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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영화 다시보기] 플란다스의 개
게시물ID : movie_26532짧은주소 복사하기
작성자 : 날아라돌고래
추천 : 2
조회수 : 4425회
댓글수 : 0개
등록시간 : 2014/04/06 22:18:18
플란다스의 개
A Higher Animal, 2000

개요 : 한국108분 2000.02.19 개봉
감독 : 봉준호
출연 : 이성재(고윤주), 배두나(박현남)
등급 : 12세 관람가


리뷰 출처 :
http://movie.naver.com/movie/bi/mi/reviewread.nhn?code=28267&nid=1869326

아래 리뷰에는 스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분석하며 보는 [플란다스의 개]의 숨겨진 진실 2009.07.16
조회 9541 추천 88 신고

 

천재 봉감독의 장편 데뷔작.

이후 [살인의 추억]부터 평단과 대중의 호평을 한 몸에 받는 감독이 되지만, 사실 이 작품으로 

될성부른 떡잎을 알아본 사람은 많지 않았다. 때는 2000년, 지금까지도 한국영화의 부정적인

단면으로서 언급되는 '조폭코미디'류의 영화가 봇물처럼 쏟아져 나오던 시기였으니만큼, 커다란

사건 하나 없이 소시민적 일상이 덤덤하게 표현된 이 영화가 관객의 눈길을 사로잡는 건

무리였으리라.

 

봉감독은 그야말로 병적일만큼 온갖 상징성을 영화에 담아놓고 있다. 뛰어난 연출력 덕분에

그저 주어지는 대로 스토리만 따라가도 그의 영화를 즐기는 것은 큰 문제가 없지만

그의 영화는 끊임없이 생각하고, 의문점을 되새기면서 볼수록 숨겨진 매력을 발산하는

보석 같은 영화다. 평범한 소시민들의 일상을 다룬 듯한 이 영화로, 봉감독은 도대체

어떤 이야기를 하고 싶었는지 알아보도록 하자.

 

 

1. 주인공들의 상징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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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가 짖는 소리로 시작해서 등장한 고윤주(이성재)가 아파트 뒤편에 우거진 수풀을 바라보는

것으로 영화는 시작된다. 그가 사는 아파트는 시영아파트. 이제 막 가정을 꾸린 30대 세대가

중산층으로서 첫 걸음을 내딛는 공간이다. 그는 교수로 임용되길 갈망하는 문과대 출신의

대학원 졸업자지만, 어쨌든 지금은 그저 백수일 뿐.

 

대신 돈을 벌어오는 아내 대신 집안일을 하며 (그저 빈둥대는 것 뿐이지만) 가끔 분리수거도

하는데, 그가 들고 있는 비닐팩을 보면 Camus양주병을 포장했던 봉지였음을 알 수 있다.

받았는지, 줄려고 샀었는지는 모르지만 어쨌든 교수가 되기 위해 허영, 명예욕의 세계에 발을

 들여 놓은 그의 모습을 발견할 수 있는 것이다.

 

가부장적인 과거 세대와는 반대로, 그는 아내가 벌어오는 돈으로 용돈도 타 쓰는, 옛날

기준으로 보면 반쪽 남자다-그래서 봉준호는 기존의 남성, 여성의 고정관념이 혼재된 시대상을

보여주기 위해 남자이름을 고윤주로, 여자 이름을 박현남으로 뒤집은 것으로 보인다. 

학문에 뜻을 두고 대학원까지 졸업했지만, 실제로는 자기 생활비조차도 벌지 못하는

무능한 인텔리, 바로 윤주의 캐릭터다. 

 

2.jpg

 

앞선 윤주의 컷과 대칭되는데, 여기서 현남(배두나)가 바라보고 있는 것은 온갖 스포츠 찌라시

들이다. 고졸 출신에 아파트 관리실 사무직으로 일하고 있는 그녀는 현실 감각 없이 허영으로

가득 찬 스타들의 세계를 그저 선망의 눈빛으로 바라보고 있다. 할 줄 아는 것도, 하고 싶은 것도

딱히 없어 그저 TV 출연이라도 어떻게 한 번 해보고 싶은, 그런 평범한 젊은 세대의 표상이다.

 

현실감각이 없는 까닭에 생활력 강한 친구 장미(고수희)가 챙겨주지 않으면 보다시피

지하철 하나 제대로 타지 못하고 뒤쳐진다. 여기서 지하철은 시대의 거친 흐름을 상징하고

있는데, 몇 번 더 등장한다.

 

 

2. 보일러 김씨와 부랑자 최씨, 그리고 경비의 정체

 

영화에서 경비(변희봉)가 관리소 소장에게 들려주는 "보일러 김씨"이야기.

변희봉의 그로테스크한 연기력과 말투로 인해 이 영화에서 가장 인상적인 장면들 중 하나로

꼽힌다. 그럼 보일러 김씨는 대체 누군가? 그저 이야기의 추임새를 넣기 위한 장치일 뿐인가?

 

보일러 김씨는 단순히 보일러를 잘 고치는 기술자가 아니다. 경비의 이야기에서,

보일러 김씨는 아파트 건축 당시의 비리를 발견하고 진실을 꿰뚫어보는 눈을 가진

(니네들 얼마나 헤쳐 먹어 브렀냐!라고 외칠 정도로) 정의로운 인물이었다.

그러나 그런 정의로움 때문에 탁! 쳤더니 못에 찔려 윽! 하고 죽은 인물이다.

 

3.jpg

 

캡쳐한 사진에서 보듯, 경비가 "보일러 김씨를 탁! 하고 밀쳤는디" 라고 말하며 손을 뻗을 때

카메라는 그의 손을 따라 움직이는데, 이 때 손이 멈추는 곳은 바로 윤주가 숨어 있는

옷장 속이다. 마치 보일러 김씨가 그 옷장으로 탁! 하고 밀쳐지기라도 한 듯... 

영화적 표현으로서, 보일러 김씨는 곧 옷장에 숨어 있는 윤주라는 등가 공식이

성립하게 된다. 정의롭게 죽은 보일러 김씨가 왜 무능한 인문학도인 윤주인가?

 

봉준호가 IMF 전후(2000년)로 바라본 자신, 386세대는 그랬다. 젊을 때는 아직 자리잡지 않은

민주주의를 부르짖으며 정의를 목놓아 부르던 세대였으나, 현실 사회에 들어와서는 어떻게든

아파트를 가진 중산층으로서 한 계단 올라가려고 아둥바둥거리는 속물적인 세대에 지나지

않았던 것이다. 누구는 변절이라고 하고 누구는 아니라고 부르짖었으나,

현실감각이 없는 무능한 인텔리로 살아가고 있다는 점에서 과거의 정의로운

세대로서의 삶은 끝났던 것이다. 보일러 김씨가 죽은 것처럼.

 

4.jpg

 

보일러 김씨가 암매장되있다는 벽을 살펴보는 윤주. 그가 그 곳에서 발견한 것은 보일러 김씨

대신 폐물더미 속에 살아가던 부랑자 최씨(김뢰하)였다. 죽은 보일러 김씨 대신 오늘날(현재)

그 자리에 대신 있는 것은 그저 밥만 먹고 살면 구치소라도 좋다고 얘기하는 부랑자인 것이다.

'보일러 김씨=과거의 윤주' 라는 공식을 대입해 보면, '현재 보일러 김씨=부랑자=현재의

윤주' 라는 공식도 성립하게 된다. 이러한 상징은 뒤에서 다시 한 번 확인된다.

 

5.jpg

 

영화의 후반부에 나오는 장면으로, 첫 번째는 그 동안의 만행(?)을 몽땅 덤태기쓰고 잡혀가다가

신발 한 짝을 떨어뜨리는 부랑자 최씨의 모습이며 두 번째 컷은 술먹고 뛰다가 구두 한 짝을

잃어버린 윤주의 모습이다. 드러나는 겉모습은 전혀 다르지만, 사소한 장치를 동질화시켜

같은 상징성을 부여하는 수법이다.

"오늘날의 윤주=부랑자나 다름없는 무능력한 인텔리" 라는 공식이 완성되는 순간이다.

과거 정의를 부르짖다 종말을 고했던 그들의 현재 삶은 어떠한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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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다시피, 밥만 먹으면 구치소라도 좋다고 한다.

언제 사회 정의와 꿈을 노래했었냐는 듯, 거친 시대의 조류 속에서 그저 생계 유지와 신분 상승

만을 쫓는 모습을 적나라하게 풍자하고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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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비의 정체를 알기 전, 우리는 그의 모자 형태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봉감독은 최근작 [마더]에서도 모자에 대한 코드를 사용했는데, 그의 작품에서 모자는

완성된 남성적 권력-주로 부정적 의미로서-을 상징한다. 캡쳐에서도 보여지듯, 현남 앞에서는

뒤집은 모자로서 친근한 모습을 보이며 죽은 개를 묻어주다가 현남이 사라지자마자 삽을

푹 꽂고 모자를 똑바로 쓰며 본색을 드러낸다. 그리고 우리는 그의 과거 행태로서 이제 그가

또다시 죽은 개를 잡아먹을 것임을 충분히 짐작할 수 있다. 모자를 똑바로 쓴 그는

어떤 사람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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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소하다 말고 골프라도 치는 것처럼 스윙하는 저 모습. 두툼한 뱃살을 과시라도 하는 것처럼

보인다. 그는 과거 아파트의 부실공사를 지적했던 보일러 김씨의 정의로운 이야기를 알면서도

은폐했던 아파트 회사 측과 이해관계가 같은 사람이다.

 

겉으로는 인심 좋은 아저씨인 척 하지만 그는 마을 주민들의 개를 잡아먹을 궁리에만 골몰하며, 

자기 잇속만을 챙기는 부패의 상징이다. 경비는 바로 양의 탈을 쓴 채 공공연하게 권력을

휘둘러 남의 피눈물을 흘리게 했던 부패한 구세대를 상징하는 인물인 것이다. 그리고

보신탕이 끓는 동안, 세계 시간을 가늠하며 러닝머신으로 가볍게 몸을 풀고 있는 그의 모습에서

시대의 흐름에 완벽히 적응한 유산계급의 이미지가 드러난다. 그리고 가장 무섭고도 중요한

진실은 이 다음 컷에서 드러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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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두침침한 지하실에서 보신탕을 끓이는 변경비.

그가 후추통을 가지러 잠시 자리를 비운 사이, 우리가 아는 부랑자 최씨가 그 자리를 차지한다.

그리고 그는 그 짧은 시간에 보신탕을 남김없이 홀라당 다 먹어 버린다. 캡쳐에서 보이듯,

두 사람의 모습은 완벽하게 병치된다.

 

'윤주의 현실=부랑자 최씨'라는 공식을 기억해 본다면, 정의를 잊은 채 자기 밥그릇에만

골몰하던 윤주가 언젠가 세월이 흐르면 자신들이 그토록 증오하고 비난했던 부패한 구세대

(경비)의 자리를 그대로 이어받게 될 것이라는 상징으로 볼 수 있을 것이다. 적나라한

풍자지만 웃을 수 만은 없는, 씁쓸한 비유다.

 

 

3. "개"의 의미, 노란 옷의 의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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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래 개라는 동물은 도둑(불의)을 내쫓고 집을 지키는 동물이다. 개짖는 소리는

불의를 쫓아내는 정의로운 소리다.

그래서 마지막 캡쳐에서 보이듯 술에 취한 윤주가 아내의 부른 배(이후에 태어날 후세대)를

어루만지며 불의의 힘(1500만원의 떡값)으로 교수가 되겠다는 더러운 욕망을 이야기할 때,

그의 눈을 번뜩 깨우는 듣기 싫은 소리가 바로 '개소리' 다.

 

그러한 개를 잡아먹는 경비나 부랑자는 이미 부정부패의 상징이다. 개소리가 듣기 싫어

매달아 놓고 목을 조르지만, 그러나 한 순간 거울에 비친 자기 모습을 보고 부끄러움을 느끼는

윤주는 아직 그 지경에는 이르지 않은 세대다. 그러나 그를 둘러싼 온갖 현실의 욕망과

더러움들이 그를 지속적으로 압박하는 이상 그가 어느 순간 그들과 같은 모습으로 돌변하여

개를 죽이는 날이 올 지도 모를 일이다. (실제로 윤주는 치와와를 옥상에서 던져 죽이기도 한다)

 

11.jpg

 

노란 비옷이 몇 번 등장하는데, 이 색깔은 영화를 읽는 중요한 코드가 된다.

개를 떨어뜨린 후 윤주를 추격하는 현남, 그리고 윤주의 개 순자를 구출할 때의 현남은

이 노란 후드티를 입고 있다. 아울러 순자를 찾기 위해 비옷을 입은 윤주나

처음에 등장하는 개를 찾는 꼬마 역시 노란 비옷을 입고 있다.

 

노란색 옷은 그야말로 때묻지 않은, 아직은 개(정의)를 지향하는 밝은 세대의 옷이다.

TV에 한 번 나와보는 것이 소원인, 평범하고 순수한 젊은 세대를 상징하는 현남이 순자를

구출할 때, 그녀를 뒤에서 응원하는 저 노란 군중들을 보자.

얼마나 뜨거운가?

 

그녀는 어쨌든 아기 업은 지하철 아줌마에게 돈을 주는 대신 자리를 양보할 정도로

순수한 선(善) 혹은 정의를 간직한 젊은 세대다. 화려함만을 보여주는 황색 매체에 휘둘린 삶을 

살아가고 있을 망정, '젊은 세대에는 아직 희망이 있다' 라고 2000년의 봉준호 감독은

이야기하고 있었던 것이다.

 

 

4. 이 영화의 결론- 엇갈린 두 세대의 미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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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교수에게 1500만원을 갖다 바치는 동안 소심하게 도움을 구하는 지하철 아줌마에게 만원을

조심스레 꺼내주던 윤주. 그것은 순수한 선의를 보여주었던 현남의 행동과 적나라하게

대칭된다.

 

학장이 폭탄주를 만든 뒤 휴지를 갖다 붙힌 저 벽을 보자. 얼마나 많은 휴지들이 저 벽에

붙어 있는지... 윤주 말고도 저 어두운 타락의 방을 거쳐간 이들, 이전부터 불의와 손잡은

앞선 세대들이 이미 이 방을 수없이 거쳐갔음을 암시한다.  

불의를 삼킨 윤주, 구토하며 달려오는 지하철에 머리를 갖다 대지만 그는 앞선 남궁뭐시기

선배처럼 머리를 날리지는 않는다. 어쨌든 그는 괴로워 구토하면서도 시대의 막차에

탑승하는 데는 성공한 것이다. 그는 대학교수가 되었고, 그가 그토록 갈망했던 기득권 안으로

진입할 수 있었다. 불의와 손을 잡은 댓가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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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 장면이 아니다. 이제 대학교수가 된 윤주가 수업 준비 시간에 잠시 넋놓은 듯 푸르른

창밖을 바라보고 있는 장면이다. 이미 기득권에 탑승한 그지만 아직 가슴 한 켠에는 버리고 온

순수, 정의에 대한 갈망이 조금은 남아 있는 것이다. 그러나 이윽고 수업 준비가 다 되었다며

학생들은 검은 커튼으로 교실을 덮어 버리고, 어둠 속에 홀로 파묻힌 윤주의 얼굴은

회한으로 가득하다.

젊은 적 꿈과 순수를 버린 채, 살아 남아야 한다는 강박관념으로 불의와 손을 잡아

얻어낸 현재 위치. 그것은 과연 윤주에게 행복한 자리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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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면 이와 대칭되는 현남의 모습. 그녀가 있는 곳은 창 바깥의 풍경이 아닌, 실제 숲이다.

대학교수가 된 윤주가 갈망하는 순수의 공간, 그 실재의 장소에 현남은 자리잡고 있는 것이다.

비록 일자리를 잃긴 했지만, 그녀는 아직 희망이 있는 존재다.

 

그녀가 입고 있는 흰 옷의 의미는 같은 의미로 해석할 수 있다. 윤주와 현남이 달밤에

달리기를 할 때, 그들 옆을 스쳐간 어린 중고등학생들의 옷을 떠올려 보자. 흰색은 아직

아무런 티끌조차 없는, 백지 상태의 순수함이다. 이제 살아가면서 어떠한 색을 입게 될 지는

알 수 없지만, 어쨌든 모든 가능성이 열려있다는 점에서 최대한의 긍정적인 순수함을

의미한다고 할 수 있다. 그리고 이제 지난 세대인 윤주가 회한으로만 간직하는 그 순수의

공간(자연)으로 직접 여행을 떠났다는 점에서 그녀 세대의 미래 삶에 대한 봉감독의

희망적인 메시지를 읽어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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크레딧이 올라갈 때 자리를 지키고 있지 않았다면 보지 못했을 이 컷.

영화 속 주인공들이 유일하게 관객을 바라보는 장면이다.

봉감독은 영화 마지막에 현실과의 접점을 노골적으로 노출시키는 경향이 있다.

[살인의 추억]에서도, [마더]에서도 그랬다.

현남이 들고 있는 것은 거울이다. 장미가 발로 부러뜨렸던 누군가의 차 사이드미러.

거울을 보고 스스로에게 자문해 보라는 의미다. 자, 나는 이렇게 중산층 아파트를 둘러싼

각종 군상들과 세대들을 보여주었다, 너는 현재 어떤 모습으로 살아가고 있는가 하는.

 

 

5. 왜 플란다스의 개인가

 

이제 제목의 숨겨진 의미가 드러날 차례다. 네로도, 파트라슈도 없는데 대체 왜

플란다스의 개인가? 이 질문에 대해서는 감독이 공식적으로 답변한 적이 없어

여전히 세계 7대 미해결 과제로 남아 있는데...

 

먼저 원작 동화 [플란다스의 개] 줄거리를 생각해 보자. 주인공인 네로와 파트라슈는

모두 선의의 인물들이다. 그리고 동시에 힘(권력)이 없는 인물들이기도 하다.

떠올려 보면 동화 속 네로에게도 역시 선택의 순간이 있었다.

바로 아로하의 아버지 지갑을 주웠을 때다. 그 안에 있는 돈을 쓰면, 어쨌든 그는 그를 둘러싼

현실적인 고통(굶주림)에서 벗어날 수 있었지만 그는 불의와 손잡지 않았다. 그리고 그 지갑을

파트라슈를 통해 돌려주도록 하고 자신은 교회 예배당에 가서 자신의 순수한 꿈이자 이상이었던

루벤스의 그림을 바라보다 죽는다. 그리고 그런 주인을 따라 파트라슈도 그의 곁을 지키며

함께 죽는다.

 

동화 속에서, 우리의 주인공은 불의와 타협하지 않고 끝까지 개(정의)와 함께 이상을

바라보다 죽음을 택했다. 그리고 아이러니하게도 영화 [플란다스의 개] 주인공인 윤주는

정확하게 그 반대의 길을 택했다. 이제 그 세대는 검은 장막 안에 갇혀 버렸고, 봉감독은

나머지 희망을 이후 이어질 뒷세대들에게 '너희는 어떤 식으로 살테냐' 하고 묻고 있는 것이다.

동화와 현실의 엄청난 괴리를 반어법적인 제목으로 풍자하면서.

 

이 영화가 나온지 거의 10년만에 리뷰를 쓰려니 조금 답답하다.

봉감독이 그나마 아직 희망이 있는 세대라고, 긍정적인 시선으로 바라 보았던 당시의 20대는

현재 "88만원 세대"라는 또다른 이름을 가지고 있다. 개를 잡아먹는 것은 일상다반사,

아예 개 짖는 소리조차도 듣지 못하는 세대로 인식되고 있다. 모두가 결국은 개를 잡아먹는

추악한 경비원 세대, 혹은 밥만 먹으면 좋다는 부랑자 최씨 세대로 살아갈 수 밖에 없는가. 

하얀 체육복을 입고 거침없이 밤거리를 내달리던 우리의 젊은 아이들은 어디서 무엇을

하고 있는가. 포악하게 내달리는 지하철 같은 시대를 살아가는 우리에게 과연 출구는 있는가.

2009년에 다시 보는 [플란다스의 개]는, 그래서 더욱 원작 동화의 비극적인 엔딩보다도

씁쓸한 결말을 가진 영화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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