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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 - 인생의 큰 오점이지만, 유일한 정상적이고 즐거운 추억
게시물ID : freeboard_755074짧은주소 복사하기
작성자 : 김재규장군님
추천 : 1
조회수 : 268회
댓글수 : 3개
등록시간 : 2014/04/02 01:10:42
[[ 어지럽다. 알아들을 수 있게 썻는지 모르겠네요..  
행동의 원인을  변명하고자.. 과거를 많이 집어 넣었어요.    

나쁜남자를 넘어  멍청한 못된남자 이야기 입니다. ]]

생애 유일한 오점



작년 기억들을 떠 올려보면 내가 얼마나 나쁜놈이고,  자기 주의적이였는지 기억난다
살아온 날들이라도 미리 예기해 주었다면 . 나 자신부터 구원 되었을 것인데.
그런 좋은 아이들에게   왜 그리 대했을까. 생각에 잠긴다.

복도를 따라 걸어오는 대학내 커플 둘, 오빠 멋있어요 잘생겼다고 말했다.

내가 만우절이 끝났다고 말하니
그게 뭐가 재미있냐는 듯이 웃으며. 아니에요 정말 잘생겼어요. 아양을 떠는 목소릴 냈다.
참으로 귀여웠고, 고마웠다.  그 둘은 참으로 즐거워 보였고 잘 되길 빌었다.

현대판 대공분실이라고도 할 수 있는 곳이자
고문실 세 곳 과   거리의 생활을 거쳐
 뒤늦게 나혼자의 걸음을 멈추고,
진보 사람들을 만나고 시위대속  시위를 하지 않았다면

나는 영영 그들과 친해질 수 없었으리라. 
그 한순 간 만이라도.
그리고 완전한 이별, 오해가 아닌, 나란 존재가 결코 그들과 어울릴 수 없고,
 내가 결코 치유될 수 없는 다른 사람이라는 것을 다시 알게 되었다.
싸우는게 몸에 베여버렸고.  사과할 줄도 몰랐고, 모든것을 내 중심에서 생각했기에
이는 필연이였다.

나는 그때 부터 악마가 되어있었다. 좋든 싫든.



2013 3월.
늦게 들어온 학교,   연령대가 다양한 기술을 배우는 학교에서
나는 첫 소개에서 쑥쓰러워 하며 대충 말했다. 
첫 인상이 중요한 만큼 안경을 벗고 발표하는데 
앞에 무엇이 있는지 형체조차 알 수 없었다. 

그러고는 아직 얼굴에 흉터가 남아 있음에도
  외모에 대한 찬사가 왔고 20대 중반치고  이례적이었다.
   짐승같은 과거를 가진 것 치고는 부끄럼을 잘 타고
  사람에 대해 내색이 심했고, 무엇보다도 두려움이 많았다.

지난 날들에 불의에  저항을 했다는 이유로
 살인마란 오명이 붙은게 세포하나하나 까지 베여 있어서 그럴까
거기다 바로 이전까지는 머리를 다쳐 감정과 표정조차 내것이 아니었다.
(표정은 아직도 내 맘껏 조절할 수 없다.)



나는 누구에게도 관심을 두지 않았다. 한 곳만 보는 동상처럼 표정은 굳어 있었다.
그 표정은 나조차 무서울 정도로 독했다. 
부산 깡패와 함께 할때 시위대에서 장기간 싸울때 모습으로 상대를 죽이려 들때나 그런 표정이 나올만큼 독했다.
다른 학생들은 대학의 로맨스에 빠져 있지만,  내가 느끼기에는
공기부터 달랐다.  이 환경이 언제 쯤 이었는지 생각할 수 없을 만큼
사람이 모여 있으면  항상 익숙하게 그랬다.. 내 삶은  저항하고 다칠때마다 여러 사람이 모여있었다.
나보다 약한 이들의 죽음과. 내가 파괴되는 삶  그런 삶 속에서만 언제나 사람이 많이 있었다.
 
잊혀진 기억. 나 혼자 죽어라 싸우던 기억.
기약없이 박살났던 기억. 혼자서 죽지 않기 위해서 싸우고 결국 지고, 끊임없이 부서졌다.
반항을 할 수록,  옮은 말을 할 수록   의식까지 뽑혔다.  살아있는게 기적일 만큼 맞고, 
죽다 살아나고 , 여기서 말하기 싫으나  행복에 빠진 정상인이 알아주지 않는
 다른 방법들로 인격까지 개조 된 적이 있었다. 차마 입에 담을 수도 없는 짓들을 격어왔다. 그게 사람의 형상으로 머물러 있었고,  내가 언제든지 다시 얼굴이 함몰되면 똑같이 당하리라.
투쟁속에서 많은 사람을 만나고 몸에 베인경계심이 많이 거두어 졌다. 거기서 인간미를 처음 느꼈다.
정신이 들려고 몸을 지져 글을 쓰고   외지에 가 깡패 집에 들어가 칼을 맞은 적도 있다.
하지만 한번 사람에게 밟혀 가진 장애는 회복되지 않았다.


(중략)

 사람 대신 다른 생명을 생각였기에.  빨갱이 보다 더 무서운 사상을 가지고 있었다.
제압하지 않으면 죽는 삶과  양심에 찌들은 삶 열 살 때 부터 스물 셋 까지 지속하다
시위대에서 단 하나뿐인 생명살림 천사들을 날수로만 치면 반 년을 만나고 
보통 사람을 다시 만났다.
그것만은 지금 보면 참 다행이라 생각한다.

여러날이 지났다.
관심이 몇 번 오갔으나. 나는 언제나 굳어있는 표정.  마치 죽은 사람과 똑같은 표정으로 학생들을 기겁하게 만들었다.
 하루하루가 살 얼음판 같았다. 누굴 마주하려면 표정을 언제나 지어야 했다.
그 표정이 어떻게 생겨먹은지도 모르고 마음대로 될 수도 없었다.
하나 소망이 있다면,  늘 혼자다니던  여행을 같이다닐 동반자가 필요 했었는데, 그것마저
슬픈 인연과 아픈 기억만 떠오르게 했다.


그래도 그 와중에도 나에게 맘을 열어주는 여자가 있었다.
기억은 앞의 만우절에서 며칠 지난 뒤로, 
한마디에 순종했다
"오빠 안경을 왜 쓰고 다녀요 얼굴 가리게. 안 경 벗는게 멋져요."
지금은 왜 그리 맘을 열었는지 이해가 되지 않으나,  입학 전 시위를 하다 
"네 나이에 이런 일을 하는게 아니라  공부해 변호사가 되어 오너라" 라는 말씀에  
  희망을 가지고 입학했던걸 기억한다. 아무리 어두운 과거라도 투쟁속에서 많이 풀렸다. 물론 절망을 많이 맛보았다. 특히  개표조작 조차 빨갱이로 모는   전의경들의 사고 방식은  과거 나에게 장애인 살인마란 별명을 붙여준 쓰레기들의 완성판을 보는 것 같았다.

어찌되었든
이 귀엽고 깜찍한~ 목소리에  눈이 안보여도 벗었다. 예전에 안경없이 세벽에 부산 산을 맨발로 뛰며 안보이는채로 훈련하던 때가 있어서 그런지.  아니면 이 행복함에 경각심을 잃은 건지.

눈을 가렸다.
급식을 기다리며 줄을서고 그 아이와 새근새근 웃으며 이야기를 하고 있었는데, 누가 뒤에서 쳤다.
누군지 대충 이해가 갔다.
 왜 그애에게만 저렇게 친절하냐던 여자애 였다. 
( 원래 옛날 아주어릴적 시골에서 만난 동생과 비슷해 관심을 가졌다가 그걸알고 옆자리에 그 여자애가 앉았는데 바로 일베를 하더라   그래서  황급히 버렸다.  빌려준 폰도 초기화 하고 )

"오빠 00 사줘요"
"애인한테 사달라 해?"
"애인 없어요"

참 내가 이런 삶을 마주 할 줄은 몰랐다.
식사를 받아먹는 것부터 대화까지  꿈에서도 볼 수 없던게 현실로 나왔고

완전히 취할만큼 새로운 감정 이었다.

꾸미지 않고 다녀도 그런게 이어졌다.
칠 교시 쯤
 잠시 졸고 있는데,  누가와서 부드럽게 어깨를 건드렸다.
그게 누군지 예상하고 심장이 뛰었다. 그리고 얼마나 행복했는지 모른다


 영원히 깨지 않았으면 좋을  몇년에 한 번 나올  한 순간  너무좋은 꿈 마냥.
그녀를 마주할 수록  그렇게도 안내던 웃음만 나왔다. 머리가 새하않게 도배될 만큼
끝도없이. 그리고 머리가 아팠다.

다음 날
10대 들이 남녀 할 것 없이 화장을 하기에 나는 그 애에게 화장을 부탁했다.
더 꿀릴게 없어지겠지?  라는 맘보다.  언제 끝날지 모르고,  나는 어떻게 변할까.
추억으로 남기고 싶었다.   보상심리?
이런 행복이 얼마 안 갈 것을 느낌 상 알고 있었다.
화장을 하면서  남자가 화장이라니 우스워서 웃었다. 그리고 그 손길에 긴장되고 심장이 뛰었다.

그걸 보며 남학생이 아이 뭐시긴가 할줄 안다며
눈을 띄우니  아이들에게 가수 누구 같다는 소리를 들었다.
심술 굳은 여학생이  (아마 내 이제껏 표정에 불안을 가졌고 이제 그게 풀려서 그런지
그동안의 역적질에 대한 죄를 묻겠다며)
  눈주위를 도깨비 눈으로 만들었다.
그걸 놀릴 셈으로 자기 남자친구를 불러올 모양이었는데
물로 씻다가  잉크가 번지고  어느정도 남은 그 가수의 모습을 보고 조금 놀라더니
 보여주길 관 두었다.  정작 나는 남들처럼 꾸민 내 모습을 제대로 보지 못했다.



다음 날, 그 애가 남자친구의 무릎에 누어  오빠 나를 좋아해? 물었다.
아니라고 답했다.  또 한 커플 중 내 눈에 낙서를 한 여자애가 나는? 이라 물었다.
넌 싫어 ~!.

아쉬운 마음이 들었지만 맘을 열어준 좋은 친구로 고마운 존재로 남고싶었다

그날도 안경을 벗고 있었고 형체 말고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어쩌면 다시 그애가 말을 걸어주길 바라고 이러고 있었는지 모른다.
수저와 젓가락을 가지러 가는데  사람이 많길래
나를 처음으로 웃긴 사람이자 내 첫 스승이던  깡패가 하던 것 처럼  손을 내밀어 밀었다.
그리고 날 보는 이에게
 뭘 봐? 라고 답했다.  이는 아주 정신나간 행동이었다.

얼마 안가. 나는 그게 누군지 알았다.
아직까지 죄책감이 들 일이 그 때 일어났다.
그 애의 애인 이었다.

이 후에는 해명할 기회를 줘도 내가 병신처럼 굴었다.
사과는 여자아이 한테 했고, 그 여자아이의 화냄에 따라 당사자에게 사과를 했다.
"너희는 내 마음을 열어준 고마운 은인들이야.  여기서 뭐라 할 줄 몰랐다."
그걸 질투라 여기고 떨어지는게  싫어서
한 교시가 끝나자 마자
"내가 무릎이라도 꿇어야 용서하겠냐는 말을 했다." 참으로 정신 나간 소리였다.

이제껏 남에게 해를 준 적이 없었고   사과하는 법도 몰랐다.
오직 싸우는 법만 알고 살아   벌어진 일이었다.  안경과, 웃음이 그 행동을 불러왔다.
오랫동안 시력을 잃고 산 그... 시절

내가 저주스러웠다.
학교를 마칠 때 까지   나는 항상 고통스러웠다.  그 애가 중도에 그만 두어 더 고통스러웠다.
내가 정말 인간 말종 쓰레기  온갖 욕을 붙여도   못할 놈이었다.

그 후
쉬는 시간에, 어떨 때는 교육시간에 있던    둘의 애정행각이 사라졌다.

그 애는 나를 저주했다.  기대한 만큼  배신감도 큰 법인지,   인간 말종으로 보았다.
반년이 지나서 맘을 풀었으나,  내가 그 일을 아직 담고 있는 모습을 보였고
그애는 그 길로 학교를 그만두었다.

내가 밀은 그 사건 이후
직업 학교에서 공부는 전혀 되질 않았고,  이 학교에서 공부 한 날은 약 한 달 남짓 된다.
4일 공부해 두번째 자격증을 딴 건 용하다고 해야할까.


이 보다는 덜 하나  또 가슴 아프게 한 여인이 있다.

어떤놈이 날 건드려서 제압을 했는데, 교수님께 한번만 더 이런 일이 있다면 목숨을 보장 못한다
는 식으로 강력히 말했다.  교수님은 내가 너무 민감하게 반응하는게 아니냐는 말을 하셔서
  여기서 시위해서 경험이 약간 튀어 나왔고 젊은 사람은 미친놈 밖에 못봤다. 양심이라곤 없이 그저 제 이득만을 위해사는 인간들..
(아픈 과거를 말한 적이 없는데.)
그 일이 그녀가  내 과거의 일부를 들은게 되고,  그거에 그녀는 빠졌다.
아무리 슬픈 눈빛을 한달 가까이 보내도 나는 무시했다.  그리고 비웃어 내 쳤다.

마치 "어쩌라고" 표정    그 덕에 좋은 사람한테 갔다. 아주 베리베리 한 사람 한테~  잘 한 짓이라 본다. 
착한 사람일 수록 싸이코로 찍히는게 현명하다

이후
사랑에 변화하는 여자의 모습이란  너무 고귀했다 ^^  정말 그 애가 맞는가 싶을 정도로.
사랑을 하기전에 그녀의 모습은 나랑 격차가 벌어졌지만, 후에는 내쪽이 바닥으로 내려 갈 만큼.  그녀는 멋져졌다.


   이 쳐 죽일놈 .


앞으로 이런 관심을 가질 일이 적다.
내 나이가 점점 들기 때문 ^^ . 하루가 다르게 늙고 있으니 **.

보통 거리낌없이 쉽게 가지는 인연이나, 나에게는 하나 뿐인 특별한 기억이다. 
  아 어지럽다. 더 잘 쓸 수 있는데..  머리가 어질어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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