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마철 날씨는 한 낮이지만 어둑했고,
쏟아지는 장대비는 아니지만 부슬부슬 내리는 비가 날 더 감상에 빠지게 만드는 날씨였다.
그러다 문득, 콜렉트 북을 정리하고 싶어 오랜만에 펴 봤다. 방치해 둔 탓에 먼지가 쌓여 손이 시커멓게 됐다.
수북하게 먼지 쌓인 케이스와는 달리 안에 있는 콜렉트 북은 깨끗했다.
조금은 설레는 마음으로 첫 장을 열어보니 헌혈증과 빛바랜 스티커 사진 속 친구들의 얼굴이 날 맞이했다.
항상 느끼는 것이지만, 이렇게 오래전 친구들과 찍은 사진을 보면 돌아 갈 수 없는 그 시절이 그립다.
뒷 장을 넘겨보니 영화표와 뮤지컬 티켓이 있다.
제목을 보고 내용을 떠 올리자니 흐릿한게, 재미 없었던 건지 머리가 나빠진건지 헷갈린다. 아니, 헷갈리는 거 보니 머리가 나빠진 것 같다.
쓸데없는 생각과 함께 마지막 장을 보니 주고 받았던 쪽지가 있다.
다 정리했다고 생각했었는데, 남아있었다.
맨 뒷장에 고이 접혀 있던 쪽지 안에는 서로에게 던진 질문들이 적혀있다.
'너에게 결혼이란?'
'나에게 바라는 것이 있다면?'
이 질문을 보고 다시 대답을 떠올려봤다. 확실히 3년 전과 지금의 나는 많은 것이 변해있다.
2년 전의 나에게 너와의 결혼은 현실이지만 행복이었고 꿈이었으나, 지금의 나에게 결혼은 의미없는 것. 단지 그 뿐이다.
2년 전 너에게 바랬던 것은 변치 말고 함께 하자는 소망이었지만, 지금의 내가 너에게 바라는 것은 지난 날 너에게 줬던
단 한 장 뿐인 내 다섯 살 때 사진 뿐이다.
내가 변한 만큼, 너도 많이 변했겠지.
지금 나에겐 아무도 없지만, 지금 너에겐 사랑하는 사람과 아이가 함께 있겠지.
내가 마지막으로 바라는게 있다면 네가 미친듯이 행복했으면 좋겠다. 그 것 뿐이다.
앞으로 내가 행복해 지는게 미안해지지 않게.
지금 내가 쓸데없는 감정에 휘말려 오늘 밤 이불 뻥뻥 찰만큼 오글거리는 이 글을 쓰는 이유는
잊지 못한 너를 그리워하고 추억을 되새기며 슬픔에 잠기는 비생산적인 일을 반복해서 하고자 하는 것이 아니다.
그건 1년 전에 졸업했다.
단지, 2년 전 우리를 갈라 놨던 현실의 벽.
넌 잘 피해갔지만, 난 아직 넘지 못한 그 벽을 지금부터라도 허물고 앞으로 나아가 행복해지기 위한 다짐과 같은 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