주하는 동북민주연군 기병대. 1947년 겨울, 만주 쑹화강 부근.
 
미국의 지원을 받은 국민당군은
요충지 동북 대부분을 점령했다
중공은 소련에 지원을 요청했지만
오히려 군대의 철수를 요구했다
북만주를 국민당에 내준 중공은
보급로도 끊겨 진퇴양난이 됐다
마오쩌둥은 평양에 특사를 보냈고
김일성은 모든 부탁을 들어줬다
 
장제스의 동북 집착은 이유가 분명했다. “동북은 조선, 소련, 몽고와 인접한 지역이다. 중공이 이곳을 점령했다 하는 날에는 저들이 말하는 양쯔강 이북의 해방구와 연합해 우리를 공략할 게 분명하다. 그렇게 되면 조선과 소련은 유리해지고, 우리는 승리를 장담할 수 없다. 우리가 동북을 장악하면 상황이 달라진다. 중공 군대는 동쪽과 남쪽에서 협공당한다. 동북지구는 반소, 반공 지역이 된다. 미국이 우리에게 지원을 아끼지 않은 것도 그런 이유에서다. 동북을 점령하면 우리를 반공 돌격대로 만들 심산이지만, 두고 봐라 어림도 없다.”
 
중공은 양쯔강 이북의 산시(山西), 허베이(河北), 허난(河南), 산둥(山東) 일대의 농촌에서나 기지개를 폈다. 관할 지역의 인구도 전체 중국 인구의 30%가 채 안 됐다. 특히 동북지역은 국공합작으로 중일전쟁이 본격화되자 조직이 거의 파괴되는 바람에 보잘것없었다. 동북을 놓고 국공전쟁이 발발하자 중공의 승리를 확신하는 나라가 거의 없었다. 소련도 얄타협정에 발이 묶여 중공을 대놓고 지원하지 못했다.
 
중공 최고 지도부와 북한의 인연은 중공 중앙 조직부장 천윈에서부터 시작됐다는 것이 정설이다. 군대는 묘한 조직이다. 헝겊 쪼가리에 그려서 양어깨에 붙이고 다니는 계급장이 뭔지, 쫄병은 쫄따구들끼리 말이 통하고, 장군은 장군을 만나야 말이 통한다. 원래 중공 군대는 보직은 있어도 계급은 없었다. 항일전쟁 8년간 홍색도시 옌안(延安)에서 안정된 생활을 하던 천윈이 동북에 주둔한 소련 홍군의 지휘관과 회담하려면 계급장이 필요했다. 중공 군사위원회는 천윈과 펑전에게 중국어와 러시아어로 된 중장 계급증서를 만들어줬다.
 
동북 최대의 공업도시 선양(瀋陽)에 도착한 천윈 일행은 계급증서를 들이밀고서야 겨우 소련군 사령관을 만났다. 국민당 군대가 진주하기 전이었지만 소련 쪽은 미국과 장제스의 눈치를 봤다. “중국 공산당에 대한 소련의 지원은 한계가 있다”며 중공 휘하 동북민주연군(東北民主聯軍: 동북항일연군의 후신)의 선양 진입을 모른 체했다. 정식으로 허락하지는 않았다. 소련 공산당을 형님처럼 떠받들던 중공은 의외였다. 동북 점령은 물건너갔다는 생각이 지배적이었다. 10월31일, 중공은 청년 장군 린뱌오(林彪)를 동북민주연군 총사령관에 임명했다.
 
11월이 되자 국민당 대군이 동북으로 몰려들었다. 소련 홍군은 동북민주연군의 철수를 요구했다. “도시에서 나가라. 상부의 지시다. 철수하지 않으면 탱크로 밀어버리겠다.” 거의 명령조였다. “공산당 군대가 다른 나라의 공산당 군대를 탱크로 밀어버리겠다니, 말이 될 소리냐”고 항의해도 소용없었다.
 
린뱌오가 동북에 도착하기 전까지 펑전과 천윈이 모든 업무를 처리했다. 선양에서 철수한 병력을 북만주 중심도시 하얼빈으로 이동시켰다. 상인으로 변장해 동북에 들어온 훗날의 ‘동북왕’ 가오강과 전 중공 총서기 장원톈 명의로 ‘만주공작에 관한 의견서’를 옌안으로 보냈다. “선양, 창춘, 하얼빈 등 3대 도시와 창춘철도를 비롯해 만주를 독점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소련의 철수 요구가 있기 전에 우리가 주동적으로 철수하는 것이 옳다고 생각한다. 전쟁과 근거지 확보를 통해 대도시에 주둔한 적들을 포위하고 창춘철도의 간선을 파괴해야 국민당과의 장기전에서 승리할 수 있다.”
 
마오쩌둥의 답전은 간단했다. “큰 집을 내주고 행랑채 두개만 확보해라. 남쪽에 방어진지를 구축하고 북쪽으로 뻗어나가라.” 북만주를 내주고 동만과 남만에 근거지를 확보하라는 지시였다. 동북에 부임한 린뱌오는 천윈의 의견을 지지했다. 하얼빈에서 군말 없이 철수한 린뱌오는 이듬해 4월 무력으로 하얼빈을 점령했지만 또 철수했다.
 
북만주에서 승기를 굳힌 국민당 군은 창춘과 지린(길림)을 점령해 동남과 남북을 차단했다. 중공은 압록강변의 단둥(丹東)과 퉁화(通化)마저 국민당 쪽에 내줬다. 동북민주연군은 혼란에 빠졌다. 도망자가 속출했다. 동북민주연군은 동북에 와서 급조된 부대였다. 팔로군 출신은 앞에 말한 것처럼 10만여명에 불과했다. 비적, 아편 중독자, 만주국 경찰, 탈옥수 등이 섞여 있다 보니 그럴 수밖에 없었다. 국민당 군의 공세가 시작되자 5만여명이 투항하거나 중공이 파견한 간부를 살해하고 탈영했다.
 
 
남만 지역도 다르지 않았다. 자고 나면 8천여명이 흔적도 없이 사라지고, 둔화(敦化)의 경우는 8개 연대 중 조선족으로 구성된 1개 연대 외에 7개 연대가 국민당 쪽으로 넘어갔다.
동북민주연군은 활로를 모색해야 했다. 그 넓은 만주 벌판에서 공급을 차단당한 중공은 남만의 부상병과 가족들, 전쟁물자 수송이 난관에 처했다. 기댈 곳은 단둥에서 투먼(圖們)까지 800㎞의 국경을 맞댄 북한밖에 없었다.
천윈은 베이징 칭화대학 경제학과 출신인 주리즈(朱理治)와 훗날 중국 해군사령관이 되는 샤오징광(蕭勁光)과 함께 마오쩌둥의 부탁 편지를 들고 평양으로 향했다. 김일성은 마오의 특사 두 사람을 김책의 집에 머물게 했다. 북한 쪽이 만주에 대한 물자수송로를 터주고 부상병과 간부 가족들을 돌봐달라는 천윈의 부탁을 그는 모두 들어줬다. 마오의 서신은 더욱 노골적이었다. “전쟁에는 무기가 제일 중요하다. 아무리 사기가 높아도 사상 무장이 잘 돼 있어도 총과 실탄이 없으면 오합지졸이다.”
 
김일성은 알았다며 토를 달지 않았다.
 
김명호 성공회대 교수

출처: http://www.hani.co.kr/arti/SERIES/549/630669.htm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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